<미생>에서 <송곳>으로
무한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시장의 도덕’이 온 나라를 잠식해버린 ‘헬조선’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청년들은 어떤 희망의 말도 선뜻 꺼내지 못했다. 이십 대 청년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마련한 좌담회 「청년이 청년에게: 그들이 묻는 일터와 삶」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 “다 우울해 있는 상태인 것 같아요”였다. 장시간 알바를 해야 대학을 다닐 수 있지만 그 때문에 학업은커녕 인생의 꿈조차 구겨진 종이처럼 접어가야 하는 그들의 일상은, ‘정식 일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각종 불법과 편법 사이에서 저임금을 능가하는 인간적인 굴욕을 견뎌내고 있었다.
누군가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이라고 했다. 기어가는 경제 불황과 바닥없는 실업이 예측할 수 있는 미래의 전부인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어진 이 짜증스러운 상황”에서 그들은 대부분 ‘탈조선’을 유일한 비상구로 여겼고, 그저 아프지 않고 너무 가난하지 않게 살거나, 별다른 곤란을 겪지 않는 인생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만 무겁게 털어놓았다. 청년들에게 한국은 분명 “희망 없는 사회”이며, 뭔가 변화하고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은 언젠가 먼 미래에 오긴 올 것이라고 그래도 믿고 싶은 믿음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비판적인 정신까지 무너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청년들아 참아라”라고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꼰대’나 ‘씹선비’를 차갑게 비판하고, “금수저에 대한 분노”만으로 차별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내며, “남이 더 못난 것으로 풀어내는” 작금의 혐오 문화를 경계하고, 임금피크제가 청년 실업의 해법이 아니라 “우리끼리 서로 죽이는” 길이라고 규탄한다. 마치 아직은 다 포기할 수 없다는 필사적인 안간힘으로 이 우울한 시대의 지옥 같은 세상을 버텨보고 있는 것이다.
한때 유행어였던 미생(未生)은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들’을 뜻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 공동체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셈해지지 않고 어떤 자격이나 능력도 인정되지 않는 사람들을 ‘몫 없는 자들’이라고 개념화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이와 유사한 한국적인 대중적 용어는 ‘미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알바 인간’으로 사는 청년들만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인간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이들을 우리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발견한다.
최지인 작가는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서 김일영 시인과 함께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고공 농성장에서 미생과 만난다. 2014년 9월에 이미 법원에서 정규직으로 인정하라는 판결을 받아내 승소했지만, 사측은 이를 무시하고 노동조합원들을 해고․고소․손해배상가압류 등으로 압박하고, 검찰과 노동부는 승소 판결을 지켜내려는 고공 농성을 해산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까지 ‘재벌 보험’을 들기 위해 재벌 편에 서는 막막한 벽 앞에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대의 힘’밖에 없다. 또한 이란주 작가는 「종이컵 노동자 이야기」에서 이주노동자를 “초라하게 구겨진 채 버려진 일회용 종이컵”에 비유한다. ‘고용허가제’나 ‘성실근로자재입국취업제도’ 등의 악법으로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조건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언제든 미등록노동자나 불법체류자라는 명목으로 추방될 수 있는 ‘일회용 인간’일 뿐이다. 그는 1990년 유엔에서 채택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을 준수하는 것이 이 오래된 “슬픈 이야기”를 끝맺는 첫걸음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2015년 6월 이주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조직‧가입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서 향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기아자동차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판결문에 적힌 권리를 현실의 권리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앞으로도 험난할 테지만, 무려 10년 만의 승소 판결로 이주노동자들이 국내에서 노동 3권을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열렸다.
그러나 미생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9월 노사정위원회는 ‘일반해고조건 완화’, ‘취업규칙변경요건 완화’, ‘임금피크제’ 등과 같은 노동법 개정안에 합의하여,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들을 마음껏 쓰다가 버릴 수 있는 ‘자본 천국’을 예고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자본의 유토피아일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은 마치 성동격서(聲東擊西)처럼 느껴질 정도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상징적으로 죽은 존재로서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이 예외가 아니라 정상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조르조 아감벤의 비판을 차용하자면, 이제 ‘미생’(未生)이 아니라 ‘미사’(未死)를 말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완전히) 살아 있지 못한 자들’이 ‘아직 (완전히) 죽지 못한 자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원은 「<미생>에서 <송곳>으로」라는 총론에서 ‘미생’이 ‘미사’가 아니라 오히려 ‘송곳’이 될 것을 제안한다. 송곳은 시시한 약자들이 연대해 시시한 강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함의한다. 그 기초는 다시 노동조합이다. <미생>에 없고 <송곳>에 있는 것, 그 뚜렷한 차이가 바로 노동조합이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을 보호하는 가장 기초적인 노동조합운동으로 돌아가서 기본소득 확보와 최저임금 인상을 동시에 추구하자고 역설한다.
아마 그 미래의 한 풍경을 이한구 사진작가의 작품과 최진영 작가의 글에서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발바닥 노동의 삶이 흘러가는 청계천 거리를 걸으며, 성실하게 일하고 이웃과 더불어 생활하는 작은 소망을 따뜻하게 전해준다.
‘혁명의 나비 효과’에서는 최근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는 한국의 가계부채와, 세계적인 감탄을 불러일으킨 일본의 대규모 시위를 다루었다. 박찬종은 「한국 부채 경제의 역사적 변형」에서 ‘부채’라는 주제어로 한국의 경제사를 요약하고, 현재 가계부채에 의존하는 수출 주도 경제성장의 한계가 거의 내파 수준에 도달했다고 경고한다. 권명아는 「무한한 상호작용, 데모」에서 일본의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유례없는 대규모 ‘데모’가 단순한 파토스의 분출이 아니라, 서로의 사연을 나누고 지식을 공유하는 장으로서 새롭게 발명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실천의 사상’에서는 한국에서 비폭력의 대명사로만 통하는 간디를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장진범은 「마하트마 간디, 비타협적 대중운동의 사상가」에서 간디의 주요 사상이 비폭력만이 아니라 비타협에 있다는 점을 새롭게 부각시킨다. 비폭력과 비타협을 함께 끌어당기는 “중력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간디가 사고한 대중운동이며, ‘대중들의 힘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결집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간디의 사상에 담겨 있는 핵심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읽기는, 한국 사회에서 ‘저항’을 사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간디를 다시 돌아보는 안내판으로 구실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밖의 문학’에서 현직 국어교사인 이현애는 「성장은 어떻게 오는가」라는 주제로 강윤화의 어쨌든 밸런타인을 매개로 삼아 청소년 아이들의 고민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알바 인간’으로 사는 이십 대 못지않게 십 대의 삶도 고달프고 팍팍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존나’와 ‘짜증나’로 표현되는 아이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강박적인 말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냥의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하다.
‘문학 기획: 표절 이후 한국문학의 방향’에서는 손종업과 소영현이 ‘신경숙 표절 사건’ 이후 문학과 비평이 나아갈 길을 세심하게 밝혀주었다. 소영현은 「비판의 공공성과 문학의 대중성」에서 표절 시비와 문학권력 논란을 벗어나 한국 문학의 미래와 문학장의 쇄신을 숙고할 수 있는 안타까운 기회가 논의의 공전에 갇히게 된 과정을 되짚어보고, 우리가 문학이라 불렀던 것의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문학의 공공성과 역사적 대중성에 대해 비판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손종업은 「한국 문학의 침묵과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황숙진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찬찬히 읽어가면서, 작가는 단순히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아픈 상처들을 만나고 기록하고 함께 아파하고 그 원인과 치유법을 찾는 존재”이며, 다수가 보지 못하는 진실이 포함된 “소수의 의견”에서 문학의 절실함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올해 제8회 오장환문학상은 최정례 시인이, 제4회 오장환신인문학상은 채인숙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되셨다. 실천문학과 함께 좋은 인연이 쌓여가기를 기원하며 편집위원을 대표하여 축하의 말씀을 올린다.
차례
2015 겨울
▃실천의 말
다 우울해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김정한
▃화보
청계, 지나고 흐르지만 늘 현재인|최진영․이한구
▃특집|쫓겨난 노동
좌담_청년이 청년에게: 그들이 묻는 일터와 삶|김지수․선이은․신문평․양지원․김동현(사회)
<미생>에서 <송곳>으로: 세대 전쟁에서 시간 전쟁으로|김원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김일영․최지인
종이컵 노동자 이야기|이란주․조지은
▃제8회 오장환문학상 발표
수상 소감_최정례
심사평_최두석
수상자 신작시_낙장불입 외 2편
수상자 자선 대표작_내가 한 잎 나무일 때 외 6편
작품론_제목|김수이
작가론_최정례의 과외수업|김종훈
제4회 오장환신인문학상 발표_수상자|채인숙
▃실천의 사상
마하트마 간디, 비타협적 대중운동의 사상가|장진범
▃문화 기획
비평의 공공성과 문학의 대중성|소영현
한국문학의 침묵과 마이너리티 리포트|손종업
▃시
박라연|개안의 다양성 외 1편
박판식|사 외 1편
손택수|겨울 유목 외 1편
이진희|끝과 시작 외 1편
임정민|마을과 마음에서 멀어진 외 1편
전욱진|일요일 외 1편
조혜은|만삭 외 1편
▃단편소설
강윤화|또다시, 그대로, 아무것도
백민석|링고
▃연재소설
이현수|나의 마지막 조선(제1회)
▃문학 밖의 문학
성장은 어떻게 오는가: 강윤화의 『어쨌든 밸런타인』 속 성장의 기록들|이현애
▃혁명의 나비효과
무한한 상호작용, 데모|권명아
한국 부채 경제의 역사적 변형|박찬종
▃계간 리뷰
마종기, 『마흔 두 개의 초록』, 김윤희, 『오아시스의 거간꾼』, 박후기, 『격렬비열도』, 윤의섭, 『묵시록』|전해수
김이정, 『유령의 시간』, 정용준,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조해진, 『여름을 지나가다』|이지은
유경순, 『1980년대, 변혁의 시대 전환의 기록』, 조지 카치아피카스, 『한국의 민중봉기』, 김형민, 『접속 1990―우리가 열광했던 것들』|장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