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애욕을 떠나라! (Away with the Passions!)
어떤 사람이 음욕이 그치지 않는 것에 절망하여 스스로 성기를 끊고자 하니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성기를 끊는 것은 마음을 끊는 것만 못하다. 마음이 주인이니 주인이 고요해지면 하인은 따라서 고요해질 것이다. 삿된 생각을 그치지 못하면 성기를 끊는다고 무든 이익이 있겠느냐?
그에 붓다는 게송(偈頌)을 읊으셨다.
“정욕(情慾)은 의지에서 생겨나고
의지는 생각과 상상에서 자라나니
양쪽이 다 고요해지면
색도 없고 윤회도 없다.”
이 게송은 카사파 붓다의 말씀이시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탐욕에서 근심이 생기고 근심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탐욕을 떠나면 두려움도 없고 근심도 없다.
인간은 불행 속에 있다. 수십 세가 동안 인간은 불행 속에서 지내 왔다. 불행하지 않은 인간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런 일은 극히 드물어서 믿기지 않는다.
붓다들을 믿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 때문에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불행이 너무 크고, 사람들이 너무 깊이 그 속에 빠져 있어서 어떤 탈출도 불가능해 보인다.
‘붓다’란 상상해 낸 인물에 불과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붓다들은 인간의 꿈이다.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붓다란 것은 희망 사항이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되기를 원하고 불행에서 벗어나길 꿈꾼다. 인간은 그러한 침묵, 그러한 평화, 그러한 축복을 갖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난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이드는 거기 희망이란 없다고, 본질상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
프로이드의 말을 아주 예민하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그는 손쉽게, 무턱대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 있어 왔던 가장 통찰력 있는 마음들 중의 하나이다. 그가 행복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때, 또 행복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을 바라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진심을 말한 것이다.
인간의 불행에 대한 그의 관찰은 그를 이러한 결론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철학자의 결론이 아니다. 프로이드는 비관론자가 아니다. 하지만 수천 명의 인간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존재 깊숙이 들어가면서 그는 인간이 그런 식으로, 뿌리 깊이 불행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편하게 지낼 수 있을 뿐, 엑스터시 속에 존재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과학 기술이나 사회적인 변화나 약간의 경제 성장, 또 다른 무엇을 통해 삶을 조금 더 안락하게 할 수 있을 뿐, 인간은 여전히 불행 속에 머물 것이다.
붓다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프로이드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은 평온은 꿈만 같아 보인다. 인간은 붓다를 꿈꾸어 왔다.
이러한 생각이 생기는 것은 붓다가 그토록 드물고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통상적인 관념을 넘어서 있다. 인간은 왜 그렇게 불행 속에서 지내왔는가?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기적이다.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모든 사람이 불행 속에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축복스럽고, 평화롭고, 고요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이 기쁨 속에 존재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이 축제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자, 거기에는 뭔가 깊은 원인이, 프로이드의 분석으로도 밝힐 수 없고, 논리로도 꿰뚫을 수 없는 깊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경전에 들어가기 전에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은 행복을 원하고, 그 때문에 인간은 더욱 불행하다는 것이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불행해질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부조리하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대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과정을 이해할 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불행을 일으킨다. 그대가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행복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누구도 그대를 불행하게 할 수 없다. 프로이드가 놓친 점이 여기에 있다. 그는 행복에 대한 욕구가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먼저 왜 그대는 행복을 바라는가? 그리고 행복에 대한 욕구가 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행복을 바라는 순간 그대는 현재로부터 벗어난다. 그대는 존재로부터 벗어난다. 그대는 이미 미래―어디에도 없고 아직 오지 않은―로 옮겨 가 버렸다. 그대는 꿈속으로 옮겨 갔다. 그런데 꿈은 절대로 충족될 수 없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꿈이다. 꿈은 비실재이다. 비실재를 통해서는 아무도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 그대는 기차를 잘못 탔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그대가 불행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불행한 존재는 자기가 미래의 어느 날, 어느 때, 어떤 식으로 행복해질 것이라고 투사한다. 투사는 불행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불행의 씨앗을 운반한다. 그것은 그대로부터 온다. 그것은 그대와 다른 수가 없다. 그것은 그대의 자식이다. 그 얼굴은 그대와 같을 것이다. 그의 몸 안에서 그대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연속체가 될 것이다.
오늘 그대는 불행하다. 그대는 내일에 행복을 투사한다. 하지만 내일이란 그대, 그대의 오늘,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투사이다. 그대는 불행하다. 내일은 이 불행으로부터 나오므로 그대는 더 불행해질 것이다. 물론 불행해질수록 더더욱 미래에는 행복해지길 바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대는 불행해질수록 행복을 바라고, 행복을 바랄수록 더욱 불행해진다. 이것은 개가 자기의 꼬리를 좇는 것과 같다.
선(禪)에 그것에 대한 적절한 문구가 있다. 그들은 그것을 ‘마차 때리기’라고 한다. 말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차를 때린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가 불행하다면, 그대가 꿈꾸고 투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더 많은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니 첫 번째로 할 일은 꿈꾸지 않는 것, 투사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로 할 일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만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그러면 어마어마한 계시가 그대를 기다린다. 그 계시란 지금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불행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불행해 본 적이 있는가? 바로 이 순간 그대는 나를 마주보고 있다. 바로 지금 불행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가? 그대는 어제를 생각하며 불행해질 수 있다. 그대는 내일을 생각하며 불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심장이 고동치고 맥박이 뛰는 이 실재의 순간, 바로 지금 불행해질 수 있는가? 어떤 과거도 없이, 어떤 미래도 없이?
그대는 불행을 과거나 미래로부터 가져올 수 있다. 어제 누가 그대를 욕했다. 그대는 아직도 상처를 지니고 다닐 수 있다. 그대는 아직도 아픔을 느낄 수 있다. 그대는 아직도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 왜 그런 일이 그대에게 일어났을까? 왜 그 사람이 그대에게 욕했을까? 그대는 그에게 무척 잘해 왔고 항상 그를 도왔으며 언제나 친구였는데, 그가 그대를 욕했다! 그러나 그대가 아직도 화가 나 있다면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것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지나갔다.
아니면 그대는 내일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다. 내일이면 돈이 바닥날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 지내지? 어디에서 먹지? 내일이면 돈이 바닥날 텐데! 그때 불행이 들어온다.
불행은 어제로부터 오거나 내일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지금 여기에는 없다. 바로 이 순간, 지금, 불행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이 정도 배웠다면 그대는 붓다가 될 수 있다. 그때는 아무도 그대의 길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모든 프로이드들을 잊을 수 있다. 그때 행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일어나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그대는 계속 곁눈질하기 때문에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
행복은 그대가 있는 곳에 있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행복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그대를 에워싸고 있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것은 바로 공기와 같고 하늘과 같다. 행복은 구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다. 기쁨은 바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다. 하지만 그대는 바로 봐야 하고, 즉시 봐야 한다. 곁눈으로 보면 놓친다.
그대가 놓친 것은 바로 그대 자신 때문이다. 그대가 놓친 것은 그대의 잘못된 접근 방식 때문이다.
이것은 붓다가 세상에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진리이다. 이것은 그의 공헌이다. 그는 말한다.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를 생각하지 말라. 그러고 나서 불행해지도록 해보라. 아마 실패할 것이다. 그대의 실패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것은 미리 알 수 있다. 그대는 어찌할 수 없다. 아무리 그대가 불행해지려고 해도, 아무리 훈련을 해도 바로 이 순간 그대는 불행을 창조할 수 없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다른 곳을 보도록 조장하여, 그대는 줄곧 놓치고 있다. 행복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단지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순간 그대는 행복해질 수 있다. 아주아주 행복해질 수 있다.
붓다에게도 이렇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는 왕의 아들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더 불행하게 되었다. 가지면 가질수록 그대는 더 불행해진다. 그것이 부자의 불행이다. 그것이 오늘날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부유해지만 질수록 그들은 더 불행해진다. 부유해지면 질수록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쩔쩔매게 된다.
가난한사람들은 언제나 할 일이 확실하다. 그들은 돈을 벌어야 하고, 좋은 집을 지어야 하고, 차를 사야 하고,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야 한다. 그들은 언제나 계획표를 갖고 있다. 그들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에겐 미래가 있다. 그들에겐 희망이 있다. “언젠가는…….”이라는. 비록 지금 그들은 불행 속에서 지내지만 희망이 있다.
부자는 불행 속에 있으면서 희망도 사라졌다. 그의 불행은 곱절이다. 부자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곱절로 가난하다. 그는 결국 미래로 투사하지만 미래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는 필요한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당황한다. 그의 마음은 더욱 근심하고 걱정하게 된다. 그는 불안해진다. 이것이 붓다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는 부유했다. 그는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는 무척 불행해졌다. 어느 날 그는 모든 부와 아름다운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를 남겨 두고 궁전에서 도망갔다. 그는 거지가 되었다. 그는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이 마을 저 마을에 가서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두에게 물었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충고하려 했고 그는 모두의 충고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의 충고를 따르면 따를수록 그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붓다는 그들이 말해 준 모든 것을 해보았다. 누군가는 말했다.
“하타요가를 하라.”
그는 하타요기가 되었다. 그는 요가 자세를 아주 극단적으로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타요가를 하면 몸은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행복해질 수는 없다. 겨우 좋은 몸, 더욱 건장한 몸, 그러나 차이는 없다.
그대는 불행에 대한 에너지를 보다 많이 가질 것이다. 그대는 불행해질 것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돈을 더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다. 적은 돈이 그대를 그토록 불행하게 만든다면, 많은 돈은 더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산수이다.
붓다는 모든 요가를 그만두었다. 그는 다른 선생들, 몸 자세를 가르치지 않고 오직 만트라와 찬송과 명상만을 가르치는 라자요기들에게 갔다. 그는 그것도 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추구했다. 진정으로 추구할 때는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기엔 치료약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도중에 멈추는데, 그들은 참된 구도자가 아니다. 참된 구도자란 추구의 끝까지 가는 자로서 마침내 모든 추구가 터무니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는 추구하는 것 자체가 욕망의 길이라는 것을 어느 날 알아차린다. 어느 날 그는 궁전을 떠났었고, 세속적인 소유물들을 떠났었다. 6년 동안 영적인 추구를 한 후, 그는 모든 추구를 그만두었다. 전에 한 세계를 버렸었고, 이제 그는 다른 한 세계마저도 버렸다.
그는 완전히 욕망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 일은 일어났다. 그 순간 거기에 축복이 있었다. 그가 완전히 욕망에서 벗어났을 때, 모든 희망을 잃었을 때, 미래가 사라졌다. 미래는 희망으로 인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시간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미래는 희망과 욕구의 일부이다. 미래는 탐욕의 일부이다. 미래는 시간의 일부가 아니다.
시간은 항상 현재이다. 시간은 결코 과거나 미래가 아니다. 시간은 항상 여기에 있다. 지금은 무한하다. 시간은 절대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며 절대로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여기에, 항상 여기에 있다. 어떤 방식, 어떤 상황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의 탐욕, 그대의 욕망, 그대의 희망이다.
모든 욕구를 버리고, 모든 희망을 버리고 포기했을 때, 돌연히 고타마 싯다르타는 붓다가 되었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었지만 그는 딴 곳에서 찾고 있었다. 그것은 거기에, 안에도 밖에도 없었다. 그것은 우주가 만들어져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지복이다. 그것은 진리이다. 그것은 신성이다.
인간이 불행하게 지내는 것은 욕구에 대한 이 기본적인 진리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이 경전들이 아주 쉬워질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음욕이 그치지 않는 것에 절망하여 스스로 성기를 끊고자 하니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성기를 끊는 것은 마음을 끊는 것만 못하다. 마음이 주인이니 주인이 고요해지면 하인은 따라서 고요해질 것이다. 삿된 생각들을 그치지 못하면 성기를 끊는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많은 것들이 이해되어야 한다. 먼저, 붓다가 몸에 반대했다는 카더란 오해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잘못되었다. 그는 절대로 몸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몸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절대로 몸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 경전은 그것을 명확하게 밝혀줄 것이다. 그는 말한다.
어떤 사람이 음욕이 그치지 않는 것에 절망하여 스스로 성기를 끊고자 했다.
이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진리와 신과 엑스터시가 아니면 그대가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을 찾으려고 자신들의 몸을 망가뜨렸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몸은 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거기에는 어떤 논리가 있다.
사람들은 불행한 이유가 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몸 때문에 성욕이 있다고 생각한다. 몸 때문에 탐욕이 있고, 몸 때문에 돈이 필요하고, 몸 때문에 관계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모든 문제가 몸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왜 몸을 망가뜨리지 않겠는가? 왜 자살을 하지 않겠는가?
자살을 하는, 정말로 자살을 가르치는 종파가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이 몸을 버려야 한다. 용기가 충분하다면 단숨에 몸을 버려라. 용기가 충분하지 않다면 서서히, 부분적으로 몸을 절단해라. 몸을 버려라.”
혁명 전 러시아에 아주 대중적인 종교가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성기를 자르라고 가르쳤다. 수천 수만 명이 그 말을 따라 성기를 잘랐다. 성기를 자름으로써 성을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은 정말 어리석다. 성은 성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에 존재한다. 성기를 잘라도 성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사실 이제 그것은 충졸될 길이 없으므로 더욱 신경과민이 될 것이다.
단식을 가르치는 종파가 전 세계 곳곳에 있었다. 잠시 동안이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단식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척 건강해지고, 정화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장기간 단식을 하는 것은 몸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그런 종파들이 있었다. 붓다 시절에는 단식에 사로잡혀 있는 자이나 종파가 있었다.
“단식을 계속하라. 한 달, 두 달, 석 달―만약 단식 중에 죽는다면 가장 높은 천국에 갈 것이다.”
단식에 대한 이런 관념이 왜 그렇게 깊이 뿌리박히게 되었는가? 음식과 성은 인간의 두 가지 강박관념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불행의 이유라고 생각하다. 사실은 바로 그 반대이다.
들은 얘기다.
한 항공회사가 이런 편지를 받았다.
“삼가 아룁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안전벨트를 매세요.’라는 안내 방송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방송이 나온 뒤에 매번 비행기가 흔들리니까요.”
지금 그대는 원인의 결과와 결과의 원인을 오해할 수 있다. 편지의 내용은 논리적으로 보인다. 편지를 쓴 사람은 몇 번이고 지켜본 것이 틀림없다. 안전벨트를 매야 한다고 방송될 때마다 별안간 비행기가 거칠게 덜컥 흔들린다. 그는 그것을 여러 번이나 지켜봤다. 방송이 나올 때마다 즉시 뭔가 잘못되어 간다. 그의 제안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처구니없다. 그 방송은 원인이 아니다. 방송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비행기가 흔들릴 것을 예상하고 방송이 그대를 도우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그대의 마음은 성적이다―원인이 거기에 있다. 몸은 그것을 따를 뿐이다. 몸이 따를 때 그대는 자각한다. 그대는 아직 그다지 깨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마음속에 있을 때는 자각하지 못했다. 그것이 몸 속에 들어와 아주 견고하게 되면 그대는 자각한다. 그대의 각성은 예민하지 않다. 그대는 원인에서부터 포착하지 못한다. 그대는 그것이 이미 결과로 나타났을 때 포착한다.
그대가 이미 어찌할 수 없을 때 그것을 포착한다. 그대는 그것이 이미 고착되었을 때만 그것을 지각하고 포착하게 된다.
그대 안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데는 세 가지 상태가 있다. 첫째, 그 생각은 언어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생각으로 공식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가장 미묘한 것이다. 만약 거기에서 포착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둘째 단계는 그것이 말 속으로 들어왔을 때이다. 그것은 공식화되었다. 그대 안에 생각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둘째 단계에서도 지각하지 못할 정도로 잠들어 있다. 생각이 실체화되었을 때, 그것이 벌써 거친 몸속에 들어왔을 때, 그것이 몸을 점유했을 때 그대는 지각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의 무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대가 정말로 고통과 아픔, 거의 지옥과 같은 그 삶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더욱더 깨어나야 한다고 붓다는 말한다. 깨어나면 깨어날수록 더 깊이 원인을 볼 수 있다. 원인을 깊이 보면 볼수록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욕망이 아직 의식적인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 그것이 아직 말로 되지 않고 느낌으로 있을 때, 단지 의식으로 들어오려고 무의식 속에서 애쓸 때 포착할 수 있다면 그것을 멈추는 것은 아주 쉽다.
그것은 바로 이렇다. 조그만 씨앗은 아주 쉽게 뽑아버릴 수 있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커다란 나무가 되었을 때에는 뽑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먼저 생각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다음 그것은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다음 그것은 몸속으로 들어온다. 그대는 그것이 몸속에 들어왔을 때라야 그것을 느낀다. 거기에서도 느끼지 못하고 잠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라야 비로소 그들은 느낀다.
가령, 분노는 먼저 그대의 가장 깊숙한 곳, 무언(無言)의 막연한 곳에서 일어난다. 다음 그것은 생각이 된다. 그 다음 그것은 그대의 몸으로 들어온다. 아드레날린과 다른 독소들이 현관으로 퍼진다. 그대는 누구를 죽이거나 때리거나 물어뜯을 준비가 되었다. 그대는 미친다. 하지만 그대는 인지하지 못한다. 그대가 누군가를 때리면 그때 그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셋째 단계이다. 그때 그대는 알아채게 된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여러 번 그런 순간을 겪지 않았는가? 그대의 자식이나 친구나 아내, 누군가를 때렸을 때 그대는 별안간 깨닫게 된다. “내가 무슨 질을 한 거지? 나는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 일이야.”라고 그대는 말한다. 이것은 그대의 무의식을 보여줄 뿐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첫 번째 단계에서 어떤 것이 일어날 때 붙잡아라. 그러면 그것은 아주 쉽다―마치 씨앗을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나무를 없애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나무가 수백만 개의 씨앗들을 대기 속에 내보냈을 때는 그대의 통제를 벗어난다. 바람은 씨앗들을 들판 멀리 날려 보낼 것이다. 이제 씨앗들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나무는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가능성을 창조했다. 그것은 많은 들판에 드러날 것이다.
몸을 망가뜨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그대의 눈이 아름다운 여자나 멋진 남자에 대한 욕구를 일으킨다고 해서 눈을 망가뜨린다면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인도에 수르다스라는 성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수르다스는 성자가 아니다. 수르다스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때만 성자일 수 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수르다스가 진실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참으로 신뢰할 만하고, 그의 통찰은 참으로 순수하다. 그렇다며 분명 그 이야기가 틀렸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수르다스는 속세를 떠났다. 그런데 그가 시내로 들어가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는 거의 자석에 이끌리듯이 그녀를 쫓아갔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산야신이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여자에게 가서 음식을 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구실이었다. 그는 그 여자에게 매일 가기 시작했다. 단지 얼굴을 보기 위해, 단지 그녀의 눈을 바라보기 위해, 단지 약간의 접촉을 갖기 위해서. 그는 그녀를 꿈꾸기 시작했다. 온종일 그녀를 생각하고 상상하며 그녀에게 다시 갈 수 있는 다음날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자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한 것은 그의 눈이었으므로 그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
내가 말하건대, 내가 단언하건대, 이 이야기는 순전히 꾸며 낸 이야기다. 이건 너무나 바보스럽기 때문이다. 수르다스가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분명 다른 눈먼 사람들이 꾸며냈다. 이것은 분명히 늘 어리석은 일만 꾸미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날조한 이야기다. 그것은 어리석다. 눈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마음이다. 눈을 통해 접근하는 것은 마음이다. 손을 통해 접근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대가 누구를 때리거나 죽일 때 살해자는 손이 아니다. 살해자는 그대이다. 그대가 손을 자른다 할지라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법정에 가서 판사에게 “저는 무죄입니다. 단지 제 손이 그랬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법정에서 그런 식으로 논쟁한 일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사람을 죽인 것은 내 손이었습니다.”
판사 역시 대단히 영리하고 교활했다. 판사가 말했다.
“당신이 옳소. 당신은 정말 논리적이오. 당신은 죽이지 않았소. 당신의 손이 죽였소. 그러니 당신의 손은 감옥에서 지내야 할 것이오. 당신은 집에 가도 되지만 손은 갈 수 없소.”
그래서 손은 쇠사슬로 묶였다. 그러고는 판사가 말했다.
“왜 가지 않소?”
그가 말했다.
“손 없이 어떻게 갈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판사가 말했다.
“당신이 손 없이 갈 수 없다면 어떻게 손이 당신 없이 뭔가를 할 수 있겠소? 당신들 둘은 한 짝이오. 그리고 사실 손은 하인일 뿐이오. 그대가 주인이오.”
어떤 사람이 음욕이 그치지 않는 것에 절망하여 스스로 성기를 끊고자 했다.
붓다는 몸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몸을 적대하지 않는다. 그는 그럴 수 없다! 몸은 정말 결백하기 때문이다. 몸은 결코 어떤 잘못도 하지 않는다. 존재계에서 더 이상 순수한 그것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것은 너무나 순수하다.
그렇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몸은 그대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따른다는 사실이다. 몸은 하인이며 매우 순종적이다. 설령 그대가 누구를 살해하려 한다 할지라도 몸은 따른다. 그것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대가 기도하려 사원에 가려 하면 몸은 그것을 따른다. 그것은 결코 ‘노’라고 말할 줄 모른다. 그대가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거나, 사원에서 기도하려고 하거나 몸은 너무도 순종적으로 그림지처럼 그대를 따른다.
몸에는 절대 책임이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몸에 대해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몸은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것이다. 그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유일한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대가 양쪽에서, 안과 밖에서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바위를 보는 것은 외부로부터 보는 것이다. 달을 보는 것은 외부로부터 보는 것이다. 몸, 곧 그대의 몸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보는 것이다. 그대의 몸은 외부로부터 볼 수 있고 내부로부터도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몸은 내부를 위한 문이다. 몸은 내면 여행을 위한 문이다. 붓다가 어찌 그것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는 붓다의 몸을 볼 수 있다―그토록 아름답고, 그토록 우아한. 어떻게 그가 그것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붓다의 조각상을 지켜보라. 그는 틀림없이 그의 몸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그의 몸에 엄청난 자비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의 몸은 꽃과 같다. 그의 몸은 장미꽃이나 연꽃이다. 아니다, 그는 몸을 반대할 수 없다.
붓다가 몸을 반대했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붓다에게 자신의 해석을 끼워넣고 있는 것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성기를 끊는 것은 마음을 끊는 것만 못하다. 마음이 주인이니 주인이 고요해지면 하인은 따라서 고요해질 것이다.
붓다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어떠하든, 원인은 그대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대가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 그대가 불행하다면 마음이 잘못된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행복하다면 마음이 올바른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완벽하게 작용하는 마음 작용의 콧노래에 불과하다. 마음이 우주와 조율되어 있을 때 그대는 행복하다. 마음이 자연을 거슬러 갈 때, 자연의 법칙―붓다는 그것을 담마라 부른다―을 거스를 때, 마음이 도를 거슬러 갈 때, 마음이 흐름을 거슬러 갈 때, 마음이 물결의 흐름과 반대로 헤엄치려고 할 때 거기 문제가 생긴다. 거기 불행이 있다. 마음이 단순히 부목(浮木)처럼 흐름을 따를 때, 그것이 어디로 가든지 그저 흐름과 함께 갈 때 그것은 행복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것은 궁극에, 대양적인 지복에 도달한다. 거기 도달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노력할 필요가 없다―노력 없이 그것은 일어난다.
그래서 근본 문제는 몸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라고 붓다는 말한다. 영혼에는 문제가 없다. 몸에도 문제가 없다. 문제는 바로 둘 사이에 있다. 몸과 영혼 사이에 연결된 마음이 문제이다. 마음은 무지와 앎,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무형(無形)과 형상 사이의 다리이다. 바로 이 다리가 문제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을 해결할 수 있다면 문득 그대는 집에 와 있다.
마음이 문제이다. 마음을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더 잘 기능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다시 욕망이 일어난다. 다시 그대는 마음의 덫에 걸린다.
만약 내가 무욕이 되어야만 행복해질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즉시 그대의 마음에 욕망이 일어난다.
“어떻게 하면 무욕이 될까?”
즉시 그대는 단서와 방법과 테크닉을, 무욕이 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이제 무욕이 되는 것은 다시 욕망이 된다. 마음이 문제라고 말하면 그대는 즉시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는지, 어떻게 그것을 해소하는지, 어떻게 그것을 없애는지 묻는다. 하지만 질문하는 자, 자신이 바로 마음이다. 또 노력하려고 하는 자, 자신이 바로 마음이다. 따라서 그대가 무엇을 하더라도 무엇을 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마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그대의 질문은 남아 있다―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마음의 본성을 살피고 어떠한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야말로 필요한 모든 것이다. 그것을 설명해 보자.
붓다는 말한다. “욕망을 가지면 불행해질 것이다!” 그러면 갑자기 욕망이 일어난다. “어떻게 하면 무욕이 될까? 우리는 행복하길 원하고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으니까.” 욕망이 일어나고 새로운 불행이 일어난다. 붓다가 욕망이 불행을 일으킨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이 어떻게 불행을 일으키는가를 보라는 말이다. 다만 지켜보라. 각각의 욕망은 그 자체의 불행을 가져온다.
그대는 길을 지나가고 있다. 그대는 지나가는 근사한 차를 본다. 번쩍 하며 이 차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이제 그대는 불행해졌다. 한순간 전만 해도 그대는 만사가 좋았고 불행은 없었다. 지금 차가 지나가고 불행이 일어난다. 붓다는 지켜보라고 말한다.
방금 전에 그대는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 산책을 가던 중이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새들이 노래하고, 나무는 푸르렀으며 아침의 미풍은 상큼했다. 그리고 태양은 황홀했다―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대는 기쁨과 활기로 가득 찬 시적(詩的)인 세상에 있었다. 그대의 생기 있는 웃음소리는 이 아름다운 아침의 일부였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차가 지나간다.
차 주인이 그대를 어지럽힌 게 아니다. 그는 그대가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가 그대에게 불행을 일으키려 한 게 아니다. 그에게 화내지 말라. 그대에게 불행을 일으킨 것은 차가 아니다. 어떻게 차가 그대 안에 불행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대 안에 불행을 일으킨 것은 그대의 욕망이다.
차를 보자 욕망이 일어난다.
“나는 저 차를 소유해야 한다. 저 차는 내 차고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별안간 나무는 더 이상 푸르지 않고, 새는 노래하지 않으며, 태양은 더 이상 거기 없다―그것은 벌써 져 버렸다. 아침부터 태양은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침울하고 어둡다. 그대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안개에 휩싸인다. 그대는 삶과의 접촉을 잃었다. 즉시!
단지 번쩍 떠오르는 욕망으로 그대는 아름다운 진리와 기쁨에서 수천 리 멀어진다.
다만 지켜보라. 붓다는 다만 지켜보라고 말한다. 길옆에 서서―지켜보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주 사소한 욕망이 일어나자 그대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대는 천국에 있다. 그대는 24시간 동안에 수많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그대는 지켜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묻는다.
“천국은 있습니까? 지옥은 있습니까?”
그러면서 놀랍게도 그들은 잇달아 천국과 지옥을 화물 열차처럼 왕복한다―끊임없이! 옮겨 가려면 단 1초라도, 눈 깜짝할 사이라도 필요한데―그들은 바로 한 순간에 지옥에 있다가 다음 순간에 천국으로 가 있다.
욕망이 어떻게 그대를 지옥으로 데려가는가를, 욕망이 얼마나 지옥인가를 지켜보라. 그리고 어떻게 무욕을 얻을 수 있는지 묻지 말라. 그것은 무의미하다. 만약 그대가 욕망의 본성을 살피고 그것이 불행을 가져온다는 것을 느끼면 바로 그 이해가 욕망을 멈추게 할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지켜보라. 만약 그것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대의 통찰력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 그대의 통찰력이 깊어지게 하라.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그대를 깨닫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욕망이고 그대만이 지켜볼 수 있다. 나는 그대의 욕망을 지켜볼 수 없다. 그대는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지켜볼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개인적인 세계이다. 지옥이나 천국은 개인적인 일이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대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다만 지켜보라…….
붓다의 말은 지켜보라는 것이다. 주시하라. 무욕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대단히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대는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불행을 만들 것이다. 다만 욕망의 본성 속으로 들어가서 깊이 그것을 살펴보라. 지켜보라……. 그것이 어떻게 어둠을 일으키는지, 그것이 어떻게 불행을 가져오는지, 그것이 어떻게 갑자기 그대를 사로잡고 압도하는지를. 단지 계속 지켜보라.
어느 날 그 일은 일어날 것이다. 차가 스쳐 지나가고, 욕망이 일어나기 전에 그대는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별안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대는 주의 깊게 되었고 욕망은 일어나지 않았다. 욕망은 일어나려 했었다. 그것은 그대에게 뛰어 올라와 그대를 지옥으로 데리고 갈 태세였다. 그러나 그대는 주시하고 있었다. 그대는 큰 행복을 느낄 것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열쇠를 가질 것이다. 이제 단지 주의함으로써 욕망은 일어나지 않았고 차는 스쳐 지나가 버렸다. 차는 욕망과 상관이 없다. 욕망은 그대가 무의식적이고 깨어 있지 않고 잠들어 있고 몽유병자나 술꾼의 삶을 살기 때문에 일어난다.
각성이 무욕이다. 욕망의 각성이 무욕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 열쇠는 많은 자물쇠를 여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대가 탐욕스럽다면 어떻게 그것을 제거하는지 묻지 말라. 그것은 다시 다른 이름하에, 다른 형태의 탐욕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성자들이나 마하트마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경전을 읽었다. 그들은 욕심이 많으면 지옥에 간다고 한다. 이제 천국에 가려는 욕심이 일어난다. 천국에는 아름답고 신화에나 나오는 온갖 것들이 있다고 경전들은 말하지 않는가! 그들은 탐욕을 창조했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어떻게 하면 욕심을 벗어나는지를 묻는다. 그대 안에 새로운 욕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이를까? 어찌하면 파라다이스에 들어갈 수 있을까? 어찌하면 한도 끝도 없이 영원히, 환희롭고 지복스럽게 살 수 있을까? 지금 이것은 새로운 욕심이다.
그것은 길이 아니다. 붓다의 길은 정말 지금껏 지상에 있어 왔던 길 중 최고의 길이다. 붓다의 길은 가장 통찰력 있고 혁명적인 길이다. 그는 말한다.
“욕심을 지켜보라. 그저 욕심을 지켜보고,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이 불행을 일으키는지 보라. 그 지켜보는 가운데 그대 안에 빛이 생겨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 내면의 불꽃이 밝게 빛날 것이며, 욕심의 어두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폭력도, 분노도, 소유욕도 마찬가지다―“그대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사라질 것이다.”
한 가정부가 주인 앞에서 트림을 했다. 물론, 그 주인은 서양인임에 틀림없다. 인도에서는 아무도 트림하는 것을 뭐라 하지 않는다. 그 주인은 매우 성이 나서 그녀를 때리려 하다가, 문득 그녀의 젊고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는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그녀와 성적 쾌락을 즐겼다.
다음날 그가 서재에 있을 때 가정부가 들어왔다.
“뭐야? 뭘 원하나?”
“저, 주인님. 방금 전에 또 트림을 했는데요.”
자, 한번 맛을 보면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은 욕구가 또다시 일어난다. 그대가 과거에 알았던 모든 것을 미래에도 자꾸만 자꾸만 요구하게 된다. 그대의 미래는 변경된 과거에 불과하다. 그대의 미래는 과거를 반복하려는 욕망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연히, 그대가 권태로운 삶을 살았다 해도 그대 말고는 아무도 그것에 책임이 없다. 그대는 권태로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권태는 불행이다. 그대가 반복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대는 권태를 구하게 된다.
가령, 그대가 앉아 있는데 저녁의 첫 별이 보였다. 그대는 그것을 지켜봤다. 무척 평온한 저녁이었다. 바람은 시원했고 새들은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은 고요했고 음악적이었으며 그대는 그것과 조율되어 있었다. 별이 드러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대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제, 그대는 어떤 맛을 알았다. 그대는 그것을 보물처럼 끌어 모은다. 이 보물은 그대를 불행하게 할 것이다.
우선 그대는 그것에 또다시 매달릴 것이다. 그 집착은 불행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달린다고 해서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이 일어났던 것은 그대가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면서 그냥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순진무구한 상태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기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대가 그것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것이 근본 요인이다. 그대는 구하지 않았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대는 정말로 욕망이 없었다. 그대는 단순히 거기에 있었다. 별안간 그대는 자각하게 되었다. 그 첫 별을. 그리고 첫 별을 자각하게 되었던 그 순간, 그대는 그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기억하라. 그것은 나중에 온다. 그것은 반복이다. 그 순간에 그대는 그냥 거기에 있었다―행복도 불행도, 아무것도 없이. 이러한 말들은 아무 의미도 없다. 존재는 너무나 광대해서 그 어떤 말도 그 앞에선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버리고 기억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대는 거듭 말한다.
“아름다웠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얼마나 성스러웠던가!”
이제 매일 저녁 그것을 반복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다음날 그대는 또 기다리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그대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고 그대는 그것을 바라고 있다. 그대는 지난 경험을 재현하고 싶다. 자, 이것은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대에게 그 경험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너무 많은 것을 구하고 있다. 그대는 이완하지 못하고 긴장한다. 그대는 첫 별을 놓칠까봐 겁낸다. 그대는 염려한다. 그대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지 어떨지 걱정한다.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첫째, 그대는 기억이 존재하지 않고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던 그 순수성을, 경험되지 않은 상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설사 어느 날 그것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반복이 될 터이므로 권태로울 것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아름다움은 새로움에 있지 결코 낡아버린 것 속에 있지 않다. 아름다움은 신선함에 있지 결코 죽어버린 것 속에 있지 않다. 아름다움은 원본에 속하지 복사품에 속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경험이 직접적일 때 오지 중고일 때 오지 않는다.
이제 그것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그대를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중고의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신은 절대로 중고가 아니라는 것을. 신은 언제나 신선하다.
저녁의 아름다움 속에서, 혹은 날개짓하는 새들의 아름다움 속에서 신을 안다는 것은 그대가 절대적으로 순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는 철저히 버려야 하고 미래가 간섭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오직 그때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축복이 있고 신의 은총이 있고 행복과 지복이 있다.
한번 그대가 어떤 것을 경험하면 그대는 그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거지가 된다. 그러면 그것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상흔 같이 기억을 지니고 다닐 것이다.
그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행복할 때, 그 순간에는 그것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그것을 지켜보라. 오직 나중에, 경험이 지나가고 났을 때, 색이 바랬을 때, 그것이 더 이상 없을 때, 그때 마음이 들어와 그것을 기대하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는 말한다. “그래, 그것은 훌륭했어! 너무나 훌륭했어!”라고. 경험 자체가 일어날 때 마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행복은 마음이 없을 때 존재한다.
마음이 들어오면 행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거기에는 오직 기억만, 죽은 기억만 있을 뿐이다. 그대의 연인은 가고 그대는 다만 연인이 쓴 편지만을 가지고 다닐 뿐이다. 꽃은 시들고 단지 하나의 이미지만 그대의 마음속에 남는다. 이 이미지는 행복이 그대의 존재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미지가 장벽이 될 것이다. 바윗돌이 될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과거를 지고 다니지 말고 미래를 구하지 말라. 다만 지금 여기에 있으라. 그때 거기엔 마음이 없다. 그리고 육체는 단순히 그 무심(無心)을 따른다.
지금 당장 몸은 마음을 따르고 그리고 그 마음이 범인이다. 그대는 줄곧 몸을 탓한다. 그것은 마치 방으로 달려오다 문에 부딪치고는 문에 화를 내며, 문이 죄인인 양 문을 때리기 시작하는 어린애와 같다.
어린애만 그러는 게 아니다. 성인들도 그런 짓을 한다. 편지를 쓰고 있는데 만년필이 말을 잘 안 듣는다. 그대는 성이 나서 만년필을 마룻바닥에 집어 던진다. 그대는 만년필을 벌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그대가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고도 그대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믿는가? 그대가 집에 와서 화내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몹시 화를 내며 문을 발로 ‘쾅’하고 연다. 문은 그대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선사를 보러 왔다. 그는 문을 쾅 열고는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는 선사에게 와서 절하고 그의 발을 만졌다. 선사가 말했다.
“나는 너의 인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돌아가서 문에게 먼저 사죄하고 오라. 그리고 신발에게도.”
그 사람이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를 웃음거리로 만드시려 하십니까?”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선사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기 있도록 허락하지 않겠다. 그냥 나가라! 네가 문을 모욕하고 신발을 모욕할 수 있다면 그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도 당연하다. 네가 그것들을 모욕했을 때 너는 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이제 네가 어리석다고 느끼느냐? 가서 그렇게 하라!”
그래서 그는 갔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용서를 구했다. 그가 말했다.
“제발 용서하십시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잘못을 했습니다. 나를 용서하십시오.”
그가 신발과 문에게 사죄하고 나서 돌아왔을 때 그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사가 그를 가까이 불러서 안아 주었다. 그가 말했다.
“그것은 엄청난 체험이었습니다! 내가 용서를 빌 때 처음엔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것은 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나를 용서한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들의 자비심과 연민과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대는 줄곧 무의식적인 습관으로 행동한다. 그대 행동의 그 무의식적인 매너리즘이 붓다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의 모든 의미이다. 마음은 그대의 잠이다. 마음은 그대의 부재이다. 그래서 몸이 이 마음을, 이 잠을, 이 술취한 마음을 따른다 해도 몸에게 화내지 말라.
마음이 주인이니 주인이 고요해지면 하인은 따라서 고요해질 것이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무심이 된다. 무심과 고요한 마음은 꼭 같은 것이고,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 게 아니다. 고요한 마음, 서늘한 마음이 무심이다―마음은 열병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끊임없는 불안, 긴장, 병이다. 그렇다. 병(dis-ease)이 마음이다. 병이 사라질 때 그대는 무심의 상태에서 작용하고 몸은 그것을 따른다.
몸은 추종자다. 만약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다면 몸은 마음을 따른다. 만약 그대가 무심하다면 몸은 무심을 따른다. 그러니 몸과 싸우지 말라. 바보가 되지 말라.
삿된 생각들을 그치지 못하면 성기를 끊는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그에 붓다는 게송을 읊으셨다.
“정욕은 의지에서 생겨나고
의지는 생각과 상상에서 자라나니
양쪽이 다 고요해지면
색도 없고 윤회도 없다.”
이 게송은 카샤파 붓다의 말씀이시다.
붓다는 말한다.
“나 이전에도 수백만의 붓다가 있었고, 나 이후에도 수백만의 붓다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세계에서 아주 새로운 어떤 것이다.
마하비라는 말한다.
“나 이전에 오직 스물네 명의 티르탕카라들이 있었고, 더 이상 티르탕카라는 없을 것이다.”
모하메드는 말한다.
“나 이전에 오직 네 명의 예언자들이 있었고, 나 이후로 더 이상 예언자는 없을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나는 신의 독생자이다.”
붓다는 드문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나 이전에도 수백만의 붓다들이 있었고, 나 이후에도 수백만의 붓다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더욱 진실되어 보인다. 이 무한 속에 스물네 명의 티르탕카라들이 전부란 말인가? 라마는? 크리슈나는? 그들은 자이나교의 티르탕카라에 속하지 않는다.
모하메드는 말한다.
“나 이전에 오직 네 명의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러면 마하비라는? 크리슈나는? 또 붓다는? 그들은 그 안에 속하지 않는다.
또 예수는 말한다.
“나는 독생자다.”
신이 오직 한 명의 아들만 가져야 한다는 이 사실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그 후에 그는 무엇을 했는가? 산이 제한을 따랐는가? 이것은 터무니없어 보이고, 광신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신의 외아들의 추종자들이므로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그 사람들을 알아본다면 그들은 곧바로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예수는 신의 독생자이다. 그것은 에고와 우월성을 만들어낸다.
힌두교에는 스물네 명의 아바타라(avatara, 화신)만 있다고 힌두교도들은 말한다. 몇 세기 전에는 열 명의 아바라타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약간 늘렸다. 왜냐하면 자이나교도들이 스물네 명의 티르탕카라들을 주장하고 있어서 심한 경쟁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다.
“좋다, 우리도 스물네 명을 가져야겠다.”
스물네 명의 숫자가 표준이 되었다. 불교도들조차 스물네 명의 붓다가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티르탕카라가 스물네 명이고 붓다가 스물네 명일 때 아바타라가 열 명이라는 것은 다소 빈약해 보인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확대했다. 그들은 열 명의 아바타라를 버리고 자기들도 스물네 명의 아바타라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마하비라는 어떤가? 아디나타(Adinatha)는 어떤가? 그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붓다는 모두를 포함시킨다. 그는 엄청나게 포괄적이다. 그리고 그는 우월 의식을 만들지 않는다. 전에도 수백만의 붓다들이 있었고, 이후에도 수백만의 붓다들이 있을 것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세상에 붓다들이 없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 붓다가 되는 것은 단지 그대의 본성을 자각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특별할 게 아니다. 그대가 시도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보물이다. 그것은 단지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보라. 붓다는 자기 자신이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수많은 붓다들이 있었고 또 이후에도 수많은 붓다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선언의 아름다움을 보라. 자신에 대해 붓다는 말한다.
“나는 수백만 명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나의 어떤 것도 특별함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정말로 종교적인 사람은 이래야 한다.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아주 평범하다. 거기 수많은 붓다들이 있는데 그대가 특별할 수 있겠는가?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면 그대는 특별할 수 있다.
당시 엄청난 투쟁이 있었는데, 마하비라가 자신이 스물네 번째라고 주장했을 때 다른 여덟 사람도 자기들이 스물네 번째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것은 문제를 일으켰다! 아무도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누가 진짜 마직막 티르탕카라인지 어떻게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일부의 사람들은 고살라크를 선택해서 따랐고, 일부는 마하비라를 선택해서 따랐다. 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아지르 케쉬캄발, 산쟈이 빌레티푸타를 택했으며, 또 다르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떻게 결정한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신의 독생자라고 말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그들은 예수가 속였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기다려 왔지만, 그 누구도 메시아가 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를 기다렸단 말인가? 그들은 꿈꾸고 또 꿈꾸면서 아무도 허용하지 않았다.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려 이제 유대이들에게 그것은 습관이 되어버렸다. 예수는 주장했다. 예수 이후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지만, “내가 메시아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파괴되고 거절당하고, 그것이 사기임이 입증당해야 했다.
메시아는 확실히 올 것이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주장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수십 세기 동안 기다리면서 그들은 중독이 되었다. 지금도 그들은 기다릴 것이다. 설령 신이 온다 해도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다. 그들은 “누가 당신을 원한단 말인가? 우리는 기다림을 즐긴다. 우리는 희망 속에서 존재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끝없이 꿈꾸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이고, 신은 특별히 자기들만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힌두교인들은 자기들이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자이나교인들도 자기들이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붓다는 희귀하다. 붓다는 이전에도 무량한 수백만 명의 붓다가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갠지스 강의 모래알들을 헤아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많은 붓다들이 이전에 있었고, 더 많은 붓다들이 이후에도 있을 것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의 지위를 아주평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다.
비범함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비범함이다. 또 그대가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그대가 열등감 때문에 괴로워한다년 것을 보여줄 뿐이다.
모하메드는 더 이상 예언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대는 문을 닫는가? 만약 누가 “내가 예언자다.”라고 주장한다면 회교도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모하메드가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닫는 그는 누구이길래? 문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아니면 그것은 모두에게 속한다. 어떻게 그가 그것을 닫을 수 있는가?
그러면 애초에 왜 이런 생각이 생겨났는가? 마하비라는 자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모하메드는 자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자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대는 단순히 진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떤 새로운 사상이 일어나는 것도 허용치 않는다. 그대는 문을 닫고 독단적인 교리를 만들어 아무도 그 교리를 방해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붓다는 모든 문을 열어 놓았다. 그는 말한다. “수백만의…….” 그는 카샤파 붓다라는 이름을 가진 과거의 붓다의 이 게송을 기억한다. 그는 말한다. “이 게송은 카샤파 붓다가 말씀하셨다.”
“정욕은 의지에서 생겨나고
의지는 생각과 사살에서 자라나니
양쪽이 다 고요해지면
색도 없고 윤회도 없다.”
의지는 에고를 의미한다. 의지는 존재와의 싸움을 의미한다. 누군가 흐름을 거슬러 싸우는 것을 보면 “그는 의지력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의지력이란 무엇인가? 모든 의지는 신에 대항한다. 그대는 그것과 싸운다. 그대는 사물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대는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 만일 그대가 자연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그대는 의지를 가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한다.
“바그완, 어떻게 해서든 더 강한 의지력을 갖도록 도와 주십시오.”
왜 내가 그대의 적인가? 왜 그대가 더 미치도록 도와야 하는가? 의지력? 서양에서 의지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서양 전체가 강한 에고를 가져야 한다고, 의지력을 가져야 한다고, 의지력을 계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점에 나와 있는 수천 권의 책들이 의지력 계발법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책들이 팔리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더욱더 에고를 연마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말한다.
“정욕은 의지에서 생겨나고, 욕망은 의지에서 자라난다.”
‘나’, ‘에고’는 마음의 뿌리이다. 그대의 모든 마음은 나의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의지는 생각과 상상에서 자라나니…….” 생각은 과거로부터 오고 상상은 미래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그대가 경험했고 배웠던 모든 것들, 그것들은 그대의 에고이다. 그리고 미래에 경험하고 싶고 미래에 갖고 싶은 모든 것들은 그대의 의지이다. 이들은 동일한 현상의 양면이다.
“양쪽이 다 고요해지면…….” 생각이 더 이상 없을 때란 과거가 더 이상 없고 상상과 투사와 욕망과 미래가 더 이상 없을 때를 의미한다. 양쪽이 다 조용해지면 색(色)도 없고 윤회도 없다. 그때 모든 색이 사라진다고 붓다는 말한다. 그때는 더 이상 감각과 그것을 경험하고 싶은 욕심이 없다.
기억하라. 색이 사라지는 것은 감수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대는 엄청나게 민감해진다. 감각적인 사람은 민감한 사람이 아니다. 감각적인 사람은 아주 둔하고 거칠고 야만적이다. 민감한 사람은 매우 진화된, 고도로 진화된 사람이다. 그는 대단히 수용적이다. 감각적인 사람은 쾌락을 좇고, 민감한 사람은 지복이 여기 있음을 알고, 그것에 열려 있고, 성스러운 지복에 젖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스폰지처럼 그것을 흡수한다. 그는 민감하다.
감각적인 사람은 항상 무언가―돈, 권력, 명예―를 좇으며 성취하려고 애쓴다. 민감한 사람은 단순히 지금 여기에 살며 열려 있는 아름다움을 즐긴다. 내일이 오면 내일이 스스로 보살필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내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할 때의 의미이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들에 핀 백합꽃을 보여주며 말했다.
“보라,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그들은 수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여기에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일 일어날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솔로몬의 영광도 그토록 아름답진 않았다―이 가난한 백합꽃처럼.”
민감한 사람은 꽃과 같은 사람이어서 존재에 열려 있고 그것을 즐기고―무한정하게 즐기고―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의 추구는 녹아 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좇지 않는다.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돈을 몽땅 잃었다. 그는 시내에 있는 모든 카지노에서 매번 참패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케네디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50센트짜리 동전 뿐이었다. 그는 또 도박을 할 방법을 궁리해 내느라 애쓰며 길을 따라 걷다가 그 동전을 허공에 던졌다. 아뿔사! 그때 동전이 손가락을 빠져나가 거리 한 복판에 있는 하수도 창살 속으로 빠졌다.
우리의 영웅은 총알처럼 쫓아갔지만 그것을 잡기도 전에 택시에 치어 다리가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갔다.
그는 두 달을 병원에서 지낸 뒤 보험회사에서 받은 돈을 쥐고 다시 카지노로 출발했다. 도중에 그는 동전을 빠뜨렸던 그 하수도 곁을 절름거리며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아래를 들여다보려고 하다가 다시 택시에 치어 나머지 한 쪽 다리마저 부러져 병원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두 번씩이나 똑같은 장소에서 치었죠?”
간호사가 물었다.
“제 말 뜻은, 뭐가 당신을 그 바보 같은 하수도로 되돌아가게 했느냐는 거죠.”
“그것은 행운의 부적이었다오.”
그가 설명했다.
“그래서 난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았소.”
사람들은 계속해서 쫓아가고, 매번 치인다. 그들의 온 생애는 상처와 상처로 점철될 뿐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거듭해서 똑같은 것들을 쫓고 있다―마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민감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머문다. 그러면 신이 그를 찾는다. 감각적인 사람은 여기에서 저기로, 또 다른 곳으로 정신없이 쫓아다닌다. 그리고 이것이 전체의 아름다움이다. 그대가 신을 좇으면 절대로 그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신이 있는 곳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행복을 좇는다면 절대로 행복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의 거처는커녕 그것의 얼굴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설명 그대가 우연히 그것과 마주친다 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민감한 사람은 자기가 있는 곳에 그대로 앉아 있고, 그러면 그에게 행복이 오고 지복이 오고 신이 온다.
이것은 기억해야 할 것인데, 그대만 신을 찾는 게 아니라 신 또한 그대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신이 와서 문을 두드리지만 그대는 한번도 거기 있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대는 딴 곳에 있다. 신은 줄곧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만 그대는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 문은 현재에 있고 그대는 미래나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탐욕에서 근심이 생기고 근심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탐욕을 떠나면 두려움도 없고 근심도 없다.
이것을 관찰해 보라. 이것들은 이론이 아니다. 이것들은 삶에 일어나는 사실이다. 붓다는 이론가도 형이상학자도 아니다―그는 바로 삶의 근본적인 사실의 과학자이다. 그는 오직 사실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대는 그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단순히 지켜보면 그대는 그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말한다. “탐욕에서 근심이 생기고…….”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근심이 생긴다. 어떻게 차지할까? 어떻게 도달할까? 어떻게 성취할까? 그대는 걱정한다. 그대가 걱정할 때마다 수천 수만 가지의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더 많은 근심이 생겨난다.
“어느 쪽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옳은 선택일까? 어느 쪽이 옳은 길일까?”
그러고 나면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대가 도달할 수 있을지 어떨지, 세상에는 수많은 경쟁자가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알렉산더와 징기스칸과 나디르 샤를 보라.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그토록 애를 쓰고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대가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때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것들은 단순한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옷을 사기 위해 기성복점에 갔다. 판매원이 재킷 하나를 권하더니 또 다른 재킷을 입혀 보고는 고객에게 말했다.
“돌아 보세요. 이쪽을 한번 보세요. 자, 이제는 거울로 뒷모습을 보세요. 이쪽에서, 다시 저쪽에서.”
그런데 여전히 그 사람은 다른 재킷을 입어 보겠다고 했다.
마침내 주인이 그들에게 와서 한 재킷을 골라 줬다. 고객이 그걸 입어보고는 즉시 그 옷을 샀다. 손님이 나가자 주인이 판매원에게 말했다.
“얼마나 쉽게 파는지 봤지?”
“좋습니다.”
판매원이 말했다.
“사장님이 파셨지만 누가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죠?”
일단 탐욕이 있으면 그것은 그대를 어지럽게 만든다―걱정, 근심에. 무엇을 선택하나? 무엇을 포기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어떻게 가야 하나? 무엇이 옳은 방법이고, 옳은 접근 방식일까? 그때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것을 할 수 있을까? 끝없는 두려움. 그대는 어지럽게 된다.
탐욕은 세일즈맨이다. 그리고 그때 악마, 보스가 들어온다. 그러면 그대는 지옥에 던져진다. 탐욕은 그대를 어지럽게 한다. 그러면 아무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아무도.
아름다운 우화를 읽었다.
오말리 신부와 코헨 랍비가 골프를 치고 있었다. 세 번째 홀에서 오말리 신부가 친 공이 로프(rough, 골프장에서 잡초가 우거진 곳)로 들어갔다. 그가 소리쳤다.
“에이 빌어먹을!”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주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
다섯 번째 홀에서 그는 또다시 로프 안으로 한심한 슛을 날렸다.
“오, 빌어먹을!”
다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오, 주여! 다시 한 번 용서해 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아홉 번째 홀에서 다시 로프 안으로 공을 치는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고함쳤다.
“이런 빌어먹을!”
바로 그때 번갯불이 쳤고 랍비 코헨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 소리가 나더니, 낮고 묵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오, 빌어먹을!”
신조차도 실수할 수가 있다! 그러니 도대체 그대가 성공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대는 겁먹고 전율하며 공포로 떤다.
탐욕은 근심을 일으킨다. 근심은 두려움을 일으킨다―탐욕을 떠나면 두려움도 근심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 탐욕만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오직 근심과 두려움밖에 가진 게 없다. 그들은―수많은 사람들이―내게 와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한다. 그들은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을 원한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탐욕을 벗어나라고 말하면 그들은 나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트라같이 값싼 것을 원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계속 욕망을 갖고, 계속 탐욕을 좇을 수 있도록. 그리고 여전히 걱정 속에 산다.
어떤 정치가가 나에게 찾아오곤 했는데 그는 항상 “바그완, 어떻게 하든 제가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말했다.
“정치가로 있으면서 그것을 부탁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에게 그것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라? 만일 그것이 정치가에게 일어날 수 있다면 성자들은 바보인가?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러면 그들은 왜 야망을 버려야 했는가? 그것은 절대로 올 수 없다. 야망은 긴장과 근심을 낳는다. 정치에서 물러나라!”
그러면 그는 말하곤 했다.
“당신 말씀은 옳지만 지금 당장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긴장 속에서 지내는 게 낫다. 그것들을 받아들여라. 그대는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대는 케이크를 먹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가지려 한다.”
그러자 그는 마하리쉬 마헤시 요기에게 가기 시작했다. 여러 날 동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우리는 기차에서 만났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여러 날이나 내게 오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당신에게 갈 필요가 있을까요? 당신은 정치를 그만두라고 합니다. 마헤쉬 요기가 더 낫습니다. 그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을 더욱 능력 있게 만들어 주겠소. 당신은 더 훌륭한 정치가가 될 것이오. TM만 하시오.’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것은 들어맞는다. 꼭 들어맞는다. 그대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단지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블라, 블라, 블라. 그리고 그것이 전부다. 20분 동안 그것을 반복하면 그대가 어디에 있든 모든 성공이 보장되고 모든 능력이 보장된다. 심지어 도둑도 TM을 하고 밀수업자도 TM을 하며 정치가도 TM을 한다. 밀수업자는 자신이 TM을 하면 절대로 붙잡히지 않고 더욱 능란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이란 그렇게 값싼 게 아니다. 명상이란 그대 존재의 전적인 변형이다. 그리고 커다란 이해와 커다란 지성이 필요하다.
붓다의 경전은 진정으로 지성적인 사람들과, 자신들이 주변에 만들어 온 불행으로부터 정말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불행에 넌더리가 나서 그 덫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결정할 일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가 불행을 창조했다! 그대가 어떻게 그것을 창조해 왔는지 한번 이해하면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그것을 창조할 수 없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