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트라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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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위대한 만트라, 심원한 지혜의 만트라, 가장 높은 만트라, 이 위에 견줄 바 없는 만트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반야바라밀다는 이 모든 고통을 없애 주나니 여기 진실만이 충만한데 거짓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 이 만트라는 다음과 같이 설해졌다. 가떼 가떼 파라가떼 파라삼가떼 보디 스와하 이로써 반야바라밀다의 정수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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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인간의 진화를 광물권, 생물권, 정신권, 크라이스트권의 네 단계로 보고 있다.
이 네 단계의 진화 과정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를 분명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이해함으로써 반야심경의 이 클라이맥스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물권은 의식이 완전히 잠든 상태이다. 물질의 차원이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의식이 잠든 상태이다. 물질은 그러므로 의식의 정반대가 아니다. 다만 의식이 잠든 상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이다. 바위는 붓다, 잠든 붓다이다. 어느 날엔가 이 바위는 그 잠에서 깨어 붓다가 될 것이다. 아마 수십억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없다. 다름이 있다면 여기 시간의 길고 짧음이 있을 뿐. 저 영원의 차원에서 본다면 시간이란, 시간의 길고 짧음이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동양에서는 예부터 돌로 붓다의 모습을 만들었다. 왜 하필이면 돌로 붓다의 모습을 깎았는가?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상징적인가? 가장 낮은 차원인 돌과 가장 높은 차원인 붓다가 돌부처의 형태를 통해서 서로 연결되고 있다. 돌은 가장 낮은 의식의 차원이다. 붓다는 가장 높은 의식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돌부처의 모습은 다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속에 붓다의 성질이 깃들어 있다. 보라. 이 보잘것없는 돌멩이 하나에조차 붓다가 숨어 있다.” 붓다란 무엇인가? 이 돌의 현현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위는 지금 그 자신의 전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그 표현의 구체적인 모습이 여기 돌부처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 광물권이다. 광물군은 물질의 차원이다. 무의식의 차원, 수면의 차원, 삶 이전의 차원이다. 이 상태에서는 자유가 없다. 자유는 의식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는 오직 원인과 결과만 있다. 법칙만이 전부다. 원인과 결과라는 이 법칙에 어긋나는 단 하나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자유를 알지 못한다. 자유는 의식의 그늘로서 들어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면 그럴수록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이를 붓다는 모크샤(解脫), 완전한 자유라고 불렀다.
바위는 구속의 상태에 있다. 모든 곳으로부터, 모든 차원으로부터 감금의 상태에 있다. 바위는 감옥 속의 영혼이다. 바위는 감옥 속의 영혼이다. 붓다는 날개를 단 영혼이다. 붓다에게는 그러므로 어떠한 사슬도 없고 멍에도 없다. 그를 가둘 감옥은 없다. 붓다를 둘러싸고 있는 벽은 없다. 붓다에게는 그의 존재의 한계가 없다. 그의 존재는 우주의 존재, 그 자체만큼 광대무변하다. 붓다는 우주, 그 자체와 하나이다.
그러나 광물권의 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만이 유일한 진리요, 법칙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형식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아주 제한된 영역의 탐험에 그치고 있다. 과학은 물질의 차원을 넘어서서는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다. 과학의 개념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과학을 통해서는 문제의 해결보다는 오히려 불행만을 초래하고 있다. 과학의 비전은 한정되어 있다. 과학은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 전체와 조화될 수 없다. 과학의 시야란 마치 조그만 대나무 구멍을 통해서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 과학은 아직도 광물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학은 아직 속박 속에 있다. 과학은 날개가 없다. 저 무한의 영적 공간을 날 수 있는 그런 날개가 없다. 원인과 결과의 차원을 넘어갈 때만이 과학은 날개를 가질 수 있다. 비상력을 가질 수 있다.
여기 원자물리학들은 지금 원인과 결과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과학은 지금 원인과 결과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여기에서 과학이 발견한 것은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점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확정성 원리이다. 이런 일을 하라. 그러면 이런 결과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물을 100°로 끓여라. 그러면 물은 수증기로 증발해 버릴 것이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물은 자유가 없다. 물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군. 100°가 되어도 온 종일 수증기로 증발하지 않겠다. 지금 물의 이 상태로 그저 있어야겠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자유가 물에게는 없다. 물은 거부할 수 없다. 원인과 결과의 이 법칙에 저항할 수 없다. 어느 날 물은 아주 기분이 상쾌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기분 만점이야. 그래서 5°만 되어도 수증기로 증발할 작정이야.” 그렇다.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고전 물리학자들은, 과학자들은 이 점에 대하여 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하여 아무런 암시조차 포착하지 못했다. 불확정성 원리란 즉 자유의 원리를 뜻하는 것이다. 이제 물리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그들은 알았다. 모든 것이 결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불확정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거기 자유가, 절대자유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전자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의 현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자를 입자라고도 말할 수 없고 파(波)라고도 말할 수 없다. 전자는 어떤 때는 입자처럼 운동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파처럼 운동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를 예측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양자(量子)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일 뿐만은 아니다. 파(波)와 같이 운동함과 동시에 또 어떤 때는 입자와 같이 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파와 입자의 이 동시 현상은 고전 물리학자들에게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코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뉴튼 역시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불가능하다. 그것을 통찰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어떤 물건이 선과 같이 운동하면서 동시에 점과 같이 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비논리적이다. 비논리적이어도 이만저만하게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대여, 생각해 보라.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어떤 물건이 점처럼 운동하면서 동시에 선처럼 운동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점이면서 동시에 선이라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이제 물질의 정체에 대한 어떤 암시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멀고 먼 길을 우회해서 그들은 마침내 여기에까지 왔다.
삶의 가장 위대한 요소, 자유라는 이 문앞에까지 왔다.
그러나 광물권 속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광물권은 수슈프티이다.
<수슈프티>, 이는 무슨 말인가? 잠, 깊은 잠, 꿈조차 없는 깊은 잠이란 뜻이다. 보라. 바위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아니 바위는 결코 꿈을 꿀 수가 없다. 꿈을 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약간의 의식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위는 그저 거기 있을 뿐, 거기 바위에게는 영혼이 없다. 개성이, 행동이 없다. 꿈마저 꿀 수 없기 때문에 바위의 잠은 동요되지 않는다. 밤이나 낮이나 십 년이 흘러가거나 백 년이, 아니 천 년이 흘러가거나 바위는 계속 잠자고 있다. 바위의 잠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다. 바위는 수백억 년 동안 잠을 잤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수천억 년 동안 잘 것이다. 단 한 오라기의 꿈조차 없이.
요가에서도 의식의 차원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요가의 이 네 단계는 샤르댕의 네 단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요가에서의 첫째 단계는 <수슈프티>, 깊은 잠이다. 광물권이 여기 해당한다.
광물권은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깝다. 물질이 죽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실지로는 그렇지 않다. 물질은 기다리고 있다. 그 자신의 삶이 싹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질은 씨와 같다. 바로 씨의 차원이다. 비록 지금은 죽음과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은 죽은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죽음보다 더 깊은 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 삶으로 싹트는 그 순간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지금 현 상태는 죽음이다. 마음이, 의식이 없기 때문에. 기억하라. 이를 기억하라. 네 번째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서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붓다의 경지는 마음이 없는 차원이다. 이 바위 역시 마음이 없는 차원에 있다. 이런 견지에서 돌부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위와 붓다의 만남은 상반되는 두 극의 만남이다. 바위의 no-mind는 below mind의 차원이다. 그러나 붓다의 no-mind는 beyond mind의 차원이다. 여기 유사성이 있다. 붓다와 바위 사이에 아주 유사성이 있다.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모든 걸 다 알아버린,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같이 보이는 성자 사이의 유사성과 같다. 어린아이는 below mind의 차원이요, 성자는 beyond mind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바위는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가 통과한 그 삶의 이 모든 혼란을, 혼란과 고통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는 이 모든 과정을 넘어가고 또 넘어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모든 것을 다 초월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 유사성이 있다. 붓다는 또 다시 no-mind의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 그는, 그의 의식은 완전히 각성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제 마음이, 마음이라는 이 사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바위는 깊은 무의식 상태, 일종의 혼수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바위에게는 마음이, 사념이 존재할 수 없다. 바위는 지금 죽음보다 더 두꺼운 무의식 상태에 있다. 그래서 여기 마음이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 붓다의 경우 의식은 완전무결한 각성 상태에 있다. 그래서 여기 마음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를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다. 이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필요한 것은 그대의 의식이 지금 정말로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 의식이 진정으로 깨어 있다면, 저 샛별같이 초롱거린다면 여기 통찰력이, 직관력이 생기게 된다. 직관력이 모든 걸 꿰뚫을 때 사념,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때 그대의 행동은 직관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이, 사념이 아니라 직관으로부터 나온다. 여기 마음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지금부터 그대는 사물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이 통찰력이 그대로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여기 그 예가 있다. 그대는 지금 방안에 있다. 여기 불이 났다. 그대는 그 불이 난 것을 본다. 이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불이 난 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문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여기 기다릴 겨를이 없다. 따지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책을 뒤져볼 여가는 더욱 없다.
길을 가다가 뱀을 만난다. 그 순간 그대는 그 뱀을 뛰어넘어간다. 사념이 들어오기 전에 그대는 뛰어넘어 버린다. 뱀을 뛰어넘는 이 행동은 사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사념이 아니라 직관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여기 굉장한 위험이 따른다. 이 위험성은 그러나 그대를 살아 굽이치게 한다. 의식을 각성시킨다. 이 자각 상태에서 뛰어넘음, 이것이 no-mind의 행동이다. 붓다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그대 삶 속에서는 이런 순간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대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 의식이 완전히 깨어서 전체적으로 살아갈 그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의 경우 이것은 그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다. 그는 전체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사념이, 따지고 헤아리는 것이 필요치가 않다.
첫째 영역은 no-mind의 영역이다. 여기 self는 없다. 마음이 없으면 self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네 번째 단계에서도 self가 없다. 마음이 없는데 거기 어떻게 self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중심의 기능을 필요로 한다. 중심의 이 기능이 에고를 만들어낸다. self를 만들어 낸다. 마음은 어떤 통제 속에서 그 자체를 지켜야 한다. 어떤 일정한 방식과 명령을 통해서 그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마음은 그 자신을 움켜쥐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을 움켜쥐려는 이것이 중심을 형성한다. 중심을 통해서만이 slef는 통제될 수 있기 때문에. 중심이 없으면 self는 더 이상 통제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들어오게 되면 거기 에고는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에고가 없으면 마음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에고가 없는데, 중심이 없는데 누가 통제할 것인가? 도대체 누가 심사숙고할 것이며 계획을, 꿈을 꿀 것인가?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한 사념 뒤에는 또 다른 사념이 온다. 이런 식으로 사념의 연속은 계속된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사념의 연속 현상,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에고가 없다면 마음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대는 모른다.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대는 전혀 모른다.
광물권에는 다시 마음도 없고 self도 없고 시간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하위권이다. 시간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바위에게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그리고 미래도 없다.
붓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는 시간의 상위권이다. 붓다는 안다.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그는 시간이 아니다. 영원에 살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현재다. 현재는 결코 과거와 미래의사이에 끼어 있는 그 가상 공간이 아니다. 사전에서는 현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그 가상 공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는 아니다. 무슨 현재가 이런가? 그것은 이미 과거이다. 현재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존재의 외곽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므로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 미래는 현재가 되면서 과거 쪽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런 현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가 아니다. 미래와 과거 사이의 현재란 과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진행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란 어떤 것인가? 붓다의 현재, 크리스트의 현재이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저 들판의 백합을 보라. 그들은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다. 솔로몬의 영화조차도 저 백합에 미치지 못한다. 보라. 저 들판의 백합을 보라.” 백합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 모른다. 백합은 모른다. 과거를, 그리고 미래를 모른다. 아아, 백합은 결코 알지 못한다.
붓다는 알고 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마저도 없다는 것을. 거기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원의 차원이다. 이 영원의 차원에서는 지금 여기가 있을 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대신 지금 여기가 있을 뿐. 영원, 그 자체로 불타고 있을 뿐. 바위 역시 이 차원에 있다. 물론 그것은 무의식 상태이다.
두 번째 영역은 생물권이다. 이는 삶을, 전의식(前意識)을 뜻한다. 첫째 영역은 물질이었다. 이 두 번째 영역은 생명이다. 나무, 동물, 새 등…. 바위는 움직일 수 없다. 바위에게는 생명이 없다. 전혀 그 가능성이 없다. 나무는 바위보다 더 살아 있다. 동물들은, 새들은 바위보다 더 살아 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많이 움직일 수 없다. 나무는 그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움직일 수 있을 뿐. 흔들릴 수 있을 뿐. 그러므로 나무에게는 약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동물들에게는 보다 많은 자유가 있다. 그들의 활동 범위는 훨씬 넓고 크다. 이 영역을 생물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생명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는 전의식(前意識)이다. 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 그 기본 단계이다. 바위는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 있다. 그러나 나무를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 나무는 확실히 무의식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의식과 같은 그 어Es 것이 나무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의식의 빛줄기가 들어오고 있다. 여기 비하여 동물들은 보다 의식적이다.
생물권은 요가의 스와바나(swabana), 꿈의 차원에 해당한다. 이 상태에서 의식은 꿈과 같이 오고 있다. 개도 물론 꿈을 꾼다. 잠자는 개를 보라. 그가 지금 무슨 종류의 꿈을 꾸는지 알 수 있다. 꿈속에서 그는 파리를 잡으려 한다. 어느 때는 슬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고양이를 보라. 잠자면서 쥐 잡는 시늉을 한다. 지금 그의 의식계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의식은 표면적이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아직도 절대적이다. 그러나 바위처럼 그런 상태는 아니다. 약간의 자유가 여기 가능하다.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동물들에게는 약간의 자유가 있다. 그들도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자유 의사를 발휘할 수 있다. 선택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들은 감정적이다. 그는 기분이 좋으면 호의적이다. 그러나 기분이 나쁠 때는 전투적이다. 약간의 결정이 여기 가능하다. 그러나 동물들에게 있어서의 이 결정력이란 아직 초보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시작에 불과하다. self는 아직 단단하지 않다. 이 self는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변질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self라는 이 자아의식, 그 구조는 이제 구체화되고 있는 중이다. 형상화되고 있는 중이다.
동물은 과거 지향적이다. 동물은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동물에게는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다. 미래를 계획할 수가 없다. 앞을 생각할 수가 없다. 때로는 앞을 생각하지만 그 역시 부분적이다. 배고프게 되면 동물은 몇 시간 앞을 생각할 수 있다. 음식을 얻을 수 있는 몇 시간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동물은 결코 한 달 이상을, 일 년을 생각할 수 없다. 동물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지향적이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났던 그대로 미래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동물에게 있어서 미래는 과거의 반복일 뿐. 과거가 지배하고 있다. 시간도 과거를 통해 들어오고 self도 과거를 통해 들어온다.
셋째 영역은 정신권이다. 마음, 자의식의 부상이다. 의식은 다음 삼 단계로 진화되고 있다. 무의식, 전의식(前意識), 자의식(自意識). 이 세 번째의 자의식 상태에서 의식은 구체화된다. 그러나 의식이 구체화됨과 동시에 재난이 뒤따른다. self가, 에고가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self는 필요악이다. 의식은 구체적으로 나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 사념의 투사가, 개성의 완고성이 존재를 침입하게 된다. 마음은, 사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인간은 미래에 살고 있다. 그러나 동물은 과거에 살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미래 지향적이다. 미개국일수록 더욱 더 과거 지향적이다. 미개인들은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다. 문명인들만이 미래를 향해 살고 있다. 미래에 사는 사람들은 확실히 과거에 사는 사람들보다 생활 수준이 높다. 젊은 사람들은 미래를 향해 살고 있다. 그러나 노인들은 과거 속에서, 과거의 추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노인들보다 훨씬 더 살아 있다. 활기에 차 있다. 미국은 미래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과거에 살고 있다. 인도는 5천 년 전, 1만 년 전 속에 살고 있다. 인도에 있어서 이 오랜 전통이란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이 짐을 운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짐은 지금 마멸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인도로서는 이 짐을 계속 미래 쪽으로 운반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산이기 때문에,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도는 그토록 콧대가 높다. 과거에 대한, 과거의 전통에 대한 자부가 높은 것이다.
과거에 대한 다부는 비문명적 차원이다. 인간이란, 문명이란 미래를 향해 어떤 비전을 제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해 강력한 발산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여기 문명 속에는 더 이상 과거는 없다. 오직 미래만이, 미래를 향한 비상만이 있을 뿐.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이 눈부신 비전을 향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도는 오직 과거의 사건에만 열광하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아직도 라마의 드라마를 공연하고 있다. 그것도 해마다. 수백만 번도 더 상연된 연극인데도 그들은 연극을 볼 때마다 거의 전율을 느끼고 있다. 똑같은 연극을 그들은 이런 식으로 수천 년 동안 상연하고 있다. 인간이 우주선을 타고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을 때 인도인들은 전혀 무관심했다. 라마의 연극을 상연할 때만 그들은 호기심을 갖는다. 그들은 이 연극의 스토리를 이미 다 알고 있다. 이 연극을 적어도 열 번 이상 관람했다. 그러나 이 라마야나는 그들의 유산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들은 이 연극을 통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보라. 힌두 승려들을, 자이나교 승려들을. 아폴로호가 처음 달에 착륙하자 그들은 야단이 났던 것이다. “인간이 달에 착륙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미국인들의 사기극에 불과하다. 이것이 사기극이라는 것을 우리는 증명하고야 말겠다.” 왜 그들은 그렇게 격분해 하고 있는가? 달은 곧 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달은 곧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한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 어떻게 신을 정복한단 말인가? 달은 곧 신이 아닌가?”
구쟈라트에 사는 자이나교 승려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말했다. “선생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나는 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의 삶 전체가 달 착륙 사지에 의해서 기만당했던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인간이 달에 착륙하는 이 사진은 사진사가 조작해 낸 것이다. 그리고 달에서 가져왔다는 그 돌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마 시베리아나 어디 그쯤에서 주어온 것이 분명하다.” 자이나 교리에 의하면 누구도 달에 갈 수 없다. 달은 곧 신이기 때문이다. 신을 밟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과거 지향적인가? 이 얼마나 퇴보적인가? 인도가 성장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도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너무 과거에만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권에서는 마음, 자의식, 사념의 투사, 개성, 미래 지향… 등등이 발생한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불안에 떨게 된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가장 긴장된 사람들이다. 휴식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대신 인도인들은 아주 여유 있다. 너무나 여유가 있는 나머지 이제는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인도의 경우 전구 하나를 갈아 끼우는데 적어도 세 사람이 필요하다. 한 사람은 전구 윗부분을 잡는다. 한 사람은 전구를 돌려 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은 의자를 잡는다. 이 얼마나 느린 사람들인가? 그들은 불안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불안이 무엇인지, 그리고 불안이 실재하는지 어떤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불안은 미래로부터 비롯된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짜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여, 또다시 낡은 삶의 방식을 반복하려는가? 어떤 새로운 일을 하려 할 때 거기 실수의 가능성이 있다. 성공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하는 만큼 불안도 거기 정비례한다. 이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미국이 가장 혼란한 나라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인도는 이 점에서만은 가장 안정된 나라이다.
짐승들에게는 불안이 없다. 과거에 살기 때문에, 낮은 차원에 살기 때문에. 동물들은 인간보다 훨씬 안정되고 편안하다. 여기 힌두 성자의 말이 있다. “보라. 우리 힌두들을 보라. 얼마나 평화로운가. 우린 노이로제라는 이름을 모른다. 배고플 때조차 우리는 아주 조용히 배고파한다. 죽을 때조차 우리는 아주 수동적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미쳐 날뛰지 않는가? 들떠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않는가?”
그대여, 기억하라. 하나의 진행 과정 속에는 불안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된다. 행여 실수나 하지 않을까,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게 된다. 그러나 과거 속에는 아무 두려움이 없다. 이미 경험한 사실들의 반복이기 때문에. 과거란 너무나 잘 아는 사실들이기 때문에. 그대는 이미 여행했다. 그대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는 아담과 이브로까지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는 두려움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따르게 된다.
세 번째의 이 영역, 정신권의 영역은 불안의 영역, 긴장의 영역이다. 두 번째 생물권과 세 번째 정신권 가운데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세 번째를 선택하라. 정신권을 선택하라. 그러나 이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대신 세 번째와 네 번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때 네 번째 영역을 선택하라. 언제나 보다 높은 차원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하라, 그대여. 나는 인도를, 인도인들의 그 마음가짐을 비난했다. 네 번째 영역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휴식의 차원에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 휴식은 차원이 다르다. 과거 지향적인 곳으로부터 비롯되는 그런 휴식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를 버린 곳으로부터 오는 그런 휴식이다. 그들은 완전하게 휴식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불안이, 노이로제적 증상이 없다. 그들의 마음은 평화롭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호수다. 그러나 이는 첫째 영역이 아니라 넷째 영역을 택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하위권에 머물렀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상위권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붓다의 이러한 삶의 태도를 보았다. 붓다의 침묵을, 그 축복을 보았다. 저초록 넉넉한 휴식의 상태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붓다처럼 살 수 없겠는가? 우리라고 붓다보다 못하리란 법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노력도 없이 네 번째의 경지에 가려 하고 있다. 대신 그들은 세 번째 단계로부터 두 번째 단계로 되돌아가고 있다. 붓다의 침묵과 같은 그런 분위기가 두 번째 단계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 같은>이지 붓다의 침묵, 바로 그 자체는 아니다. 과거로 되돌아가기는 쉽다. 그리고 과거로 되돌아감으로써 보다 평화롭고 안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붓다는 결코 과거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에조차 안주하지 않는다. 그는 시간, 그 자체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을 버렸다. 시간의 생성 원인인 마음, 그 자체까지를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에고까지를 버렸다. 불안을 만들어 내는 제일 원인인 에고, 그 자체까지를 버렸다.
인도 사람들은 미래를 버렸다. 미래는 불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글ㄴ 다음 과거 쪽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 세 번째 단계 정신권은 요가에서의 각성의 단계와 같다. 첫 번째는 잠의 단계, 두 번째는 꿈의 단계, 그리고 세 번째는 각성의 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각성은 붓다의 각성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대는 이를 각성이라 부른다. 그대의 두 눈은 떠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꿈이, 몽환이 먹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두 눈만은 초롱하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잠이, 의식의 잠이 가득하다. 깨어 있을 때조차 그대는 잠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세 번째 경지이다. 이는 도움이 된다. 낮 동안 일에 지치다 밤이면 잠에 빠진다. 잠은 깊은 휴식을 준다. 잠이 깊으면 그럴수록 휴식도 이에 정비례한다. 아침이 되면 그대는 또다시 싱싱하게 된다. 잠 속에서 깊은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피곤하면 푹 자라. 그러면 다시 싱싱해진다.” 그대는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피로, 잠, 회복… 이것이 육체라는 이 기계장치의 성능이다.
다음 마지막 경지 네 번째 단계이다. 이 네 번째 단계는 육체의 기계장치 능력 너머이다. 이 네 번째 단계는 그대의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대는 한 번도 이곳에 도달해 본 일이 업다. 그곳에의 도달이란 어렵다. 그것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이다.
네 번째 영역은 크리스트 권이다. 그러나 이 영역을 붓다 권이라 말할 수도 있다. 크리스트 권이나 붓다 권이라 의미는 매한가지다. 또한 크리쉬나 권이라 불러도 매한가지다. 의미는 같다. 세 번째 단계에는 일종의 자유가 있다. 가짜 자유, 선택의 자유가 있다. 이 세 번째 단계의 자유를 왜 가짜 자유라고 하는지 그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대는 말한다. “우리 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이 말은 무슨 종교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대는 사원에 갈 수 있다. 교회에 갈 수 있다. 가고 싶은 어떤 종교 집회에도 다 갈 수 있다. 여기 종교에 관한 한 전혀 법의 제재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슬람교도가 될 수도 있다. 힌두교도가, 크리스찬이 될 수도 있다. 자유국가란 각자가 자유의사에 따라 그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디서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또 무슨 말을 하든지 관계없다는 뜻이다. 그대는 파시스트가 될 수도 있다. 국수주의자가, 민주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대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이 모든 넌센스들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대여, 선택하라. 무엇이든지 선택하라. 그러나 이것은 가짜 자유다. 왜 이를 가짜 자유라 하는가? 마음이 사념으로 가득 차 있는 한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이미 제약되었다. 부모들, 선생들, 그리고 이 사회에 의해서 규제되었다. 이래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최면술에 걸리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을 데리고 최면술사에게 가면 최면술사는 그에게 최면에 걸 것이다. “내일 아침 당신은 상점에 갈 것이다. 상점에 가서 담배 한 갑을 살 것이다.” 최면술사는 그의 무의식 깊이 이렇게 암시를 건다. 내일 아침이 되면 그는 틀림없이 상점에 갈 것이다. 최면술사의 암시가 그의 무의식 깊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식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를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왜 상점에 가는지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오늘은 참 상쾌하군. 아침 일찍 상점에 가보자.” 왜 하필이면 오늘인가? 그것도 아침인가? 그는 말할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자유다. 가고 싶으면 언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도대체 누가 내 자유의사를 막는단 말인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자유이다.” 그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최면의 암시이지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면서 상점에 가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자유의사이다.” 그는 상점에 가서 담배 한 갑을 산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상점 앞에 이르게 되면 그는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담배를 끊은 지도 몇 개월이 되는군. 자, 오늘은 모처럼 담배 한 갑을 사볼까? 나라고 담배를 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이것도 어디까지나 내 자유의사니까….”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상점 문을 연다. “담배 한 갑만 주십시오.” 왜 하필이면 담배인가? 그는 말할 것이다. “담배를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자유의사에 의해서이다. 나에게는 적어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는 담배를 사 가지고 돌아오면서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는 이미 최면술사의 그 암시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 암시대로 그는 지금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조건지워졌다. 힌두교도로서, 크리스찬으로서, 그리고 회교도로서, 그대는 조건지어졌다. 인도인으로서, 중국인으로서, 독일인, 한국인으로서. 자, 이런데도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미 조건지어져 있다. 부모들에 의해서, 그대가 속한 사회, 이웃, 그리고 학교 등에 의해서 조건지어졌다. 자, 이런데도 자유, 자유라고 외칠 수 있단 말인가? 그대의 자유는 가짜이다. 위조지폐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자유의 느낌을 부여할 뿐. 그리하여 잠시동안 그대를 행복감에 젖게 할 뿐. 교회에 갈 때 그대 자유의사에 의해서 간다고 생각하는가? 깊이 투시해 보라. 그것은 더 이상 자유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힌두교도의 가정에서, 회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대는 크리스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힌두 사원에 가고자 한다. 이 역시 일종의 조건반사이다. 또 다른 형태의 조건반사 현상이다. 그대의 부모들은 아마도 너무 광신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들의 그 행위를 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한계이다. 그래서 그대는 반대자가 된다. 강력한 거부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부모들은 막강했다. 그대는 너무 어리다. 그대는 도저히 부모들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대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언젠가는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겠다.” 어른이 되고 자립할 수 있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는다.
“언젠가는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겠다.”는 이 생각이 교회에 대한 그들의 강박관념에 의해서 뿌리박혀 왔기 때문이다. 이 역시 최면의 일종이다. 그것은 분명히 명령의 거역 현상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최면의 단계이다. 그대는 반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자유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는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를 대서라도 그대는 교회에 갈 수 없는 구실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들이 그대를 너무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 강박관념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마침내 힌두교인이 될 것이다. 부모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 쪽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반사 현상이다. 반응이다. 첫째는 복종, 그 다음은 불복종, 그러나 이 양자 속에는 전혀 자유가 없다.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비단 조건반사의 문제만은 아니다. 양자택일을 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혼란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대는 지금 A라는 여자와 B라는 여자, 둘 중의 한 여자와 결혼하고자 한다. 자, 어떻게 선택하겠는가? 그대는, 그대의 마음은 혼란의 와중에 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 나는 지금 두 여자를 놓고 번민하고 있습니다. 한 여자는 그 용모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마음씨는 아주 고약합니다. 또 한 여자의 경우 용모는 못생겼지만 마음씨가 참 착합니다. 자,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여기 또 한 사람의 경우가 있다. 그는 지금 두 여자와 결혼하려 하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아주 예쁘다. 그러나 그 미모에 반비례하게 가난하다. 그에게는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못생기긴 했지만 아주 부자였다. 거기에다 아주 아름다운 음성을 가졌다. 그녀는 훌륭한 가수였다.
이 두 여자를 놓고 그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여자의 경우 그 음성이 그 용모만큼 아름답지 못하다. 그는 음악가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용모 못지않게 음성도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가수인 여자를 택하기로 했다. 비록 얼굴을 못생겼지만 그녀에게는 돈이 있고, 고운 음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생활에 대한 불안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오직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일생 동안 음악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여기 두 가지가 성취되었다. 돈과 음성, 그러나 이 가수인 여자는 너무 못생겼다. 못생기다 못하여 그 얼굴이 불쾌감을 줄 정도였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아주 예쁘다. 그러나 돈이 없다. 돈이 없고 음성이 아름답지 못하다.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음악에 열중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가기 위하여 구멍가게를 하든지 아니면 시골 면서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시골 음악 교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그의 전 생명이었다. 그의 삶은 음악을 통해서만 그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었다. 음악을 하지 못할 경우 그의 삶은 더 이상 아무 가치가 없었다.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민하다가 마침내 못생긴 여자와 결혼하기로 했다. 못생겼지만 돈이 많은 여자, 음악을 깊이 이해하는 여자와 결혼하기로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들은 집에 왔다. 밤에는 별일이 없었다. 불을 끄게 되면 그녀의 그 추악한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 옆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 추악한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노래를, 빨리 노래를 불러라.” 그는 그녀의 그 추악한 얼굴을 잊어버리기 위해 노래를 부르라고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식이다. 두 남자를 놓고, 또는 두 여자를 놓고 우리는 번민하고 있다. 둘을 다 소유하자니 불가능한 일이요, 그중에 하나를 택하자니 또 다른 하나를 놓치기 싫고…. “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러면 이 혼란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목적의식 때문이다. 동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음악이, 생활의 안전이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양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랑이, 참다운 사랑이 거기 없기 때문이다. 거기 사랑이 있다면, 정령적인 사랑이, 헌신적인 사랑이, 생명까지라도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거기 있다면 여기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양자택일의 번민 따위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헌신적이지도, 정열적이지도 못하다. 그들은 그저 미적지근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목숨을 바쳐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는 불이, 새파랗게 타오르는 생명의 불이 없다.
그대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전체가 될 때, 전체적으로 살 때, 그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가능하다. 전체가 될 때, 삶의 이 에너지와 전체가 될 때 그 전체가 바로 결정이다. 따르라. 오직 전체만을 따르라. 삶의 이 완전연소를 따르라. 전체, 그 자체로서의 결정만을 따르라. 그러면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양자택일의 번민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다. 미숙이를 택할까, 혜영이를 택할까를 놓고 번민하지 않는다. 그대의 가슴은 오직 하나, 오직 미숙이에게로만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양자택일이란 있을 수 없다. 혼란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이 혼란을 통하여 어느 한쪽을 택하게 되면 거기 갈등이 시작된다. 이런식으로 혼란은 더욱 혼란만을 부를 것이다. 결정하지 말라. 혼란을 통해서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말라.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크리슈나무르티는 <선택이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선택이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다. 선택하지 말라. 선택하는 대신 그것 자체와 하나가 되라. 전체가 되라. 새벽처럼 잠깨어라. 서릿발같이 잠깨어라.
그대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다. 여기 내 말을 듣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그저 미적지근하게 들을 수 있다. 졸면서 하품이나 하면서 들을 수 있다. 오만 가지 생각을 다하면서 들을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내가 진실을 이야기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이다. 그러나 둘째로, 전체적으로 듣는다면, <지금 여기>가 되어 듣는다면 전체적인 열렬함, 그 자체가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이 열렬한 속에서, 전체적인 이 집중 속에서 그대는 알 것이다. 진실이, 진리가 무엇인가를. 내가 진실을, 진리를 이야기할 때 바로 그 순간, 그대 가슴은 부르르 떨 것이다. 그대 전체가 지금 듣는 그것인데 여기 단 한 개의 언어인들 놓치겠는가? 그대의 지성은 지금 새벽같이 깨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 단 한 개의 언어조차 놓치지 않는다. 또한 거기 진실이 아닌 것을, 진리 아닌 것을 말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대는 그것을 포착한다. 그러므로 그대 쪽에서는 아무 결단도 내릴 필요가 없다. “이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야 옳은가? 그렇게 하지 않아야 옳은가?”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혼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대는 나를 본 일도 없고 또 내 말을 들은 일도 없다. 이를, 이 포인트를 포착하라. 진리 속에서는 찬성도 반대로 필요치 않다. 진리는 찬성과 반대의 차원이 아니다. 찬성과 반대의 이 차원을 넘어서서 그저 전체적으로 들어야 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 순간 그대는 진리를 느낄 것이다. 이 느낌이 그대로 하여금 보다 깊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찬성과 반대의 차원은 아니다. 나에게 설득당한다든가 내 주장에 복종한다든가 그런 차원은 아니다. 나는 결코 그 누구도 설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변형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변형은 진리, 그 자체로부터 시작된다. 진리란 믿음이 아니다. 진리란 논쟁이나 비판이 아니다. 대신 진리란 현재다. 영원한 현재이다. 지금 여기 이 영원한 현재에 있다면 그대는 진리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현존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결코 진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단계 <정신권>은 가짜 자유의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대의 결정도 역시 혼란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이 영역에서는 혼란에서 혼란으로, 혼란만이 증가할 것이다. 혼란은 투쟁을 낳는다. 혼란 속에서는 언제나 양자택일이다.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 To be or not to be? 이런 식으로 양자택일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을 결정하게 되면 또 다른 한쪽은 뒤로 물러나서 보복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란 오직 네 번째의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이 네 번째 영역에서 no-mind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no-mind의 현상은 첫 번째 바위의 그것이 아니다. 바위의 그것이 아니라 붓다의, 크리스트의 no-mind이다. 이 네 번째 영역에서는 의식이, 완전한 의식이 현현한다. 이때는 이렇게 조차도 말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순수의식 상태에 있다.” 여기 “나는…”이라는 그 <나>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순수한 의식 상태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 어떠한 이름도 없고 명상도 없다. 이것은 nothingness이다. 공(空)이다. 이 의식 상태에서는 사념이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사념 대신 통찰이, 직관이 작용하고 있다.
지능은 가르치고 배움에 의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직관은 배울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다. 그것은 그대 내면으로부터 온다. 그대 존재의 한가운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순수한 의식 상태, 명상이다. 이것을 또한 여기, 현재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현재는 결코 과거와 미래의 그 중간에 있는 현재가 아니다. 이 현재는 차라리 과거와 미래가 다 소멸되어 버린 그런 차원의 현재이다.
샤르댕은 이를 오메가 포인트라고 한다. 붓다는 이를 열반(涅槃, nirvana)라 했다. 자이나 성자들은 이를 moksha(解脫)라 했다. 그리고 예수는 이를 God the father라 했다.
이와 같이 이름은 다르다. 그러나 그 언어 속에 담겨진 의미는 마찬가지다. 마찬가지의 목적이 각기 다른 그릇에 담겨 있을 뿐. 여기 이 반야심경 전체가 세 번째 영역으로부터 네 번째 영력으로 옮겨가는 그 과정이다. 정신권으로부터 크리스트권으로, 지능으로부터 지성으로, self-consciousness로부터 no self-consciousness로 옮겨가는 그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세 번째 영역은 각성이다. 일반적인 각성의 상태이다. 그러나 네 번째 영력은 투리야(turiya)다. 요가에서는 이렇게 부르고 있다. 투리야란 무엇인가? 네 번째라는 뜻이다. 파탄잘리는 이 네 번째 영역에 아무런 이름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투리야(네 번째)라고만 했다. 투리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이 투리야를 크리스트권이라 부르면 크리스찬의 전용물처럼 보인다. 크리쉬나권이라 부르면 힌두의 전용물처럼 보인다. 붓다권이라 부르면 불교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파탄잘리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투리야(네 번째)라 불렀던 것이다. 투리야는 따라서 모든 것을 포함한다. 네 번째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파탄잘리는 그래서 이 네 번째 영역에는 아무 이름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영역에는 거기 적당한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세 개의 영역은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형태가 있는 것은 모두 거기 적당한 이름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태가 없는 것은 어떠한 이름도 적합하지 않다. 때문에 투리야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저 <네 번째>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반야심경 전체가 세 번째 영역으로부터 네 번째 영역으로의 이동이다. 사리자는 지금 세 번째 영역의 극점에 와 있다. 정신권의 맨 끝에 와 있다. 사념의, 자의식의 끝에 와 있다. 사리자, 그는 세 번째 영역을 샅샅이 여행했다. 그런 다음 그 세 번째 영역의 맨 끝에 와 있다. 세 번째 영역과 네 번째 영역의 경계선에 와 있다.
……그러므로 (오, 사리자여) 그대는……
붓다는 지금 이 세 번째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 있다. 그곳에서 사리자를 부르고 있다. 네 번째 영역으로 부르고 있다. “오너라, 사리자여, 어서 오너라.” 부르고 있다. 반야심경 전체가 지금 이 마지막 장(만트라의 절정)으로 압축되고 있다. 지금까지 앞의 모든 구절은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지막 절정에 대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리자여, 오직 이 한 가지 사실만은 알아야 한다. 이는 반야심경 전체에 대한 결론이다. 두 에너지 사이에, 붓다와 사리자라는 두 에너지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결론이다. 그러나 사리자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알지어다. 사리자와 붓다의 대화는 아르쥬나와 크리쉬나 사이에 오고간 대화보다 훨씬 차원 높은 대화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브하가바드기따에서 아르쥬나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물음이 언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아르쥬나는 제자보다는 학생에 가깝다. 아르쥬나는 브하가바드기따의 최후에 가서야 제자가 된다. 아르쥬나가 제자가 될 때 크리쉬나도 비로소 스승이 될 수 있었다. 제자가 만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자가 되지 않는다면 스승인들 어떻게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제자가 학생의 상태에 있을 때 스승은 선생에 지나지 않는다.
브하가바드기따의 끝은 반야심경의 시작이다. 사리자는 처음부터 제자였다. 학생이 아니라 제자였다. 사리자는 침묵 속에서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질문조차도 없었다. 언어의 흔적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추구하는 자였지 질문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전체가 묻고 있었다. 그는 말로 묻지 않았다. 그의 존재 전체가 그대로 의문부호였다. 그는 붓다 앞에 섰다. 그의 존재 전체가 지금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다. 추구자의 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사리자의 이 상태를 꿰뚫어본 붓다는 사리자 그 자신에게 적중한 말을 하고 있다. 제자가 필요함을 느낄 때 말하기 전에 스승은 이를 알고 있다. 스승은 제자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지금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제자는 기다려야 한다. 사리자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을 20년 동안이나 기다렸다. 스승이 그의 갈구하는 바를 꿰뚫을 때까지 사리자는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승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그러므로 오, 사리자여, 여기 이 한 가지 사실만은 꼭 알아야 한다.” 붓다는 지금 그의 전 메시지를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하고 있다. 몇 개의 만트라로 압축하고 있다. 구도의 긴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모든 것을 마음의 구절에 집어넣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위대한 만트라, 심원한 지혜의 만트라, 가장 높은 만트라라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붓다는 지금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반야바라밀다, 이는 위대한 만트라다.” 만트라란 무엇인가? 만트라는 불가사의한 언어를 뜻한다. 지식의 한계를 넘어가 버린 그런 언어를 뜻한다.
만트라를 정확히 이해하기 바란다. 만트라는 글귀다. 마법적인 글귀다. 만트라는 그러므로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트라는 그대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기 실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확실히 마법의 글귀는 필요하다. 그대의 문제점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 한 예가 있다.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매일 공동묘지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로는 밤늦게 묘지를 지나가는 때도 있었다. 그의 집은 바로 공동묘지 옆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귀신에 대한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꿈속에서도 귀신들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때로는 방에서도 귀신의 모습이 보였다. 밤은 그에게 있어서 지옥이었다.
그는 스승에게 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스승은 말했다. “젊은이, 염려하지 말게. 내 간단히 귀신들을 물리쳐 주겠네. 자, 기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게. 이 주문(만트라)을 가지고 가게. 이 주문 봉지만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네. 귀신들은 얼씬도 못할 것이네.”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그날도 밤늦게 공동묘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그렇게 태연할 수가 없었다. 귀신들은 그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보통때 같으면 너무 겁에 질려서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의 손에는 그 주문 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공동묘지 한가운데에 섰다. 그러나 귀신은커녕 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침묵, 달빛에 젖으며 침묵만이 쌓이고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주문 봉지를 가슴에 품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모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주문 봉지 때문이었다. 자, 이번에는 주문 봉지에 너무 집착이 갔다. 만일 이 주문 봉지를 잃어버리게 되면 어찌 될까…. 그 순간부터 또다시 귀신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어디를 가나 이 주문 봉지를 가지고 가야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다. “자네 왜 그 봉지를 그렇게 신주 모시듯 하는가?” 그는 말했다. “이 주문 봉지가 없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또 귀신에게 쫓기게 된다네. 이 주문 봉지는 내 생명의 은인이네.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막아 준다네.”
그는 또다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누가 이 주문 봉지를 훔쳐 가면 어떡하나. 귀신들은 나에게 보복을 하러 올 것이다.” 밥 먹을 때도 이 주문 봉지를 손에 쥐고 밥을 먹어야 했다. 화장실 갈 때에도, 심지어는 사랑의 그 순간에도 이 주문 봉지를 놓을 수 없었다.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또 다른 두려움이 그를 휩쓸었다. “이 주문 봉지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땐 나는 디 이상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귀신들이 나를 죽여 버릴 것이다.”
어느 날 스승은 물었다. “자네 요즘은 어떤가?”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은 다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또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자다가 자꾸자꾸 깹니다. 주문 봉지가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때는 주분 봉지가 이불 밖으로 흘러나가는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은 철렁합니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다시 귀신들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말했다. “자, 이제 새로운 만트라를 주겠네. 그 주문 봉지를 버리게.”
그는 말했다. “스승님,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스승은 말했다. “젊은이여, 내말을 잘 듣게나. 귀신들은 실재하지 않네. 그리고 이 주문 봉지는 눈속임에 불과하네. 귀신들은 바로 그대 자신의 환각 현상이라네. 정말로 귀신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까짓 주문 봉지를 두려워하겠는가? 이는 그대 자신의 환각에 불과하네. 생각다 못하여 그대는 스승을 찾아왔네. 스승인 나를 찾아왔네. 스승은 모든 걸 해결해 주리라 믿고 나를 찾아왔네그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주문 봉지를 준 걸세. 젊은이며, 분명히 알게나. 귀신들은 실재하지 않네. 주문 봉지의 효과는 이 때문이라네. 자, 그러니 이제 그 주문 봉지에 너무 신경쓰지 말게. 그것을 버리게.”
만트라는 확실히 실재하지 않는 것을 제거해 준다. 예를 들면 만트라는 에고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에고란 무엇인가? 에고야말로 귀신이다. 유령이요, 관념이다. 나는 그대의 실재하지 않는 것을 제거할 것이다. 나는 실재하는 것만을 줄 것이다. 나는 그대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로 그것을 제거해버릴 것이다.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의 불행, 야망, 공포, 시기, 질투, 미움, 집착 등등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귀신에 불과하다. 만트라는 하나의 멋진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대의 에고를 제거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일단 이 유령들이 제거되면 그때 만트라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유령들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그 순간부터 주문봉지는 필요치 않게 된다. 그리고 그대는 배꼽을 쥐고 웃을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속임수에 넘어간 것을 알고는. …그렇다. 귀신은, 유령은 가짜였다. 그러나 이 속임수가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실지로 이런 예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잠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의 입으로 뱀 한 마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위 속에서 뱀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당황했다. 그는 의사를 찾아가서 X-ray를 찍었다. 그러나 X-ray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분명히 뱃속에 뱀이 들어갔습니다. X-ray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분명히 뱀이 들어갔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뱀이 꿈틀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 정말 미칠 지경입니다.”
그는 수피 스승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수피 스승은 말했다. “젊은이, 과히 걱정 말게. 내일 아침이면 그 뱀은 도로 나올 것이네.” 내일 아침을 약속하고 나서 수피 스승은 한 마리의 뱀을 구했다. 그의 아내에게 주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 남편이 잠을 깨기 직전에 이 뱀을 이불 밑에 넣어라.”
아침이 되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보았다. 한 마리의 뱀이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그는 질겁을 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여기! 여기다! 뱀이 나왔다. 입으로 들어간 뱀이 도로 나왔다. 그래도 뱀이 없다고 말하는가? 의사들은 모두 얼간이들이다. 보라. 여기 이 뱀을 보라.” 그 순간부터 그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
이것이 바로 만트라의 위력이다. 병은, 문제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점은, 그대 자신의 모든 문제점은 바로 그대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만트라는 일종의 전략이다. 그대의 환영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이다. 환영이 제거되면 그 뒤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진실이, 진리가 남아 있다. 만트라는 거짓을 제거한다. 만트라를 통해서는 결코 실재를, 진실을 획득할 수 없다. 만트라는 오직 거짓을 제거해 줄 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만트라의 기능은 충분하다. 일단 거짓이 거짓으로서 취급되면 거기 진실이, 진리가 나타난다. 진리란 무엇인가? 자유이다. 생명의 무한한 비상력이다.
그리고 반야바라밀다는 이 모든 고통을 없애 주나니
붓다는 말한다. 그대의 고통을 없애는 데는 이 짧은 만트라로써 족하다. 이 만트라를 받아 지녀라. 이 만트라는 그대를 저 언덕으로 안내할 것이다.
여기 진실만이 충만한데 거짓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붓다는 말한다. 만트라는 그대에게 거짓을 거짓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진리를, 진실을 알았을 때 여기 어떻게 잘못이 있을 수 있겠는가? 거짓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satyam amithyatvat)
amithya란 말은 mithya에서 왔다. mithya란 ‘거짓, 잘못’을 뜻한다. 여기에 ‘a’가 붙으면 amithya, ‘거짓이 없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mithya는 영어의 myth(신화) 속에 존재한다. myth는 거짓을 뜻한다. 이 myth는 mithya와 같은 어원이다. 다시 myth란 무엇인가? 실재하는 것 같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 영어의 miss(놓치다)라는 말도 mithya와 그 어원이 같다. misunderstanding의 mis도 역시 mithya에서 왔다. “그는 미스를 범했다(missed).”고 우리는 말한다. 이 경우 ‘to miss’ 역시 mithya에서 왔다.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가 놓쳐 버린 r서이다. 우리는 진실(진리)을 놓쳤다. 거짓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 거짓을 버린다면 더 이상 미스는 없을 것이다. sin(죄)이란 무엇인가? <to miss>를 뜻한다. 과녁을 빗가나 버렸다(to miss)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짓에 집착할 때마다 그대는 죄를 범한다. 거짓에 집착할 때는 진실이라는 그 과녁을 빗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대는 신이라는 이 관념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신이라는 이 관념은 거짓이다. 사실 모든 관념은 거짓이다. 관념은 하나의 장벽이다. 여기 붓다는 말한다. 반야바라밀다, 이 만트라는 그대의 모든 장벽을 제거해 준다. 그대에게 오직 nothingness만을 줄 뿐이다. nothingness 속에서 진실은 잠깬다. 여기 방해물은 아무것도 없다. nothingness란 방해ㅇ물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모든 거짓이, 그 관념이 제거되었다는 뜻이다. 그대는 텅 비어 있다. 활짝 열려 있고 발가벗은 채로이다. 진리는이런 상태를 통해서만 들어온다. 여기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 이 만트라는 ……설해졌다.
붓다는 말한다. “나는 그대에게 최후의 진리를 일러주었다. 진리의 무한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반야바라밀다, 이보다 더 높고 깊은 진리는 없다.” 그렇다. 이보다 더 향상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은 향상의 극치다. nothingness는 만트라다. 만트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만트라다. 이 nothingness의 차원으로 들어오게 되면 여기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전 메시지이다.
…tadyatha, 다음과 같이 설해졌다.
붓다는 이제 단 몇 줄의 문장에 그의 말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 반야심경의 전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다.
가떼 가떼 파라가떼 파라삼가떼 보디 스와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더 높이 가자 우리 다 같이 가자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
붓다는 <가자(gate)>라는 말을 네 번이나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광물권, 생물권, 정신권, 크리스트권을 넘어가자는 뜻이다. 첫 번째로 가자. 이 물질로부터, 육체로부터, 가시적인 이 유형의 세계로부터 떠나가자.
두 번째로 가자. 이 삶으로부터, 삶과 죽음의 이 무한 연속으로부터 떠나가자.
세 번째로 더 높이 가자. 마음으로부터, 사념으로부터, 에고로부터 더 높이 떠나가자.
넷째로 우리 다 같이 가자. 더 높이 가자는 그것마저 떠나가자. 크리스트권으로, 붓다권으로 떠나가자. 붓다는 지금 창조, 그 이전의 상태로 들어가고 있다.
삶의 궤도는 원형이다. 이는 오메가 포인트이며 동시에 알파 포인트이다. 그대는 보았을 것이다. 옛 사원이나 책에서 오메가 포인트가 곧 알파 포인트라는 상징화를 보았을 것이다. 뱀이 그의 입으로 그의 꼬리를 물면서 원형을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Bodhi …… 깨달음이여,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삼마디히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각이다. 불성에의 자각이다. ……사바하(svaha), 할렐루야의 상태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왔을 때,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을 때 여기 무엇이 남아 있는가?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nothingness만 남는다. 이것이 축복이다. 사바하, 할렐루야의 경지이다. 이것이 바로 절정, 엑스타시이다. 모든 사람들이 찾고 있는 그 절정의 순간이다. 좋은 방향에서건 나쁜 방향에서건 사람들은 모두 이를 찾고 있다. 이를 찾기 위해서 생의 긴 순례자가 되고 있다.
그대는 붓다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대는 아직 붓다가 아니다. 이것이 딜레마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만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여기 이 반야심경은 그대를 다시 본궤도로 옮겨 놓을 것이다. 붓다가 되도록 운명 지워진 그대에게 이 반야심경은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반야심경은 그대 존재를 충만하게 할 것이다. 기억하라. 그대여 이 반야심경은 그저 독송만 되풀이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이것을 기억하라. 보라. 중국, 한국, 일본, 스리랑카, 태국 등지에서는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이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독송에만 그치고 있다. 오늘도 그들은 역시 이렇게 독송할 것이다.
가떼 가떼 파라가떼 파라삼가떼 보디 스와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그러나 이 독송은 어디까지나 독송으로 끝난다. 이 독송의 반복이 실지로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 이 반야바라밀다주는 다른 만트라같이 그저 독송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독송과 더불어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것이 그대 자신이 되어야 한다. …가자. 이 모든 동일성의 차원으로부터 떠나가자.
…가자. 이 모든 제약의 차원으로부터 떠나가자.
…가자. 보다 크고 넓은 곳으로 가자. 저 하늘, 저 무하공간조차도 그대를 제한하지 못할 것이다.
Svaha… 영원하여라.
사바하(Svaha)란 무엇인가? 무한한 엑스타시의 표현이다. 사바하는 할렐루야와 같다. 감탄사의 절정이다. 축복의, 더할 수 없는 충만과 축복의 상태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여기 이 반야심경은 그저 사바하라는 이 감탄사만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지금 붓다는 이 반야심경의 끝에서 몇 개의 단어로 그의 메시지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대는 붓다이다. 붓다는 바로 그대 자신이다. 이를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괴로움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여기 이 반야심경은 말한다. “그대는 이미 붓다였다. 그대는 지금 붓다이다. 그대는 틀림없이 붓다가 될 것이다.” 때문에 이 반야심경 강의의 첫 대목에서 나는 말했다. “그대에게 절한다. 그대 속에 있는 그 붓다에게 절한다. 그대는 붓다이다. 분명히 붓다가 될 것이다.” 이를 명심하도록….
recognition(認識)이란 말은 참 멋지다. <되돌아본다>는 의미이다. 그대 자신을 존경하라. respect(존경)란 말도 역시 멋진 말이다. 즉 <다시 한 번 또 본다>는 뜻이다. repent(회개)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repent란 아람어로서 return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repent란 말은 기독교의 repentance(회개)와는 사실상 아무 관계도 없다. repent는 그저 단순히 return을 뜻한다. 180˚의 회전을 뜻하는 것이다. 파탄잘리는 이를 pratiyahar라 불렀다. 따라서 pratiyahar는 <내면으로의 이행>, <자기 자신으로 돌아감>을 뜻하다. 또 마하비라는 이를 pratikrama라 불렀다. pratikrama란 무슨 뜻인가?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내면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실재적인 그대>와 <비실재적인 그대> 사이의 갭은 원래부터 없는 것이었다. 그대는 원래부터 실재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대 자신이 <비실재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대 자신 때문이다. “나는 누구누구다.”라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누구>라는 이 생각을 버려라. 그런 다음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보라. 그대여, 부디 속지 말라. 소위 믿음이라는 것에게, 관념에, 성전 따위에 그리고 지식에 그대여 결코 속아서는 안 된다. …버려라. 무조건 버려라. 그대 존재 속에 들여 놓은 그 관념의 가구들을 모두 집어내라. …텅 비게 하라. 그대 존재의 반을 텅 비게 하라. 텅 비어 있다는 이 인식이 바로 사바하이다. 할렐루야다. 여기 절정의 음악이 들린다. 춤이, 침묵이, 무한한 창조의 에너지가 파도쳐 온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대에게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 사바하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자신의 방식대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오직 그 자신의 방식으로밖에. 붓다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밖에 이를 표현할 수 없었다. 미라(Meera) 역시 그녀의 방식으로밖에 이를 표현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방식으로밖에 이를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침묵을, 침묵의 노래만을 부를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미라처럼 찬양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크리쉬나를 부르며 이 마을 저 마를 떠돌다 죽을 것이다. 아니면 챠이타냐(Chaitanya: 신 크리쉬나의 신봉자. 크리쉬나와 그의 연인 라다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순례를 시작한 사람)처럼 노래 부르는 순례자가 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미친 듯이 춤을 출 것이다. 춤으로밖에 이를 전달할 수 없기에. 또 어떤 이는 그림을, 음악을, 조각을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이를 표현할 것이다. 그대여, 결코 모방하지 말라. 붓다를, 미라를, 또 예수를 모방하지 말라. 그저 그대 자신의 방법대로 분출하는 그 에너지만을 주시하라. 그대 자신의 사바하로 하여금, 할렐루야로 하여금 넘쳐흐르도록 하라. 그대 자신의 것이 되도록 하라. 그러나 이는 그대 자신이 nothingness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nothingness(空), 이는 반야심경 전체의 맛이다. 공(空)이 되어라. 그러면 전체가 될 것이다. 이 게임에서는 오직 잃은 자만이 승리자가 될 것이다. 패배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패배자여, 승리는 그대의 것이다.
붓다는 만트라의 수여자였다. 가장 위대한 구루(mahaguru)였다. 나는 붓다를 위대한 구루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 구루라는 말은 요즘과 같이 더려워진 그런 말의 의미는 아니다. guru라는 이 네 개의 글자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다. 크리슈나무르티가 가장 싫어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누가 그를 구루라 하면 아주 싫어했다. …그건 사실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그 태도는 진실이다.
그러나 붓다만은 진정한 구루였다. 구루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겁다는 뜻이다. 사바하로, 축복으로, 그리고 법열로 무거워질 대로 무거운 상태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비구름으로 무거워져 있는 하늘과 같다. 누구든지 목말라하는 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 즉시 단비를 내려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구루란 누구인가? 그대를 해방시키는 사람이다. 그대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람이다. 붓다는 구루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구루였다. 그의 메시지는 어느 누구의 그것보다 훨씬 위대하다. 그리고 이 반야심경은 붓다의 메시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차원 높은 메시지이다. 그는 49년간 많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어떠한 메시지도 여기 이 반야심경의 메시지에는 견줄 수 없다. 말하자면 그의 메시지 전체가 여기 이 반야심경으로 압축되고 있다. …그대는 참으로 행운아이다. 이 반야심경을 듣고 또 명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기 때문에. 붓다의 메시지, 그 정수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기 때문에. 아니 행운을 넘어서서 그대는 이제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메시지의 정수, nothingness, 수냐(空), 바로 그 자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