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옷과 이야기

개화기 복식

작성자이춘희|작성시간04.10.13|조회수1,375 목록 댓글 0
▶개화기

서구사상의 도래, 기독교·천주교의 전래, 선교사에 의한 신교육의 보급, 남녀평등주의 사상, 1894년 갑오개혁과 고종 32년(1895) 구미식 의복착용과 단발령, 1896년 독립신문의 창간, 1919년 3.1운동 등 새로운 사조에 의한 의식의 전환을 개화기의 시작으로 보면, 개화기는 1895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43년간, 대략 반세기를 개화기로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우리의 개화기는 민족사상의 격변기이며, 역사 진전이 가속화된 시기였다.

개화기를 통해서 나타난 복식변천의 요인으로는 실학에서 싹튼 것으로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이려는 사상인 서양문물 도입사상의 대두와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선함으로써 전통사회의 붕괴를 보게 되어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한 사회개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 정책의 변화로서 갑신정변, 갑오경장, 을미개혁, 대한제국의 성립 등은 복식제도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문호개방 이후 근대적 교육이 실시된 신교육의 보급, 특히 여성교육기관의 설립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교육기관과 대중매체인 언론의 보급은 의복의 변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복식에서 삼국시대 이후 나타난 중국식 복제와의 이중구조가 이조말 서양문물의 도입과 개화운동 등을 통하여 양복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겪음으로써 서양복식과의 이중구조를 나타내게 되었다. 8·15 해방과 6·25 동란을 거쳐 1960년대부터는 서구문물 도입과 산업발달 및 국제간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하여 기성복이 등장하였고 이는 점차 확산되어 우리 고유복식인 한복은 일상복이라기 보다 예복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 남자복식

1. 두식

을미년 단발령과 망건의 사용이 폐지되면서 머리 모양이 달라지고 관모도 달라졌다.
상투머리 대신 짧은 머리, '중머리'또는 '하이칼라머리'를 하게 하였다.

관모에 있어서도 흑립만이 오랫동안 착용되었다.
특히 의관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갖추기 좋아했던 유림촌로들은 집에 있으면서도 맨머리로 있는 일이 없었는데, 대개는 간편하게 탕건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정자관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상투 없는 맨 머리에 탕건을 쓰고 그 위에 흑립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흑립, 망건,정자관 등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 후 서울에는 관모점이 생겨 파나마모자, 맥고모자를 팔게 되고 중절모자도 생겨나서 전국으로 퍼져나가 일대 유행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복에 모자는 익숙하게 되었다.

2.상의

(1)마고자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마괘라고도 한다.
원래 만주인의 옷이었던 것을 대원군이 만주보정부에서의 양거생활에서 풀려나와 귀국할 때(1887)에 입고 돌아와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듯 마고자는 추운 지방에서의 덧저고리로 보온에 좋고 입어서 풍신하여 애용되었는데, 뒤에 가서는 남자용 마고자를 본따 여자용 마고자를 만들어 입게 되었다.

(2)두루마기(주의)

두루마기는 영조14년(1738)에 있었던 백의금령 이후에 중의가 착수로 변한 것으로, 과거에는 사대부계급에서는 집에 있을 때, 민서계급에서는 외출할 때 웃옷으로 입었던 것이다.
고종 31년 갑오경장시 의제개혁에 조선의 대례복은 아직 흑단령을 입지만, 진궁시의 통상복에는 흑색 주의와 답호로 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는 답호도 없애고 주의만을 입게 함으로써 우리의 포제는 두루마기 일색이 되었다.
사대부계급에서는 집에 있으면서도 반드시 포를 입고 관을 써 의관을 정제하게 마련이었으나, 한일합병 후에는 이러한 범절이 엄격히 이행하지 않아 여름철에는 저고리,바지, 조끼로써,봄, 가을, 겨울에는 이에 마고자를 더하는 것이 보통이었고,두루마기는 양복에 있어서의 외투와 같은 역할만을 하였다.

(3)적삼

여름용 간이복으로 민서계급의 상의였으나, 한복에 조끼가 도입되면서 조끼의 장점인 호주머니를 곁들여 편리한 옷이 되자 일반적으로 통용하게 되었다.

(4)조끼

조끼는 우리 한복에 없던 것이 양복이 생활화되면서 양복의 조끼에서 본따 만들어 입게 되었다.

(5)토시

토시는 겨울과 여름 두 계절에 사용하였다.
겨울용은 방한구의 일종으로 비단, 무명, 교직등으로 겹으로 만들고 안에 털을 대었으며, 여름용은 저고리수구에 땀이 배지 않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가도록 등나무 또는 말총을 사용하여만들어지었다.
1920년대부터 장갑이 들어오면서 차츰 존재가치를잃게 되었다.

3. 하의

(1)고의

적삼과 함께 여름용으로 서민층에서 입던 것인데, 일하는 데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하의였다.

(2)속고의

내의에 속하는 것으로 '팬츠'가 들어와서 대치되었다.

(3)행전

보행에 편하도록 통으로 하여 무릎 아래에 묶고 신 위까지 내려오도록 한 것으로
각반과 같은 용도의 것이었다.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그 필요성이 줄어들자 자연히
소멸하였다.

4. 요식

한복에는 필요한 물건을 지니고 다닐 호주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없어 따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띠에 매달았다. 보통 주머니 외에 쌈지용 담배주머니, 안경집
등이 있었다.
그러나 조끼를 입게 되면서 조끼의 호주머니가 이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5. 이식

(1)버선

1920년대 양말이 들어왔으나 나이 든 사람들은 한복에 꼭 버선을 신었다.
그리고 일반인은 버선과 양말을 혼용하여 신게 되었다.

(2)신

대원군이 집권하게 되자, 그의 생활개조시책에 따라 견혜 이상의 사치용 초단신,금단신,흰갓신 등을 신지못하게 하고,재료로 섞어 만든 초리도 신분질서를 어지럽힌다 하여 사용금지령을 내렸다.
또한 관복이 양복화되면서 흑피혜, 협금혜, 목화등이 필요 없게 되었으며, 각종 갓신과 짚신,미투리 그리고 우중(雨中)에 신는 진신, 나막신 등이 일반화되었다.
1920년경부터 고무신이 나오게 되었는데, 우리 신을 본따서 만든 고무신은 값싸고 경제적이어서 이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일부 부유층에서는 서양식 단화를 신거나,이 단화와 우리 신을 절충한 끈 없는 단화를 만들어 신기도 하였다.

마고자 무사의 정장 관복

◈여자의 복식

1.여자의 두발양식

(1)머리모양

1)궁중

개화기를 맞이해서도 나라가 존속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궁중양식은 그대로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예장에 필요했던 '어여머리', '큰머리'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막을 내린 후로 궁중에 의식이 없어지자 '어여머리','큰머리'들은 하나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2)일반

일반여성에 있어서도 당분간은 조선 후기 여성들의 머리모양 그대로 처녀들은 댕기머리였고,부녀자들은 기호를 중심으로 이남은 쪽진머리, 서북은 얹은머리였다.
이 풍습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다만 쪽진머리가 옛날과 같이 머리 뒤로 올라갔으며, 가발의 풍습도 전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07년 최활란이 당시 동경에서 유행하던 '팜프도어'(히사시까미)를 하고 돌아왔다.
이것은 너무나도 이례적이었던 만큼 한때 학생들간에 유행도 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1920년대 미장원이 생겼는데, 우리 나라 첫 미용사는 오엽주로서 일본에서 배워 화신백화점에서 미장원 개업을 한 것이 시초이며,1937년경부터 '퍼먼넨트'가 등장하였다.

3)개화기의 머리형태

①1910∼1920년대

●다리미자루형:긴 머리를 따서 두 번 내지 세 번 구부려 그 위에 나비가 앉은 것처럼 커다란 리본을 맨 것이다.

●쟁머리(팜프도어:히사시까미):귀밑머리를 풀고 머리를 치켜 올려 틀어 얹은 것이다.

●둘레머리:머리를 한 가닥으로 굵직하게 따서 터반 모양으로 두른 것이다.

●트레머리:옆 가리마를 타서 갈라 빗어 머리 뒤에다 넓직하게 틀어 붙인 것이다.

●첩지머리:1926년경에 유행하던 것으로, 앞 가리마를 똑바로 타가지고 양쪽에 귀밑머리를 땋을때 세 가닥으로 갈라서 앞의 두 가닥을 엮은 것 위에 같이 꼬아 넣은 것이다.

②1930∼1940년대

단발:1934년경부터 5∼6년간 크게 유행하였다.

퍼머넌트:1937년경부터 등장하여 젊은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2.예복

조선시대 예복으로는 왕비의 적의, 활옷, 원삼, 당의와 이에 따른 스란치마, 대란치마 그리고 무지기, 대슘치마 등을 들 수 있다.
개화기를 맞이했다 하더라도 왕조의 명백은 유지되어 궁중예복 및 상류층의 예복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일합병으로 왕비법복인 적의는 존재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그 밖의 예복은 끈질긴 전통과 함께 구식혼례 또는 수연에서 볼 수 있다.

3.평상복

평상복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저고리,치마,버선,신이지만,이 밖에 친의류에 속하는 속적삼,단속곳,바지,속속곳,다리속곳,너른바지가 한동안은 그대로 있었다.
덧입는 것으로는 배자,덧저고리가 있었는데, 이때에 마고자, 두루마기 및 속치마가 등장하였다.


1)저고리

1920년대 이전의 저고리는 일반 부녀자의 경우 저고리길이가 20㎝안팎이었으며, 진동이 16∼22㎝로 입어서 꼭 낄 정도였다.
겨드랑이 밑이 1㎝ 정도로 살을 가리기 어려운 겨드랑이 밑살을 가리기 위한 특수한 '허리띠'도존속하였을 것이다. 깃너비는 3㎝ 안팎으로 좁았으며, 당코깃인데 앞깃이 15∼17㎝이고 고름은 넓고 길어졌다.
그리고 전도부인 및 학생의 경우는 1890년대에는 일반 부녀자와 마찬가지로 저고리길이가 매우 짧았는데 1900년대부터 차차 길어졌다.
1920년대에는 일반적으로 저고리길이, 화장, 진동, 배래,수구 등이 넉넉해졌다.
1930년대 전후는 저고리길이가 더욱 길어져 겨드랑이 밑이 13∼14㎝ 정도까지 내려갔고, 진동,소매너비,수구 등도 더욱 넉넉해졌으며, 고름도 넓고 길어졌고, 동정도 넓어졌다.
또한 배래선은 뚜렷한 곡선을 이루었다.
그 후 차츰 저고리길이가 길어져 나중에는 저고리가 배꼽을 덮을 만큼 길어졌으며, 긴 길이에 비해 화장이 짧은 것이 이때의 유행이었다.
1935년경의 저고리길이는 알맞게 되었으나 1940년 전후에는 저고리 길이가 다시 짧아져 바스트라인까지 근접했으며, 화장은 짧아진 대로이고, 깃길이가 길어져 안깃의 교차점이 내려가 살이 많이 나오도록 늦추었으며, 고름은 더욱 길어졌다. 또한 이때부터 고름 대신 단추를 달거나 '브로치'를달게 되었다.

2)치마

일반 부녀자들의 치마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다만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치마길이가 활동하기 편하도록 짧아졌다.그리하여 치마는 짧은 치마와 긴 치마의 이중구조로 되었다.
그러나 가정 밖에서는 짧은 치마를 입고 활동을 하다가도 집에 들어와서는 긴 치마로 갈아입었다.

짧은 치마의 변천과정을 보면,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의 간편함을 본따 저고리를 길게 하고 치마를 짧게 해서 입기 시작했는데, 짧은 치마도 나름대로 모양이 있어 유행의 변천이 있었다.
즉, 주름의 너비, 치마길이, 층수 등으로 변화를 주었다.
일제 말기에는 '몸뻬'가 치마를 대신하게 되어 여학생들을 비롯하여 일반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이를 입었다.


부녀자의 나들이복장 장옷을 입은 여인들 처녀의 챙머리 천의·삿갓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