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족보]와 과괄(科刮)과 현달(顯達)에 관하여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59)
백민 이양재 (Korea Genealogy Heritage Center)
-On the Genealogy of the Gwangsan Kim Clan, Gwagwal (The Lineage of Examination Success), and Hyeondal (Eminence)-
우리나라의 전통보학에 연이광김(延李光金)이라는 말이 있다. 연안이씨(延安李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를 합쳐서 말하는 것인데, 연이광김은 조선시대 최고의 양반(兩班) 가문을 말한다.
광산김씨를 대표적인 양반 집안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과 급제자의 수도 중요하지만,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하였다는데 있다.
In traditional Korean genealogy, there is a saying, "Yeon Lee-Gwang Kim (延李光金)." This term combines the Yeonan Lee clan (延安李氏) and the Gwangsan Kim clan (光山金氏), representing the most prestigious Yangban (noble) families of the Joseon Dynasty.
Defining the Gwangsan Kim clan as a representative noble family is not only due to their impressive number of civil service exam graduates, but more importantly, because they produced as many as seven Daejehak (Chief State Scholars).
1. 광산김씨
광산김씨는 신라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는 토성이다. 광산김씨의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1747년 [광산김씨족보] 정유대보와 [신라김씨선원보], [계림대보], [경주김씨보] 등에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년 4월~839년 7월)의 셋째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신라 말엽에 경주의 혼란을 피해 무진주 추성군 서일동(현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였다. 시조 김흥광의 손자인 김길(金吉)은 고려 태조를 도와 무공을 세우고 개국공신이 되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다.
김길의 공로로 인해 그의 조부인 김흥광이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를 계기로 후손들이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았다. ‘광산’은 ‘광주(光州)’이다. 그러므로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광주김씨(光州金氏)라고도 부른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 시조 알지(閼智)의 연원을 두고 있는 성씨가 호남에서 번성한 것이다.
2. 조선시대 광산김씨의 과괄과 현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광산김씨는 926,316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씨 인구 순위 제8위이다.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광산김씨가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263명(문과 갑과 장원급제자 12명), 무과 276명, 생원 350명, 진사 402명 등을 1,028명을 배출하였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표(1)과 같이 잡과까지 포함한다면 문중에서 주장하는 것보다 상당히 더 많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광산김씨는 문과 267장, 진사 412장, 생원 363장, 무과 294장을 배출하였으며 잡과에도 59장 등 모두 1,395장을 배출하였다.
광산김씨문중에서는 이 가운데 대제학 7명 외에도 상신 5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하니, 대제학 배출 순위 1위이다.
대제학은 1품인 삼정승(三政丞) 보다 품계가 낮은 2급이었으나, 그 명예는 삼정승보다 중요했다. 문형(文衡)이라고 불리기도 한 대제학(大提學)은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家門)으로도 문제가 없는 사람만이 오를 수 있었다. 그 자리는 당대의 관학계를 대표하는 자리였으므로,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다.
조선시대 518년간에 상신에 오른자는 365명인데 비하여 문형에 오른 자는 134명뿐이다. 그러므로 20세기의 전통보학자들 사이에서는 “대제학 하나가 정승 셋보다 낫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3. 고려시대 광산김씨의 과괄과 현달
광산김씨의 번성은 조선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조 김흥광의 손자인 김길이 고려 태조를 도와 무공을 세우고 개국공신이 되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김길의 손자 김책(金策)이 864년 갑자방 갑과 1위에 올라감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광산김씨 고려조 문과-사마 급제자는 표(2)와 같다.
이상의 고려시대 문과급제자 22인 23장(1인 중복)과 진사 급제자 2인 2장(1인 중복, 총수 23인 25장)을 보면, 이들 가운데 김수가 1255년에 문과 급제한 이래 그의 아들 김태현은 진사시에 그리고 병자방과 친시방에 문과 급제하며, 그의 네 아들 김광식-광철-광재-광로가 모두 문과 급제한다. 이들 3대 6명이 모두 8장의 급제자를 내는 셈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고려조 문과-진사 급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급제자 수를 배출한 가문은 안동권씨의 문과 21명 22장(문과에 권부 중복)과 진사 3인(권원이 문과와 진사에도 급제) 4장으로 도합 23인 26장으로서, 광산김씨의 문과 22인 23장, 진사 2인 2장으로 23인 25장인데, 안동권씨와 광산김씨는 문과 급제자는 광산김씨가 1명 1장이 더 많고, 진사에서는 광산김씨가 2인 2장인데 비하여 안동권씨가 3인 4장이므로 안동권씨가 1인 2장이 더 많다.
문과시와 진사시를 합하여 전체로 볼 때는 급제 인원은 같지만, 장수에서는 안동권씨가 1장이 다 많다. 이들 두 성씨의 뒤를 이어 파평윤씨는 고려조에서 문과 17인 17장이다. 이들 세 문중의 시조나 중흥조는 모두 고려조의 개국공신이라는 공통성이 있다.
표(2)의 광산김씨 고려조 문과-진사 급제자들의 방목과 족보를 참조하여 정리하면 표(3)과 같이 정리된다. 1세 김흥광으로부터 7세 김양감(고려 문종과 선종 시기의 벼슬아치)까지는 단선(單線) 계보이다.
그런데 표(3)의 ⑨김주정(金周鼎, 1228~1290)은 『광산김씨족보(光山金氏族譜)』 초간보에 등재된 ‘문숙공 주정 묘지략(文肅公周鼎墓誌略)’과는 증조의 이름 표기가 다르다.
묘지략에 “아버지는 경량(鏡亮), 조부는 광세(光世), 증조는 위(位)”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위(位)는 김주영(金朱永)의 이름을 쓰지 않기 위하여 달리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1783년 계묘보(표(4)-목록⑧)에는 9세 김주영의 아들로 10세에 ‘김위(金位)’가 나오며, 11세로 ‘김광세’가 나온다. 불과 10년 정도 전에 간행된 1770년대 족보(표(4)-목록⑦)에는 김위가 없다. 표(3)의 세수(世數)는 광산김씨족보 목록⑦에 의거한 세수로 표기한 것이다.
표(3)의 고려조 문과급제자 계보는 주로 양간공파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⑯김자빈은 낭장공(郞將公)파로서, 그는 김한로(金漢老, 1358년∼?)의 부친이다. 김한로는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양녕대군의 장인이다. ⑰김독은 광산김씨 족보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조선 1408년 무자 식년시 동진사에 급제한 그의 아들 김유무(金由畝)의 방목 기록에는 광산김씨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동성동본동족이면서도 후일 족보를 편찬할 때 등재되지 않은 예는 광산김씨 이외의 다른 씨족들 사이에서도 간혹 보인다. 교통이 불편하고 자료 수집이 어려웠던 수백 년 전에 보이는 오류는 당연한 일이다.
5. 광산김씨문중의 옛 족보
광산김씨 문중에서 1910년 이전에 간행한 족보 및 파보는 70여 종이 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중 중요한 족보는 표(4)와 같다. 아래의 목록에는 순조 말년(1834년) 이후에 발간한 5책 미만의 옛 족보는 포함하지 않았다.
대략적으로 볼 때 1920년경 국내외에 있었던 우리 동족의 인구수는 대략 2,000만 명이었으나, 100여 년이 흐른 현재는 남북과 해외를 합하여 이보다 3.5배에 이르는 7,500만 명의 인구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때,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광산김씨가 926,316명이라는 것은 조선말에도 30여만 명이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가 있다.
광산김씨는 크게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공파', '사온서직장공파' 등 다섯 파로 분류한다. 양간공파 후손들이 70%로 제일 많고 현달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양간공파 후손들에 의하여 [광산김씨족보] 대보(大譜)의 편찬이 주도된다.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광산김씨의 족보는 문헌상으로는 최초 용계보(龍溪譜)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신 용계(龍溪) 김지남(金止男, 1559~1631)이 1600년경에 작성한 2책이 있었는데 전하지 못하고, 영남종인(嶺南宗人)과 외손 송희업(宋熙業)이의 편찬한 족보가 있었는데, 이 두 족보는 규모도 작고 빠진 데가 많았다.”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677년에 김만기(金萬基, 1633~1687)가 쓴 서문에도 나타나 있다. 1677년 [광산김씨족보] 정사보가 있었고, 1677 정사보로부터 70년 후 1747년에 정묘대보 17권17책을 편찬하였고, 다시 1747년 정묘대보로부터 101년 후인 1848년에는 무신보 16권16책을, 1876년에는 병자보 29권29책을 편찬하였다.
이러한 거질의 광산김씨 4대 족보에도 당시 생존하였던 다수의 광산김씨가 등재된 것은 아니다. 당시 생존 인구 가운데 일부만이 족보에 등재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거대 문중은 파보나 마을 족보가 발달한다.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1677년(肅宗 3년 丁巳)에 文忠公(萬基)께서 영남보와 희업보를 보완하여 瑞石譜(서석보)를 발간하니 광산김씨의 최초의 대동보이다. 10년 후 1687년(숙종 13년)에 김만기의 아들인 文淸公(鎭圭)께서 편찬한 竹泉譜(죽천보) 8권을 편찬하였는데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중에서 죽천보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1687년에 김만기(金萬基, 1633~1687)는 54세였고, 김진규(金鎭圭, 1658~1716)는 29세였다.
그런데 나는 1677년 정사년에 김만기가 편찬 중인 족보는 초보(草譜)였을 것으로 본다. 7년 후인 1684년 갑자년에 송시열이 제후를 지었다. 그리고 3년 후 1687년에 죽천보 8권의 편찬이 마쳐졌다. 이를 분석하여 보면, 막대한 간행비를 들여 발행하는 족보를 검수(檢修)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었고, 이에 김진규가 부친이 만든 초보(草譜)의 내용을 재편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 편찬 과정에서 김만기가 스승인 송시열의 제후를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만기는 정사년에 서문을 썼고, 그의 스승 송시열이 7년 후인 1684년 갑자년에 제후(題後)를 썼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편찬하였는데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한다. 애당초 1677년 초보는 간행되지 않은 원고본이므로, 원본이 없어지면 실전하게 된다.
참고로, 김만기의 증조부는 형조참판을 지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며, 할아버지는 허주(虛舟) 김반(金槃, 1580~1640)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 김익겸(金益兼, 1614~1636)이다. 어머니는 윤지의 딸 해평윤씨 부인이다. 동생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은 그의 종조부였다. 김만기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1677년 정사보와 1684년 갑자보는 초간보 재간보로 연결되는 판본이 아니라 동일한 편찬보로 본다. 김만기의 서문과 송시열의 제후는 7년의 시차로 써졌는데, 7년이나 길게 잡아 1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재간보를 발행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표(3)의 2~4는 모두 100장 미만의 단책(單冊) 고서로서, 대성(大姓) 광산김씨의 족보라고 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좁은 가승보 수준이다. 1705년 [서석선생세년합보(瑞石先生世年合譜)] 3권1책은 권1의 계보(11장)와 권2의 연보(39장), 권3의 연보(42장)를 합한 책이다. 이 합보를 편찬한 김진규(金鎭圭, 1658~1716)는 초간보를 편찬한 김만기의 차남으로 죽천보 편찬을 주도한 인물이다.
김만기가 1677년부터 1684년 사이에 초간보를 편찬하였지만. 위의 표(3)으로 정리한 계보와 1677년 초간보 권지1의 계보를 대비하여 보면, 일부 빠진 인물들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정확하다. 이것은 이들 집안이 고려 때 이미 크게 두 갈래를 이루었고, 대체로 고려중기에 족도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가문의 족도를 집성(集成)하여 1677년을 기점으로 하여 초찬보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677년 정사보를 편찬한 김만기(金萬基, 1633~1687)는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의 친정아버지로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첫 장인이다. 당시 1680년은 인경왕후가 사망한 해이다. 당시에는 지문(誌文) 작성을 위하여서도 광산김씨의 상계대가 정리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왕조실록 참조). 그것을 김진규가 완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⑤[광산김씨족보] 정묘대보 권1(상), 김만기의 서문(1674년), 1747년, 무신자본 부분. [사진-이양재]
⑤[광산김씨족보] 정묘대보 권1(상), 계보 시작부분, 1747년. 왼쪽의 계보는 목활자로 인쇄. [사진-이양재]
광산김씨의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 ⑤1747년 [광산김씨족보] 정묘대보 17권17책은 광산김씨 상계대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족보이다. 현재 필자는 1747년 정묘대보 17권17책중 책2가 결본인 16책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묘대보는 ‘권지1 상(上)’은 갑인자체 금속활자 무신자로 인쇄하고 있고, 계보 부분은 목활자로 인쇄하고 있다.
아마도 교서관에서 인쇄에 간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사가의 족보에 조선왕조가 만든 동활자가 일부라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광산김씨족보] 정묘대보의 간행에 조선왕조가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여 준다.
정묘대보 편찬은 김만기의 손자 김진동(金鎭東, 1683~1765)이 하였는데, 1747년에 그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2품 당상관)로 광산김씨로서는 당시 최고위직 인물이었고, 김양택이 고증을 맡아 도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747년 정묘대보와 이후의 족보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은 앞서 언급한 9세 김주영과 10세 김영세 사이에 김위(金位)가 10세로 들어가고 김영세가 11세로 들어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정묘대보는 김위(金位)가 들어가 있지 않지만, 김천익(金天翼, 1719~?)이 편찬한 ⑦1783년 [광산김씨족보] 계묘보에는 김위가 10세로 들어가 있다. 표(2)의 ⑦김공수는 김위의 손자이므로 김공수가 [광산김씨족보]에 연결되지만, 김공수는 ⑦계묘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아, 이 부분은 좀 더 문헌 고증을 필요로 한다.
오른쪽은 ⑤1747년 정묘대보, 왼쪽은 ⑦1783년 계묘보. [사진-이양재]
그런데 자리 ‘위(位)’라는 문자는 사람 ‘인(人)’자에 설 ‘립(立)’자를 합한 글자로서, 원래 조정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마주하고 서 있던 '지정된 위치'를 의미했으나, 점차 신분, 직책, 권력의 자리, 후에는 신위(神位)를 뜻하게 된 글자이므로 외자 이름으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천익의 ⑦1783 계묘보에는 김만기가 1677년에 지은 서문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광산김씨 초간보와 1747년 정묘대보를 1783년 계묘보의 편찬자는 제대로 된 족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용서지학이나 현대 보학으로 보면, 광산김씨문중 족보의 정통성은 초간보와 1747년 정묘대보에 있다.
6. 맺음말
[광산김씨족보] 초간보는 숙종조(肅宗朝, 1674~1720)이던 1677~1687년 사이에 김만기와 김진규의 대를 이어가며 서석보와 죽천보가 편찬하였다.
이후 1747년 정묘대보, 1848년 무신보, 1876년 병자보가 편찬되었다. 이외에도 광산김씨 문중에서 편찬한 조선시대의 족보는 파보를 포함하여 70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많은 족보 가운데 광산김씨 문중 족보의 정통성은 초간보와 1747년 정묘대보의 계승에 있다.
이들 족보에 의하면 광산김씨의 원조는 김알지이고, 중시조는 김흥광이며, 광산이라는 본관이 고려중기에 주어졌다. 번성의 시작이 고려초로 올라가며 고려중기에 번성의 기반을 확고히 한 명문이다.
가장 최근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2015년)에 따르면, 광산김씨(光山金氏)는 남한의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에서 8위를 차지하고 있다.
김씨 성을 가진 본관 중에서는 3위에 해당하는 대성(大姓)으로 총인구수 926,316명이니, 남한 전체 인구의 약 1.9%이다. 김씨로는 김해김씨와 경주김씨에 이어 3위로 많은 수이다. 고려에서는 평장사를 8명 배출하였고, 조선에서는 정승 5명과 대제학 7명을 배출하여, 역사적으로는 김씨 가운데 학문적 위상과 가문의 격조(명예) 면에서 보면 광산김씨가 최고의 김씨 명문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조선 예학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부자를 태두(泰斗)로 본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광산김씨는 성리학적 명분론과 도덕성을 극도로 강조했던 핵심 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문 전체가 몰락할 만한 대형 반역 사건의 수괴나 간신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은 사실상 없다.
반면에 대성인 만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서는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모두 상당수 존재한다.
광산김씨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는 특출한 여성이 여럿 있다.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1944)와 김란사 (金蘭史, 1872~1919), 김순애(金淳愛, 1889~1956, 김규식의 아내), 남성으로는 김마리아의 삼촌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가 살해당한 김필순(金弼淳, 1878~1919), 그의 아들이자 김마리아의 사촌 동생인 중국 배우 김염(金焰, 1910~1983)은 독립운동을 지지하며 항일영화 촬영만을 고집했다. 또, 이상재의 측근으로서 임시정부 수립을 도운 김갑수(金甲洙, 1894~1938)도 광산김씨이다.
Conclusion. ; The clan's initial genealogy (Choganbo) was compiled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r. 1674–1720) between 1677 and 1687, spanning the generations of Kim Man-gi and Kim Jin-gyu with the publication of the Seoseokbo and Jukcheonbo.
Following this, the Jeongmyo Daebo was published in 1747, the Musinbo in 1848, and the Byeongjabo in 1876. In addition to these major compilations, the total number of genealogies published by the Gwangsan Kim clan during the Joseon dynasty, including branch genealogies (Pabo), is estimated to reach around 70 variants. The legitimacy of the Gwangsan Kim clan's genealogy among numerous clan records lies in its succession from the Choganbo (first edition) and the 1747 Jeongmyodaebo.
According to these genealogical records, the original ancestor of the Gwangsan Kim clan is Kim Al-ji, and its middle progenitor is Kim Heung-gwang. The clan seat (bongwan) of Gwangsan was officially granted during the mid-Goryeo dynasty. The clan began to flourish as early as the early Goryeo period and firmly established its foundation as a distinguished family by the mid-Goryeo era. According to the 2015 Population and Housing Census by Statistics Korea, the Gwangsan Kim clan ranks 8th in population among all clan seats in South Korea. It is a major lineage, ranking 3th among those bearing the surname Kim, with a total population of 926,316, accounting for approximately 1.9% of South Korea's entire population.
This makes it the third largest Kim clan, following the Gimhae Kim and Gyeongju Kim clans.Historically, the clan produced 8 Pyeongjangsa (high-ranking ministers) during the Goryeo dynasty, as well as 5 State Councillors (Jeongseung) and 7 Chief Scholars (Daejehak) during the Joseon dynasty. Consequently, in terms of academic prestige and family honor, the Gwangsan Kim clan is widely regarded as the most prestigious lineage among all Kim clans. Notably, the father and son duo, Sagye Kim Jang-saeng and Sindokjae Kim Jip, are revered as the pillars of Joseon Neo-Confucian ritual propriety (Yehak).
Furthermore, because the Gwangsan Kim clan was a core lineage that strictly emphasized Neo-Confucian moral philosophy and righteousness, it produced virtually no ringleaders of major rebellions or notorious traitors that could ruin the entire family.
On the other hand, given its large population, the clan produced a significant number of both great independence activists who sacrificed their lives to reclaim national sovereignty and pro-Japanese collaborators during the late Korean Empire an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Notably, many prominent independence activists were women, including Kim Maria (1891–1944), Kim Ran-sa (1872–1919), and Kim Sun-ae (1889–1956, wife of Kim Kyu-sik). Prominent male figures include Kim Maria’s uncle, Kim Pil-sun (1878–1919), an doctor who was assassinated while fighting for independence in Manchuria. His son and Kim Maria’s cousin, Kim Yum (1910–1983), a renowned Chinese actor, steadfastly supported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exclusively acting in anti-Japanese films. Additionally, Kim Gap-su (1894–1938), a close associate of Yi Sang-jae who aid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lso belonged to the Gwangsan Kim clan. (29th May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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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재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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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락 2026-06-03 10:33:54더보기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광산김씨의 족보는 문헌상으로는 최초 용계보(龍溪譜)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신 용계(龍溪) 김지남(金止男, 1559~1631)이 1600년경에 작성한 2책이 있었는데 전하지 못하고, 영남종인(嶺南宗人)과 외손 송희업(宋熙業)이의 편찬한 족보가 있었는데, 이 두 족보는 규모도 작고 빠진 데가 많았다.”라고 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