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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족보] 탐색을 위한 비망기록

작성자태민|작성시간26.06.07|조회수53 목록 댓글 0

[연안이씨족보] 탐색을 위한 비망기록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60)

 

 

 

백민 이양재 (Korea Genealogy Heritage Center)

 

The Genealogy of the Yeonan Lee Clan] Memorandum for Exploration.

우리나라의 전통보학에 연이광김(延李光金)이라는 말이 있다. 연안이씨(延安李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를 합쳐서 말하는 것인데, 연이광김은 조선시대 최고의 양반(兩班) 가문을 말한다. 이번에는 연안이씨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연안이씨의 연원(淵源)과 상계대(上系代)를 탐색하는데는 자료가 부족하여 매우 조심스럽고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이번 탐색은 미완성의 비망기록(備忘記錄)이다. 

"In traditional Korean genealogy, there is a saying, 'Yeon-Lee-Gwang-Kim.' This term combines the Yeonan Lee clan and the Kwangsan Kim clan, which represent the most prestigious Yangban (noble) families of the Joseon Dynasty. This session focuses on the Yeonan Lee clan.

However, tracing their origins and early lineage poses great difficulties and requires utmost caution due to the scarcity of historical records. Therefore, this exploration remains an incomplete memorandum."

1. 연안이씨는 동성동본이지만 중시조가 다른 여러 동족이 있다.
(The Yeonan Lee clan has the same surname and origin, but there are multiple kindred groups with different primary ancestors.)

제135회 연재에서 성주육리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다. 조선중기만해도 그들은 동성동족의 개념이 있었다. 벽진이씨의 경우 1652년에 초간보(임진보)를 편찬하면서 [성주벽진이씨족보]라고 하였다. 이들은 서로 시조가 달라 혈연적 연관성을 증명할 수 없었기에 결국 각자의 본관이나 계파로 명확히 분리되어 정착하였고, 족보도 달리 내었다.

반면에 연안이씨는 고려시대에 등장한 10명의 중시조(이습홍, 이현려, 이송, 이지 등)를 기준으로 각 분파가 갈라졌으며, 이들 10개 파 중에 4개파가 현존한다. 그런데 각 파의 중시조들 간의 정확한 형제·사촌 관계 등의 연결 고리를 증명할 수 없어 촌수를 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공동 원조로서 7세기의 인물 이무(李茂)를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연안이씨는 왜? 성주육리처럼 본관을 분적하지 않았는가? 성주육리와 연안이씨는 족보 구조는 계보상 유사한 파편성을 지니고 있지만, 가문을 유지해 온 역사적 정체성과 대종회의 결속력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 분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성주육리는 애초에 6명의 시조가 완전히 별개의 인물로 출발한 각각의 시조가 있는 성씨이었기에 결국 각자의 본관이나 계파로 명확히 분리되어 정착했다. 하지만 연안이씨는 계보가 중간에 끊어졌을 뿐, 모든 분파가  신라시대 시조인 이무(李茂)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시조라는 대전제로 내세우는 강력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분적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연안이씨는 각파 간의 결속력이 강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중기에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 파조 이습홍의 8세손인 이근수의 아들 이인수(李仁守)가 안산에 정착하면서 그 후손 일부가 안산이씨(安山李氏)로 분적하였고, 또한 연안이씨 이녕(李寧)의 후손이 해주이씨로 분적한 바는 있다. 연안이씨는 조선시대에 1,000장이 넘는 과거 급제자와 상신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6명을 배출하며 광산김씨, 달성서씨와 함께 조선의 3대 명문가로 꼽혔는데, 이들이 분적하면 명문가의 순위에서 아래로 밀려 내려오게 된다.

성주육리는 ‘서로 다른 6명의 시조’가 모였다가 갈라진 성씨라면, 연안이씨는 ‘한 명의 시조 아래에서 자라난 줄기들이 중간 기록만 잃어버린 상태’이므로 계보학에서는 ‘연안이씨는 중시조 간의 연결이 불명확하다’라는 지적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동성동본이족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상계대가 연결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의 다른 여러 동성동본의 성씨들에게서도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2. 연안이씨는 14세기에 형성되었나?
(Was the Yeonan Lee clan established in the 14th century?)

연안이씨 문중의 시조에 관한 주장을 요약하면, “당 고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삼국 시대인 660년,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副將)으로 백제 정벌에 참여해 시염성(鼓鹽城)에 식읍 1,000호를 받고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신라의 문무왕이 높은 벼슬을 제의했지만 이무가 극구 사양하므로 국빈(國賓)으로 예우했다. 나당동맹 와해 때 소정방이 신라도 공격하려 하자 반대했다. 구전(口傳)으로는 그 뒤로 백제의 여인과 혼인하고 신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는 실전되어 정확한 계대(繼代)를 알지 못하며, 후손들은 고려시대에 10개파가 생겼다. 고려중기에는 염주·염성 이씨 또는 오원이씨라고도 불렸다.”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중기 이전의 주장은 믿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시조 이무는 [연안이씨족보] 등 연안이씨 자료외에는 등장하는 고문헌이 없다. 심지어 현전하는 [연안이씨족보(延安李氏族譜)]의 가장 오래된 족보는 1605년 을사보 초고(27장)이며, 간행된 최고본 족보는 1694년 갑술보 3권3책인데, 이 족보는 파보로서 원 시조를 밝히지 않고 파의 파시조를 시조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연안이씨는 언제부터 이무(李茂)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공동 원조로 내세운 것일까? 연안이씨 초간보와 정조조 이전의 족보를 찾을 수 없는 현재 상황에서는 이를 판단하기가 불가능하다.

전설적 인물 이무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도 증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연안이씨전국대종회에서는 연안이씨의 유래를 “중국 문벌귀족의 가문이자 당나라 황실의 성씨이기도 했던 농서이씨의 후예인 연안이씨는 농서이씨 시조 노자의 후예이자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초대 황제였던 농서이씨 중시조 흥성제 이고의 후손이다. 따라서 연안이씨의 비조는 노자의 조상인 고요이며, 도시조는 노자이다. 당나라 황실과는 종친 관계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몽상가적(夢想家的) 주장을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서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데, 이제는 연안이씨 문중의 보학연구가들도 비판적인 관점을 말한 바 있다. 나는 연안이씨 이무는 실존 인물이더라도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 아니라, 당당한 우리나라의 토성으로 본다. 터무니없는 문중 일각의 주장보다는 우리나라의 토성으로 보는 것이 시조 이무의 실존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현대에 이르러 연안이씨가 존경받는 이유는 많은 고관대작의 수에 있지 않다. 연안이씨는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심지어 구한말에 이어 일제시대까지 수많은 우국지사와 독립군,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번영하는데 큰 기여를 한 집안이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성씨 연안이씨를 외래의 중국 귀화 성씨로 만든 것은 빨라야 사대주의가 팽배한 조선중기 이후이다. 

아울러 조선의 명문 연안이씨가 배출한 고려시대 과거급제자는 문과에서 2인 2장뿐으로 표(1)와 같다. 지난회에서 언급한 광산김씨의 고려시대 문과 급제자수 23인 25장에 비하면 매우 소수이다. 


연안이씨 고려조 문과 급제자 (연도순) [정리-이양재]
연안이씨의 관향지 연안은 황해도 연안이다. “본래 고구려시대에 동음홀(冬音忽), 또는 동삼홀(冬三忽)·시염성(豉鹽城)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 때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염주(鹽州)라 하였으며, 995년(성종14) 해주에 귀속시켰다. 그 뒤 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목(溫州牧)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310년(충선왕2) 행정구역개편에 의하여 목(牧)에서 부(府)로 강등되었고, 명칭도 연안으로 바뀌었다. 1413년(태종13) 연안도호부가 되었고,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연안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배천군과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므로 연안이씨 각파 대다수의 중시조가 고려중기의 인물이지만 연안이씨가 연안이라는 관향을 정한 것은 1310년이후이다. 연안이씨는 연안이라는 관향을 정하기 이전에 염주이씨라 하였는데, 염주이씨로 기록된 인물은 고려후기 원종(元宗, 재위 1260~1274)과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 활약한 형제 무신이자 정치가 이분희(李汾禧)와 이습(李習) 2명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무신정권의 권력자 김준(金俊)의 심복으로 권력 기반을 다진 뒤 왕의 측근이 되었으나, 후일 명장 김방경(金方慶)을 무고하여 투옥시켰다가 도리어 자신들이 유배지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당시 절손되어 후손이 없다. 

3. 조선시대 연안이씨의 과괄(科闊)과 현달
(Success in Civil Service Examinations(Gwagwal) and Academic/Political Distinction(Hyeondal) of the Yeonan Lee Clan during the Joseon Dynasty) 

조선시대에 이르러 연안이씨문중에서는 조선시대 정승 9명, 대제학 7명, 청백리 7명, 종묘배향공신 2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급제자는 255명을 배출하여 전체 8위이며 이(李)씨 중에는 전주 이씨 다음으로 많다. 이들 과거급제자 대다수는 정유재란(1598년) 이후 300여 년 간 배출한 것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태조부터 선조 말년(1392~1606)까지 214년간 35장, 광해군부터 숙종말년(1608~1719)까지 111년간 61장, 경종부터 순조(1721~1834)까지 113년간 85장, 헌종부터 고종조(1835~1894)까지 59년간 54장이다. (표2-1)


연안이씨문중의 과거급제자 통계 [자료-이양재]


[자료--이양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연안이씨는 164,036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보다 앞선 국세조사에서 1985년에는 30,274가구 126,569명이, 2000년에는 44,799가구 145,440명으로 조사되었으니, 15년 단위로 인구가 약 19,000명 정도씩 증가한 것이다.

해방전 연안이씨는 이남보다는 이북에 많이 거주하였는데, 전쟁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월남하였지만, 남북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 인구는 25만 명은 쯤은 넘지 않았을까? 현존 인구수에 비하여 과거 급제자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문중이다. 그러나 그 급제자의 대다수가 정유재란 이후에 300여 년 간 급제한 것이다. 즉 연안이씨가 조선이 명문이 된 것은 조선 영조조 이후이다. 

4. 연안이씨문중의 옛 족보
(Early Genealogies of the Yeonan Lee Lineage)

연안이씨 문중에서는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이 1488년(성종19)에 편찬 간행한 족보가 있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필자가 최근까지 확인한 1910년 이전에 연안이씨문중에서 편찬한 현전하는 옛 족보는 표(3)과 같이 불과 몇 종되지 않는다. 상당수 현전하고 있을 것이지만, 비장(秘藏)된 탓인지, 안타깝게도 세상 유전본(流傳本)을 표(3)의 족보 말고는 더 이상 쉬 찾을 수가 없다. 더 이상은 문중의 도움이 필요하다. 


연안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연도순) [자료-이양재]


[연안이씨족보] 서문의 앞과 끝, 1605년(을사보), 원고본. [사진-이양재]


[연안이씨족보] 서문의 앞과 끝, 1694년(갑술보), 목판본. [사진-이양재]
필자가 확인한 현전하는 연안이씨 최고본 족보는 1605년 [연안이씨족보] 을사보 원고본 1책(27장)이다. 을사보의 서두(書頭)에는 1604년에 호성공신 2등으로 책록된 이광정(李光庭, 1552~1627)이 을사년 음력 7월에 쓴 서문이 세(3)장있고, 그 다음에는 건문4년 임오 6월에 만든 이귀령(李貴齡, 1345~1439)의 호구를 두장 반면(2.5) 필사하고 있는데, 이 호구에는 이귀령의 부 이원발(李元發, 李寵), 조 이정공(李靖恭), 증조 이승안(李承顔, 李顏), 그리고 모계와 처계를 중심으로 한 상세한 가족력을 적고 있다. 계보의 본문은 17장이 있고, 이어서 이홍노(李弘老)의 발문이 한 장 반면(1.5)이 있다. 마지막 한 장에는 선조들에 관한 묘지의 목록이 1장있다. 이 을사보는 오단(五端)의 횡보인데 계보 첫면 최상단(最上端)에는 원조 이무(李茂)에 관한 기록도 없고, 세수(世數)나 대수(代數)의 표시없도 이습홍(李襲洪)을 시조처럼 기록하고 있다. 이습홍은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의 중흥조이자 파시조이다. 이어지는 계대를 보면 출생순으로 기록하였으며, 서자(庶子)는 서(庶)로 표시하였다. 


[연안이씨족보] 계보 첫장, 1605년(을사보), 원고본. [사진-이양재]


[연안이씨족보] 계보 첫장, 1694년(갑술보), 목판본. [사진-이양재]
을사보 이후 1694년 갑술보에서부터는 이습홍을 1대로 하여 대수를 기록하는데, 역시 1605년 을사보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단의 횡보에 출생순으로 기록하였으며, 서자는 서로 표시하였다. 권지3 끝면에 있는 간기에 의하면 갑술보는 갑술 4월에 평양감영에서 개간하였으며, 이만성(李萬成)이 쓴 판하서를 가지고 판목을 만들어 간행하였다. 장차(張次)는 천자문이다.

1694년 갑술보에는 1605년 이광정의 서문과 이홍노의 발문을 권두에 수록하고 있어, 1694년 갑술보는 1605년 을사보를 계숭하여 간행한 족보임을 확실하게 한다. 을사보와 갑술보에 그려진 종선(縱線)으로 계보의 분별력을 높인 편집을 보면, 을사보와 갑술보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편집을 참고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을사보와 갑술보는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의 족보이다.
 
연안이씨 문중에서는 어느 시기에 편찬한 족보에부터 이무를 시조로 기록하였을까? 18세기초에 들어와서가 아닐까? 연안이씨 각파의 초간보와 재간보, 1800년 이전에 연안이씨 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대다수를 살펴보아야 결론이 날 수 있다. 당연히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의 1605년 을사보와 1694년 갑술보 이외에도 각 파의 필사본 가승 및 초찬보나 초간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각파의 가승을 모아 초찬보나 초간보를 낸 이후에 그 필사본 가승이나 초고를 없애는 경우가 많았다. 원본을 없애는 것은 후세(後世)가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을 훼손한 것이다.
 
탐색이 이렇게 깊어가는 가운데, 최근 나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선생전집] 제50권 서(序)에 ‘연안이씨족보서〔延安李氏族譜序〕’가 있는 것을 찾아 내었다. 성호 이익이 생존연대로 보아 이 서문은 늦어도 1760년대 초일 것이다. 표(3)의 목록에는 성호 이익이 쓴 ‘연안이씨족보서’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성호의 서문은 연안이씨의 한 파에서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자신들이 당나라에서 귀화한 이무의 후손임을 주장하였다는 사실은 알수 있다.

“‥‥‥우리나라의 세가(世家)는 대개 중국으로부터 동래(東來)하였다.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세상에 전하는 말에 “당나라 현경(顯慶) 연간에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가 소정방(蘇定方)을 따라서 백제(百濟)를 정벌하러 왔다가 그대로 머무르고 귀국하지 않아서 드디어 연안을 관적(貫籍)으로 삼았다.”라고 한다. 나는 여러 이씨들의 조상 묘소에 명(銘)을 많이 지었는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세대(世代)가 이미 멀고 대수(代數)의 순서도 상고할 수 없으니, 다만 의심난 것은 의심난 상태로 남겨 둔다는 예(例)를 따라야 한다.” 한다. 그러나 퇴계 이 선생이 이 교수 형례(李敎授亨禮)와 숙인(淑人) 연안 이씨의 묘문(墓文)을 지을 때 그 말이 대개 이와 같았으니 다만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씨의 일족(一族)은 세 파로 나뉘었는데,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명망과 덕행을 가진 훌륭한 인물들이 어느 시대든 적지 않았고, 나라 사람들이 흠모하는 이로 월사(月沙) 상공(相公) 정귀(廷龜), 해고(海皐) 상서(尙書) 광정(光庭), 오봉(五峯) 상서 호민(好閔) 같은 분은 큰 명성과 빛나는 업적으로 명망 있는 준걸한 선비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구별하여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그의 호를 일컫고 아무아무의 일족이라고 하였으니, 성대하도다. 이에 세 파의 대부(大夫)와 사(士)가 서로 상의하기를 “우리 집안은 비록 각각 문정(門庭)을 세웠지만 사실상 그 근원은 같으니, 세 파를 합하여 족보를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그러나 소목(昭穆)은 연이어 있으나 문헌을 상고할 수 없으니 억측하여 판단할 수 없어서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星湖先生全集] 卷之五十, 序., “‥‥‥國之世家。蓋多自華而東。延安之李。世傳唐顯慶間。中郞將茂。從蘓定方東征。仍留不還。遂籍延安。瀷多銘諸李氏先墓。或謂世旣綿遠。傳序無考。只在疑以傳疑之例也。然退溪李先生撰李敎授亨禮及淑人延安李氏墓文。其說槩如此。只得遵之也。李氏之族。分爲三派。自勝國至于今。名德鉅公。世不乏人。爲國風之聳慕。有若月沙相公廷龜。若海臯尙書光庭。若五峯尙書好閔。其偉望赫業。譽髦斯士。故人從以別之。不敢名而稱其號曰某某之族。盛矣哉。於是三派之大夫士相與謀曰。吾家雖各立門庭。其實源同。宜合三爲譜也。然昭穆相望而文獻無徵。‥‥‥”  (필자 주)

즉, 성호 이익은 연안이씨의 어느 한 파(대장군공파로 추정)로부터 서문 써주기를 요구 받았고, 그 한 파는 귀화인 이무가 자신들의 원조라고 주장한 것이다. 18세기 중반은 사대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린 시기였다. 

②1694년 갑술보보다 35년후에 나온 ③1729년 기유보는 이현려(李賢呂)를 중시조로 하는 판소부감판사공파(判小府監判事公派)의 파보이다. 여기에는 시조로 이무를 기록하고 그 아래에 붙여서 후손(後孫)으로 현려(賢呂)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현려로부터 세수를 정하여 적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70여 년 후에 편찬한 ➄1828년 [연안이씨족보] 무자보에는 이무의 기록이 전혀 없고, 이현려(李賢呂)를 1세로 하고 있다.

조선초기의 영의정 이석형(李石亨)이 바로 이현려의 후손인데, 이석형 이후 가문이 급격히 번창하면서 판소부감사공파에서만 상신 8명, 대제학 6명 등이 배출되어 연안이씨 가문의 중심축을 이룬다. 이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를 시작으로 아들 이명한(李明漢, 1595~1645), 손자 이일상(李一相, 1612~1666)까지 3대가 연속으로 대제학(문형)을 지내는 기록을 세우며, 판소부감사공파는 연안이씨가 최고의 명문가로 자리 잡는 결정적인 계기를 갖게한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다른 여러 파의 초간보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➄1828년 무자보의 권지1 복사물 1책이 확인되고, 완질본의 권책수와 소장처는 아쉽게도 확인이 안 된다. 

한편, ④1807년 정묘보는 연안이씨 부사공파의 초간보이다. 부사공파는 고려시대 통례문부사를 지낸 이지(李漬)를 파조(시조)로 한다. 

5. 맺음말
(Conclusion) 

현전이 확인되는 17세기의 [연안이씨족보]에는 전설적 인물 이무가 연안이씨의 원시조라는 언급이 없다. 족보의 내용 구성은 발전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을 이해하는 서지학을 활용한 연구법은 현대보학의 핵심원리가 된다.

이무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를 증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연안이씨전국대종회’에서는 연안이씨의 유래를 “중국 문벌귀족의 가문이자 당나라 황실의 성씨이기도 했던 농서이씨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또한 “연안이씨는 농서이씨 시조 노자의 후예이자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초대 황제였던 농서이씨 중시조 흥성제 이고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이런 몽상가적(夢想家的) 주장을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서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연안이씨를 고려의 토성으로 본다. 

분명한 사실은 현대에 이르러 연안이씨는 최고의 명문으로 많은 인정과 존경을 받는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에 배출한 많은 고관대작의 수에 있지 않다. 연안이씨 가문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심지어 구한말에 이어 일제강점기까지 수많은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인물과 애국지사,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연안이씨는 오늘날 우리 민족이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번영하는데 큰 기여를 한 집안이고, 그 때문에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성씨 연안이씨를 외래의 중국 귀화 성씨로 만든 것은 빨라야 사대주의가 팽배한 18세기이다. 연안이씨가 고려의 토성임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The extant 17th-century Genealogy of the Yeonan Lee Clan (Yeonan Lee Ssi Jokbo) contains no mention of the legendary figure Lee Mu as the clan's original progenitor. The content and structure of a genealogy undergo an evolutionary process. Research methodology utilizing bibliography to understand this process constitutes a core principle of modern genealogy.

Despite the inability to prove the historical existence of Lee Mu, the 'Yeonan Lee Clan National Grand Jonghoe' claims their origin as "descendants of the Longxi Li clan, which was both a distinguished Chinese aristocratic family and the imperial surname of the Tang Dynasty." They further assert that "the Yeonan Lee clan is descended from Laozi, the progenitor of the Longxi Li clan, and Li Gao (Emperor Xinggeng), the middle progenitor of the Longxi Li clan and the first emperor of Western Liang during the Sixteen Kingdoms period. "

The Korean historical community does not recognize these fantastical claims whatsoever. Instead, I regard the Yeonan Lee clan as an indigenous clan (toseong) of the Goryeo Dynasty. 

A clear fact is that in the modern era, the Yeonan Lee clan is widely recognized and respected as a preeminent family. The reason does not lie in the sheer number of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s it produced during the Joseon Dynasty. Rather, the Yeonan Lee clan produced numerous figures who contributed to overcoming national crises, alongside patriots, righteous army soldiers, and independence activists throughout the Japanese invasions (Imjin and Jeongyu), the Manchu invasions (Jeongmyo and Byeongja), the late Joseon period, and the Japanese colonial era. The Yeonan Lee clan is a family that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preservation of our national identity and national prosperity today, which is why they receive such recognition and respect. Turning this Korean clan of the Yeonan Lee into a foreign-born Chinese naturalized surname occurred, at the earliest, during the 18th century when flunkeyism (sadaejuui) was rampant. It is imperative to rectify this history and establish that the Yeonan Lee clan is an indigenous clan of Goryeo.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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