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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의 거울로 비춰본 한일 양국의 심층

작성자태민|작성시간26.06.09|조회수63 목록 댓글 0

1975년의 거울로 비춰본 한일 양국의 심층

[연재] 재일사학과 한반도 근현대사-반성의 역사와 문화

 

 

 

이규수 /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개항 100주년을 목전에 둔 1975년, 어느 서늘한 지성사적 풍경

우리가 지나온 과거의 대담을 다시 펼쳐 드는 이유는, 그들이 나눈 대화 속에 단순히 흘러간 과거의 사실(史實)뿐만 아니라 시대를 꿰뚫어 보던 서늘한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대담이 이루어진 1975년은 한일 양국의 근대사가 격돌한 결정적 기점인 ‘강화도 조약(1876)’ 체결을 불과 1년 앞둔, 이른바 ‘개항 100주년’의 문턱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두 나라는 표면적으로는 활발한 경제적 밀월 관계를 맺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정치적·사회적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한국은 유신 체제라는 억압적이고 경직된 정국 속에 놓여 있었고, 1973년 도쿄 한복판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과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문세광 사건 등으로 인해 양국의 국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한국의 거리에서는 연일 반일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고, 일본 내에서는 혐한 정서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반면 당시 일본의 사회적 풍경은 한국과 사뭇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참혹한 상흔을 딛고 일어선 일본은 196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을 거쳐 1970년대에 이르러 물질적 풍요의 정점을 누리고 있었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를 성황리에 치러내며 자신들이 이룩한 ‘성공한 근대화’를 자축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팽배했다.

이토록 엇갈리는 시대적 공기 속에서, 양국을 대표하는 두 거인이 마주 앉았다.

한 명은 일본 대중의 역사 인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른바 ‘시바 사관(司馬史観)’을 확립한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였고, 다른 한 명은 일제강점기의 차별을 뚫고 일본 문단에서 활동하며 재일조선인 문학의 싹을 틔운 선구자이자 사학자인 김달수였다.

이들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얄팍한 외교사나 이분법적인 정쟁을 넘어섰다. 지난 100년이라는 험난한 세월 동안,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두 나라가 대체 어떠한 ‘문화적 체질’과 ‘사고방식’의 차이를 가졌기에 그토록 전혀 다른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해부한 것이다.

따라서 이 대담은 단순한 과거의 회고록이 아니라, 1975년이라는 현재의 위기를 직시하기 위해 양국의 정신적 뿌리 밑바닥까지 파헤친 날카로운 문화적 정신분석이라 할 수 있다.

정한론(征韓論)의 허상과 제국주의적 폭주의 문화적 기원

두 지식인이 맞붙은 대담의 첫 번째 화두는 근대 한일 관계의 씻을 수 없는 비극이 싹튼 막부 말기와 조선 말기의 개항기, 그리고 그 파국의 신호탄이었던 ‘정한론’이다.

통상적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동아시아를 뒤흔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일련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설명할 때, 학계에서는 서구식 제국주의가 밟아온 ‘자본주의적 상품 시장 개척’이라는 팽창 논리로 뭉뚱그려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시바 료타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고백하며 이러한 통설을 과감히 뒤집는다. 그는 일본의 정한론이 서구 열강들처럼 치밀한 자본주의적 계산이나 거시적인 경제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거대한 혁명 직후, 기존의 특권을 잃고 권력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극에 달한 사족(사무라이) 계급의 파괴적인 에너지를 잠재우기 위해, 그 분노의 분출구를 외부(조선)로 돌린 다분히 맹목적이고 얄팍한 정치적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맹동성과 철학의 부재를 내부자의 시선에서 아주 뼈아프게 찌른 대목이다. 일본은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한 충격을 마주했을 때, 그 문명을 소화할 어떠한 보편적 철학이나 인류애적 사상도 갖추지 못했다. 그저 ‘우리가 남의 나라를 먼저 빼앗지 않으면 서양에게 잡아먹힌다’는 약육강식의 생존 본능만으로 폭주했다는 뼈아픈 고백이다.

반면 김달수는 서구의 충격을 그토록 재빠르고 실용적으로 흡수한 일본과 달리, 오직 예교(禮敎, 유교의 예의와 도덕 질서)라는 거대한 틀에 갇혀 외부 세계를 흑백 논리로만 바라보았던 조선 사회의 경직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세계 정세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려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오직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며 전국 팔도에 낡은 척화비를 세우는 데 매달렸던 그 답답한 완고함이 결국 망국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다는 조선 지식인으로서의 뼈아픈 자성이다.

유교적 문명의 짐을 진 조선, 법가적 실용주의에 올라탄 일본

이 대담에서 가장 번뜩이는 역사적 통찰은 두 나라가 천수백 년간 형성해 온 역사적 체질을 ‘유가(儒家, 명분과 도덕 중시)’와 ‘법가(法家, 실용과 힘 중시)’의 뚜렷한 대비로 풀어낸 대목이다.

김달수가 스스로 진단하듯, 조선은 본가인 중국보다도 유교의 명분과 의리에 철저히 얽매인 사회였다. 반상의 차별을 두는 사농공상의 엄격한 질서와 예법은 과거 고대 사회의 촌락 공동체를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는 분명히 기여했다.

그러나 ‘근대 국가’라는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한 번 권력에서 밀려나면 타협의 여지 없이 목숨을 걸어야 했던 퇴로 없는 당쟁, 그리고 엄격한 나이와 신분의 위계에 짓눌린 경직된 사회는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탄력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조선 지식인들이 보여준 이 꼿꼿한 명분론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자아는, 훗날 일제 식민 지배의 잔혹한 폭압 속에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며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지속하게 만든 꺾이지 않는 정신적 뼈대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시바 료타로는 일본 사회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체질을 다르게 분석한다.

일본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구속하는 거대한 철학적 ‘문명(유교)’의 뿌리가 아주 얕았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 언제든지 쉽게 껍데기를 갈아입을 수 있는 실용주의, 즉 무력과 효율을 중시하는 ‘법가’적 태도를 아주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19세기 후반 일본이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벌인 문화적 조작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전통적 가치관이 얕았던 일본의 지배층은 자국민을 단일한 ‘국민’으로 결속시키기 위해, 비교 대상이 될 열등한 타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당시 대량으로 인쇄되어 쏟아져 나온 ‘니시끼에(錦絵, 다색 목판화)’나 각종 일간지의 시사 풍자화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매체들은 조선을 고루하고, 야만적이며, 문명화되지 못한 전근대적인 국가로 끊임없이 조롱하고 왜곡했다.

이러한 시각적 선전물들은 일본 대중의 마음에 근거 없는 우월감을 부추겼고, 서구 열강을 흉내 내는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미개한 조선을 문명화시키는 성전(聖戰)’으로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깊은 사상적 문명이 부재했기에 일본은 서양의 효율적인 근대 국가 시스템과 제국주의의 선전 도구를 그토록 맹목적이고 재빠르게 모방할 수 있었고, 결국 아시아의 이웃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것이다.

와카슈야도(젊은이 합숙소)와 관동대지진, 은폐된 야만의 그림자

일본 사회 특유의 집단적 기질을 설명하기 위해 시바 료타로가 끌어들인 ‘와카슈야도(젊은이 합숙소)’의 비유는, 일본 근현대사가 보여준 통제 불능의 폭력성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다.

와카슈야도는 사상이나 도덕적 뼈대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맹목적인 소속감과 본능적인 폭력성에 맹렬하게 반응하는 남방계적 기풍의 산물이다. 기성세대조차 손을 대지 못했던 이 통제 불능의 에너지는 일본 사회 내부에 깊숙이 잠재된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이러한 에너지는 막부 말기에는 세상을 뒤엎는 혁명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듯 보였으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법과 이성을 무시하고 질주하는 제어되지 않는 ‘군부(軍部)’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결국 아시아 전체를 참혹한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통찰은 단순히 과거의 풍습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 일대에서 자행된 참혹한 조선인 학살의 심리적 배경을 꿰뚫어 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지진이라는 국가적 붕괴와 위기 상황 속에서, 일본 사회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확고하고 보편적인 인류애나 이성적인 문명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오직 맹목적인 ‘국가주의’와 배타성만을 주입받은 대중은 국가 권력의 방조 아래 스스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했다.

그리고 마치 폭주하는 와카슈야도의 무리들처럼, 아무런 죄도 없는 이질적인 타자(조선인)들을 향해 가장 집단적이고 야만적인 폭력성을 스스럼없이 발현했다. 이것은 결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이성적인 책임 소재는 사라지고, 가해자들끼리 "다 같이 한 일이니 우리가 안고 가자"며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특유의 모호한 융화주의(다테마에와 혼네)는 이후 국가가 조직적으로 이 학살의 진실을 은폐하고 기억을 왜곡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유교 특유의 인륜과 책임감이 결여된 자리, 무책임한 융화주의로 포장된 일본 사회의 이면에는 이처럼 타자를 향한 끔찍하고 통제 불능의 야만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바 료타로 스스로가 대담에서 지적한, 철학 없이 효율만 남은 ‘문명 없는 문화’가 낳은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한 민낯이라 할 수 있다.

절대적 가치관의 붕괴와 역사적 성찰의 과제

1975년이라는 위태로운 시대적 교차점에서 두 지식인이 길고 깊은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양국 모두를 향한 뼈아픈 반성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오직 ‘국가’라는 새로운 종교적 허상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던 일본은, 패전이라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도 다시 ‘경제 부흥’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 아래 과거에 대한 철저한 성찰 없이 앞만 보고 폭주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공해병과 배금주의라는 또 다른 형태의 인간성 상실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반면, 오직 유교적 명분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만이 옳다고 맹신하여 외부 세계에 눈을 감았던 조선은, 망국이라는 쓰라린 고통을 경험하고 해방을 맞이한 이후에도 여전히 이념이라는 새로운 절대 잣대에 갇혀 국토가 분단된 채 동족끼리 끔찍한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달수는 이 대담을 통해, 세상에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뼈저린 깨달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 비록 얄미울지언정 일본이 보여준 그 ‘적당주의’와 상황에 맞게 껍질을 바꾸는 ‘유연성’ 속에서 합리적인 생존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화답하듯 시바 료타로 역시, 일본이 자랑하는 그 유연함이라는 것이 실은 지켜야 할 굳건한 철학이나 도덕적 깊이의 부재에서 온 얄팍함에 불과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온갖 시련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조선인이 지닌 꼿꼿한 자아와, 인간관계의 끈끈한 인륜의 깊이에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한다.

결국 이 대담이 우리에게 남기는 묵직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근대 한일 관계사를 단순히 '선량한 피해자'와 '악랄한 가해자', 혹은 '선과 악'이라는 납작하고 이분법적인 도식으로만 재단해서는 결코 온전한 역사적 진실에 가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민족이 천년에 걸쳐 형성해 온 고유한 기질적 차이, 그리고 각각이 품고 있던 문명사적 한계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직시해야만 비로소 얽히고설킨 지난 100년의 참혹한 역사를 제대로 해체하고 이해할 수 있다.

역사는 단순히 분노하기 위해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망각의 늪에 흩어진 1차 사료들을 치밀하게 발굴하고, 은폐된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여 흔들리지 않는 아카이브를 구축해 나가는 작업.

그것은 어느 한쪽의 편협한 민족주의나 감정론에 매몰되지 않고, 한일 양국 정신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층까지 냉철하게 파고들었던 이 두 지식인의 치열한 반성과 성찰 위에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대화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그들이 던진 이 아프고 날카로운 성찰의 질문들에 온전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자 주: 이 글은 일본에서 발행된 『계간 삼천리(季刊 三千里)』 3호(1975년 8월)에 수록된 좌담회, 「반성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번역하고 다듬은 것이다. (이규수/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재일사학자 김달수 선생(왼쪽)과 일본의 국민작가로 알려진 시바 료타로(오른쪽)이 1975년 계간 삼천리(季刊 三千里)』 3호(1975년 8월)에 게재할 「반성의 역사와 문화」주제 좌담회를 위해 얼굴을 맞댔다. [사진-이규수 제공] 
개국과 ‘정한론’

□ 김달수[1]: 올해로 강화도 조약[2]이 체결된 지 딱 100년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조약 체결이라는 역사적 사건 자체보다, 당시 양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의식’이라는 심층적인 측면에서 이 역사를 짚어보고 싶습니다.

19세기 후반, 일본 막부 말기와 조선 왕조 말기는 똑같이 서구 열강의 거대한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으며 비교적 유연하게 대처했죠.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일본도 처음에는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尊皇攘夷)[3]를 내세웠으나, 어느새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구호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천황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명분만 남아 재빠르게 근대화로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조선은 철저히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전국 팔도에 척화비[4]를 세워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며 결사항전을 외쳤죠. 실제로 1866년에는 대동강으로 들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고, 강화도를 점령했던 프랑스 함대를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외세에 맞서는 기개는 훌륭했지만, 서양 문물을 부드럽게 흡수한 일본과 달리 우리는 외래 문화를 늘 ‘대결’ 구도로만 대했다는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러한 경직된 사고방식에 바로 조선의 치명적인 한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 김달수(金達寿, 1919~1997)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 1세대 소설가이자 역사학자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아 재일조선인의 고단한 삶과 민족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문학 작품을 발표했으며, 고대 한일 교류사를 깊이 연구하여 『일본 속의 조선 문화』라는 기념비적인 저서를 남겼다. 이 대담에서는 조선의 유교적 전통에 대한 애증 어린 성찰을 보여주었다.(역자 주)

[2] 강화도 조약(1876) :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불법 침입해 무력 충돌을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1876년(고종 13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며,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일본에 영사 재판권(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내어준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을 기점으로 조선은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 본격적인 개항기에 접어들었다.

[3] 존왕양이(尊皇攘夷) : ‘임금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본래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 이념에서 유래했다. 19세기 중반 일본 막부 말기(바쿠마쓰)에 서양 열강의 압력이 거세지자, 무능한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교토의 천황을 중심으로 외세를 몰아내자는 강력한 정치적·민족주의적 구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정부를 수립한 주역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곧바로 ‘양이’를 폐기하고, 적극적인 서양 문물 수용과 개국 정책으로 돌변했다.

[4]  척화비(斥和碑) : 흥선대원군이 서양 열강의 침략을 배격하고 쇄국에 대한 굳은 의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1871년(고종 8년) 전국 각지의 주요 도로변에 세운 비석이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강경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역자 주)

□ 시바 료타로[5]: 한일 양국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일본인으로서 참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달수 씨와 이렇게 편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지만, 역사 앞에서는 마냥 편하게만 웃을 수 없다는 씁쓸함을 느끼곤 하죠 (웃음). 서구 제국주의가 군함의 형태로 동양에 몰려왔을 때, 한·중·일 삼국이 다 같이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연대했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꽤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갔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은 아주 강력한 수면제를 먹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 막부 말기의 정치가인 가쓰 가이슈조차 이를 몹시 안타까워하며 “조선은 우리의 큰 스승인데, 스승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아서는 안 된다. 일본·조선·중국이 삼국 동맹을 맺는 것만이 아시아가 살길이다”라고 주장했었죠.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 사회를 휩쓴 ‘정한론(征韓論)’[6]은, 사실 새로운 시대를 연 직후의 내부 모순과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철저한 정략적 기만이었습니다.

당시 외교관이었던 모리야마 시게루가 남긴 말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새 시대가 열렸지만 권력에서 밀려난 무사들의 불만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이들을 한반도로 보내 내란의 불씨를 밖으로 빼내고, 동시에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자. 일거양득 아닌가.” 지배층 입장에서는 대단히 교묘하고도 기막힌 구상이었던 셈입니다 (웃음).

하지만 제가 봐도 기가 막힌 것은, 일본이 근대화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한 생각이 ‘이웃 나라 조선을 침략하자’였다는 겁니다.

보통은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잉여 상품을 처분할 시장이 필요할 때 다른 나라를 넘보게 마련인데, 당시 일본은 그런 경제적 기반조차 없이 오직 허황되고 맹목적인 기세만으로 조선을 덮쳤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 때와 다를 바 없는 야만성이었죠.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장하며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핑계일 뿐 결국은 약탈을 위해 남의 나라 부산으로 쳐들어간 것에 불과합니다.

[5]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1923~1996) :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소설가이자 수필가다. 『료마가 간다』, 『언덕 위의 구름』 등 전국시대와 막부 말기,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방대한 스케일의 소설을 집필하여 일본의 국민 작가로 불린다. 그의 역사관을 일컬어 ‘시바 사관(司馬史観)’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대중의 역사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대담에서는 일본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일본 특유의 체질적 특성을 예리하게 꼬집어냈다.(역자 주)

[6] 정한론(征韓論) :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70년대 초반, 일본 내에서 제기된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하자’는 주장이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이 일본의 새로운 외교 문서를 거부하며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유신 이후 특권을 잃고 불만에 가득 찬 몰락 무사(사족) 계급의 시선을 해외로 돌려 내란을 막고 새 정부의 기틀을 다지려는 정략적 목적이 컸다.(역자 주)

□ 김달수: 당시 아시아 전체가 그야말로 격동의 혼란기였습니다. 중국에서는 태평천국 운동이, 인도에서는 세포이 항쟁이 터졌죠. 조선의 상황은 더 처참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7년 동안 국토가 참혹하게 짓밟힌 것도 모자라 청나라의 침략(병자호란)까지 받았습니다. 극심한 기근과 전염병이 겹치며 백성들은 유민으로 전락했고, 조선 말기에는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흥선대원군이라는 호랑이같이 강력한 정치인이 등장했습니다. 대원군은 문학이나 예술적 안목도 뛰어나고, 여러모로 참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 시바 료타로: 참 매력적인 인물이죠. 저는 흥선대원군이든 명성황후(민비)든 나름의 역사적 역할이 있었다고 높게 평가하는 편입니다.

□ 김달수: 대원군은 철저한 쇄국정책과 민족 단결을 내세워 민중을 하나로 묶었고, 그 힘으로 서양 열강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추가 대원군에서 명성황후 측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선 특유의 치열한 파벌 싸움이 또다시 터졌고, 일본은 이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정한론으로 들끓었지만, 조선은 내부 권력 다툼에 빠져 제대로 대처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가쓰 가이슈[7]는 “조선에 내란이 일어나면 일본의 사이고 다카모리[9] 같은 영웅이 나타날 테니 일본은 그와 손잡아야 한다”고 기대했지만, 조선의 내란 격이었던 동학 농민 운동은 외부의 개입으로 미숙하게 싹이 잘리고 말았죠. 결국 정국을 주도한 것은 대원군과 명성황후였고, 그들을 둘러싸고 청나라, 러시아, 일본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조선 스스로 근대화할 수 있었던 천금 같은 기회는 고뇌 속에서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7] 가쓰 가이슈(勝海舟, 1823~1899) : 에도 막부 말기의 뛰어난 해군 제독이자 정치가다. 막부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도쿠가와 가문의 평화로운 권력 이양(무혈 개성)을 이끌어내어 에도(현 도쿄)가 끔찍한 전화에 휩싸이는 것을 막았다. 시바 료타로가 언급한 회고록 『빙천청화』에서 그는 메이지 정부의 섣부른 대외 팽창주의(정한론)를 비판하며, 아시아 열강의 압박에 맞서 한·중·일 연대를 강조했던 선각자적 면모를 보였다.

[8]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1828~1877) :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현) 출신의 무사로, 메이지 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주역인 ‘유신 3걸’ 중 한 명이다. 유신 이후 정한론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오쿠보 도시미치 등 온건 개화파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낙향했다. 이후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을 이끌고 세이난 전쟁(1877)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자결했다. 정한론을 부르짖었음에도 일본 내에서는 의리와 인정을 갖춘 비운의 영웅으로 흔히 소비되는 인물이다. (역자 주)

□ 시바 료타로: 일본은 모처럼 유신이라는 거대한 혁명을 이뤄냈지만, 어떤 보편적인 세계 시민적 철학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는 뼈아픈 불운이 있었습니다. 만약 19세기 중반에 장 자크 루소의 사상 같은 것이 일본에 먼저 뿌리내렸다면 역사가 훨씬 재미있어졌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일본은 존왕양이에서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껍데기만 쏙 빼고 근대화로 직행했습니다. 철학적 깊이나 세계관이 텅 비어 있었으니, 그저 ‘남의 나라라도 빼앗고 보자’는 천박한 제국주의적 발상밖에 나오지 않았던 겁니다.

일본이 눈을 떴을 때 서양은 이미 제국주의의 약육강식 시대였습니다. 이 강렬한 첫인상이 근대 일본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체질을 굳혀버렸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을 강제로라도 우리 편으로 만들어 방패막이로 쓰자는 것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이었습니다. 2천 년 동안 섬나라에 고립되어 있던 일본인들의 몽상적인 콤플렉스가 빚어낸 비약이었죠.

어쨌든 그 맹목적이고 야만적인 에너지가 무방비 상태의 조선을 향해 폭발한 것입니다. 합리적인 자본주의 시장 개척도 아니고, 그저 폭력적인 기세만으로 쳐들어가 조선인들의 가슴에 영원한 원한을 남겼으니, 조선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악질적인 이웃이 없을 겁니다.

□ 김달수: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거대한 망상이었습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도쿠토미 소호조차 이를 강하게 비판했죠.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사이고 다카모리 역시 철저히 고립된 쇄국 상태에서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그런 몽상에 빠졌던 것인데, 도대체 그런 허황되면서도 거대한 몽상이 일본의 어디에서 비롯되는 건지 궁금해집니다.

□ 시바 료타로: 그건 에도 시대 지식인들이 방구석에서 지구본을 굴리며 벌이던 탁상공론에서 시작된 겁니다. 예전부터 일본의 지식인들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일본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크기를 두고 논쟁을 벌이곤 했죠.

예를 들어 사이고 다카모리의 스승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늘 “서양 세력이 몰려오면 아시아는 머지않아 다 잡아먹힐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는 중국 지도 병풍을 펼쳐놓고 태평천국군이 점령한 곳을 표시해가며, “중국이 무너지면 아시아는 연쇄 도산한다. 그러니 규슈의 다이묘들은 뉴질랜드로 가고, 도호쿠 다이묘들은 연해주를 거쳐 만주를 방위해야 한다”는 식의 터무니없지만 원대한 구상을 폈습니다.

당시 사가 번의 다이묘였던 나베시마 간소 역시 연해주 방어의 중요성을 외치며 수도를 서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비록 막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변방의 영주들이긴 했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헛똑똑이 서생들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사회 저변에는 예로부터 이런 몽상적이고 거대한 정략론이 쉽게 오갈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전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유교(명분)와 법가(실용)의 문제

□ 김달수: 조선이 유럽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일본보다 훨씬 늦게 전해진 천주교를 통해서였습니다. 외부 세계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깨어있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천주교 박해로 탄압받고 말았죠. 게다가 그 천주교마저도 중국을 거쳐서 들어왔습니다.

즉, 외부를 바라보는 조선의 시선은 늘 자신들을 대국으로 짓누르던 ‘중국’이라는 좁은 창틀에 갇혀 있었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영주들은 지구본을 돌려보며 세계 정세를 논했지만, 조선은 그런 일도 없었고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을 때 이를 위협으로 느끼고 왕에게 경고한 학자도 있었지만, 조정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죠. 그렇게 꽉 막혀 있었던 것은 철저한 ‘유교 만능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유교는 본래 중국의 사상인데, 조선은 본가인 중국보다도 그 명분과 질서에 훨씬 더 지독하게 얽매여 있었으니까요.

□ 시바 료타로: 유교를 창시한 중국보다 조선이 오히려 유교의 ‘모범 답안’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지요. 국가 시스템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당시 베이징에 온 영국이나 일본의 외교관들은 ‘총리아문(외무부)’[9]이라는 관청에서 교섭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 온 외교 사신들은 ‘예조(예법을 관장하는 부서)’를 거쳐야 했죠.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예조를 거치는 것은 스스로를 속국으로 낮추는 행위로 보였지만, 조선은 중국 황제와 조선의 왕이 예법에 따른 형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게다가 이러한 동아시아의 예법 질서를 깨는 자는 미개한 야만인이라는 의식이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아주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일본의 외교관이나 언론인들이 조선을 오해하게 된 결정적인 출발점입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일본이 조선 조정에 알렸을 때, 조선이 몹시 격노하지 않았습니까. 동아시아의 예법 질서로 보면 그 분노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죠. 어제까지 야만인 취급하던 일본의 지배자가 갑자기 정체불명의 ‘황제(황, 칙)’라는 단어를 쓰며 문서를 보내왔으니까요. “황제라는 칭호는 중국의 천자에게만 쓸 수 있는 것인데, 오랑캐인 너희 왜인들이 함부로 쓰다니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라며 분노했던 겁니다. 안 그래도 일본을 예의도 모르는 야만인이라며 멸시해 왔는데, 그 야만인이 황제 행세를 하니 조선으로서는 세계관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예법 질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일본과의 뼈아픈 충돌이었습니다.

일본은 그 예법을 몰랐기에, 결국 미국 페리 제독이 자신들에게 강요했던 방식 그대로 무력을 앞세워 강화도로 밀고 들어간 것입니다.

[9] 총리아문(總理衙門)과 예조(禮曹) : 근대 외교를 받아들이는 양국의 태도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관청 이름이다. 청나라는 제2차 아편전쟁 패배 후 서양 열강의 요구에 따라 1861년 외교를 전담하는 근대적 기구인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을 신설했다. 반면 조선은 근대적 외교 부서를 따로 두지 않고, 전통적인 육조 체제 중 외교와 예법, 제사를 담당하는 ‘예조’에서 서양 및 일본 사신을 맞이했다. 이는 조선이 서양의 근대적 평등 외교 관념이 아니라, 여전히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사대교린과 예교 질서의 틀 안에서 외교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역자 주)

□ 김달수: 조선은 스스로를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렀습니다만, 사회 구조나 사고방식 측면에서 보자면 글을 아는 문관을 숭상하고 칼을 쓰는 무관은 항상 멸시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일본 소학교에서 “글공부에만 빠져 나약해지는 것(문약)은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다”라고 배웠습니다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이야말로 그 ‘나약함’의 표본 그 자체였지요.

□ 시바 료타로: 그건 일본식의 시각일 뿐, 조선에서는 문(文)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였기에 애초에 ‘나약하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제가 교토의 ‘니조 진야’라는 오래된 저택에 관해 신문에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과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뒤 상인으로 신분을 감추고 살았던 작은 영주(오가와 스케타다)가 지은 저택입니다.

저는 칼럼에 “그가 차(茶)를 달여 마셨으니 문화적 소양이 깊은 훌륭한 다이묘였을 것”이라 썼는데, 정작 그 저택의 현재 주인이 “문화인이라니 무슨 모욕이냐! 우리 조상은 무술이 대단히 뛰어난 훌륭한 무사였다!”라며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웃음).

이처럼 문(文)과 무(武)를 바라보는 일본인의 의식 차이는 과거와 현재의 아시아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1920년대 중국에서 나온 “유교를 내쫓지 않고서는 중국을 구할 길이 없다”는 논문을 학생 시절부터 읽었고, 유교를 비판해야만 중국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철저히 힘과 실용을 중시하는 무(武)의 나라에서 태어났기에, 유교가 대체 어떤 것인지 피부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진짜 무게감은 달수 씨나 조선인 친구들을 통해 비로소 배운 셈이지요 (웃음).

지금 중국에서는 역사를 유가(명분과 도덕)와 법가(실용과 힘)[10]의 투쟁으로 파악하여 법가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측천무후를 칭송하고 진시황을 최고라 말하죠. 거대한 문명국이니 서양의 마르크스주의 논리로만 자국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을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가’란 단순히 옛날 책을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치가’를 뜻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일본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법가였습니다. 일본 역사를 주름잡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영웅들은 유교의 ‘유’ 자도 모르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들이었죠.

반면 조선은 고도의 도덕과 명분(문명)을 치밀하게 쌓아 올린 나라입니다. 이 근본적인 체질의 차이가 양국이 서양을 맞이하여 문을 열었을 때 정반대의 운명을 가르게 한 것입니다.

[10] 법가(法家)와 유가(儒家) :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기원을 둔 양대 통치 철학이다. 유가는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며 도덕, 인애(仁愛), 예법을 통한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삼는다. 반면 법가는 한비자로 대표되며,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통제하기 위해 엄격한 법(法)과 군주의 권력을 앞세운 실용적이고 부국강병적인 통치를 주장한다. 대담에서 시바 료타로는 명분과 도덕을 숭상한 조선과 달리, 일본의 통치자들은 철저히 힘과 실용을 중시하는 법가에 가까웠다고 분석했다.(역자 주)

□ 김달수: 게다가 유교는 조선의 모든 백성, 심지어 농민들의 생활 감각 구석구석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듯 본가인 중국보다 분가인 조선이 더 지독해졌다는 문제도 있죠. 중국에서 들어온 사상이지만 서민들의 뼛속까지 침투한 셈인데,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인 우리가 여전히 제사를 정중히 모시는 것도 그런 뿌리 깊은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모든 문화가 철저히 부정당했기에, 제사를 정성껏 지냄으로써 일종의 민족적 저항감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지배자들 입장에서는 조선인들이 현실 저항 대신 그런 제사에나 매달려 있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겠지만요.

중국의 사상가 루쉰이 공자를 맹렬히 비판했습니다만, 솔직히 저희는 지금도 감각적으로 공자를 완전히 배척하는 데는 강한 거부감이 듭니다. 그 정도로 유교가 피와 살처럼 우리 몸에 완전히 녹아들어(혈육화) 있는 셈인데, 이 점이 근대를 살아가는 조선인에게 있어 대단히 뼈아픈 숙제인 것이지요.

□ 시바 료타로: 중국인들에게도 그 점은 엄청난 족쇄일 겁니다. 일본이 불과 15년 만에 초고속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 규모가 작은 섬나라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반면 중국은 덩치가 너무 커서 변화가 둔했고, 끊임없이 군벌들이 난립해 늘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쑨원이 애써 혁명을 일으켜 놓아도 위안스카이 같은 자가 나타나 도로 황제가 되려 했죠.

결국 아편전쟁부터 마오쩌둥이 베이징을 차지할 때까지 무려 110여 년이나 걸렸습니다. 그토록 오랜 혼란을 겪은 이유도, 앞으로 중국의 문명을 결정짓는 요소도 결국은 그 끈질긴 유교의 문제와 얽혀 있다고 봅니다.

제가 최근 중국을 여행하며 중국의 변화를 크게 긍정하게 되었습니다만, 약간의 씁쓸한 의문은 남았습니다. 상하이의 한 소년궁(어린이 시설)에 갔더니, 공자의 얼굴이 그려진 과녁을 매달아 놓고 대여섯 살 된 꼬마들이 활을 쏘며 맞추기 경쟁을 하고 있더군요.

그걸 보면서 ‘단 하나의 이념만을 맹신하도록 교육받은 저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다른 가치관을 마주하면 대체 어떤 혼란을 겪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중국인들은 참 거대한 민족이지만 하는 짓은 무서울 정도로 유치하다 싶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해 세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수천 년간 아시아를 병들게 한 유교의 뿌리가 깊었다는 처절한 절박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 김달수: 중국은 5천 년 역사 동안 대단히 복잡한 삶의 방식을 이어온 셈인데, 그것을 하루아침에 강제로 단순화시키려니 탈이 나는 거겠죠. 우리에게 유교는 이미 피와 살처럼 굳어져 있기에 그것을 깨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과연 그런 물리적인 타파만으로 진정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제가 좀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요 (웃음).

□ 시바 료타로: 일본인에게 유교란 그저 책상머리에서 읽는 ‘한문 책’에 불과했지만, 중국인이나 조선인에게는 자기 몸의 살갗이고 피였기 때문에 이 껍질을 벗겨내는 데 엄청난 고통을 치르고 있는 것이지요.

일본인들이 중국이나 조선을 보며 흔히 오해하는 이유는, 유교가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전혀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를 부정하는 중국을 야만적이라 비난하거나, 조선인들이 힘(武)을 기르지 않고 글공부에만 빠졌던 것을 한심하다고 쉽게 조롱하곤 하죠.

유교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나는 이 국가의 국민이다”라는 근대적 시민 의식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유교 체제 아래서는 “나는 자랑스러운 조선 민족이다”라는 핏줄에 대한 긍지는 아주 강렬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끈끈한 민족주의를 이해하지 못하죠. 하지만 그런 민족적 긍지만으로는 ‘근대 국가’라는 괴물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근대 국가란 참으로 끔찍한 시스템이어서, 국가가 발행한 1전 5리짜리 징집 엽서 한 장만 날아오면 사람들을 뤼순 요새 같은 사지로 몰아넣어 죽게 만들 수 있어야 하거든요.

“나는 국가의 부속품인 국민이다”라고 맹신하는 인간을 찍어내는 것이 바로 근대 국가인데, 이런 ‘근대의 미신’이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작동했습니다.

이 미신이 잘 작동했다는 것은, 명분과 도덕이라는 과거의 가치를 질질 끌고 있던 조선이나 중국보다 훨씬 재빠르고 무자비하게 힘의 논리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보니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웃에 살던 일본 놈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눈빛이 돌변해 잽싸게 야만적인 침략을 저지르는 상황이 “대체 저놈들은 근본도 없이 뭐 하는 놈들이냐” 하는 식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제 생각이 다소 위험한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는 오직 ‘국가’라는 괴물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에도 시대까지 일본은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인륜이나 도덕적 뿌리가 대단히 옅었습니다. 주군에 대한 충성이든, 한약 도매상 주인에 대한 종업원의 충성이든, 오직 상하 관계의 수직적인 ‘충성(忠)’만이 존재했죠. 조선인들이 흔히 보여주는 의리나 깊은 ‘우정’ 같은 수평적 유대감은 일본 무사도에 없습니다.

그러던 사회가 하루아침에 사농공상 계급이 철폐되고 “이제 너희는 모두 천황의 국민이니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는 논리로 대체되었습니다.

유교적 문명의 뿌리가 얕고 도덕적 줏대가 없었던 일본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거대한 허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사람들을 집어삼켰던 것이죠.

근대 국가라는 괴물은 유럽이 발명한 것이지만, 그것을 맹목적으로 재빨리 흉내 낼 수 있는 위험한 체질이 일본에 있었고, 불행히도 그것이 폭주하면서 아시아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민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양이(오랑캐 배척)가 사라진 의미

□ 김달수: 젊은 시절에는 우리 조상들이 글공부(文)에만 빠져 왜 힘(武)을 기르지 않았나 원망하기도 했습니다만, 저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무력보다는 결국 문(文)을 택하게 되네요 (웃음).

무력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단순하지만 인간은 훨씬 복잡한 존재이므로, 문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교라는 낡은 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문화적 가치에 무게를 두고 학문을 존중했던 그 알맹이만큼은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 시바 료타로: 방금 말씀하신 조선인 특유의 끈끈한 인륜, 과즙이 풍부한 과일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운 인간관계는 단순히 ‘유교의 잔재’라고 깎아내리기엔 대단히 소중한 가치로군요.

□ 김달수: 저는 일본에서 자랐으니 일본의 근대적인 감각이 몸에 배었을 법도 한데, 여전히 조선의 대가족주의적인 기질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문단에서 활동할 때, 친구들과 다 같이 술을 마시고 이른바 ‘더치페이(각자 부담)’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거든요.

조선인들의 감각으로는 연장자나 돈을 낼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밥값을 계산하는 것이 당연지사니까요. 물론 더치페이에 익숙해지면 그보다 합리적이고 편리한 것도 없지요. 머리로는 스스로 근대인으로서 뒤처져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감각적으로는 여전히 저항감을 느꼈습니다.

□ 시바 료타로: 요즘 들어 드는 생각입니다만, 일본과 조선은 아주 먼 고대에는 문화적 뿌리를 공유했던 쌍둥이 같은 민족이었으면서도,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 계기가 바로 유교가 사회에 얼마나 짙게 스며들었느냐의 차이였다고 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일본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남방계 풍습이 섞여 들어와 있었다는 겁니다.

서일본 지역에 있던 ‘와카슈야도(젊은이들의 합숙소)’[11]가 대표적인 흔적이죠. 마을 어른들은 이 혈기 왕성한 젊은이 집단을 두려워하면서도 일종의 신성한 존재로 대우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숙소에서 우두머리에게 자체적인 윤리 교육을 받고, 마을에 산불이 나면 목숨을 던져 불을 껐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평소에 아무리 난폭하게 굴어도 어른들은 묵인하고 감내했죠. 술값을 각자 내는 것이나, 도쿄 문단에서 선후배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교류하는 것도 알고 보면 이 ‘와카슈야도’ 특유의 얽매임 없는 기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곳에는 피로 맺어진 끈끈한 씨족 제도가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말레이시아 같은 남방 지역에서는 사촌끼리도 친척인지 갸우뚱할 정도로 핏줄의 개념이 옅은데, 그런 옅은 씨족 사회의 특징이 서일본 지역에 나타납니다.

반면 도호쿠나 간토(동일본) 쪽으로 가면 조선식 씨족 사회의 흔적이 지금도 촌락 곳곳에 남아 있죠. 그래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열 때 무사들이 일족을 이끌고 씨족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인데, 간사이(서일본) 지방에서는 남방적 기질 때문에 그런 혈연적 결속이 불가능했습니다.

[11] 와카슈야도(若衆宿) : 15세 무렵의 소년들이 성인식을 치른 후 마을의 ‘와카슈(젊은이)’ 무리에 가입하여 결혼할 때까지 이곳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이들은 숙소에 머물며 마을 공동체의 규율을 배우고 치안 유지, 소방, 제사 등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강력한 연대감을 형성했다. 외부 권력이나 마을 어른들조차 함부로 통제하기 어려운 독자적이고 거친 에너지를 지닌 무리였다.(역자 주)

□ 김달수: 하지만 역사적으로 기나이(간사이) 지방은 고대 일본에서 씨족 제도가 가장 먼저 발달했던 곳 아닙니까.

□ 시바 료타로: 그곳은 백제와 신라에서 온 이주민들이 정착하며 씨족 제도를 뿌리내린 곳입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남방계라는 전혀 다른 문화적 지층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이 고대부터 일본과 조선의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든 원인일 겁니다.

□ 김달수: 그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결국 역사 속에서 빚어지는 것인데, 일본은 헤이안 시대 이후, 조선은 통일신라 이후 각자의 뚜렷한 정체성이 굳어지기 시작하죠.

고대에는 완전히 동일한 문화를 공유했으면서도 천수백 년을 거치며 두 민족이 이토록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어로는 사촌을 넘어가는 촌수를 명확히 따지기 어렵지만, 조선에는 ‘4촌’, ‘5촌’처럼 핏줄을 구별하는 매우 편리하고 뚜렷한 단어들이 있거든요.

□ 시바 료타로: 조선에서는 대단히 역사가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린 개념이지요.

□ 김달수: 지금도 8촌이니 12촌이니 촌수를 따지고, 평소 사이가 나쁘든 좋든 핏줄로 얽힌 친척이라는 혈연적 유대감이 아주 강합니다. 종전 직후, 재일조선인들은 반체제 저항 세력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일본 공산당에 꽤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산당 당수였던 도쿠다 규이치가 죽은 남동생의 아내(제수)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인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유교적 감각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패륜이니까요.

역시 일본인의 사고방식에는 그런 도덕적 굴레를 훌쩍 뛰어넘는 무서운 유연함과 조화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해 낸 원동력이며, 막부 말기에 그토록 핏대를 세우며 부르짖던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존왕양이)’는 구호가 어느 순간 싹 사라져 버렸는데도 일본인 스스로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겠지요.

□ 시바 료타로: 그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 교토에 새 정부 관청(다조칸)이 세워졌을 때 한 무사가 찾아가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고 하죠. “그래서,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양이(攘夷)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말입니다 (웃음).

또 하나의 이야기는, 메이지 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의 노년에 한 역사학자가 물었습니다. “이노우에 선생처럼 냉철한 분조차 젊은 시절엔 왜 그리 핏대를 세우며 존왕양이를 부르짖었습니까?” 그러자 이노우에가 “그 시절엔 일단 그러지 않으면 안 되었다”라고 대답했다는군요 (웃음).

요컨대 그들에게 존왕양이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철칙이 아니라,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했다는 뜻입니다.

□ 김달수: 참 대단하네요.

□ 시바 료타로: 대단하다기보다는 일본인들이 유교의 정교한 논리를 마음속 깊이 내면화하지 못했다는, 다시 말해 논리적 사고에 미숙했다는 뜻일 겁니다. 주자학을 익혔다 해도, 직업적인 유학자 정도나 되어야 까다로운 이론을 따졌고 그나마 학맥도 전국시대에 끊겨버렸습니다.

에도 시대에 이름을 날린 대학자들의 학력도 들여다보면 거의 독학이었습니다. 조선의 퇴계 이황처럼 위대한 스승에게서 정통성을 이어받는 굳건한 학맥이 없었기에, 일본의 한학은 철저히 개인의 독학에 의존한 자수성가형 학문에 불과했습니다.

□ 김달수: 그런 사상적 빈약함이 메이지 이후 일본 근대화 과정의 핵심인 ‘천황제’ 문제와는 어떻게 연결되는 겁니까.

□ 시바 료타로: 일본의 혁명 이데올로기가 고작 그 빈약한 ‘존왕양이’밖에 없었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존왕양이는 본래 중국 송나라가 오랑캐에게 쫓겨 남쪽으로 피난 가면서 생겨난 사상으로, 외세에 나라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탄식과 분노가 담겨 있어 정치 권력의 정통성을 따지는 데 아주 까다롭게 작용합니다.

막부 말기, 일본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할 사상적 무기가 이런 빈약한 주자학의 존왕양이밖에 없었죠. 그러다 보니 “천황을 받들자(존왕)고 하는데, 그럼 그 왕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이 생겼고, 결국 교토에 머물던 천황을 끌어내는 것으로 귀결된 것입니다.

만약 존왕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메이지 정부는 굳이 천황이라는 상징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했을 겁니다. 만약 19세기에 장 자크 루소의 공화주의 사상이 일본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면, 메이지 초기에 천황을 일시적으로 이용했더라도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공화제로 넘어갔을지도 모르죠. 그만큼 메이지 유신을 이끈 철학적 뼈대가 너무나도 앙상했던 겁니다.

□ 김달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에 시찰하러 갔을 때, 독일 학자가 “당신네 나라에는 천황이라는 참 훌륭한 구심점이 있지 않소”라고 조언하자마자 일본은 얼른 이를 받아들여 천황을 절대적인 신으로 만들고 국민을 강력하게 통합해 냈습니다.

철학적 논리를 떠나서, 그 실용적인 판단력과 불도저 같은 추진력만큼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꼿꼿한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인이라면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 시바 료타로: 일본 사회 특유의 느슨함, 장기판의 ‘말’이 훌쩍 칸을 건너뛰듯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행동하는 기질 덕분일 겁니다.

일본인들이 지금까지 무언가를 이뤄낸 방식을 보면, 예컨대 마을에 쓰레기 처리장 같은 혐오 시설을 지을 때 반대가 심해도 “일단 한 번 지어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고치자”고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라면 반대파와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여 훌륭한 논문집 한 권 분량의 명분과 이론은 완성하겠지만, 정작 쓰레기 처리장은 영원히 짓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치밀한 논리보다는 “명분은 됐고, 일단 해보자”는 사쓰마(규슈 남부)형의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이 일본의 근대화를 밀어 올린 힘인 셈이죠.

젊은이들의 합숙소(若衆宿, 와카슈야도)와 예의범절

□ 김달수: 조선은 문화를 바꿀 때 옛것을 철저히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대결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반면 일본은 무사들이 권력을 잡아도 천황 가문을 멸망시키지 않고 상징으로 남겨두는 식이죠.

근대 일본 사학자들이 조선을 두고 ‘독자적인 역사도 문화도 없는 속국’이라며 철저히 깎아내렸지만, 정작 천황이 머무는 궁궐에는 신라와 백제의 신을 모시는 사당이 버젓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전인 『고지엔』 초판을 봐도, 일본 건국기념일에 맞춰 한국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흑백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본식 융화가 참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 시바 료타로: 맞습니다. 일본인들은 애초에 ‘철저한 논리’라는 것 자체를 별로 믿지 않습니다.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12]만 봐도 그렇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벌어진 전쟁보다 규모가 컸지만, 사실 뒤에서는 적군 장수들끼리 “내일 네가 배신해라” 하고 대본을 미리 다 짜놓은 상태였습니다. 서양이나 조선의 꼿꼿한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속임수와 배신을 써서라도 피를 덜 흘리면서 ‘이제 천하의 주인이 도쿠가와로 바뀌었다’는 걸 세상에 알리기 위한 거대한 ‘연극’이 필요했던 겁니다.

융통성 없이 힘으로만 부딪히기보다는, 미리 정치적으로 결론을 내놓고 군사적인 쇼를 벌인 셈입니다.

[1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1600)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패권을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이 맞붙은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이다. 팽팽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단 하루 만에 끝난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개창하고 260여 년의 평화 시대를 열었다. 시바 료타로는 역사적 운명을 가른 이 거대한 전투조차 사전에 밀약과 배신이 치밀하게 기획된 일종의 거대한 ‘정치적 연극’이었다며,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실용주의를 예리하게 짚어냈다.(역자 주)

□ 김달수: 명분과 예의에 죽고 사는 조선인들은 그런 교묘한 꼼수를 부리지 못합니다. 막부 말기, 일본은 미국 페리 제독의 함포 외교에 굴복해 개항했는데 그 수법을 고스란히 베껴서 조선의 강화도로 쳐들어갔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강화도 조약을 맺으러 떠나는 일본 전권대사에게 당시 미국 공사가 페리 제독의『일본 원정기』책을 선물하며 응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의와 논리를 중시하는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끔찍하고 모욕적인 야만 행위는 없죠.

□ 시바 료타로: 정말 만화에나 나올 법한 짓을 한 셈입니다.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이 유럽인과 결이 비슷하다면, 일본은 확실히 길들여지지 않은 다혈질적인 남방계 기풍에 가깝습니다.

규슈 출신의 제 친구가 어릴 적 “밥 한 그릇 더 달라”고 조르자, 어머니가 “안 돼, 밤에 동네 젊은이들(와카슈)이 오면 먹여야 한단다”라며 말렸다고 합니다. 동네 청년 무리가 밤에 돌아다니다 배가 고프면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멋대로 밥을 퍼먹는 풍습이 있었던 거죠.

만약 밥을 주지 않으면 마을에 불이 났을 때 보복으로 그 집 산을 고의로 태워버리니까, 마을 어른들조차 이 청년들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일종의 통제 불능한 ‘군부(軍部)’처럼 군림했던 겁니다.

막부 말기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르던 무리나, 쇼와 시대 일본 정치인들을 벌벌 떨게 한 군사 세력의 뿌리도 바로 이런 야생적인 집단입니다.

요즘 일본의 극단주의 젊은이들이 중동까지 가서 끔찍한 무차별 테러를 저질러도, 일본 사회는 “요즘 젊은 애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며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체념해 버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조선 사회였다면, 어른들이 당장 그 젊은이의 멱살을 잡아끌고 호되게 꾸짖어 단번에 기를 꺾어놓았겠죠. 이런 태도의 차이가 양국 사회의 사고방식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 김달수: 그 통제받지 않는 젊은이 집단이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에너지를 분출하며 세상을 흔드는 힘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 시바 료타로: 밑으로부터의 힘이라기보다는 그냥 ‘야만적인 폭력성’에 가깝습니다. 마을 공동체 내부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에너지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에게는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도덕적 뼈대나 사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확고한 철학도 없이 본능과 폭력성에 그토록 맹렬하게 반응한다는 점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구별되는 일본만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 김달수: 선생님은 일본의 입장에서 그렇게 자조적으로 말씀하시지만, 제 입장에서 조선의 가장 뼈아픈 문제는 그놈의 꽉 막힌 ‘완고함’이었습니다.

조선이 개항하던 시기에도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었다면 돌파구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보 수집은 아예 전무했죠. 19세기 후반 일본과 러시아가 멋대로 한반도 38도선 부근을 가르려 밀약을 맺을 때조차, 조선은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낡은 예의범절과 명분을 지키는 데만 목숨을 걸었죠. 이것이야말로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반성하고 도려내야 할 병폐입니다.

□ 시바 료타로: 명분도 좋지만 현실을 꿰뚫어 보는 합리성이 필요했다는 뜻이군요.

조선인의 그 꼿꼿한 완고함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뚜렷한 논리 체계가 있죠. 가족의 촌수를 따질 때조차 엄격한 체계가 있어서 “네 행동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명확히 꾸짖을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일본의 여러 지역에도 유별난 고집쟁이들이 있지만, 그들의 고집에는 조선처럼 기댈 만한 철학적 기준이나 논리가 없습니다. 일본 역사에는 사람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 통제하는 ‘문명’이라는 거대한 사상적 뿌리가 내린 적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문명’이란, 내버려 두면 짐승과 같은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길들이는 거대한 시스템을 뜻합니다. 유럽의 가톨릭, 중동의 이슬람, 조선과 중국의 유교가 바로 그런 길들이기 장치였죠.

이런 무거운 문명에 길들여지다 보면, 사회 전체가 단단해지는 대신 숨 막힐 정도로 꽉 막히는 완고함이 생겨납니다. 반면 일본인들은 그런 묵직한 문명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에도 시대의 화려한 예술이나 메이지 시대의 세련된 서양식 가스등 같은 겉보기 좋은 ‘문화’는 꽃피웠지만, 인간의 내면을 통제하는 철학적 ‘문명’은 없었죠. 그래서 하나의 보편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유행이 지나면 가치관을 옷 갈아입듯 쉽게 바꿀 수 있었던 겁니다.

요약하자면, 철학적 사상(문명)은 텅 비어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삶의 양식(문화)은 눈치 빠르게 바꾼다는 점이 일본의 장점이자 한계입니다.

조선은 무거운 문명에 발목이 잡혀 망했고, 일본은 가벼운 문화의 껍데기만 좇아왔다는 차이입니다. “우리에겐 지하철도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일본인들이 있지만, 그런 피상적인 껍데기 자랑은 결국 일본 안에서나 통할 뿐이라는 자조적인 반성도 듭니다.

□ 김달수: 말씀하신 철학적 가치관의 차이는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의 더 큰 문제는,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적으로 가치관을 강요했다는 점입니다.

‘부국강병’이라는 구호 아래 국가와 윗사람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철저히 세뇌했죠. 그 맹목적인 에너지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에는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로 고스란히 쏠렸습니다. ‘우리가 왜 이 길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앞만 보고 폭주하다 보니, 끔찍한 공해 문제 같은 부작용을 맞이하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세상의 눈치를 보며 상황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속도만큼은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옛날에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존왕양이)”고 핏대를 세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구호를 쏙 빼버렸던 것처럼, 전쟁 중에는 “미국과 영국은 짐승 같은 귀신들(귀축미영)”이라며 저주하던 국민들이 패전 직후에는 순식간에 뼛속까지 친미, 친영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이런 뻔뻔할 정도의 변신이 험난한 현대 사회를 살아남는 일본만의 무서운 처세술이자 적응력일 겁니다.

반면 조선은 유교 사상에 꽁꽁 묶여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망국의 길을 걸었습니다.중국은 공자를 버리고 마오쩌둥을 택했지만 여전히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고, 조선 역시 이념으로 남북이 나뉘어 대단히 복잡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만큼은 특유의 그 얄미운 유연함 덕분에 마치 잡초처럼, 혹은 바퀴벌레처럼 놀라운 생명력으로 끈질기게 살아남겠지요 (웃음).

□ 시바 료타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일본은 사람을 구속하는 거창한 ‘문명’이나 ‘사상’이 없는 텅 빈 사회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환경에서든 기생충처럼 잘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인도를 예로 들면, 그들은 다음 생에 벌레나 미물로 태어나지 않기 위해 엄격한 사상 속에서 도덕성을 닦습니다. 종교를 철학으로 대하는 거죠. 하지만 일본인들은 호류지나 도다이지 같은 거대한 불교 사찰을 지어놓고도, 불교를 심오한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피로회복제(비타민) 같은 영양제로 취급합니다.

절에 돈을 바치면 병이 낫고 오래 살게 해준다는 식의 가벼운 약장수 마인드죠. 수백만 엔짜리 번쩍이는 가사를 걸치고 세속적인 권위나 뽐내는 일본 스님들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들이 불교의 참된 철학적 가치를 눈곱만큼이라도 이해하고 있는지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 도겐 선사처럼 훌륭한 극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절대적 가치관에 대한 의문

□ 김달수: 어제 신문을 보니 서민 풍속화인 ‘오쓰에(大津絵)’[13]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지옥도를 배경으로 스님이 엄숙하게 설교를 하고 있는데, 정작 보이지 않는 병풍 뒤에서는 남녀가 정욕을 뿜어내며 뒤엉켜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무릎을 쳤습니다.

겉으로는 고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세속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이른바 ‘다테마에(겉치레)’와 ‘혼네(속마음)’[14]라는 일본 특유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이었으니까요. 서양에 빗대자면, 정작 설교하는 신부 자신은 신을 믿지 않으면서 순진한 신도들에게만 맹신을 강요하는 구조인 셈이죠.

그런 적당주의와 위선은 명분과 체면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조선 사회에서는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교의 예법도 적당히 흉내만 냈던 일본은 바로 그 유연함 덕분에 근대화라는 거친 파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최익현[15]은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가 대마도로 끌려간 뒤, “왜놈이 주는 물과 밥은 한 모금도 입에 댈 수 없다”며 장렬히 굶어 죽었습니다.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한 치의 타협도 없는 숭고함이지만, 오직 단 하나의 절대적 가치에만 매몰되었던 조선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얄미울 정도로 뻔뻔한 일본인의 적당주의와 유연함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3] 오쓰에(大津絵) : 일본 에도 시대(17~19세기)에 시가현 오쓰(大津) 지역을 지나는 여행객들에게 부적이나 기념품으로 즐겨 팔리던 서민적인 민속 회화다. 초기에는 불교의 신앙 대상인 불화(佛畵)가 주를 이루었으나, 시대가 지나며 점차 도깨비가 염불을 외우는 그림처럼 익살스럽고 세속적이거나 해학적인 주제로 변모했다. 대담에서는 겉으로는 엄숙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세속적인 욕망이 들끓는 일본 사회의 이중성과 모순을 꼬집는 상징으로 언급되었다.

[14]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 : 일본인의 복잡한 심리와 인간관계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핵심 개념이다. ‘다테마에’는 사회적 규범이나 예의에 맞춰 겉으로 드러내는 명분, 태도, 겉치레를 뜻하고, ‘혼네’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진심이나 본심을 뜻한다. 극도로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공동체의 평화와 조화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일본 특유의 방어적이고 섬세한 문화적 기질에서 비롯되었다.

[15] 최익현(崔益鉉, 1833~1907) :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파를 대표하는 대쪽 같은 유학자이자 의병장이다. 과거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이끌어내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에는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엎드려 개항에 반대하는 ‘지부복궐척화의소’를 올렸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70대가 넘은 노구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일본이 주는 음식은 원수의 것이라며 철저히 거부하고 단식 투쟁을 벌이다 순국하여, 유교적 선비의 매서운 지조를 후세에 남겼다.(역자 주)

□ 시바 료타로: 일본인의 유연함이라고 좋게 포장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저는 반대로 굽힐 줄 모르는 조선인 특유의 꼿꼿한 ‘자아’를 마주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그 강인한 줏대는 오랜 세월 유교 문명인으로서 벼려온 품격이겠지요.

반면 일본인들은 집단 속에서 개인의 자아가 흐리멍덩합니다. 누군가 잘못을 해도 “내가 책임질 테니 다들 좋게좋게 넘어가자”며 얼렁뚱땅 무마해 버리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누구의 책임인지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이런 애매한 융화주의가 때로는 재미있는 예술이나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만.

□ 김달수: 단 하나의 절대적 가치밖에 모른다는 건 사회를 극단적으로 경직시킵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 관료들은 권력 투쟁, 즉 당쟁에서 밀려나면 인생이 완전히 끝장이었습니다. 체면을 버리고 농민이나 상인으로 직업을 바꿀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나 유연성이 전혀 없었죠.

퇴로가 없었으니 목숨을 걸고 피 터지게 당파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 시바 료타로: 정말 그렇습니다. 한 인간이 상황에 따라 장사꾼이 되기도 하고 농사꾼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지식인도 될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이 없다면 그 국가는 결국 숨이 막혀 붕괴하고 맙니다.

□ 김달수: 제2차 세계대전 전, 제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겪은 일입니다.

열다섯 살 난 형님이 저를 데리러 일본에 와서 쌀집에 갔는데,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이거 얼마야?” 하고 반말을 툭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쌀집 주인이 정색을 하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른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다니 무슨 버릇이냐”며 가게에서 불같이 호통을 치며 훈계를 하더군요 (웃음).

□ 시바 료타로: 야, 그거 참 멋진 아저씨네요.

□ 김달수: 보통의 일본 상인이었다면 속으로 ‘이 싹수없는 자식’ 하고 욕을 삼키더라도, 겉으로는 친절하게 웃으며 쌀을 팔았을 텐데 말입니다.

□ 시바 료타로: 그 상황을 일본 국내의 지역 차이로 치환해 보면 오사카(간사이)와 도쿄(간토)가 다릅니다. 제가 젊은 시절 도쿄에서 택시를 탔는데, 함께 탄 친구가 운전기사에게 “어이, 긴자로 가주게”라며 마치 영주처럼 으스대서 깜짝 놀랐습니다. 상인 마인드가 강한 오사카였다면 “미안하지만 신사이바시로 좀 가 주시겠소?” 하고 정중하게 부탁하거든요.

도쿄는 과거 인구의 절반이 무사(사무라이) 계급이었던 도시입니다. 그래서 택시를 탄 30분 동안 손님은 단순히 요금을 지불하는 고객이 아니라 일종의 ‘영주(나으리)’ 행세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의 이런 상하 관계는 철저히 ‘돈’이나 ‘기능적 역할’을 매개로 한 일시적인 상황극에 불과합니다. 조선처럼 핏줄이나 나이에 기반한 절대적이고 숙명적인 신분 질서가 아니라는 뜻이죠.

□ 김달수: 조선은 예의범절과 질서가 뼛속까지 박혀 있어서 어른과 젊은이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철창이 존재했습니다. 나이가 절대적인 기준이라 윗사람 앞에서는 감히 담배도 피울 수 없었고, 젊은이가 안경을 쓰는 것조차 오만불손한 짓으로 여겨졌습니다 (웃음).

□ 시바 료타로: 실제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주재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가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 일부러 안경을 쓰고 나타나 조선 궁정에 큰 파문이 일었죠. 다케조에는 일부러 조선의 콧대를 꺾어주려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안경을 쓴 것이었습니다.

□ 김달수: 당시 조선의 논리는 지극히 단선적이었습니다. 근시나 난시라는 의학적 개념 자체를 모르고 그저 “나이가 들면 노안이 와서 안경을 쓴다”는 사실만 알았기에, 새파랗게 젊은 놈이 안경을 쓰고 나타나면 “어디 감히 늙은이 흉내를 내며 기어오르느냐”는 발칙한 도발로 받아들인 겁니다.

연장자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예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눈치를 보면, 속 깊은 어른이 “화장실 좀 다녀오마” 하고 슬쩍 자리를 비워주어야만 겨우 한 대 피울 수 있는 숨 막히는 문화였죠. 늘 윗사람의 체면과 권위를 절대적으로 세워 주어야만 사회가 굴러갔습니다 (웃음).

그러니 아까 말씀하신 그 야생적인 ‘와카슈(일본의 젊은이 무리)’ 집단의 횡포란, 엄숙한 조선의 질서 앞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시바 료타로: 하지만 그런 꽉 막힌 유교 질서 덕분에 고대 사회의 촌락 내부가 힘과 폭력으로 무너지지 않고, 평화와 질서를 정교하게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 김달수: 그러나 그 낡은 질서 체계로는 ‘근대’라는 거대한 해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게 비극입니다. 조선 왕조에서는 학문적 파벌과 정치 권력이 끈적하게 얽혀 있어서, 정권이 바뀌면 이전 세력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학자와 사상까지 통째로 갈아치우는 끔찍한 보복이 반복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런 맹목적인 태도가 결국 근대화를 가로막은 겁니다.

앞으로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정치인은 정치에 매진하고 학자는 학문적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가 부패하면 언제든 주권자인 국민이 자유롭게 권력을 교체할 수 있는 유연한 민주적 시스템이 자리 잡아야만 합니다.

□ 시바 료타로: 정확한 말씀입니다. 구단주가 성적이 부진한 야구 감독을 미련 없이 교체하듯, 정치나 사회 시스템도 도덕과 명분의 잣대에만 얽매이기보다는 철저히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만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겠지요.

□ 김달수: 유교만이 무조건 옳다는 절대적 가치관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흐름에 뒤처졌습니다. 조선 왕조 5백 년의 그 어두운 그림자가 남북이 분단된 오늘날까지도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그 낡은 틀을 근본적으로 깨부수고 뼈저리게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애초에 세상에 처음부터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 시바 료타로: 조선 왕조라는 단일 체제가 5백 년이나 이어진 것은 세계 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엄청난 일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거대한 체제가 완전히 수명을 다해 낡아 빠졌을 때, 하필 서양 열강이 밀려오는 ‘천하대란’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20세기 초 근대화의 기로에 섰을 때, 과거 신라가 진취적으로 삼국을 통일했던 것과 같은 역동적인 에너지가 조선에 한 번 더 허락되었더라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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