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제국, 그리고 아물지 않은 기억의 연대
[연재] 재일사학과 한반도 근현대사-나카노 요시오와 김달수의 1975년 대담
이규수 /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역사는 종종 딱딱한 연표나 국가 간의 조약보다,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지식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1975년,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영문학자 나카노 요시오(中野好夫)[1]와 재일조선인 문학의 선구자이자 사학자인 김달수(金達寿)[2]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이 나눈 이 대담은 근현대 동아시아의 굴곡진 역사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시각을 제공한다.
[1] 나카노 요시오(中野好夫, 1903~1985): 일본의 영문학자이자 평론가다.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교수를 지냈다. 전후 평화운동과 진보적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을 촉구한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본문에서 언급된 도쿠토미 로카의 평전 『로카 도쿠토미 겐지로』를 집필했다. (역자 주)
[2] 김달수(金達寿, 1919~1997): 재일조선인 1세대 소설가이자 사학자다.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나 10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학으로 신문 기자 등을 거쳐 소설가가 되었으며, 일본 내 조선인 차별과 징용공의 척박한 현실을 고발했다. 후반기에는 본문에서 나카노가 언급한 『일본 속의 조선 문화』 등을 집필하며, 고대 한반도 이주민(도래인)이 일본 문화 형성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추적하여 일본의 왜곡된 고대사를 바로잡는 데 평생을 바쳤다. (역자 주)
나아가 상처 입은 두 민족이 진정한 연대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고통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은 한일 고대사부터 제국주의 침략, 3·1 운동, 관동대지진, 그리고 태평양전쟁 종전에 이르기까지 1차 사료와 생생한 개인의 기억을 엮어내며 한일 관계의 깊은 곳을 파헤쳤다.
1975년, 야만과 위선의 시대 한가운데서
이 대담의 역사적 무게를 이해하려면 먼저 '1975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1975년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조선이 해방된 지 30년, 그리고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지 10년이 흐른 해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현실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며 이념의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한국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가 정점에 달해 강압적인 통치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대담에서도 언급되듯, 1973년 도쿄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1974년 일본인 르포라이터들이 연루된 '민청학련 사건'은 한일 양국의 진보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과 환멸을 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과거 식민 지배를 반성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면서도, 당시 한국 군사정권의 폭압에는 분노했고, 동시에 북한의 폐쇄성에도 회의감을 가졌다.
나카노 요시오가 "국가의 초대를 받아 북한에 가는 것은 인민의 피땀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라며 방북을 거절하거나, 한국의 군사정권을 가벼운 흥밋거리로 소비한 일본인 르포라이터들을 강하게 비판한 대목은 당시 그들이 겪던 윤리적 고뇌를 잘 보여준다.
결국 1975년의 이 대담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었다. 제국주의의 찌꺼기가 남은 채 냉전과 독재가 얽혀 있던 1970년대 한일 관계 앞에서, 이들은 "과연 우리는 과거에서 얼마나 나아갔는가?"라는 뼈아픈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나아가 정치 권력이 주도한 껍데기뿐인 '1965년 국교 정상화'의 한계를 넘어, 민중과 지식인의 차원에서 진정한 역사 교류의 바탕을 새로 다지고자 노력했다.
깨어있는 지식인의 환상과 안중근 유묵의 아이러니
이러한 문제의식은 대담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도쿠토미 로카(徳冨蘆花)[3]의 조선관' 비판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도쿠토미 로카는 메이지 시대의 유명 소설가로,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에 감명받아 팽창주의자인 친형과 절교까지 했던 이른바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로카의 기행문과 기록들을 철저히 검증하며, 당대 일본 지식인이 가졌던 제국주의적 인식의 한계를 가감 없이 들춰낸다.
[3] 도쿠토미 로카(徳冨蘆花, 1868~1927):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소설가이자 사상가로, 본명은 겐지로(健次郎)다. 대표작 『불여귀』로 큰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기독교적 인도주의에 입각했으나 점차 톨스토이즘에 심취했다. 당대 일본의 팽창주의를 열렬히 대변하던 친형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와 사상적 대립 끝에 오랜 기간 절교하기도 했다. 1913년 조선을 방문하고 『죽음의 그늘에』 등을 남겼으나, 시대적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역자 주)
로카가 1913년 조선을 방문해 안둥(현 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널 때, 흰옷 입은 조선인들을 보며 느꼈다는 '불쾌감과 망국의 슬픔'은 언뜻 식민지 민중에 대한 연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3·1 운동 발발 3년 뒤인 1922년에 조선을 다시 찾아 남긴 글은 너무나도 기만적이다. 그는 "일본도 꽤 진지하게 조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조선도 점차 웃는 얼굴이 되겠지"라고 적었다.
인도주의자를 자처했던 지식인조차 수백만 명의 민중이 피 흘린 3·1 운동의 참혹한 진실을 몰랐거나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로카가 첫 조선 방문길에 다롄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글씨)을 얻어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했다는 사실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의 유묵은 독립과 동양 평화의 상징이다. 오늘날까지도 유해조차 찾지 못한 안중근의 숨결이, 제국주의의 시혜적 태도에 갇혀 있던 일본 문인의 정원(고슌엔)에 마치 수집품처럼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두 사람은 이 기이한 사실을 짚어내며, 선의로 포장된 일본 지식인 내면의 우월감과 무지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패전의 공포와 맞닿은 '관동대지진'의 핏빛 기억
대담은 3·1 운동을 지나 1923년 관동대지진, 그리고 1945년 패전 직전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김달수 작가가 직접 겪고 증언하는 전쟁 말기의 공포는 이 글의 가장 핵심적인 기록이다.
전쟁 말기, 미군의 B-29 폭격기가 도쿄 등에 폭탄을 쏟아부을 때 일본 민중은 패전의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재일조선인들의 뼛속에는 전혀 다른 공포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겪었던 '조선인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공습으로 세상이 혼란해지면, 지진 때처럼 또 우리가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김달수의 이 고백은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이들이 일상적으로 느껴야 했던 생존의 위협을 여실히 보여준다.
동네에서 일본인들이 죽창 훈련을 할 때 조선인들이 구역질을 느낀 이유도, 그 죽창이 미군이 아닌 자신들을 향할 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이 다가올 때 조선인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또다시 학살당할지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 사이에는 이토록 깊고 좁힐 수 없는 틈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성인 나카노 요시오조차 이 증언을 듣고 "일본인들의 부끄러운 맹점을 찔렸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귀화인' 사관의 해체와 단일 민족 신화의 허구
1970년대 당시 김달수는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는 이 대담을 통해 일본 역사 교육이 맹신하는 '단일 순수 민족'이라는 신화가 철저한 허구임을 밝힌다.
두 사람은 일본 학계가 오랫동안 써온 '귀화인(歸化人)'[6]이라는 단어에 숨겨진 제국주의적 의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선진 문화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을 굳이 '귀화인'이라 부르는 것은, 이들이 천황의 통치에 스스로 엎드려 복속했다는 '황국 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아스카(다카이치군) 지역 인구의 80~90%가 한반도계 이주민이었는데도 이들을 일방적으로 '귀화'했다고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따라서 이를 가치판단이 배제된 '도래인(渡來人)'이나 '민족 이동'이라는 관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4] 귀화인(歸化人)과 도래인(渡來人): 본문에서 김달수와 나카노 요시오가 강도 높게 비판하는 개념이다. '귀화'는 본래 천황의 덕을 우러러 그 통치 아래 스스로 복속해 왔다는 황국 사관의 뉘앙스가 짙게 깔린 용어다. 8세기 무렵 쓰인 『일본서기』 등에서부터 비롯된 이 용어는, 선진 문물을 전해준 한반도계 이주민들을 천황 지배 체제 아래 격하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다. 대담에서 두 지식인이 지적하듯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의 산물이며,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가치판단이 배제된 '도래인'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한다. (역자 주)
이는 단순한 학술 논쟁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군국주의를 떠받친 것이 바로 황국 사관이었고, 이것이 조선 식민 지배와 동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의 혼혈성을 당당히 긍정하고 국가주의를 비판한 이들의 노력은, 당시 일본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던 배타성과 우월주의를 깨뜨리기 위한 사상적 투쟁이었다.
성찰 없이 진정한 연대는 없다
결론적으로 1975년의 이 대담은 두 민족이 짊어진 역사의 짐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지적 용기의 결과물이다. 억압과 모순이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시대에 이들은 얄팍한 우호나 가르침 대신, '냉철한 비판'과 '진정한 성찰'을 택했다.
조선어의 우수성을 칭찬하면서도 정작 배우려 하지 않았던 일본 지식인의 게으름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김달수, 그리고 그 비판을 수용하며 과거 군국주의 시절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깊이 반성하는 나카노 요시오. 이들의 진솔한 대화는 한 편의 훌륭한 역사적 참회록이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한일 양국은 역사 교과서, 강제 동원 등 과거사 문제로 갈등하며 각자의 민족주의에 갇혀 있다. "역사와 문화를 정치적 잣대로만 재단해선 안 된다", "차원 높은 성찰 없이는 진정한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이들의 일갈은 지금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형식적인 화해의 수사를 거두고 서로의 뼈아픈 상처를 직시할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와 연대가 시작될 수 있음을 이 대담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역자 주: 이 글은 일본에서 발행된 『계간 삼천리(季刊 三千里)』 2호(1975년 5월)에 수록된 평론가 나카노 요시오(中野好夫)와 작가 김달수(金達寿)의 좌담, 「내셔널리즘에 대하여」를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번역하고 다듬은 것이다. (이규수/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영문학자 나카노 요시오(中野好夫, 왼쪽)와 재일조선인 문학의 선구자이자 사학자인 김달수가 마주 앉아 한일 고대사부터 제국주의 침략, 3·1 운동, 관동대지진, 그리고 태평양전쟁 종전에 이르기까지 한일 관계의 깊은 곳을 파헤쳤다. 두 사람의 대담은 1975년 5월 일본에서 발행된 계간 『삼천리(季刊 三千里)』 2호에 「내셔널리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사진-이규수 제공]
도쿠토미 로카의 조선관
□ 김달수: 선생님께서 최근 잡지 『전망』에 연재하셨던 「로카 도쿠토미 겐지로」를 세 권의 책으로 엮어내셨지요. 이를 읽어보니 선생님께서 도쿠토미 겐지로라는 인물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자유자재로 다루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로카는 1913년, 이른바 '한일 병합' 3년 후에 조선을 찾았습니다. 당시 로카의 조선관을 보면 그 시대적 한계상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이에 대한 선생님의 논평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한일 병합 조약'과 '구 미일안보조약'을 비교하시며, "이런 조약은 언제나 지배자 측에서 강요하는 것이지만 문서(조문)상으로는 늘 그 반대로 포장된다"고 예리하게 지적하신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 나카노 요시오: 얼마 전 체결된 '오키나와 반환 협정' 때도 그랬습니다만, 불평등 조약이란 언제나 그런 식이지요.
□ 김달수: 그리고 로카는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3년 후에 두 번째 조선 여행을 떠납니다.
□ 나카노 요시오: 1919년(다이쇼 8년)은 제가 중학교 4학년이던 해입니다. 아마 당시 일본에서는 3·1 운동에 대한 언론 보도가 전무했을 겁니다. 적어도 도쿠시마현 시골에 살던 저는 전혀 몰랐고, 도쿄에 살고 있던 로카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의 편지나 다른 어떤 자료에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거든요.
저 조차도 3·1 운동이 일어나고 수년이 지나 제3고등학교나 도쿄제국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만세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집요한 항일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불완전하게나마 알게 되었으니까요.
□ 김달수: 로카는 이때의 조선 여행에 대해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라는 책 속에 「조선과 나」라는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3·1 독립운동 3년 후인 1922년(다이쇼 11년)의 재방문이었습니다만, 이때 그는 경성(서울)에도 들르지 않고 군산에 있는 매형의 병문안을 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왕복 항해 기간을 포함해도 고작 사흘 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본 것이였죠.
저는 이 글을 두고 참으로 어리석은 궤변이라고 비판했습니다만, 로카는 그때 "일본도 꽤 진지하게 조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조선에 대학을 세운다니 아주 잘된 일이다. 조선도 점차 웃는 얼굴이 되겠지"라며 참으로 속 편하고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역시 3·1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고 봐야겠지요. 진상을 알았다면 설마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 무렵 시라카바파(白樺派)의 야나기 무네요시 씨는 3·1 운동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검열 때문에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쓸 수는 없으니 조선의 예술에 빗대어 조선에 다가가려 했고, 나아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우회적으로 거세게 항의하고 있었지요.
그러고 보면 제가 놀란 것은 로카가 첫 번째 조선 방문 당시, 가는 길목인 다롄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글씨)을 받았고, 그것이 지금도 그의 옛집인 고슌엔(恒春園)에 보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5] 시라카바파(白樺派)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시라카바파는 1910년 창간된 문예지 『시라카바』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학·예술 사조로, 톨스토이 등의 영향을 받아 인도주의와 개인의 자아 존중을 표방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파의 핵심 맴버이자 일본 민예운동의 창시자다. 조선의 도자기와 민예품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으며, 1919년 3·1 운동 당시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를 비판하고 조선 민중의 저항에 공감하는 글을 발표했다. (역자 주)
□ 나카노 요시오: 로카는 여기저기서 받은 물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만, 신기하게도 안중근 의사의 글씨만큼은 마치 어제 받은 것처럼 아주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김달수: 로카도 안중근 의사가 어떤 인물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겠지요.
□ 나카노 요시오: 물론입니다.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행문 『죽음의 그늘에』를 보면 안중근에 대해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명확하게 '지사(志士)'라고 적지는 않았지만, 행간을 읽어보면 분명히 그를 향한 호의가 느껴집니다.
□ 김달수: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로카가 조선에 발을 들이자마자 대단히 불쾌해했다는 사실입니다.
□ 나카노 요시오: 맞습니다. 안둥(현 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가는데,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몹시 언짢아하지요.
□ 김달수: 그리고 즈시(逗子)의 집으로 돌아와 '조선에서의 불쾌함'을 토로하는 로카에게, 그의 아버지는 "스사노오노미코토나 신공황후(神功皇后) 시절부터 조선은 본래 일본의 소유였거늘, 네가 이러쿵저러쿵 불평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참 씁쓸한 것이, 제가 수년 전 신바시를 걷고 있을 때 우연히 자민당 인사의 선거 연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한국은 삼한정벌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공의 조선역(임진왜란) 이래 우리의 오랜 현안이자 생명선이다. 우리가 한국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로카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나카노 요시오: 장황한 이야기지만, 에도 막부 말기의 개화파 지사들까지 포함하여 그것이 확실히 당시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 김달수: 그러한 제국주의적 의식은 역사 교육과 깊이 맞물려 뿌리내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 나카노 요시오: 로카 자신도 직접 조선에 가보기 전까지는 '한일 병합'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그의 형인 도쿠토미 소호는 다년간의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며 크게 득의양양해했고, 새로 창간되는 『경성일보』의 감독을 맡아 매년 의기양양하게 경성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로카는 형에게 보내는 편지 등에서도 합방에 대한 축하나 비판을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체념 섞인 무언의 비판이었을까요.
원래 로카라는 인물은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감각적으로, 즉 피부로 상황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행기 『죽음의 그늘에』를 보면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대단히 우울해하고 불쾌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는 흰옷 입은 조선인들의 모습을 거듭 묘사하며, 이를 망국의 슬픔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바라보았지요. 게다가 '한일 병합'에 대해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래의 "현안이 3백 년 만에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서술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인의 감정을 '원한(怨念)'이라고 직시하여 표현한 일본인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또한 득의만면한 형의 권유로 데라우치 총독 등 식민지 고위 관료들을 예방(禮訪)하러 가야 했을 때도 불만투성이였습니다. 조선에 있는 동안은 식민 통치자들의 '포로' 신세나 다름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간다며 빈정거렸지요. 형이 매입한 경성의 명승지 두 곳을 자랑스레 안내할 때도 로카의 불쾌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여관 숙박 일정도 갑자기 취소해 버리고, 형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경성을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로카가 임종을 맞을 때까지 형제는 무려 15년간 절교하게 되지요.
『죽음의 그늘에』를 읽어보면 유독 조선 여행 부분만 물과 기름처럼 겉돌며 분위기가 침통합니다. 글 속에 일본의 침략주의나 팽창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문구는 없지만, 실제로 조선에 가보니 억압당하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침략의 폭력성과 잘못을 피부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지요. 하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약 10년 뒤 재방문했을 때는 그 통찰력마저 완전히 무뎌져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만.
3·1 운동과 관동대지진의 기억
□ 나카노 요시오: 앞서 말씀드렸듯,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 대해 일본 본토에 있던 저 같은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나서야 '만세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해 3·1 운동이 일어나고 두 달 뒤, 중국에서 5·4 운동이 일어났지요. 당시 일본 언론들이 이른바 '21개조 요구'나 베르사유 강화 회의 소식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에 5·4 운동에 대해서는 일본인들도 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사에 '5·4 운동'이라는 명칭을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배일(排日) 운동이라는 사실만큼은 널리 알려져 있었죠. 흥미로운 점은, 당시 중국 청년들이 내건 슬로건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의 3·1 운동을 본받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당시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그런 내막을 전혀 몰랐습니다만.
□ 김달수: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작된 거대한 평화 시위이자 민중 항쟁입니다. 이 항쟁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약 1년 동안이나 간헐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미진합니다만, 야마베 겐타로 씨가 15년 전 잡지 『사상(思想)』에 기고한 「3·1 운동과 그 현대적 의의」라는 글에 따르면, 약 1년간 시위에 참여한 연인원이 무려 1천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약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지요.
□ 나카노 요시오: 그 엄청난 무력 탄압에 거의 맨손으로 맞섰다는 말씀이군요.
□ 김달수: 네, 그렇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 행진을 벌인 것이죠. 당시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등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우리 민족의 결기를 세계에 알리면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주로 기독교나 불교계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지도부 역할을 했습니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국제 사회의 선의에 기댄 다소 순진하고 태평한 발상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운동의 주도권은 이내 지도부의 손을 떠났고, 학생과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이 중심이 되어 지방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진 폭발적인 항쟁이었지요.
그런데 선생님,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 나카노 요시오: 1923년(다이쇼 12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저는 도쿄제국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습니다. 마침 여름방학이라 고베의 본가에 내려가 있었죠. 도쿄로 다시 올라온 것은 9월 중순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끔찍한 소식은 처음엔 언론 보도로 접했고, 도쿄에 올라오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직접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숙하던 도쿄 우시고메 일대에서는 실제 학살을 목격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만, 시타마치나 고토, 도카이도 철도 연선, 나카센도 인근 등지에서는 끔찍한 참극이 무수히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 김달수: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다룬 문헌은 많습니다만, 소설가 시가 나오야의 짧은 수필 「진재 문안(震災見舞)」이 떠오릅니다. 그가 나카센도를 거쳐 도쿄로 오는 길에 조선인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참상을 목격하고 쓴 글이죠. 군마현 마쓰이다와 도쿄 등지에서 벌어진 일들을 시가 씨는 대단히 담담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나카노 요시오: 이와나미 서점의 부사장이었던 고바야시 이사무 씨도 당시의 목격담을 남겼지요. 본가가 가마쿠라여서 지진 직후 걸어서 귀가하는 길에 끔찍한 장면들을 목격했을 텐데, 전후에 발표한 글을 보면 당시 일본 사회의 광기에 대해 깊은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 김달수: 평론가 나카지마 겐조 씨도 자신의 저서 『쇼와 시대』에서 그 사건을 언급하고 있지요.
□ 나카노 요시오: 나카지마 씨는 도쿄 출신이니, 당시 마쓰모토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방학을 맞아 도쿄에 머물다 그 참상을 직접 목격했을 겁니다. 지식인들이 남긴 그러한 문헌 기록은 찾아보면 꽤 많을 겁니다.
화가 다케히사 유메지가 수집한 지진 관련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지진 발생 닷새 뒤인 9월 6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계엄사령부가 '조선인 학살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호외를 내렸더군요. 이는 외교단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고, 외국 특파원들이 이 끔찍한 학살극을 해외로 타전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국제적 비난에 당황하여 부랴부랴 제동을 건 것입니다.
마치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3년(메이지 6년)까지 기독교 박해를 고집하다가, 외국 외교관들의 거센 항의와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자 황급히 탄압을 거두었던 추태와 완전히 똑같습니다. 만약 지진 당시 도쿄에 외국인 기자나 외교관들이 없었더라면, 그 잔혹한 학살은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김달수: 우리 재일조선인들에게 관동대지진이 남긴 공포와 트라우마는 전쟁 중은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뼛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진으로 땅이 조금만 흔들려도 우리 머릿속에는 즉각 당시의 학살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니까요. 실제로 전후에 후쿠이현이나 니가타현에 지진이 났을 때, 경찰 내부에서 '(조선인을 경계하라는) 주의 문서가 돌았다'는 이야기마저 들었을 정도입니다.
□ 나카노 요시오: (일본의 전통적인 신분 차별인) 부라쿠민 차별 문제와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에 그런 차별적 관행이 '절대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지요. 어쨌든 저 같은 세대는 제국주의라는 가장 나쁜 시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니까요. 도덕적으로 떳떳한 척 잘난 체할 자격이 없습니다. (웃음)
창씨개명과 전쟁 말기의 공포
□ 김달수: 지난 50년간, 태평양 전쟁을 전후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1939년 11월에 내려진 이른바 '창씨개명' 령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달으면서 일제는 중국 전선에서 수렁에 빠졌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조선에 강제적인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1940년에는 끝까지 버티던 『동아일보』마저 강제 폐간시켰고, 그 직전에는 이(李)나 김(金) 같은 조선 고유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을 강행한 것입니다.
□ 나카노 요시오: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던 '박(朴)' 씨가, 창씨개명 후에는 졸지에 일본 제국 군대의 '오카모토(岡本)' 중위로 불리게 된 비극적이고 씁쓸한 촌극처럼 말이지요. (웃음)
□ 김달수: 그렇습니다. 조선인에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성을 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야 이, 성을 갈아버릴 놈아!"라는 말이 아주 심한 욕설로 통할 정도였으니까요. 즉, 성을 바꾸는 자는 짐승이나 다름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도처에서는 웃지 못할 희비극이 속출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아예 '개자식'이라는 뜻의 '이누코(犬子)'로 바꾸어 신고한 사람도 있었고, 당시 악명 높던 미나미 지로(南次郎) 조선 총독을 조롱하기 위해 보란 듯이 이름을 '미나미 타로(南太郎)'로 지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웃음) 물론 이토 히로부미의 '이토'나 일왕비의 이름인 '요시코'를 사용하는 것은 불경죄로 엄격히 금지되었지요.
그중에는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라는 기상천외한 이름을 지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이름은 조선 타령의 후렴구인 '에헤라 노아라'를 그대로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세상천지가 모두 미쳐 돌아가니 그저 에헤라 디야 노아라"라며 일제의 강압적 정책을 통렬하게 비웃고 조롱한 것이었죠.
제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은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였습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거리에 나붙은 보도사진 속에서 철모를 쓰고 엎드려 총을 쏘는 일본군의 모습을 보며 엉뚱하게도 '참 멋있는 투구(철모)구나'라고 생각했던 철없던 시절의 기억입니다. (웃음) 그때부터 정말 쉴 새 없이 전쟁이 이어졌지요.
□ 나카노 요시오: 맞습니다. 만주사변부터 패전까지 꼬박 '15년 전쟁'의 시기였으니까요.
□ 김달수: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전쟁 소식만 듣고 자라다 보니,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무렵에는 저도 모르게 전쟁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전쟁이 비정상적인 비상사태가 아니라 하나의 일상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죠. 그러니 '전쟁이 언제쯤 끝나겠구나' 하는 감각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전쟁 말기, 스물다섯 살이던 저는 한 지방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마침내 끝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은 8월 11일, 시모무라 히로시 정보국 총재의 담화와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의 담화를 신문에서 나란히 읽고 나서였습니다.
□ 나카노 요시오: 그랬지요. 내용이 정반대인 두 담화가 동시에 신문에 실리던 참으로 기이한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교수와 학생들은 해군기술연구소에 강제 동원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해외 단파 방송을 몰래 엿듣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포츠담 선언의 수락 경과나 일본 측의 조건부 항복 논의, 나아가 최종 전면 수락에 관한 극비 정보들이 알음알음 새어 나오고 있었죠. 저 역시 전쟁이 드디어 끝날 것 같다는 확신이 든 것은 8월 10일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함께 살고 있던 부모님께 "전쟁은 이제 곧 끝납니다. 하지만 절대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 김달수: 저는 그때까지 전쟁이 끝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한다는 소식을 직감한 순간 전혀 새로운 종류의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앞으로 며칠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질 텐데, 이 대혼란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강렬한 생존에 대한 공포였죠.
□ 나카노 요시오: 패전의 극심한 혼란을 앞두고, 관동대지진 당시의 참혹했던 이미지가 겹치며 되살아났던 것이군요.
□ 김달수: 네, 그렇습니다. 저는 철이 들 무렵부터 주위 어른들에게 관동대지진 당시에 겪은 끔찍한 일들을 숱하게 들으며 자랐습니다. 제 내면 깊은 곳에는 그 지진이 남긴 일종의 공포 이미지가 화석처럼 단단하게 남아있었던 겁니다.
전쟁 말기 미군의 맹렬한 공습이 쏟아질 때 우리 재일조선인들이 벌벌 떨었던 진짜 이유는, 폭격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관동대지진'의 악몽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이 공습으로 큰 피해를 보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면, 지진 때처럼 그 분노의 화살을 또다시 조선인들에게 돌려 희생양으로 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뼛속까지 사무쳤던 것이죠.
그래서 당시 동네에서 죽창 찌르기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저는 두려움을 넘어 끔찍한 구역질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나카노 요시오: 그 죽창의 끝이 미군이 아니라 조선인들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군요. 과연, 일본인들의 부끄러운 맹점을 찔린 기분입니다. 저를 비롯한 대다수의 일본인은 당시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요.
일반 서민들은 패전이라는 사실 자체에 허둥대기 바빴고, 심지어 지식인들 중에는 '이것으로 일본은 군국주의를 벗어나 더 좋아지고 밝아질 것'이라며 의기양양해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당시 당신들이 품고 있던 그 처절한 두려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 김달수: 전후에 어떤 논객이 "그 알량한 죽창으로 미군의 최신형 B-29 폭격기를 찌를 작정이었냐"며 비웃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단언컨대 당시 그 죽창은 B-29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짐작이 헛된 망상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준 글이 하나 있습니다. 전후 언론인 오야 소이치 씨가 쓴 「니시다 기타로의 패배」라는 글에, 전쟁 당시 교토에 주둔하던 어느 사단장이 훈시한 내용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공습으로 혼란에 빠졌을 경우, 제1 처분(학살) 대상은 미군과 영국군 포로, 제2 처분 대상은 조선인, 제3 처분 대상은 (반전 성향의) 교토 학파 지식인들이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쟁 중에 제가 겪던 공포가 단순한 피해망상이 아니라,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참혹한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섬뜩해졌죠.
전쟁 말기 저는 본사가 공습으로 타버려 실직 상태가 된 후, 가나가와 신문의 요코스카 지사 근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언제 강제 징용에 끌려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집에 숨어 지냈죠.
요코스카는 해군 군항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폭격을 당할 것이라 짐작했는데,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가 저에게 "요코스카는 절대 공습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유를 묻자, "미국 놈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여기서 자기네 군함을 수리해야 할 텐데 뭣 하러 시설을 부수겠냐"는 겁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놀랐습니다. 대중의 감, 즉 민중의 통찰력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예리하고 무서운 것이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실제로 도쿄와 요코스카의 상황도 그 아주머니의 말대로 흘러갔으니까요.
□ 나카노 요시오: 그 무렵 요코스카 군항 주변에서는 일본 정규군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거리를 걷는 남자는 십중팔구 핫파후쿠(葉っぱ服·거친 작업복) 차림의 조선인 징용공들뿐이었습니다.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철저하게 단속했는데, 당시 요코스카에는 조선인 보조 헌병이 네 명이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선어를 할 줄 아는 데다, 조선인 특유의 정서나 생활 방식을 훤히 꿰뚫고 있었으니 징용공들에게는 여간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그중에는 꽤 흥미로운 인물도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밀조의 건배」라는 소설에 쓴 적도 있습니다만, 한 헌병이 수시로 찾아와 기독교인을 잡아 가거나 탁주를 몰래 빚는 것을 적발하곤 했습니다. 징용공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그 헌병의 입을 막아 조선인 공동체를 방위해야 했기에, "이 헌병 놈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며 그가 올 때마다 몰래 빚은 탁주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웃음)
그렇게 술을 얻어마신 헌병이 하루는 징용공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더군요. "내가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게 사복을 입고 다니지만, 만약 공습이 떨어져 세상이 혼란해지면, 그때는 반드시 헌병 제복을 갖춰 입고 이 숙소 주변을 샅샅이 순찰하겠다."
이 역시 관동대지진의 이미지가 투영된 약속이었습니다. 혼란을 틈타 폭동이나 학살의 위협이 닥치면, 자신이 정규 제복을 입고 방패막이가 되어 동포들을 지켜주겠다는 의미였던 셈이지요.
조선어와 일본
□ 김달수: 선생님께서 조선인과 처음 인연을 맺으신 것은 언제쯤입니까?
□ 나카노 요시오: 교토에 있는 제3고등학교 시절부터입니다. 다른 고등학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제3고등학교에는 대체로 반마다 세 명 정도 조선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활달하게 스포츠를 즐기는 친구들이 많았죠.
저는 야구부에 있었는데, 박(朴)씨 성을 가진 조선인 형제 선수가 있었습니다. 동생인 박석윤(朴錫潤) 군은 제 동급생이었고, 형은 투수로 활약했는데 이름이 박석윤(朴錫胤)이었습니다. 제1고등학교 야구부의 명투수 우치무라 유시(内村祐之) 씨가 활약하던 시대의 일입니다. 동생은 훗날 조선으로 돌아간 것으로 아는데 전후 생사를 알 길이 없군요. 형은 만주로 건너가 일제에 부역하며 꽤 출세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종전 후 '한간(漢奸·매국노)'으로 몰려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럭비부에도 '윤'씨 성을 가진 동급생 명하프(스크럼 하프)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일찍 세상을 떠난 듯합니다.
'김종만'이라는 유쾌한 동급생도 있었는데, 그 친구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시절 동급생 중에는 조선인이 없었지만, 3년 후배 중에 이민하(李敃河)라는 뛰어난 수재가 있었습니다. 쇼와 초기에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문학론 번역 총서를 펴내기도 했죠. 훗날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전후에는 서울대학교 영문학 교수를 지냈는데, 10년쯤 전에 타계했습니다.
화제를 좀 돌리자면, 지금 생각해도 유감스러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전쟁 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만주에 제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저 유럽이나 미국조차 가보지 않았을 만큼 무심했던 터였죠. 게다가 당시 영문학은 이른바 '적성국(敵性國) 문학'으로 취급받던 터라, 윗선에 꽤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해외로 내보내 주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벌이는 오만방자한 행태를 싫어도 전해 듣게 되니,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워졌던 탓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 행동이 거창한 '저항'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시절 전쟁에 반대하여 무슨 행동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제 와서 잘난 체하며 입을 열 자격조차 없습니다.
□ 김달수: 그 서슬 퍼런 시절에는 일제에 영합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 나카노 요시오: 그렇습니까. (웃음) 다만 전쟁 전에 조선이나 중국에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이유는, 만약 그때 가보았더라면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그 시대적 차이를 제 몸으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 김달수: 만약 그 시절 조선에 가려 했다면 비행기가 아니라 현해탄을 건너는 관부연락선을 타야만 했습니다. 조선인의 경우, 일본 당국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자'-조선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먹물 좀 먹은 자"라고 불렀죠-라고 판단하면 어김없이 깐깐한 사상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을 탈 때나 내릴 때, 심지어 기차 안에도 사상범을 감시하는 이동 형사가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었으니까요.
□ 나카노 요시오: 일본인들도 시모노세키에서 줄을 서서 사상 조사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 김달수: 사회주의자가 아닌지 감시한다는 점에서는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아주 평등했지요. (웃음) 1940년,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 동포들로부터 사상 조사가 시끄럽다는 말을 듣고 아무 책도 가져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이 문고본 정도면 괜찮겠지' 싶어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안나 카레니나』를 한 권 챙겨갔는데, 하필 그게 걸렸습니다. "톨스토이는 노농(노동자·농민) 러시아인이 아니냐"며 트집을 잡더군요.
□ 나카노 요시오: 무정부주의적 평화주의자인 톨스토이를 공산주의자로 몰았단 말입니까?
□ 김달수: 그렇습니다. 관부연락선에는 그런 불쾌한 추억이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반면교사가 될 만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형사가 취조 중에 "너는 이런 사상을 알고 있겠지?"라며 이것저것 캐묻곤 했는데, 정작 저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었거든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헤에, 세상에 그런 사상도 있었구나'라며 오히려 형사에게서 새로운 사실들을 배우는 셈이 되었습니다. (웃음)
□ 나카노 요시오: 정경모 씨가 들으면 꾸짖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왜 먼 서양의 영어는 그렇게 열심히 배우면서 정작 이웃 나라의 한국어는 배우지 않느냐는 핀잔을 들으면 참으로 뼈아픕니다. 저 같은 세대는 제국주의라는 나쁜 시대의 교육을 받은 탓이 크지요. 사실 저는 조선어를 읽지 못합니다. 최근에도 『동아일보』를 구독하고는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합니다.
김대중 씨 납치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이었을 겁니다. 친구인 아오치 신(青地晨) 군이 찾아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이 왜 둘로 분단되었는지, 한국 전쟁 무렵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름대로 공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구나 당시 '한국' 하면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독재 국가라는 감정적인 거부감이 앞서, 한국 문제를 제대로 공부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싫어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작고 소박한 연구회라도 만들어 한국 문제를 제대로 공부해보자"고 다짐하던 참에 그 납치 사건이 터져버린 겁니다. 결국 연구회 모임을 꾸리기도 전에 항의 운동부터 나서게 된 것이죠. 그 후 아오치 군은 그 기세로 아예 『한국 문제』 전문 운동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정작 연구회는 지금까지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만,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들수록 오히려 공부가 절실히 필요한 법인데 말입니다.
□ 김달수: 정말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일본 사회에서 '조선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은 대단히 미묘하고 민감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최근 지방 강연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아주 기쁜 일이 있습니다. 지역마다 조선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젊은이들을 반드시 만나게 되거든요. 얼마 전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에 갔을 때도 조선어를 공부하는 사람을 만났고, 도쿄에는 아예 '3·1회'라는 이름의 조선어 학습 모임도 생겼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전쟁 중에는 창씨개명으로 조선의 성씨가 부정당함과 동시에 조선어 자체도 탄압을 받았습니다. 조선의 초등학교에서는 조선어 교육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본토에는 조선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딱 한 곳 있었습니다. 바로 덴리(天理) 전문학교, 지금의 덴리 대학 조선어 학과입니다. 그 학교가 왜 존재했느냐 하면, 조선인들을 단속하고 통제할 치안·경찰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그곳에서만 제한적으로 조선어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 나카노 요시오: 천리교 포교 목적이 아니라 치안 관계자들을 위한 곳이었단 말씀입니까?
□ 김달수: 천리교 포교 목적도 있었지만, 치안 관계자들도 그곳에서 조선어를 배웠습니다. 전후 상황을 보더라도 일본에서 조선어를 가장 열심히 배우고 있는 집단은 다름 아닌 자위대입니다. 자위대원 수천 명이 조선어를 꽤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잡지를 통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 나카노 요시오: 그들은 주로 정보 수집이나 회화(말하기) 위주로 배우겠지요.
□ 김달수: 그렇겠지요. 하지만 무장 조직인 자위대가 조선어를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사실은 왠지 기분이 언짢더군요.
□ 나카노 요시오: 저 같은 사람은 유창하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조선어 문장을 읽을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도 정경모 씨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영어에 쏟는 노력의 10분의 1만 투자해도 조선어를 읽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그것조차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 세대는 예전에 조선어를 '언문(諺文)'이라는 이름으로 배웠습니다만, 대학 시절 「언어학 개론」 수업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조선의 문자는 모음과 자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구조적으로는 오히려 인도유럽어족의 체계와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15세기 이조(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참으로 훌륭한 문자 아닙니까.
□ 김달수: 네, 원리만 알면 대단히 간단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반대로 조선인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은 비교적 수월하다는 점입니다. 저는 만 열 살 때 일본으로 건너와 처음 초등학교 야간반에 다녔는데, 이듬해에는 벌써 일본어로 된 『소년 구락부』를 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사라기 지로나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소년 소설들을 즐겨 읽었죠.
□ 나카노 요시오: 선생님께서 쓰신 어떤 글에서 그 시절 '다치카와 문고'[6]를 푹 빠져 읽었다고 하신 걸 본 기억이 납니다. (웃음)
[6] 다치카와 문고(立川文庫):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소년용 대중소설 총서다. 사나다 10용사, 사루토비 사스케 등 닌자나 무장들의 영웅적인 무용담을 주로 다루어 당시 청소년층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김달수가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계기로 언급했다. (역자 주)
□ 김달수: 맞습니다. (웃음) 지금도 사루토비 사스케를 비롯해 '사나다 10용사'의 이름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10년이 지나서는 일본어로 직접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봐도 일본어를 배우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기억은 없습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구사하게 되어 버린 것이죠.
그래서 저 스스로는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자부했습니다만, 깊이 들어갈수록 어렵더군요. 예를 들어 종전 후까지 저는 '통일(統一, 도이쓰)'이라는 단어를 '도이치'라고 잘못 발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잘한 실수들은 지금도 꽤 많을 겁니다. 물론 눈으로 읽는 것 자체는 쉽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어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선생님께서도 『동아일보』의 한자 표제를 보면 대충 의미는 짐작하시지 않습니까?
□ 나카노 요시오: 그렇습니다. 신문 표제에 쓰인 한자와 주변 문맥을 훑어보면 대강 무슨 뜻인지는 짐작이 갑니다만, 막상 한글로 된 본문 기사로 넘어가면 전혀 모르겠더군요.
□ 김달수: 제가 조선어를 공부한다는 일본 청년들에게 자주 해주는 조언이 있습니다. 자음과 모음의 원리를 익혔다면, 한글 발음이 적혀 있는 『천자문』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천지현황의 '천(天)'을 조선어로는 '하늘 천'이라고 읽습니다. '천'은 한자의 음이고 '하늘'은 고유어 훈이지요. 이처럼 한글과 한자를 동시에 연결하여 외우는 겁니다.
아무래도 일본인 입장에서는 한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어려우니, 처음 조선어를 배울 때는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일단 천자문을 마스터하고 한글의 조사(테니오하)를 구분할 수 있게 되면, 사회과학 분야의 용어 정도는 쉽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 문학 작품으로 넘어가면 일본어처럼 뉘앙스가 깊어져 훨씬 어려워지지요.
□ 나카노 요시오: 저 역시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이나 「비어(蜚語)」를 일본어 번역본으로 읽어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런 작품의 묘미를 일본어로 온전히 살려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습니까. 쓰루미(鶴見) 군이 대단히 훌륭한 시라고 극찬했습니다만, 내용을 차치하더라도 조선어 원문으로 읽어야만 그 특유의 리듬감이 살아날 텐데 말입니다. 번역문으로는 그 생생한 맛이 전달되지 않으니 진정한 의미에서 시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김달수: 김지하의 시는 리듬감을 빼놓고는 곤란합니다. 또 하나, 그의 시에는 한자어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자어들은 조선의 민중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사용하는 살아있는 언어입니다.
저희가 일본어로 소설을 쓸 때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이 바로 조선인들의 대화를 표현하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대화 중에 불쑥 『논어』나 『맹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곤 하거든요. 조선에서는 그런 고전 한어들이 일상 대화에 깊숙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일본어로 그대로 직역해 놓으면 생생한 리얼리티가 전혀 살지 않는 것이지요.
□ 나카노 요시오: 앞서 전쟁 전에도 조선에 가보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국이나 공화국(북한) 어느 쪽에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경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겠지만, 그곳에 다녀온 무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어 지금까지 발길을 끊었습니다.
언젠가 조총련의 한덕수 씨와 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분이 저에게 공화국에 방문해 보지 않겠냐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일본인이라는 족속들은 국가에서 '초대'를 해준다고 하면, 단것에 개미 떼가 꼬이듯 너도나도 앞다퉈 지원하지 않습니까. 초청받는 쪽이야 대접받으며 우쭐해져서 가는 것이겠지만, 초청하는 국가에 돈이 열리는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국가 차원의 초청이라 해도 결국은 그 나라 인민들이 피땀 흘려 이룬 노동의 결정체에 신세를 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렇게 우쭐대며 남의 피땀에 무임승차하는 것은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중에 제 비용으로 갈 수 있는 때가 오면, 꼭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 김달수: 이런 방식은 어떻습니까? '초대받는 손님' 자격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선생님들이 남한으로 들어가 38선을 돌파해 북한까지 종단하는 겁니다. (웃음) 그건 머지않아 꼭 실현해 보기로 하죠.
앞으로 조선과 일본은 어떻게든 과거를 딛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지식인 선생님들께서도 조선을 향해 과감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속죄 의식' 때문일까요? 아직도 조선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왠지 모르게 비판을 망설이고 우물쭈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조선인 측의 잘못된 면에 대해서도 사양하지 말고 따끔하게 지적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 조선인들 역시 일본을 향해 할 말은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양측이 이렇게 투명하게 마주 보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우호나 연대는 불가능합니다. 선생님께서 '초대'받는 형식의 방문을 꺼리시는 이유도 이런 맥락과 닿아 있겠지요. 만약 훗날 정말로 자유로운 방문이 가능해진다면, 그때는 부디 저희 고국을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 나카노 요시오: 일전에 한국에서 발생한 하야카와, 다치카와 두 일본인 구속 사건[7] 때, 아오치 군이 저에게 구명 성명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잠시 보류하겠다고 거절했습니다. 하야카와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다치카와라는 사람은 주간지 르포라이터 아닙니까. 저는 그런 부류의 인간을 혐오합니다.
어차피 전후의 풍요로운 일본밖에 모르는 젊은이가, 마치 일본 국내에서 흥미 위주로 취재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군사정권 치하의 한국에 뛰어들어 르포 활동을 하려 했다니 참으로 경박한 짓입니다. 독재 정권 치하의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그런 안이한 태도로 몇 번이나 드나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덜미가 잡힐 만한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둘째 치고 말입니다.
[7] 하야카와·다치카와 두 일본인 구속 사건: 1974년 한국의 유신 군사정권 시절 발생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인 하야카와 요시하루와 다치카와 마사키가 구속된 사건을 가리킨다. 나카노 요시오는 독재 치하의 엄혹한 상황에 얄팍한 흥미 위주로 뛰어든 르포라이터의 경박함을 비판했고, 김달수는 그들이 정치적 탄압에 직면해서도 끝까지 신념을 관철하지 못하고 희화화한 점을 꼬집었다. (역자 주)
□ 김달수: 그 사람들은 한국 수사 기관에서 좀 더 버텼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국제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지 르포라이터라면 응당 알았을 텐데 말입니다. 한국에서 쫓겨난 뒤 "조서를 보고 하도 어이가 없어 크게 웃어버렸다"며 무용담처럼 떠들고 다니던데, 그렇게 호기가 넘쳤다면 끝까지 남아서 계속 웃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귀화인' 사관과 현대
□ 나카노 요시오: 선생님께서 쓰신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동안 대다수의 일본인은 고대 조선의 출토품이나 유품을 보면 은연중에 '전리품'이라는 생각부터 떠올리곤 했지요. 선생님께서 굳이 지적하시지 않더라도 이런 발상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고대 한일 관계를 '정복'이나 '침략'의 구도로 볼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선주민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도래(渡來)'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문화가 서쪽(한반도)에서 동쪽(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은 일본인 입장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니까요.
전쟁 전 일본의 역사 교육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단일 순수 민족'이라는 허상에 맹목적으로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타 민족과의 혼혈을 대단한 수치로 여겼죠.
영국의 소설가 대니얼 디포가 쓴 『순수한 영국인(True-born Englishman)』이라는 장시(長詩)가 있습니다. 17세기 말, 영국이 네덜란드 출신의 윌리엄 3세를 국왕으로 맞이했을 때, 타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국민 사이에서 큰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디포는 국왕을 변호하며 "애초에 순수한 영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죠. 그는 영국인 역시 로마인, 색슨인, 덴마크인, 노르만인 등이 뒤섞인 '잡종(heterogeneous)', 즉 혼혈 민족이며 이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신흥 자본주의 정신을 신봉했던 디포는 순수 단일 민족이라는 편견에서 완전히 해방된, 당시로서는 무척 근대적인 인간이었던 셈입니다.
제가 20대 때 이 시를 처음 읽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저 역시 '일본인은 순수하고 단일한 우수 민족'이라는 식의 교육을 주입받고 자랐으니까요. 일류 문인이 혼혈을 당당하게 긍정하는 영국의 풍토가 참으로 놀라웠고, 종전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역사에서 누가 누구를 정복했다거나 당했다는 식의 논리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고대사는 잘 모릅니다만, 장래의 일본과 조선(한국)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런 편협한 생각에서는 하루빨리 탈피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긍정적인 의미의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은 양국 모두에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셔널리즘을 정복과 피정복의 잣대로만 따지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이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게도 똑같이 당부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는 '귀화(歸化)'라는 용어에도 별로 공감하지 않습니다. '도래하여 정착했다(도래 정착)'고 표현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민족이 뒤섞이는 '잡종'도 꽤 괜찮은 일입니다. 외부의 뛰어난 문화에 자극을 받아 발전했다는 것은 결코 굴욕이 아닙니다. 저 자신도 과거에는 분명히 잘못된 인식을 품고 있었지만, 앞으로 한일 양국은 어느 쪽이 이기고 졌는가 하는 저차원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서로 좀 더 고차원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 김달수: 정말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당장 '귀화인'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더라도, 그 이면에는 일종의 멸시와 우월감이 깔려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에서는 '조선'이나 '조선인'이라는 단어 자체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렸습니다.
조선의 가치를 철저히 파괴해 버린 것이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렇게 '가치 없는' 조선에서 고대에 높은 문화를 가지고 일본으로 도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기가 몹시 곤란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문화를 자신들 아래로 굴복시켰다는 뉘앙스의 '귀화인 사관'이 여전히 뿌리 깊게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겁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나라(奈良) 시대 이전의 수도이자 '일본 문화의 고향'으로 불리는 아스카(다카이치군) 지역에는, 서기 772년(8세기 후반) 기준으로 이른바 '귀화인'인 한씨(韓氏·아야우지) 가문과 그들이 백제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80~9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일본기』의 해당 구절을 아예 외우고 다닙니다만, 그 책에는 "무릇 다카이치 군내는 앞서 이주해 온 자들과 77개 현에서 온 인부들로 땅이 가득 차 있다"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정 지역 인구의 80~90%가 외부에서 온 이주민인데, 이들을 전부 '귀화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웃음) 이 거대한 집단을 단순히 '귀화했다'고 뭉뚱그려 버리면 역사적 사실을 대단히 왜곡하는 결과가 됩니다. 민족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이러한 민족 형성의 과정을 제대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나카노 요시오: 유럽의 역사학이었다면 이를 '귀화' 따위로 부르지 않고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민족 이동'의 관점에서 파악했을 겁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정복이니 피정복이니 하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역사를 상상할 수 있죠. 앞서 말씀드린 선생님의 저서가 흥미로웠던 이유는, 조선 측의 문헌은 일절 배제한 채 오로지 일본 측의 문헌만으로도 그러한 사실들을 훌륭하게 증명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한일 관계는 정복이나 굴복의 관계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와 정착한 '하나의 거대한 민족 이동'이었다고 이해하면 모든 것이 명쾌해지지 않습니까.
□ 김달수: 맞습니다. 유럽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게르만 민족 이동' 같은 대규모 이주 현상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현대의 미국을 보더라도, 아직 단일한 '미국 민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건국된 지 고작 2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미국의 실질적인 구성원은 여전히 이탈리아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 다양한 이주민들의 집합체입니다.
□ 나카노 요시오: 그렇군요. 미국인들 스스로도 자국을 거리낌 없이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라고 부르니까요.
□ 김달수: 하지만 미국도 앞으로 1천 년쯤 지나면 완벽하게 융합된 통일 민족으로서의 '미국 민족'이 형성될 것입니다. 일본의 고대사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아귀가 들어맞습니다.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등 한반도의 다양한 이주민들이 바다를 건너왔고, 이들이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에 걸쳐 선주민들과 융합하며 독자적인 '일본 민족'을 형성해 나간 것입니다. 즉, 그 이전의 아득한 고대에는 확립된 민족 개념으로서의 '일본인'이나 '조선인'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혈통을 뜻하는 인종과 문화·역사적 공동체인 민족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니까요.
□ 나카노 요시오: 동감입니다. 일본이라는 확고한 국가관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일본서기』가 편찬될 무렵부터였죠. 천황 지배 체제를 권위 있게 포장하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이고 작위적으로 쓰인 역사서가 바로 『일본서기』입니다.
□ 김달수: 그렇습니다. 『일본서기』가 쓰인 시점은 고대 국가의 기틀이 갓 다져지던 때였으니, 국가적 결속을 위해 그러한 배타적인 내셔널리즘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문제는 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그 고대 국가 시절의 편협한 내셔널리즘을 아직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곧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을 지배했던 천황 중심의 황국 사관이나 타국을 억압하는 침략 사관의 잔재를 아직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나카노 요시오: 선생님께서도 책에서 따끔하게 비판하셨습니다만, 일례로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8] 씨는 그의 명저 『고데라 준례(古寺巡礼)』에서 호류지 유메도노의 구세관음상을 두고 "이 훌륭한 작품을 조선의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조급한 판단을 면할 수 없다"라고 애써 부정했습니다. 와쓰지 씨 역시 당대의 분위기에 휩쓸려 무의식중에 '일본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맹목적인 내셔널리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지요.
어차피 오랜 옛날 불상의 제작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 도리도 없거니와, 어느 쪽이면 또 어떻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시공을 초월한 예술 작품 그 자체의 가치인데 말입니다.
[8]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 1889~1960): 일본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윤리학자, 문화사가다. 『고데라 준례(古寺巡礼)』, 『풍토(風土)』 등의 저서로 유명하다. 불교와 서양 철학을 융합해 독자적인 윤리학 체계를 세웠으나, 대담에서 지적받듯 그의 고대 문화재 인식 기저에는 '일본 우위'를 입증하려는 맹목적인 내셔널리즘이 깔려 있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천황제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사상적으로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역자 주)
□ 김달수: 와쓰지 씨는 미술사가 어니스트 페놀로사가 구세관음상을 조선의 것이라고 평가한 대목을 반박하려 했던 것인데, 그러한 '귀화인 사관'이나 '황국 사관'에 찌든 내셔널리즘은 결국 그렇게 주장하는 지식인 자신의 영혼마저 부식시켜 버립니다. 역사학자 후모토 마사토 씨도 고대 한반도의 안라국(아라가야)에 기원을 둔 자신의 성씨(姓氏)와 얽힌 감회를 서술하며 비슷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물론 우리 조선인들 역시 과거 일제 강점기라는 뼈아픈 수난의 역사가 있는지라, 어느 정도 방어적이고 강경한 내셔널리즘을 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한일 양국이 과거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심하게 왜곡된 역사관을 상호 간에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최우선으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차원 높은 성찰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저희 조선인들의 편협한 내셔널리즘도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 나카노 요시오: 그러한 높은 차원의 성찰과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두 나라가 국경과 민족의 벽을 넘어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 것입니다. 양국 모두가 여전히 상대방을 이기려 드는 낮은 차원의 내셔널리즘에 얽매여 있는 한 미래는 없습니다. 저 자신도 과거에는 참으로 우둔하고 편협했습니다만,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 김달수: 요컨대, 양국의 역사와 문화 교류를 지나치게 '정치적인 잣대'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정치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모든 논의는 언제나 편을 가르는 대립과 맹목적인 대결로 변질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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