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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포은시고』와 [성인록]에 관한 비망(備望)

작성자태민|작성시간26.06.13|조회수26 목록 댓글 0

정몽주의 『포은시고』와 [성인록]에 관한 비망(備望)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61)

 

 

 

 

백민(白民) 이양재(李亮載) / 서지학자

『포은시고』 초판본은 1439년에 나왔다. 그것은 불변의 연도이다. 그런데 1434년부터 1455년 사이에는 단 한 종류의 금속활자 초주(初鑄) 갑인자(甲寅字本)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포은시고』 초판본을 금속활자본으로 찍으려면 당연히 초주 갑인자로 찍어야 했다. 

그런데 초판본을 복각한 것으로 주장하는 『포은시고』 재판본 신계본은 초주 갑인자체와 글자 크기도 다르고 서체도 다르다. 이것은 『포은시고』 초판본이 금속활자로 간행한 사실이 전혀 없음을 말하여 준다. 

필자는 이제 더 이상 늦지 않게 선행 연구자의 오류를 지적하며, 국가유산청에서는 [포은시고] 초판본 현전본을 종합 조사하고, 그 가운데 선본(善本)을 골라 국가지정 문화유산 보물로 지정할 것을 촉구한다. 

필자는 지난 5월 26일 자 연재에 “정몽주의 [포은시고(圃隱詩藁)]에 관한 비망(備望)”을 기고한 바 있다. 이 기고는 2017년에 [포은학연구] 제19집 pp.39~71에 게재한 홍순석 교수의 “『포은시고』 판본에 대한 고찰”에 대한 정면 비판이었다. 

나는 그 비판론을 기고하기까지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몰랐다. 필자의 글이 나가고 관련 학계와 고서수집가들 사이에서는 큰 반향이 나왔고, 비로소 알게 된 것은 홍순석 교수는 2002년 6월에 포은학회 설립을 발의하고 2007년 5월에 창립한 후에 포은학회 회장을 지낸 인물인데, 그는 “서지학자가 아니라 한학자”이며, “그의 논문은 과거의 다른 여러 논문을 짜깁기 한 수준”이라는 혹평이 주를 이루었다. 

이번 회에서는 필자의 발표에 관한 우리 서지학계의 반향을 종합 정리하며, 아울러 [성인록] 등 포은 정몽주 관련 다른 자료를 일부 소개하고자 한다. 

1. 1439년에 사용한 금속활자는 갑인자 한 종류이다. 

『포은시고』 초판본은 1439년에 나왔다. 그것은 불변의 연도이다. 그런데 1434년부터 1455년 사이에는 단 한 종류의 금속활자 초주(初鑄) 갑인자(甲寅字本)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포은시고』 초판본을 금속활자본으로 찍으려면 당연히 초주 갑인자로 찍어야 했다. 

그런데 초판본을 복각한 것으로 주장하는 『포은시고』 재판본 신계본은 초주 갑인자체와 글자 크기도 다르고 서체도 다르다. 이것은 『포은시고』 초판본이 금속활자로 간행한 사실이 전혀 없음을 말하여 준다.

홍순석이 『포은시고』 초판본이라 주장한 일본 봉좌문고 소장본 『포은시고』는 활자본도 목판본도 아닌 목판으로 찍은 판 틀 종이 위에 적은 필사본이다. 

필자는 일본 봉좌문고 소장본 『포은시고』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사자관(寫字官)이 1439년 『포은시고』 초판본을 모사(模寫)한 필사본으로 본다. 1439년 『포은시고』 초판본을 갑인자로 찍었다면 조선왕조 중앙의 관판본(官版本)이어야 하지만, 1439년 『포은시고』 초판본은 도저히 조선왕조 중앙의 관판본일 수가 없다. 이것이 『포은시고』 초판본을 보는 근본적인 전제(前提)이다. 

필자의 짤막한 논고가 이제 서지학계와 수집가 사이에서는 곧바로 정론(正論)이 되었다. (참고 : 정몽주의 [포은시고(圃隱詩藁)]에 관한 비망(備望),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58)., 2026.05.26.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6591)

2. 『포은시고』 초판본과 재판 신계본의 차이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전술한 5월 26일 자 기고에서 언급한 대로 “②[포은시고] 재판본은 1533년(중종28)에 현손 세신(世臣)이 신계 군수로 있을 때 개간하였다. 

1533년 재판본은 1439년 초판본을 다시 새긴 복각본(復刻本)이다. (중략) 초판본과 재판본의 근본적인 차이는 권하에 있는 정종성의 발문에 있다. 

정종성의 발문 끝부분에서 초판본은 “‥‥‥恩出望外驚感無措豈唯小臣感激思效萬一冥冥之中忘必有感泣而啚報者矣於是倩工鋟榟以壽其傳庶幾益廣我‥‥‥”라고 하고 있는데, 재판본에서는 “‥‥‥恩出望外驚感無措於是倩工鋟榟以壽其傳庶幾益廣我‥‥‥”로 24자(“豈唯小臣感激思效萬一冥冥之中忘必有感泣而啚報者矣”)를 삭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번각하면서 여러 곳에서 차이가 나며, 신계본에는 후대인들의 서발이 있다.” 


[포은시고], 1439년 초판본 발문 [사진-이양재]


[포은시고], 신계본 재판본 발문 [사진-이양재]
초간본과 복각본을 비교해 보면 한눈에 드러난다. 그런데 복각본을 내면서 해당 부분을 삭제한 이유는 초간본을 낼 때의 제반 상황이 재판본을 내면서 일부가 변했던 이유일 것이다. 

3. 포은이 둔촌에게 보낸 서한을 모각(模刻)하여 처음 소개한 책은 윤두수가 편한 [성인록]. 

불과 15장의 [성인록]은 1581년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에 의하여 처음 편찬되었다. 

편찬자 윤두수는 발문에서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 올 때 삼충사(三忠祠)에서 문산(文山, 文天祥) 선생의 초상을 보고는 늠름한 기상을 느꼈고, 송도(松都)에서 포은 선생의 화상을 보고도 삼충사에서와 다름없이 경모의 마음이 일었다. 사람을 감발시키는 것이 독서보다 더 나을 것 같아 그들의 초상과 유묵을 모아 책을 편집하였다. 두 분의 생애는 서로 흡사하다. 즉, 장원급제를 한 것이나 정승으로 국사를 맡은 것이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이 그것이다. … 두 분 선생이 시비·이해·경중을 분별하는 것이 생사를 초월하셨는데, 이는 바로 인을 이루는 것(成仁)이다.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성인록]은 1581년에 목판본 1책으로 처음 출간된 이래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581년 초판본이 있고 복각 및 모각본이 있으며, 신찬편(新撰編)도 있다. 

문제는 이 책이 처음 간행되고 11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포은시고] 재판본과 함께 판각이 소실되었으므로, 이 책의 임란전 초판본은 매우 희소하다는 데 있다. 

나는 1983년경에 유명한 고서수집가 윤석창으로부터 몇 점의 고본을 매입하였다. 그중에는 [성인록] 1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 책을 매입한 이유는 16세기까지 전래해 오던 포은 정몽주의 유묵이 모각 되어 있는데, 이 유묵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필자의 21대 조인 광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 선조에게 보낸 서한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각되어 있는 서한 가운데 한 점으로 보이는 유묵이 성균관대학교 소장의 [근묵(槿墨)]에 채집되어 있다. 


[성인록]에 나오는 ‘포은선생화상’, 목판본. [사진-이양재]


[성인록]에 나오는 ‘포은선생유묵’, 목판본. [사진-이양재]
둔촌이 포은보다 10년 위였지만, 둘은 매우 절친하였다. 2027년은 둔촌 선조 탄신 700주년이다. 

이 700주년을 맞아 연일정씨 포은 정몽주의 후손과 영천최씨 천곡 최원도(崔元道, ?~?)의 후손, 그리고 한산이씨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후손, 성주이씨 도은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의 후손이 함께 모였으면 한다. 

그분들이 기개를 펴던 개성의 고려궁터 만월대(滿月臺)에서 말이다. 후에 내가 고서를 수집하면서 몇 부의 [성인록]을 보았지만, 윤석창이 내게 양여한 고본보다 선명한 인쇄 상태의 고본을 아직은 달리 못 보았다. 

4. 이방원의 [하여가]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를 판각한 참고 자료가 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선죽교에서 타살되기 직전에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을 만났던 것으로 전한다. 그 자리에서 이방원은 시조 [하여가(何如歌)]를 지었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화답(和答)하였다고 한다. 이 두 시조는 한문(漢文)으로 기록되었다가 후일 국문(國文)이 창제되고 난 후에는 조선 글로도 전한다.

이방원의 [하여가]는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진심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마련된 자리에서 지어 부른 작품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포은집(圃隱集)』에는 이 [하여가]를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라 기록하고 있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으로 응수한 것으로 기록한다. 

「하여가」가 직설적인 말을 피하고 우회적 기교로 여유롭고 느긋하게 표현한 것에 비하여, 「단심가」는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바위 같은 굳은 의지를 보인다. 

그런데 정몽주와 이방원이 만났던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백 년 전의 옛 기록을 의심하는 일이다. 분명한 기록을 의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존적 역사를 훼손하는 일이고, 정몽주와 이방원을 만나 시로 대화를 한 것을 부정하는 행위는 우리 문학사를 흐트러트리는 일이다.
 
아래 사진은 1983년경에 고서화 거간이던 장포(章포)에게서 매입한 인쇄물 낙장(落張)이다. 

포은의 친필은 아니지만, 포은 등등의 선인들을 숭모했던 누군가가 여러 선인의 글을 초서로 써서 만든 책의 한 면일 것이다. 누구의 서체인지 어느 책의 일부분인지 아직 규명이 안 되어 있다. 

이 파편이 된 자료 한 장만 보아도 포은은 조선시대의 문인들 사이에서 크게 숭모되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면의 왼쪽이 포은의 단심가이다. [사진-이양재]
흔히들 포은 정몽주를 고려의 충신이라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포은 정몽주가 지키려 한 현대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포은이 지키려 한 것은 망해가는 고려를 지키려 한 것보다는, 고려 백성으로서의 자주적 의미와 정신적 가치를 지키려 한 것이다. 

5. [포은시고] 초판본과 그 가치에 관한 전면 재검토를 요구한다. 

나는 [포은시고]에 관한 정론(正論)을 확정 제시하였다. 서지학적인 검토가 없었던 짜깁기 논문을 포은학회에서 2017년 [포은학연구] 제19집 pp.39~71에 게재함으로써, [포은시고]에 관한 문화유산의 가치가 왜곡(歪曲)되었음을 설파하였다. 

이것은 포은학회가 정작 포은 정몽주를 선양한다며, 연구 전제(前提)부터 중대한 오류가 있는 짜깁기 논문을 내세워 [포은시고] 초판본의 가치를 훼손(毁損)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을 지난 10여 년간 방치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포은학회는 저질렀다. 도대체 포은학회는 뭐하는 학회인가? 

포은학회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것이며, 2017년의 오류를 더는 방치하지 말고 사과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제 더 이상 늦지 않게 선행 연구자의 말도 안 되는 오류를 다시금 지적하며, 국가유산청에서는 [포은시고] 초판본 현전본을 종합 조사하고, 그 가운데 선본(善本)을 골라 국가지정 문화유산 보물로 지정할 것을 촉구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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