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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섯째 이야기, 6월 6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2)

작성자태민|작성시간26.06.15|조회수26 목록 댓글 0

온다섯째 이야기, 6월 6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302)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가 어느덧 병오년을 맞이하면서 100화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온째 이야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온’은 100의 순우리말입니다.

내란의 완전 종식과 내란 세력의 청산은 민주주의운동의 확고한 진전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오랜 질곡이었던 외세, 특히 미국에 대해 자주화를 확실하게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나 미국의 변화도 있지만, 이제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할 시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분단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붉은 말은 달려야 하고, 거기에 올라탄 신돌석씨도 힘껏 달릴 것입니다.

통일뉴스와 신돌석씨를 애독하시는 여러분!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정착되는 세상, 대미 자주화가 이루어지는 세상, 통일의 그날을 향해 달려봅시다.

 


[삽화-백소(白笑)]
몇 년 전부터 6월 6일이면 반민특위 강제 해산을 기억하는 기억식 행사가 열리고 있다. 신돌석씨는 재작년부터 참가하였다. 그 전에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모르는데 신돌석씨가 참가한 이후부터는 반민특위 터에 모여서 간단한 행사를 하고 중부경찰서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려면 명동을 거쳐서 갔다. 작년부터는 유족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작년 초에 결성한 반민특위기념사업회가 주관해서 행사를 하고 있다. 신돌석씨도 이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반민특위 터는 을지로입구역 부근에 있는 스탠포드호텔 명동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옛 제국은행 경성지점 건물이 있었는데 반민특위가 1949년 1월 21일부터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활동을 시작했는데, 협소한 공간 때문에 이범석 국무총리의 특명으로 이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개월도 안 되어서 경찰의 습격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이곳에 반민특위가 있던 곳이었음을 알리는 반민특위 터 표석이 있었는데 강제 해산 50주기에 즈음해서 1999년 9월 20일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설치했다고 한다. 그때는 옛 제국은행 경성지점 건물은 이미 사라졌고 국민은행 본점이 있었는데, 소유권이 바뀌면서 2018년부터 새로운 소유주를 위한 건축공사가 벌어지는 바람에 표석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표석은 그곳에 그대로 있다고 한다.

중부경찰서까지 행진을 하는 것은 중부경찰서 경찰들이 반민특위 강제 해산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서장 윤기병이 강제 해산을 진두지휘한 자라고 한다. 작년에 신돌석씨도 참여했는데 중부경찰서는 신축공사를 하는 바람에 현재는 그곳에 없고, 터만 있다. 아무튼 이런 것 하나하나를 정부가 나서지 않고 시민단체들이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국민주권정부가 어떤 변화를 보일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볼 일이다.

2026년 6월 6일은 국민주권정부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전국 선거인 지방선거가 끝나고 3일 지난 뒤에 맞이하였다. 작년에는 대통령 선거 직후이었고, 재작년에는 윤석열 정부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매년 분위기에 차이가 있었다. 재작년에는 아직 반민특위기념사업회가 결성되기 전이었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거의 모든 개혁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국의 대치 국면이 가파르게 진행되던 때였다.

그날도 반민특위터에서 간단한 행사를 하고 중부경찰서까지 행진하였다. 참가 인원은 적었지만 다들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결국 윤석열 독재도 친일 청산이 안 되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 발언하는 이들의 대체적 기조였다. 윤석열은 100년도 더 된 일을 무릎 꿇고 사죄하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망언을 해서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친일적인 독재자였다. 하지만 그의 정권이 수명이 다한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퇴진운동본부도 결성되었고, 촛불행동은 그의 탄핵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주말마다 집회를 열었다. 그 외 많은 단체, 많은 사람들이 윤석열 정권은 곧 끝나야 하고, 끝날 것이라고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실감 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현실화된 것은 비상계엄선포라는 내란 때문이었다. 그의 패착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더 이상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된 상태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후자에 생각이 가까웠다.

작년 6월 6일은 국회에서 탄핵이 되고, 헌재에서 파면까지 인용된 뒤, 선거를 통해 내란 정권을 완전히 교체한 직후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정세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였다. 게다가 반민특위기념사업회가 작년 1월에 결성되었다. 기억식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단체가 분명하였다. 또 좋은 소식도 있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것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을 신돌석씨는 특별수사본부라는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서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북한에 포섭된 국회의원들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국회 활동을 하다 검거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검거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상검사와 수사관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통쾌하다는 느낌까지 가졌었다. 드라마라서 그런지 검거된 국회의원들을 상당히 비열하게 그렸다.

반민특위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나가면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진화위에서 진실규명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내용을 들여다보니 감이 잡혔다. 결정적인 증거도 없고, 이들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정재한이란 사람의 진술뿐이다. 그런데 그는 재판에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별건으로 처리되어서 사형집행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오리무중인 사람을 증인으로 삼는 경우는 공안사건에서 많이 있었다.


[삽화-백소(白笑)]
안 봐도 비디오라고 아마도 이때 검사와 수사관이란 자들은 이 사건 피의자들을 잡아가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고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진 사건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는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엉터리 증인을 조작해 내고, 재판부는 그것만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고 이들과 관련된 재판은 중지되고 자료는 멸실되었다. 그래서 공소기각이 되었다.

문제는 이들을 왜 조작을 해서까지 간첩으로 몰았을까 이다. 신돌석씨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강화되자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해 내고 이들에 대한 배후로 인혁당재건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민청학련은 전국적인 시위를 계획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국가변란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 쓸 일도 아니었고, 인혁당재건위는 있지도 않은 조직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된 국회의원들은 반민특위에 대한 입법에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간첩으로 몰고 난 뒤 반민특위를 습격해서 강제 해산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다. 이승만 정권이 반정권세력 혹은 분단반대세력을 집중적으로 제거했던 시기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난 뒤 신돌석씨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쩌면 이들은 이렇게 한결 같을까? 개 꼬리 삼년 묵혀도 황모되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이들을 두고 있나 보다.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한 진화위의 결정은 조금이나마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이기는 하지만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유족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리하여 3기 진화위에 다시 결정을 신청했고, 재심을 청구하였다. 일부 관련자에게만 적용되었고 그나마도 인권 침해 등과 관련되어서만 그리 된 것이다. 결국 국회프락치사건이 있게 된 배경인 반민특위 강제해산에 대한 진실 규명이 없이는 진정한 진상규명은 어렵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파고든 학자가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박사학위논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신돌석씨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용감한 사람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유족은 물론이고 종교인 재야인사 청년학생들이 끈질기게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추구해 나가서 결국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7-80년대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는데 기어이 해냈다. 국회프락치사건도 역시 그런 것 같다. 이렇게 역사가 진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518광주민중항쟁을 폄훼하는 문제로 논란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그런 경향이 심해진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이전에는 국가권력이 제도언론을 장악하고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모욕을 주어서 일반인들이 그렇게 할 까닭도 없었다. 그런데 518광주민중항쟁이 어쨌든 부족하나마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고 법적으로도 인정되게 되면서 그에 대한 반발과 왜곡이 심하게 나오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의 진전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과거를 정확하게 다시 살리는 일도 하면서 전진해 나간다. 한강 작가의 말대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릴 수 있지만, 역으로 현재가 과거를 살리기도 한다. 아니 살려야만 한다. 진실을, 의로움을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을 넘어 4.3항쟁으로, 여순항쟁으로 우리의 노력은 넓혀져 왔고, 더욱더 넓혀져야 한다.

여순항쟁이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군사반란이라는 왜곡에서 벗어나서 동포에게 총을 쏠 수 없다는 의로운 정신으로 제주 출동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정도 되자 친일 친미 수구세력들은 그야말로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색깔론을 들먹이면서 구태의연하게 선거 토론 중에도 주적이 누구냐고 묻는 한심한 작태를 벌이고 있다. 그들이 그럴수록 우리는 의연하게 의로운 과거를 살려나가야 한다.

반민특위도 국회프락치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반민특위는 친일파를 청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소장파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입법이 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국회프락치사건은 그 중심 인물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이렇게 명백한 것이 제대로 규명이 되지 않는 것은 선사시대나 고대사처럼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전을 이루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가로막으려는 세력의 싸움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과정과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다. 역사의 진전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모든 분야에서 집요하게 싸워야 한다. 학계, 언론계, 종교계를 비롯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선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정치권에서 법과 제도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반민특위도 마찬가지이고,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도 마찬가지이다.


[삽화-백소(白笑)]
국회프락치사건과 관련해서 현재 대다수 국민들이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관련자들 중 다수가 북으로 갔다는 점이다. 이것을 그들이 북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 프락치의 증거라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월북한 것인지 납북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설사 월북이라고 하더라도 무슨 생각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규명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의 친일 청산의 의지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이 존중되어야 함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남이냐 북이냐로 갈라치기하는 분단 냉전식 사고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한 흑백논리를 전가의 보도로 쓰는 자들이야말로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국민 대다수가 합의한 것을 바탕으로 과거에 대한 진실 규명의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한다. 그것이 지금 살아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올해 6월 6일은 지방선거를 치르고 맞이하였다. 선거 결과는 예상했던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내란청산을 해야 한다는 민주개혁진보진영과 보수결집을 외치며 내란옹호를 위해 뛰는 수구세력 싸이의 싸움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수구세력은 지리멸렬하지 않았다. 일부 분열이 있었지만 반(反)수구라기보다 비(非)수구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이 오히려 목소리가 약화되었다.

이번 지방선거의 과정에서 박근혜 이명박이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한 사람은 탄핵되었고, 또 한 사람은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되었던 사람인데 이들이 선거운동에 뛰어들고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정말 한심한 현실이다. 이러다가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까지 옥중 선거운동을 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오고 있다. 어찌됐든 이들이 일단 하나로 뭉치고 있다는 것이다. 극우 유튜버들조차 함께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단결이 언제까지 지속되리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들이 뭉치는 것 자체가 위기감의 발로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현실을 가볍게 보아 넘겨서도 아니되지만 과장해서 보아도 안 된다. 그런 가운데 재미동포로 미국 극우세력의 대표격 중 하나인 자가 선거 기간에 다녀갔다. 이들은 미국 정부를 압박해서 우리 정부를 어떻게 해보려고 한다. 그런 징후는 도처에서 나타났다. 이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은 국제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이들이 결집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분열 현상은 약화되고 있다. 국민대중의 눈치를 보면서 윤석열과 절연해야 한다는 등 떠들던 자들이 슬그머니 윤어게인으로 돌아가고 있고, 그에 반대하던 자들은 그냥 눈치만 보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당분간 지속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대중이 합의하는 선에서 과거에 대한 진상규명은 더욱 추진되어야 한다.

이들이 서로 눈치 보는 현상은 개헌안 표결 때부터 나타났다. 계엄해제나 탄핵 때와는 달리 국힘당에서 이탈해서 표결에 참여한 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한 사람이 두 명 정도 있었으나 그들도 표결하는 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구심력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누가 보아도 치졸하고 한심해 보이는 그 당 대표가 그런대로 세력을 유지해 가면서 반대파를 강하게 누르기 시작하면서 선거에 임했다.

그들은 적은 편이라도 똘똘 뭉치는 것을 택한 듯하다. 이런 자들을 상대할 때 민주개혁진보세력의 전략 전술이 다양화 다변화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 내란청산이나 국힘당 해체만을 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민주개혁진보진영이 분열되면서 힘을 받지 못한 점도 없지 않다. 결국 법과 제도로 정착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개헌 문제에서 보듯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법적으로 되어 있는 광주민중항쟁을 헌법 전문에 넣는 것은 그들이 오래 전부터 동의한 바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기념식마다 참여했고 심지어 묘소 참배도 때마다 했다. 그런데 역시 그들의 속마음은 아니었다. 그 동안 밀려서 인정한 것일 뿐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성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것을 위해 계속 선동을 하고 있다.

이제 전선은 반민특위로 상징되는 친일세력 청산에 대한 문제까지 갔다. 그리고 그것은 미 군정 문제나 해방정국 문제, 이승만 정부 문제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막으려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우회적인 방식도 있겠지만 역시 법과 제도로 정착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교육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한다. 그 점에 대한 우리 모두의 분명한 인식이 요구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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