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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과 저항의 이중주

작성자태민|작성시간26.06.19|조회수25 목록 댓글 0

청산과 저항의 이중주

[연재] 홍암 나철 서거 110주기를 추모하다 (1)

 

 

 

김동환 /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인물의 무게는 역사적 평가와 비례한다. 그 평가가 현재에도 숨을 쉰다면 그 무게 역시 미래의 가치 형성과도 무관치 않다. 우리 근대사에 그러한 통시대적(通時代的) 의미를 살다 간 인물들은 극히 드물다. 그 대표적 인물이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이다. 

  그동안 나철에 대한 평가는 주로 독립운동의 대부, 항일의 선각, 저항의 지주 등 주로 시대역할론적으로 조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각주구검의 어리석음과 다를 바 아니다. 오히려 나철의 행보는 과거의 반성 속에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설계해 보자는 시대를 넘어선 경구와 맞닿아 있다. 그가 외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으나 정신은 있다)’이 그것이다. 이 외침은 노예의 시대와 주인의 시대, 망각의 시간과 각성의 시간을 구분시켜 주는 단말마적 절규였다. 우리의 근대를 나철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바라볼 수 있는 경계선적(境界線的) 구호도 된다. 

  올해로 나철이 서거한 지 꼭 110주기를 맞는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침묵은 너무도 길었다. 어제도 그러했고 오늘까지도 조용하다. 필자가 『홍암 나철, 근대를 꿈꾸다』(도서출판 선인, 2026)의 졸저를 내놓게 된 배경이다. 물론 당랑거철의 무모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에 구차한 변명을 보태기로 했다. 올 한가윗날(9월 25일)은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진순명(自盡殉命)한 지 1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 기간을 빌려 10여 회에 걸쳐 넋두리를 늘어놓고자 한다.


  우리의 근대는 복잡하다. 외세의 침략으로 근대 전반기의 불평등 조약 체계와 그 후반기의 식민지사회라는 특수한 성격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정신사적 관점에서 보면 더욱 꼬여있다. 망국의 원인이 되는 중화의 질곡 위에 일제의 강점이라는 식민의 굴레가 덧씌워졌다. 중화주의와 황국주의가 겹쳐진 모양새다. 우리의 근대가 청산과 저항의 이중주로 울려 퍼진 운명적 배경이 된다.

  어느 집단이건 정체성이 있다는 것은 작지 않은 힘이다. 그것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주인의식으로 직결된다. 주인의식은 주변 상황의 역학관계와 맞물리며 늘 핍박과 저항이라는 길항작용을 해 왔다. 우리의 역사를 보더라도 외세 혹은 외래 사조의 충돌 과정에서 가장 큰 핍박의 대상이 우리의 정체성과 맞물린 집단 혹은 문화였다. 

  가령 팔관(八關, ᄇᆞᆰᄋᆞᆫ)은 단군신앙의 맥인 동맹(東盟)을 원류로 하는 것으로 고려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몽고 침입에 의한 팔관의 붕괴는 우리 정체성에 치명타가 되었다. 팔관의 재계(齋戒)가 우리 민족의 진실한 정성례(精誠禮)임을 강조한 나철이, 몽고에 의한 팔관의 단절을 교맥(敎脈)의 단절로 이해하고 있음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성리학의 전래 역시 우리 정체성적 사고를 휴지기(休止期)로 몰아넣은 뼈아픈 경험이다. 흔히들 절개와 충의의 상징적 인물로 포은 정몽주를 꼽는다. 그러나 정체성의 시각에서 곱씹는다면 쓰리고 아리다. 중화의 질서를 창도한 인물이 정몽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존주자양이적(尊朱子攘夷狄)의 논리를 세운 장본인이자 우리나라 도학(성리학)의 비조로 추앙된다. 우암 송시열은 중화(中華)로써 이적(夷狄)을 변화시키고 『가례(家禮)』를 따르고 『춘추(春秋)』의 법을 밝힌 인물로 정몽주를 드높였다. 

  또한 “본조(本朝, 조선-인용자 주)의 모든 선비가 근본을 추구하고 의의를 풀이하여, 그 도학연원(道學淵源)과 전장문물(典章文物)에 대해, 낙민[洛閩,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함-인용자 주]에 소급하고 은주(殷周)에 젖어 드는 이가 다 선생(정몽주-인용자 주)을 조종으로 삼았으니, 그 치도(治道)를 제재하고 나라를 보존하고 충(忠)을 다하고 인(仁)을 이룬 것은 사실 선생의 여사(餘事)이다.”라고도 추켜세웠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조에 들어서는 우리 정체성의 공간은 더욱더 좁아졌다. 그 근간이 되는 단군의 위상은 기자에 밀려 초라해지고, 단군조선보다는 기자조선이 우선시 되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국호를 정함에 있어, 팔조교(八條敎)와 홍범(洪範)을 전한 기자를 기리면서, 조선이 기자조선을 계승하여 입국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주무왕과 공자에 대한 흠모를 내세워, 조선을 동주(東周)로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의 서두에 실린 「國號」조의 원문. 주무왕의 封함을 받은 기자로부터 조선 국호의 정당성을 연결시키고, 동쪽의 중화라 할 수 있는 東周朝鮮을 꿈꾸고 있다. 
  우리 역사서의 망실 역시 조선조 정체성의 위기와 관련하여 놓칠 수 없는 사건이다. 올바른 역사서를 잃어버림은 곧 우리 역사의 망각 혹은 말살과 연결된다. 일찍이 숙종조의 북애자가 “조선에 국사가 없다”고 언급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국사, 즉 진정한 민족사서의 부재를 한탄한 것이다.

  “단군사가 전하거나 부여사가 전하거나, 고흥의 백제사가 전하거나, 이문진의 고구려사가 전하거나 거칠부의 신라사가 전하였으면, 우리나라가 오늘에 이르러 민력(民力)이 팽창하여 동아에 칭패(稱覇)함도 가하며, 국위가 진작하여 서구를 내려봄도 가하거늘, 오호라, 고대의 거필(巨筆)은 병화(兵火)에 투(投)하며 흑 속에 묻혀 일단편(一短篇)도 전치 못하고 전한 것은 노예무리의 사필뿐이라.”고 절규한 신채호의 정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서다운 사서는 모두 없어지고 무정체(無正體)의 역사만 남아있음이 한스럽다는 의미다.

  조선조 위정자들의 망동은 우리 정체성을 담은 사서들을 없애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이른바 조선판 분서갱유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당시 세조·예종·성종 때의 수서령(收書令)에 나타나는 서목을 보더라도 우리 정체성을 담은 사서가 적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그 서책 명에 나타나는 의미가 유교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수서령의 정책 배경 역시 조선의 국시(國是)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조선의 국시는 바로 숭명의식(崇明意識)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중화질서에 어긋나는 우리의 주체의식은 쉽게 표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수서령에 포함된 책들은 당대의 반체제 서적으로, 그 제목들만으로도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사서나 사상서임을 직감케 해준다. 국시를 거스른다는 것은 반체제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더욱이 숭명(崇明)에 반한다는 것은 역천(逆天)의 의미로까지 해석되었다. 숨기면 효수(梟首)하겠다는 극단의 방법까지 동원한 이유가 이를 뒷받침한다.

  후일 나철이 그의 유서 『중광가(重光歌)』에서 “후조선 휘참(諱讖)하야 세조 예종 금서(禁書)로 / 고조선사 오훈고(五訓誥) 신사비기(神事秘記) 다 탔네”라고 탄식한 것도,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담은 사서들의 참화를 지적한 것이다. 

  조선조 수서령에는 안 나타나지만, 고구려의 『유기(留記)』100권이나 『신집(新集)』,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 등도 전하지 않는다. 또한 『신지비사』·『신지비사역술(神誌秘詞譯述)』·『진역유기』·『삼한습유기』·『대변경』·『신선전』·『해동비사』·『해동비록』·『단군기』·『해동고기』·『선사』 등도 제목이 익숙한 책들이다. 모두 우리 고유의 역사의식 내음이 물씬 풍기는 책들이다.

  조선의 성리학적 지배구조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 장치 중의 또 하나가 과거제도다. 고려 광종 때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해 시작된 과거제도는 중국 당나라의 과거 임용 제도를 모방하여 마련되었다. 광종은 중국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가 후주에서 태조와 세종의 개혁정치에 관여했던 경험을 십분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유교에 밝은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는 광종에게 가장 안성맞춤의 제도로 인식되었다.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사상을 뿌리내리는 것이야말로 왕권의 확립에 무엇보다도 긴요했기 때문이다. 

  광종은 과거제의 도입을 통해서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유교이념의 기반을 좀더 공고히 다지고, 유교사상의 세뇌를 받은 새 관료들을 충원하여 사회 변화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결국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기구의 정비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었다.

  과거제도는 문인 통치의 전통, 나아가서는 유교적 가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봉건시대 유럽의 지배계층인 기사(騎士, knight)나 일본의 사무라이와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시험을 치르는 문인들이 배워야 할 지식이 오직 사서오경 내지 육경으로 요약되는 유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학은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 이후 제국(帝國)의 성립과 더불어 국교(國敎)의 위상을 누렸린 가치다. 또한 충과 효의 도덕률을 강조함으로써 중국 사회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고 독자적인 유교문화권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배경 속에 당‧송‧명‧청 등의 통일제국시대에도 유교는 견고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유교적인 지식과 교양은 과거제를 통해서 출세의 도구가 되었으며, 나아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었다.

  고려조나 조선조의 과거시험 내용 역시 유교 경전‧시문(詩文)‧역사가 중심이었다. 이른바 유교적 문사철(文史哲)의 인문학 과목들이다. 따라서 유교적 소양과 도덕 수양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은 결코 관료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학문‧교육 구조는 조선조 사대부들의 사유구조 전부를 지배하게 된다. 

  이미 과거제도의 폐해에 대해서는 이만규(李萬珪)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후세에 자유로운 사상의 발달을 저해한 것과 사대부 계급에 부와 공명사상만을 양성한 점, 공허무용(空虛無用)한 학문으로 유지된 것과 합격 후 연줄 찾는 데만 열중하는 나쁜 습관을 조장한 점 등이 그것이다. 또한 조선조의 교육이 명나라를 높이는 숭명사상이 가득찬 것은 유교사상이 길러온 모화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힐난했다. 

  『천자문』이 중국 것임은 물론이고 그 내용 역시 중국의 역사‧지리‧인물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몽선습』 속에는 명나라 태조가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한 것이 기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의 일화 역시 제갈량 등 중국 사람만 있고 조선인이 없으며, 유학자들이 『통감』이나 『사략』을 가르치면서도, 조선의 역사는 한 장도 없다는 조선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거시험은,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오로지 유교적 사유에 의한 관료 선발에 충실하였다. 따라서 조선조 과거급제를 통해 벼슬에 들어선 인물들의 가치관은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중국 정신의 완벽한 구현을 통해 중국인의 아바타(avatar)로 역할하는 것이 조선조 관리들의 지향이었다. 이것은 명나라의 멸망 이후 나타나는 소중화주의의 가치관 속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한편 조선조 중화의식은 왜란(倭亂)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감회와 맞물리면서 오히려 심화된다. 더욱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가 등장하자 소중화의식으로 더욱 화석화되어 갔다. 이것은 일본의 17세기 중후반의 성리학자였던 하야시 가호(林鵞峯)의 다음 인식과는 천양지차다. 

  “숭정제(崇禎帝)는 죽고 홍광제(弘光帝)는 달로[㺚虜, 몽골이나 만주족 등을 낮잡아 부르던 말로 여기서는 여진족(청나라)를 말함]에 패하였다. 당왕(唐王)과 노왕(魯王)은 겨우 남쪽 귀퉁이를 보존하고 있을 뿐, 중원은 달로가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중화가 이적으로 변모한 상태(華變於夷之態)’이다.…(중략)…만약 이적(夷狄)이 중화(中華)로 변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다른 나라 일이지만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華夷變態』「序」)

  송시열이 존주대의(尊周大義)로 주자(朱子)의 강기(綱紀)를 다잡으려 한 것이나, 정조가 『주자선통(朱子選統)』을 통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도모하려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어 실학의 거두 박지원이 제창한 법고창신(法古創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개화파의 서양문명 수용 논리로 제시된 구본신참(舊本新參) 역시, 그 사상적 배경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

  이항로의 위정척사(衛正斥邪)가 존왕양이(尊王攘夷)·춘추대의(春秋大義)의 정신을 기저로 한 주자학적 화이의식(華夷意識)에 기반한 가치임은 익히 아는 바다. 그럴싸하게 포장된 동도서기(東道西器) 역시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材)와는 정신적 배경이 너무 다르다. 급기야 정신적 가치마저도 서양에서 가져올 수 있다는 서도서기(西道西器)의 주장까지 등장하게 된다. 

  유사 이래 국권과 영토를 모두 강탈당했던 일제강점기,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우리의 중화적 과거들을 교묘히 재활용하여 영구적 식민지를 위한 도구로 삼았다. 예를 들어 조선조 수서령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체성을 담은 국사들을 병탄 직후부터 조직적으로 없앴다.[나다니엘 페퍼(김여제 번역),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국가보훈처, 1994] 반면 그들의 식민통치를 위해 유리한 문적들은 그대로 온존시켰다.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 기록들은 유교의 유교에 의한 유교를 위한 중화의식에 충실한 기록들이다. 

  일제는 이러한 작태를 통해 우리의 중화적 굴레를 승계라도 하듯 주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부끄럽게도 우리의 노예적 굴레는 그대로인 채 주인만 바뀐 형국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근대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노예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은 주인이기에 느끼는 책임이다. 예관 신규식이 그의 『통언(痛言, 한국혼)』에서 부끄러움마저 잊어버려 망할 수밖에 없었던 아래의 탄식 역시 같은 맥락이다.

  “첫째, 선조의 교화(敎化)와 그 종법(宗法)을 잊어버렸고, 둘째 선민(先民)의 공렬(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으며, 셋째 국사(國史)를 잊었고, 넷째 국치(國恥)를 잊었으니, 이렇게 사람들은 잊어버리기를 잘하고 보면 나라는 망하게 마련인 것이다.”

  밝고 희망적이어야 할 근대가, 이렇듯 우리에게는 중화의 청산과 일제에의 저항이라는 운명적 이중주로 울려 퍼졌다. 근대에 들어 이러한 부끄러운 몰골을 자각시킨 인물이 홍암 나철이다. 그가 절규했던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있다)’이 그 각성의 구호였다. 정체성[道]의 망각으로 무너진 나라를 정체성의 재건으로 되찾자는 외침이었다. 까닭에 그가 살다 간 모든 자취들이 노예근성을 씻어버리고자 한 몸부림과 연결된다. 우리가 근대를 일깨운 인물로서 나철을 응시하며, 그의 삶과 가치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오랜 기간 대학에서 대종교독립운동사와 국학 이론을 강의하였다.

주요 저술로는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국학과 민족주의』(공저, 2019), 『배달의 역사, 새 길을 열다』(공동편역, 2020), 『총을 든 역사학자 김승학-그 삶과 사상』(2021), 『임오교변』(공저, 2022), 『무원 김교헌의 생애와 역사인식』(2023), 『대종교항일투쟁인물사전』(2024) 외 다수가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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