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섯째 이야기, 6월 6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303)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가 어느덧 병오년을 맞이하면서 100화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온째 이야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온’은 100의 순우리말입니다.
내란의 완전 종식과 내란 세력의 청산은 민주주의운동의 확고한 진전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오랜 질곡이었던 외세, 특히 미국에 대해 자주화를 확실하게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나 미국의 변화도 있지만, 이제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할 시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분단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붉은 말은 달려야 하고, 거기에 올라탄 신돌석씨도 힘껏 달릴 것입니다.
통일뉴스와 신돌석씨를 애독하시는 여러분!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정착되는 세상, 대미 자주화가 이루어지는 세상, 통일의 그날을 향해 달려봅시다.
[삽화-백소(白笑)]
반민특위터에 도착한 것이 1시 조금 안 되어서였다. 연휴 기간인데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작년은 특별한 사정이 있었지만 재작년과 비교해 보면 정세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였다. 하지만 작년과는 달리 단지 승리 혹은 성취감이 주된 것은 아니었다. 지방선거의 결과는 선거로 내란세력의 완전한 청산은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거 무용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 현재로서 저들을 정치적으로 청산하는 데 선거는 가장 중요하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하였다..
김민호 최미숙 등과 미리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지역 시민단체 사람들 세 명도 함께 했다. 반민특위에 대한 기억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김민호나 또 다른 진보측 사람들은 1990년대만 해도 회의적이었다. 신돌석씨가 속해 있던 조직에서도 일부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 문제로 깊이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사회주의를 정통으로 하려는 생각이 강해서 그랬던 것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본다. 그때는 그런 분위기가 상당히 강했었다.
21세기가 되고 정권도 몇 차례 바뀌면서 생각들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해 이해가 높아진 점이다. 그러면서 현대사에 대한 공부도 많이들 하였다. 이전에는 현대사를 북 위주로만 보려고 하거나 아예 사회주의계열 아니면 견인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경향이 신돌석씨 주위에는 많았다. 그런데 어느덧 현대사의 다양한 견해에 대해 공부도 하고 관심도 많아졌다.
그런 가운데 여운형, 김규식 등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김구에 대해서도 그렇다. 김구를 그저 우익일 뿐이고, 운동 방식도 테러 위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때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분단을 막고자 한 그의 헌신을 높이 샀고,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그의 공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도산 안창호에 대해서도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진정성과 헌신성을 높이 사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반민특위의 진상이 규명되고 그 정신이 계승될 때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이 강화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미 군정에 대한 문제로 확대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신돌석씨는 이전에 교육을 받으면서 관련 서적과 논문들을 읽은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된 것은 이승만 정권과 친일 경찰의 폭력적 방식이 직접적 원인이지만, 그것을 막아낼 수 없는 물리력의 한계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49년 6월 6일에 친일 경찰 출신들이 중심이 된 경찰들은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여 사무실을 부수고 조사자료를 불태웠으며, 반민특위 위원을 협박하고 반민특위 특별경찰대원을 폭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친일파 경찰의 만행에 대해 이승만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에 대한 폭력적 공격이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발표하면서 공개적으로 그 만행을 옹호하고 나섰다.
반민특위에 대한 강제 해산은 지금으로 견주어 보면 내란특검을 군대나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셈이다. 지금 그것은 왜 불가능한가? 군대와 경찰이 헌법적 틀 내에서 통제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정권의 통제는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의 명령이 그들의 폭거에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반헌법적이었다. 마치 윤석열이 반헌법적인 12.3계엄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저지하는 데 시민의 힘이 컸지만 입법부의 노력, 이후 국가권력의 신속한 대응이 있었다. 그런데 반민특위 강제 해산 때는 그것이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경찰은 거의 모두 친일 경찰이 장악하고 있었다. 관료도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이르게 된 데는 미 군정 3년의 기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미 군정은 친일 경찰, 관료들을 그대로 중용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것을 묵인했고, 그들 자신이 탄압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해방 이후 미 군정 3년이 우리가 자주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데 크게 역작용을 했고,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미 정부에 이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진행되고 미국의 진정한 사과와 관계의 변화가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의 새로운 우호 관계가 재정립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진실의 확산과 인식의 변화가 필수불가결하다.
반민특위기념사업회에 신돌석씨가 가입을 하게 된 것은 최미숙 때문이었다. 최미숙이 어느 날 그런 단체가 생긴다면서 지역에서도 가입을 하자고 권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있는데 굳이 따로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전체적인 친일청산과 또 달리 반민특위가 기억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의했다. 어쩌면 반민특위의 성립과 강제 해산이 지금 우리에게 특별히 가르쳐 줄 바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들었던 극우 반공드라마가 오히려 배경지식이 되고 반대로 이해되어서 그런 점도 있는 것 같았다. 1980년대 후반에 신돌석씨는 학생 출신들과 함께 검찰에서 나온 좌익실록이란 것으로 공부를 했다. 남민전, 통혁당, 인혁당 등을 그것을 통해 배웠다. 거기 나온 것을 거꾸로 이해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맹점이 있었다. 아무리 반대로 이해하려고 해도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고문과 조작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사건 관련자들을 냉혹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삽화-백소(白笑)]
그런 공부를 하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해방정국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 신돌석씨가 누구보다 많이 알았다. 학생 출신들이 신기하게 생각했다. 신돌석씨는 라디오 드라마에서 들은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것이 이런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많은 것이 궁금해졌다. 반민특위나 국회프락치 사건도 그 중 하나였다.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를 알고 싶어졌다.
김민호는 신돌석씨가 강권하자 마지못해 가입했는데 창립대회에 참가해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반민특위에 대한 내용이 담긴 서적이나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이 친구는 그런 점에서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지금은 지역에서는 누구보다 반민특위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미숙은 언제나 그렇듯 꾸준하다. 반민특위에 대해서도 다른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지역 여러 단체들에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미숙의 소개로 창립대회에서 사무총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신돌석씨와 비슷한 나이인 듯한데 반민특위 유가족이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조사관이었단다. 환갑이 다 되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유가족들이 대부분 80이 넘었는데 이 사람만 60대 후반으로 상대적으로 젊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가족모임부터 거의 혼자 실무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늦게 낳은 자식이 반민특위기념사업회를 조직하게 된 것도 역사의 우연이라면 우연이겠다.
반민특위터에서 간단한 출발 행사를 하였다. 사무총장의 사회로 이사장 인사말씀이 있었고, 이사인 교수 한 분이 오늘 행사의 의미를 말하였다. 그 분은 내란세력과 민주세력은 반민특위에 대한 이해로 정확하게 나뉘어지는 것이 우리 현대사라고 하였다. 이어서 사무총장이 상여 행렬은 반민특위와 함께 민족정기가 죽은 것을 의미하고, 행진을 통해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고 오늘 행사를 안내하였다.
한 무리의 상여 행렬이 상복을 입고 만장을 들고 출발하였다. 공주 봉현리 상여소리를 전승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웹포스터에서 보기는 했는데 실제로 보니 규모가 상당하였다. 공주 봉현리에서 온 사람만 4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분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 장례식이 있을 때면 상여를 메고 장례식장에서 묘소까지 간다고 한다. 오늘은 한창 농번기인데도 반민특위 기억식을 위해 특별히 왔다고 한다.
명동거리가 복잡하고 노점상들이 있기 때문에 을지로로 우회하는 길을 택하였다. 명동 안으로는 어떤 종류의 행진도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혐중시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원래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최측이 경찰에 신고할 때 그렇게 이야기되었단다. 하긴 명동 안으로 시위행렬이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입구에서 작년에 벌어졌던 혐중시위를 신돌석씨가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명동이 엄청나게 복잡하게 느껴졌었다.
상여 행렬이 앞장서고 뒤에 만장을 든 사람들이 따르니 장관이었다. 아쉬운 것은 명동이 아니라 을지로로 우회하니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외국인들은 주로 명동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전통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공휴일이면서 토요일 오후이니 지나는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구경거리로 알던 사람들이 만장에 쓰인 글씨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반민특위 해체는 내란의 뿌리’ ‘다시 반민특위 다시 민주주의’ 등 만장에 쓰인 글자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작년에는 강사와 함께 역사기행을 했었다. 강사는 몇 년 전 3월에 현충원 안내를 했던 강사였다. 그야말로 믿고 맡길 수 있는 현대사 기행 강사였다. 명동예술극장을 지나면서 그곳이 일제 강점기 때 명치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는데 주로 일본 영화를 상영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해방 뒤에는 시공관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고 서울의 문화에술중심지 구실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국립극장으로 되면서 연극중심지였다.
1975년에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한 뒤 민간자본에 매각되어 은행 등으로 사용되면서 그 특색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2009년에 다시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으로 복원되면서 연극 공연 중심의 극장으로 되었고, 2015년부터 국립극단의 전용극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당시인 1955년 민주당 전당대회 때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다행히 저격은 실패하였다. 당시에는 민주당원이 했던 것처럼 조작되었으나, 4.19혁명 이후에 그 배후에 이기붕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강사가 말했었다.
이때만 해도 정치인을 죽이는 테러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폴란드 출신 미국 정치학자가 ‘민주주의는 우리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확신을 하는 상태’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신돌석씨는 참으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1987년 이전까지, 아니 노태우 정권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정치인에 대한 죽임은 박정희 때까지인 것 같기는 한데 반대세력을 죽이는 일은 그 뒤 한동안 계속되었다.
반민특위도 테러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1949년 2월, 친일파들은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서, 반민특위를 주도한 인사들을 납치, 암살하고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한 극악한 공작을 시도했다. 이른바‘반민특위 위원 암살 음모 사건’이다. 사주를 받은 백민태 등은 반민특위를 주도한 인사들을 납치한 후에“나는 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하는 것보다 이북에서 살기를 원한다”라는 <성명서>를 작성하게 한 뒤, 38선 근처에서 이들을 살해하려고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살해한 뒤 월북하려고 했던 것처럼 꾸미고 공산주의자 인사들을 소위 애국청년들이 살해한 것으로 꾸미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암살명단에는 반민특위 위원장과 부위원장, 국회의장,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인 대법원장,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장인 검찰총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납치, 암살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승만 정부와 친일 세력은 친일 경찰을 동원해서 습격을 하였고, 이어서 국회프락치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해 냈다.
지금도 이재명 대통령이 야당 대표이던 시절 당한 테러 등 그러한 테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상당히 약화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만큼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는 징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확고하게 정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내란극우세력을 일단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백병원 앞을 지나갔다. 1991년이 떠올랐다. 김귀정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었다. 신돌석씨가 체포되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수배되어 있으므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조직의 방침인데 신돌석씨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죽음이 있지만 자기 나라 경찰에 의해 최루탄 세례를 받고 토끼몰이로 포위된 뒤 무수한 구타를 받고 압사당한다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도 이른바 민주화가 된 이후라는 시대에 말이다.
더욱이 열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백골단들이 다시 쳐들어와서 시신을 탈취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몇몇 노동자들과 병원에 들어간 신돌석씨는 시신을 탈취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더 이상 탈취하지 않고 장례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경찰이 했다는 말을 듣고 빠져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잡히지 않겠다고 숨어 있는 것이 스스로에게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었다.
명동성당 앞에 왔을 때 강사는 여기가 바로 이재명 의사의 의거터라고 했다. 대통령 이름과 묘하게 같아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강사는 천주교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고 때로는 반독립적이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 반성하고 민주화운동에서는 어느 종단 이상으로 앞장섰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신돌석씨가 처음 노동운동을 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던 ‘함께 하는 집’이 떠오른다.
당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함께 하는 집’에 너도 나도 도움을 받으려고 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비판을 하곤 했었다. 1986년에 반미투쟁이 고조되면서 더욱 그랬다. 그때 원장 수녀가 신돌석씨를 불러서 사상에 대해 묻고 자신들은 친북이나 공산주의는 인정하지 못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1986년 후반 이후부터 지역 내 민주화운동진영은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이고 내용상으로는 ‘직선제 쟁취’였다.
신돌석씨가 속해 있던 조직은 직선제 쟁취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조철구는 다양한 세력의 연대는 3.1혁명 때부터 이어져 오는 우리 운동의 전통이라고 했었다. 그때는 그 말이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범국민적인 운동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생각을 신돌석씨는 그 뒤 여러 차례 항쟁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지금은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수가 되었다. 연합정치, 연대의식 등은 우리 운동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상여를 앞세운 행렬이 중부경찰서 터 앞까지 갔다. 중부경찰서는 재건축공사로 다른 곳으로 임시 이전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비어 있다.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그랬었다. 여기서도 간략한 행사를 하였다. 반민특위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이란 사람이 정부당국에 대한 요구사항을 이야기하였다. 어제 국회에서 기자회견할 때 발표했던 내용이란다. 반민특위 강제해산은 국가폭력이므로 정부당국의 적절한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4.3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했듯 반민특위 강제해산도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해서 국민주권정부의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경찰의 폭력적 강제해산 행위에 대해 행안부장관과 경찰청장도 사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과는 완전한 진상규명과 정확한 역사 기록을 위해서 특별법으로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야만 법과 제도를 통해 비로소 반민특위 정신이 되살아날 수 있고, 친일청산도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의 운영위원이 마무리 발언을 했다. 그는 12.3내란의 뿌리는 반민특위 강제해산이고, 그때 그것을 막지 못한 것이 그 뒤 70년의 역사에 질곡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질곡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전진해 왔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제 절망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고 반민특위 정신을 계승해서 내란 청산을 완성하자고 하였다.
이제 본행사가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1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유튜브애서 현대사 인기강사인 사람이 강연을 하고, 공연도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70년이 다 되었지만 그 정신을 계승해서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서 기억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그 생명력은 죽음 뒤의 부활이라고 일컬어도 좋으리라. 오늘 상여 행렬과 함께 울려퍼지던 상여소리가 귀에 맴도는 듯하였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알리고 다시 부활을 알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