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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넘어 연대의 가능성을 묻다

작성자태민|작성시간26.06.23|조회수43 목록 댓글 0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넘어 연대의 가능성을 묻다

[연재] 재일사학과 한반도 근현대사-한국과 일본, 상호이해를 위한 제안

 

 

 

 

이규수 /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구노 오사무(久野収)·김달수(金達寿) 대담의 역사적 독해와 현재적 의미

본 텍스트는 일본의 진보적 사상가 구노 오사무(久野収)와 재일조선인 지식인이자 작가인 김달수(金達寿)가 나눈 대담으로, 1970년대 중반(1975년 쇼세이마루 사건 직후)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대담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찰의 폭압과 조선인의 실존적 고통에 대한 회고에서 출발하여, 일본 역사학계의 식민사관 및 관념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그리고 두 민족 간의 뿌리 깊은 ‘근친증오’를 넘어설 일상적·문화적 연대의 제안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대담은 단순한 과거사의 회고를 넘어,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상흔이 전후(戰後) 일본 사회의 심층 의식 속에 어떻게 기형적으로 잔존하고 있는지를 파헤친 귀중한 기록이다.

국가 폭력의 일상화와 재일조선인의 디아스포라

대담의 첫머리는 193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 치하의 유치장 풍경으로 시작된다.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구노 오사무의 증언과 김달수의 회고가 교차하며, 당시 일본 경찰, 특히 특별고등경찰(특고)이 조선인을 어떻게 철저히 통제하고 억압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김달수가 증언하는 ‘내선계(内鮮係)’의 횡포는 식민지 백성들의 디아스포라적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값싼 노동력으로 조선인을 착취하다가도 통제의 필요성이 생기자 이동의 자유를 억압했던 일제의 정책은, 임종을 앞둔 부모를 만나기 위해 ‘일시귀선증명서’를 애걸하며 눈물짓던 조선인들의 비극적인 일상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제국주의의 폭력이 거창한 정치적 구호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서 한 장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민중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구노 오사무는 유치장에서 목격한 조선인 청년들의 강인함과, 기차 안에서 일본어 발음으로 조선인을 가려내려 했던 경찰의 폭력적 검문을 증언한다. 이는 관동대지진 당시 “주오엔 고주센(15엔 50전)”을 발음하게 하여 조선인을 학살했던 제노사이드의 기억이 1930년대에도 국가 권력의 통제 방식으로 버젓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조선인 청년들 사이에 존재했던 암묵적인 연대와 경외감은, 식민지 파시즘 치하에서도 피어났던 항거의 불씨를 확인하게 한다.

관념적 역사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식민사관의 민낯

본 대담에서 가장 학술적으로 예리한 부분은 일본 역사학계에 대한 김달수와 구노 오사무의 통렬한 비판이다. 이들은 우익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마르크스주의(유물사관) 역사가들조차 일본 고대사를 해석함에 있어 한반도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축소해 왔음을 지적한다.

특히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같은 당대 일류 학자들의 심리적 모순을 짚어낸 대목은 압권이다. 

쓰다는 일본 고대 신화의 허구를 밝혀내는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기에는 “요보(조선인을 비하하는 멸칭)에게 질쏘냐”라며 맹목적인 적대감을 기록했다. 김달수와 구노 오사무는 이를 두고, 머리로는 조선 문화의 우수성과 역사적 실체를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이를 억누르고 뒤집어엎으려 했던 제국주의 지식인의 병리적 열등감이라고 정확히 진단한다.

고대 일본 문화의 90%가 한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정치인의 발언이나 일반 대중의 상식보다 오히려 학계의 인식이 뒤처져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일본 학계가 도래인(渡来人)을 단순히 ‘귀화인’이나 ‘기술 노예’로 폄하하고, 역사 발전의 동력을 일본 내부에서만 찾으려 했던 ‘내적 발전 단계론’은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학문적 복무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가들이 역사적 팩트보다 제국주의적 국책과 대륙 침략의 정당화에 매몰되어 있었음을 고발하는 이 대담은, 전후 일본 사회가 식민 지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실패한 학문적 배경을 명확히 제시한다.

1975년의 한일관계, 냉전의 틈바구니와 ‘근친증오’의 발현

대담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정서는 ‘근친증오(近親憎惡)’와 1975년 당시 재일조선인들이 느껴야 했던 실존적 공포다. 

1975년은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고 냉전의 긴장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극도로 고조되던 시기였다. 남한은 유신 체제하에 있었고,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미일과 북중러의 진영 대립이 첨예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75년 9월 발생한 ‘쇼세이마루(松生丸) 사건’은 이 대담의 핵심적인 시의적 배경이 된다. 

일본 어선이 북한 경비정의 총격을 받은 이 사건을 두고, 일본 언론은 북한이 처한 군사적 긴장 상태나 어부들의 생계 문제 등 구조적 모순을 분석하기보다는 맹목적인 ‘국민 감정’을 자극하는 선정주의로 일관했다.

김달수는 이러한 언론의 선동이 단순한 외교적 마찰을 넘어, 언제든 재일조선인에 대한 집단적 폭력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경계한다. “조선인 따위에게 무시당할 쏘냐”라는 술집에서의 일상적인 적대감이나, 지진 괴담이 돌 때마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을 떠올리며 공포에 떨어야 했던 재일조선인들의 처지는 메이지 시대 이후 100년간 주입된 ‘조선인 멸시’ 교육의 끔찍한 결과물이었다.

혈연적, 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친밀함 때문에 오히려 우월감을 과시하려 하고 차별이 더욱 잔혹해지는 ‘근친증오’의 메커니즘을 두 지식인은 날카롭게 통찰했다. 

1975년의 일본 사회는 여전히 이승만 라인 문제나 쇼세이마루 사건 등 외부의 자극이 주어질 때마다 권력의 조작에 부화뇌동하여 소수자인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억압된 광기의 사회였다.

일상의 문화 교류와 NHK 조선어 강좌 제안의 의미

대담의 결론부는 비관을 넘어선 연대의 가능성으로 향한다. 김달수와 구노 오사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도 일상 민중들의 삶 속에서 피어나는 긍정적인 변화에 주목했다. 그것은 바로 ‘조선 요리(야키니쿠)’의 대중화와 젊은 세대의 ‘조선어 학습’ 열기였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다완 등 ‘사물’에 대해서는 수천만 엔을 지불하며 찬사를 보내면서도, 정작 그것을 만든 ‘조선 사람’은 멸시해 온 기형적인 일본의 문화 소비 구조를 김달수는 지적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구노 오사무가 제안한 것이 바로 ‘NHK 조선어 강좌 개설’ 서명 운동이다.

언어는 대상화된 사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배와 감시의 도구로서 경찰과 특무 기관원들만이 배웠던 조선어를, 이제 전후의 일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이웃과 교류하기 위해 배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거대한 인식의 혁명이었다. 이들은 정치와 외교가 풀지 못한 차별과 배제의 매듭을, 밥을 함께 먹고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민중적 차원의 교류를 통해 풀어나가고자 했다.

1975년의 대담이 2026년의 오늘에 던지는 현재적 의미

구노 오사무와 김달수가 이 대담을 나눈 지 반세기가 흐른 2026년 현재, 한일관계와 동아시아의 지형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구노 오사무가 꿈꿨던 NHK 조선어 강좌는 이미 오래전 정규 편성되었고, 삼겹살과 야키니쿠를 넘어 K-팝과 K-푸드 등 한국의 대중문화는 일본 젊은 세대의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두 지식인이 염원했던 문화적 연대와 상호 이해의 토양은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75년의 이 대담은 2026년의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늘하고 유효한 경고를 던진다. 대중문화의 폭발적인 교류 이면에는 여전히 위안부 및 강제동원 문제, 독도 영유권 등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둘러싼 역사 갈등이 화약고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일본 사회 내 일부 극우 세력에 의한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와 넷우익의 부상은, 김달수가 경계했던 ‘조선인 멸시의 심층 의식’과 ‘근친증오’가 여전히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조선의 다완(茶碗)은 사랑하면서 조선인은 멸시했던 과거의 모순은, 오늘날 "한국의 아이돌과 드라마는 소비하지만, 한국이라는 국가와 역사적 책임은 부정하고 혐오하는" 기이한 분열적 태도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다. 역사의 내적 발전론에 매몰되어 침략의 폭력성을 외면했던 과거의 역사학자들처럼, 오늘날에도 역사를 자국 중심주의적 서사로 표백하려는 역사 수정주의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결국 구노 오사무와 김달수의 대담은 2026년의 우리에게 "진정한 연대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문화적 소비의 차원을 넘어, 국가 폭력과 차별의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 그리고 제국주의적 오만함이 만들어낸 '근친증오'의 메커니즘을 성찰하는 뼈아픈 반성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한일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어두운 유치장에서 특고의 폭언을 견디며 발급증을 기다리던 조선 청년들을 향해 연민과 경외를 동시에 품었던 진보적 일본 지식인의 시선, 그리고 가해자의 논리를 넘어 세계 문화사적 차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직조해 내고자 했던 재일조선인 역사가의 넓은 품. 이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연대의 정신이야말로, 배타적 민족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드는 21세기의 오늘날 한일 양국 시민 사회가 복원하고 계승해야 할 가장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다.

역자 주: 이 글은 일본에서 발행된 『계간 삼천리(季刊 三千里)』 4호(1975년 11월)에 수록된 좌담회, 「상호이해를 위한 제안」을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번역하고 다듬은 것이다. (이규수/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경찰과 조선인

□ 김달수: 구노 선생님은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이른바 '사상범'으로 경찰에 구속된 적이 있으시죠?

□ 구노: 네, 교토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경찰서 저 경찰서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다 보니 영양실조에 걸리기까지 했죠. 경찰들도 제가 죽어버리면 곤란해지니까, 가끔은 사상범을 감시하는 특고(특별고등경찰) 조사실로 불러내 제 돈으로 튀김덮밥(텐동) 같은 걸 시켜 먹게 해주곤 했습니다.


구노 오사무(久野収) [사진-이규수 제공]
□ 김달수: 구노 선생님은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이른바 '사상범'으로 경찰에 구속된 적이 있으시죠?

□ 구노: 네, 교토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경찰서 저 경찰서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다 보니 영양실조에 걸리기까지 했죠. 경찰들도 제가 죽어버리면 곤란해지니까, 가끔은 사상범[1]을 감시하는 특고(특별고등경찰)[2] 조사실로 불러내 제 돈으로 튀김덮밥(텐동) 같은 걸 시켜 먹게 해주곤 했습니다.

[1]사상범(思想犯) : 일제강점기 당시 천황제나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죄목이다. 대담자인 구노 오사무 역시 반파시즘 활동을 하다가 사상범으로 몰려 구속되었다. (역자 주)

[2] 특별고등경찰(特別高等警察, 특고) : 일제가 천황제 체제 유지를 위해 사상범, 정치범, 노동운동가, 독립운동가 등을 감시하고 탄압할 목적으로 설치한 비밀경찰이다.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억압적인 통치 기구였다. (역자 주)

□ 김달수: 혹시 그 유치장에서 조선인들을 만나지는 못하셨나요?

□ 구노: 이상하게도 저는 중국인들만 만났습니다.

□ 김달수: 보통 유치장에 갇히면 조선인 '동지'를 만났다는 분들이 많은데, 구노 선생님은 중국인을 주로 만나셨다니 특이하군요. 당시 중국인들도 꽤 많이 끌려왔었나 봅니다.

□ 구노: 제가 중국인을 많이 본 건 마침 중일전쟁이 막 시작된 때라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직접 마주치진 못했어도 조선인 역시 엄청나게 많이 검거되었지요.

한 번은 니시진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특고 방에 불려 나가 난로를 쬐곤 했는데 그때마다 조선인 청년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고향인 조선에 다녀온 뒤 일본으로 다시 들어오려면 경찰이 발급한 증명서가 꼭 필요했거든요. 그걸 받으러 온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경찰은 증명서 발급에 엄청나게 인색했습니다. 특고의 '내선계(조선인 담당 부서)'[3] 형사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루에 겨우 두세 장씩만 발급해 주는 식이었습니다. 경찰에게 온갖 폭언과 모욕을 들으면서도 증명서를 달라고 애원하는 조선 청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며,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아픔이 너무나 많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3] 내선계(內鮮係) : 일본 내 경찰서에 설치된 부서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재일조선인)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전담했다. 요시찰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조선인 가정의 일상까지 감시하며 뇌물을 요구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역자 주)

□ 김달수: 저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게 1920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시고, 저는 5년 뒤인 1925년에 일본으로 갔는데 그때만 해도 도항 증명서 발급이 그렇게 까다롭진 않았어요.


김달수(金達寿) [사진-이규수 제공]
□ 구노: 아, 그랬습니까?

□ 김달수: 그때까지는 일본 측에서도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서 조선인들을 계속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통제가 아주 심해집니다. 조선인이 너무 많이 넘어오면 관리하기 힘들어진다는 이유였죠. 또한, 이른바 '불온한' 사상이 일본으로 들어오거나 반대로 조선으로 퍼져나가는 걸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재일조선인 중에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읽는 사람은 모조리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방금 말씀하신 특고의 '내선계'는 조선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개입해 수시로 순찰을 돌았어요. 요시찰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조선인 가정에도 불쑥불쑥 찾아와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캐고는 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령이 좋은 사람들은 특고 형사에게 몰래 뇌물을 찔러주며 고향에 다녀올 수 있는 '일시귀선증명서(一時帰鮮証明書)'[4]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돈조차 없는 사람들은 경찰서 문지방이 닳도록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죠.

[4] 일시귀선증명서(一時歸鮮證明書) :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고향(조선)에 잠시 다녀올 때 일본 경찰로부터 발급받아야 했던 여행 증명서다. 이 증명서가 없으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생업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이를 무기로 조선인들을 통제하고 괴롭혔다. (역자 주)

그렇게 힘겹게 증명서를 받아도 고향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고작 60일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갔는데, 부모님의 병세가 길어지면서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얄궂은 일도 생겼습니다(웃음). 그러는 사이 체류 기한이 끝나버리거나, 기한 만료 직전에 허겁지겁 장례를 치르는 안타까운 일도 잦았죠. 기한을 하루 이틀만 넘겨도 큰일이 났으니까요.

저도 부산에서 그런 비극적인 광경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증명서를 검사하는 부산 수상경찰서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틀 정도 늦어졌으니 제발 한 번만 눈감아 달라. 어떻게든 일본 가는 연락선에 타게 해달라"고 매달리는데도, 경찰은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그분은 "어머니가 좀처럼 돌아가시지 않아서 늦어진 것뿐인데..."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 구노: 제가 검거되었을 무렵, 조선인들은 주로 고조나 시치조 경찰서에 수감되었습니다. 저는 북쪽 경찰서들로 돌려졌는데, 만약 우즈마사 경찰서 근처에 수감되었더라면 조선인들을 만났을 겁니다. 저는 좌익 운동권 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습니다만, 당시 급진적인 좌익 진영 사이에서는 '경찰서에서 가장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들은 조선 청년들'이라는 전설 같은 소문이 돌았습니다.

"조선인들은 아무리 끔찍한 고문을 당해도 절대 동지를 팔아넘기지 않는다. 그러니 불법 전단지를 뿌리든 뭘 하든 조선인과 한 조가 되면, 네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무조건 안심해도 좋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죠. 저희에게 함께 운동하는 조선 청년들은 그야말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차별은 일상적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가 규슈에 있어서 가끔 오사카나 간사이 지역으로 갈 때면, 시모노세키 근처를 지나는 심야 기차 안에서 어김없이 검문과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구석으로 끌려가서는 "너 센진(조선인을 비하하는 말) 아니냐"며 일본어로 "몇천 몇백 몇십 몇엔 몇전" 같은 복잡한 숫자를 발음해 보라는 억지 요구를 받곤 했죠. 그럴 때마다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살아가기가 참으로 고통스럽겠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 김달수: 제 친구 중에 구노 선생님이 만드셨던 『세계문화』나 『토요일』 같은 잡지에 깊은 영향을 받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전쟁 중에 교토에서 '산이치서방(三一書房)'[5]이라는 헌책방을 운영했었죠.

[5] 산이치서방(三一書房) : 1945년에 일본 교토에 설립된 진보 성향의 출판사다. 이름인 '산이치'는 조선의 '3·1 독립운동'에서 따온 것이다. 일제강점기 직후 일본 한복판에서 조선의 저항 운동을 기리는 이름을 지은 것은 당시 일본 내 깨어있는 지식인들의 용기와 연대 의식을 보여준다. (역자 주)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조선의 3·1 독립운동의 이름을 딴 '산이치(3·1)'라는 간판을 내거는 건 정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 헌책방이 광복 후에 출판사로 발전해 지금의 산이치서방이 된 것이죠.

□ 구노: 아, 박원준 군 말이군요. 저도 잘 압니다. 사실 그가 시작한 헌책방 산이치서방의 원래 자리는 저희가 『세계문화』를 발행하던 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와 함께 일하던 서점 주인이었던 나카가와 추이치 군이 경찰에 수차례 불려가 "당장 서점 문을 닫지 않으면 불온 세력으로 엮어 감옥에 처넣겠다"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서점을 넘기게 되었는데, 박 군이 그것을 인수해 '헌책방 산이치서방'이라는 간판을 달았던 겁니다.

광복 이후 박 군을 비롯한 동료들이 모여 본격적으로 출판을 해보기로 뜻을 모았고, 신무라 다케시 씨와 제가 고문으로 합류하면서 "이왕 할 거면 '산이치서방'이라는 이름으로 전쟁 전의 그 저항 정신을 이어가자"고 결의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역사와 교육

□ 구노: 일본인들이 조선을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지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저 역시 혈통으로 보면 명백히 조선계입니다. 수염이라도 기르면 조선 사람과 전혀 구별할 수 없고, 제 조상도 틀림없이 조선에서 건너왔을 테니까요.

□ 김달수: 아하, 그래서 예전에 기차 안에서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검문을 당하셨던 거군요(웃음). 관동대지진 때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가려내려고 발음하기 어려운 "쥬고엔 고쥬센(15엔 50전)"을 강제로 읽게 했다는 비극적인 일화와 같은 맥락이네요.

□ 구노: 제가 겪었을 때는 조선인들의 일본어 발음이 좋아져서인지 "몇천 몇백 몇십 몇엔 몇전"을 읽어보라며 자릿수를 훌쩍 늘렸더군요. 겉모습도 비슷하고 혈통도 얽혀 있을 만큼 일본과 조선은 가까운 사이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에 이토록 깊이 들어와 있음에도 일본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조선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양의 백인과 흑인 차별과는 결이 다른,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머리로는 차별하면 안 된다고 알면서도 무의식 속에는 차별이 깔려 있죠. 저는 전후(戰後) 동아시아 역사 연구에서 가장 충격적인 발견이 바로 '일본 천황가와 고대 조선의 왕족이 단순한 친척을 넘어 깊은 혈연으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달수: 소설가 나카노 시게하루 씨에게 들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 중 이른바 '순수 우익'을 자처하던 사람들이 일본 민족 고유의 정신(야마토 정신)을 끝까지 파고들어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추적하다 보니 결국 '천황의 조상이 조선에서 왔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 겁니다. 그러자 이 순수 우익 세력은 오히려 "천황을 내쫓아야 한다"는 문서를 돌렸다고 하더군요. 나카노 씨도 그 문서를 받았다고 하니, 그 이면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었든 그런 촌극이 벌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 구노: 사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진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덮으려고 '일본과 조선은 원래 조상이 같다(일선동조론)'[6]며 일본이 본가고 조선이 분가라는 억지 논리를 내세웠던 것이죠.

[6]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이 같다는 일제의 식민 사관이다. 표면적으로는 두 민족이 하나라는 뜻을 담고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고유한 역사를 지우고 일본에 동화시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된 이론이었다. (역자 주)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보면, 순수한 일본(야마토) 민족이라든가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은 천황의 핏줄(만세일계)[7] 같은 건 애초에 없었습니다. 뿌리가 조선에 있고 조선의 왕자가 건너와 일본 왕가를 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팩트라면, 도대체 일본인이 조선인을 차별할 근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7] 만세일계(萬世一系) : 일본 천황의 핏줄이 신화 시대부터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져 왔다는 주장이다. 천황의 신성불가침을 강조하는 일본 우익의 핵심 이데올로기다. 대담에서는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이 천황가와 핏줄이 닿아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허구가 깨졌다고 지적한다. (역자 주)

□ 김달수: 사상가 요시모토 다카아키도 쓴 적이 있습니다만, 극우 작가였던 미시마 유키오가 천황제의 뿌리가 결국 조선 문화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해서 할복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 구노: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 김달수: 그건 그렇고, 저는 선생님이 쓰신 『현대 일본의 사상』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책에 나오는 비유 중에 "교회의 사제는 신을 믿지 않아도, 그곳에 모인 신도들은 신을 굳게 믿고 있다"는 내용이 참 와닿았습니다. 지배층은 진실을 알면서도 대중을 속이고 통제한다는 뜻이지요. 일본의 천황제와 사회 구조를 꿰뚫는 아주 날카로운 통찰이었습니다.[8]

[8] 현교(顯教)와 밀교(密教) : 본래 불교 용어지만, 이 대담에서는 비유적 표현으로 쓰였다. '현교'는 대중에게 겉으로 드러난 교리, 즉 대중이 맹신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반면 '밀교'는 소수만이 아는 은밀한 진리, 즉 지배층 학자들만 몰래 알고 있는 '천황가의 조선 도래설' 같은 역사적 진실을 의미한다. (역자 주)

최근 한 잡지의 좌담회에서 전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씨도 이렇게 인정했습니다. "고대 일본 문화의 90%는 한반도에서 온 것입니다. 나머지 10%만이 토착 민족의 것이죠."[9] 또, 예전 한일 회담이 한창일 때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도 "조선과의 문제는 고대 신화 시대부터 이어져 온 현안"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즉, 권력을 쥐고 있는 정치인들은 이미 역사적 실체를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9] 야마타이국(邪馬台國) : 3세기경 일본 열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국가다.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며, 당시 한반도의 선진 문화와 도래인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자 주)

문제는 오히려 역사를 가르치는 학자들입니다. 특히 유물사관(마르크스주의)[10]을 따르는 진보 학자들의 태도가 실망스럽습니다. 이들은 역사가 발전하는 원동력을 오직 '일본 내부의 자생적인 모순과 극복'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고대 국가가 형성될 때 한반도에서 넘어온 도래인(渡来人)들의 결정적인 역할을 쏙 빼놓고, 동아시아 전체의 융합 과정은 외면합니다. 겉포장만 과학적일 뿐, 사실상 "일본 역사가 최고"라는 황국사관[11]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10] 유물사관(唯物史觀) /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 물질적 생산 방식과 경제적 토대가 사회 구조와 역사의 발전을 결정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김달수는 일본의 진보적(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조차 외부(한반도)의 거대한 영향을 무시하고, 오직 일본 내부의 모순만으로 고대사가 발전했다고 고집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역자 주)

[11] 황국사관(皇國史觀) :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역사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대외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군국주의적 역사관이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을 단순히 '귀화인'이나 '노예'로 격하하는 것도 이 사관의 영향이다. (역자 주)

□ 구노: 맞습니다. 그런 책상머리 이론은 결국 우익 역사학자들이 빠진 함정에 똑같이 빠지기 십상이죠.

□ 김달수: 일이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 구노: 일본 고대사의 권위자로 불리는 이노우에 미쓰사다조차도, "조선의 시각으로 일본의 역사를 다시 보는 관점이 내게 전혀 없었다"며 뒤늦게 반성할 정도니까요.

□ 김달수: 학자들은 다들 입으로는 반성한다고 하지만, 막상 책을 쓸 때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정치인조차 고대 문화의 90%가 한반도에서 왔다고 인정하는데도 말이죠. 문화가 넘어왔다는 건 곧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건너왔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도 학자들은 여전히 전쟁 전의 시각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을 그저 '귀화인'이나 일본이 잡아 온 '기술 노예' 정도로 깎아내려 기록합니다. 일반 대중의 상식보다 학자들의 인식이 훨씬 뒤처져 있는 셈이죠. 이런 사람들이 교과서를 쓰고 있으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 구노: 전쟁 전의 역사학자였던 쓰다 소키치나 시라토리 구라키치 같은 인물들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비판받을 점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낡은 틀을 깨는 새로운 시각이 일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쓰다 소키치는 "일본 고대 신화는 천황가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라고 과감히 지적했지요. 그가 조선과 만주 역사를 함께 연구했기 때문에 그런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오히려 요즘 진보 학자들에게 그런 열린 시각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 김달수: 하지만 쓰다 소키치 역시, 일본의 대륙 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책 회사(남만주철도회사)의 돈을 받아 연구했던 한계가 명확한 인물입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참 재미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요보(조선인을 멸시하는 단어)에게 질쏘냐"라며 혼자 잔뜩 열등감을 드러내는 구절이 있죠. 대체 왜 조선인에게 지지 않겠다며 그렇게 힘을 주어야만 했을까요?

□ 구노: 그것은 쓰다 본인이 조선의 깊은 역사와 훌륭한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 김달수: 아, 머리로는 조선이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그것을 뒤집어엎으려 했다는 뜻이군요!

□ 구노: 네. 조선의 대단함을 아는 쓰다의 본심이 대중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면 곤란해지니까,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고 조선인에 대해 까닭 없는 오만함을 부리며 깎아내린 겁니다.

□ 김달수: 자신이 발견한 역사적 진실을 스스로 부정하고 뒤집어버렸으니, 그건 애초에 진정한 학문이라고 부를 수 없죠. 당대 최고의 학자조차 그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일본 학계는 오늘날까지도 이 부분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 구노: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왜 나쁜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없이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그저 조선이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된 현실 위에 서서, "과거 역사를 캐보니 조선이 우리보다 앞섰지만, 지금 이렇게 대단한 우리나라(일본)가 질 수는 없다"며 억지를 부린 것이죠.

진보 성향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조선어를 배우려 하거나 조선인의 고통을 가슴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몹쓸 짓을 했고 조선 인민들이 훌륭히 맞서 싸웠다"고 기계적으로 외칠 뿐, 정작 구체적으로 어떤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생생한 현실은 외면한 채 책상머리 이론(관념)에만 빠져 있었던 겁니다.

□ 김달수: 아주 관념적이고 껍데기뿐인 지식이었군요.

□ 구노: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현실을 딛고 있지 않다 보니, 1930년대가 되면 공산당 수뇌부 출신들조차 "일본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중국과 조선이 힘을 합쳐 아시아의 새로운 단결을 이루자"는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돌아서 버리고 맙니다.

□ 김달수: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을 정당화하려 내세웠던 '대동아공영권' 논리와 똑같아졌군요.

□ 구노: 맞습니다. "가장 나쁜 일본 제국주의를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라는 진짜 문제는 내팽개친 채, 그저 머릿속으로만 그럴싸한 아시아의 단결을 떠들어 댄 것이죠. 지식인들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허술하고 관념의 늪에 빠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끄러운 사례입니다.

□ 김달수: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스스로도 학창 시절엔 조선 역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극우 성향의 학자(도쿠토미 소호)가 쓴 『조선역』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얼마나 명분 없고 엉터리인 전쟁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죠. 그 책 안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재상 류성룡이 쓴 『징비록』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었거든요.

□ 구노: 네, 그 유명한 『징비록』 말이죠.

□ 김달수: 네. 기록을 보면, 일본군 병사가 아예 조선 편으로 돌아서거나 배신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한 번은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에 갇혀 있을 때, 조선 편으로 귀화한 일본군 출신이 성문 앞까지 와서 "너희들 어차피 질 텐데 헛고생 말고 이쪽으로 투항해라"라고 설득하자 성 안의 일본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는 겁니다(웃음).

그런 생생한 기록들을 보면서, 일본 학자들이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확실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익 학자가 쓴 책조차 명백한 역사적 사료 앞에서는 억지로 일본 편을 들어줄 수 없었던 거죠. 그 후로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삼한정벌' 같은 일본 고대사 기록도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겠구나 하고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에 생기는 혐오, 근친증오(近親憎惡)

□ 김달수: 극우 성향의 학자 도쿠토미 소호가 쓴 『조선역』을 그의 성향을 감안하고 읽어보면 오히려 무척 흥미롭습니다. 특히 정유재란(게이초의 역)[12]막바지에 일본군이 쫓겨 도망치던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죠. 시마즈 가문이 남긴 『정한록』의 기록을 인용한 대목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봅니다.

[12] 게이초의 역(慶長の役, 정유재란) :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한 사건을 일본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대담에서는 당시 일본군이 명분 없이 전쟁에 참여했다가 쫓겨 도망치거나, 조선 편으로 투항하는 등 엉터리 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언급되었다. (역자 주)

□ 구노: 우리는 그동안 '조선 정벌'이나 '호랑이 퇴치'처럼 겉으로만 용맹하고 허풍 섞인 영웅담만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실제 역사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 역시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김달수: 최근 오카야마 지역을 답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전선 사령관이었던 우키타 히데이에가 사실은 한반도의 백제계 출신이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 구노: 우키타 히데이에가 백제계였습니까? 그건 몰랐네요.

□ 김달수: 네, 그렇습니다. '빙고 사부로'라 불리던 충신 고지마 다카노리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고요. 찾아보면 그런 사례가 끝도 없습니다.

□ 구노: 이른바 '근친증오(가까운 친척일수록 더 미워하는 현상)'라고 해야 할까요. 일본과 조선은 역사적으로 피가 섞인 혈연이자 친척 관계에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차별이나 혐오 문제가 더욱 복잡하게 꼬이는 것 같습니다.

□ 김달수: 분명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원래 남보다 핏줄이 얽힌 친척끼리 미워하기 시작하면 훨씬 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마련이니까요.

□ 구노: 맞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끔찍한 결과를 낳기 십상이죠. 과거에 먼저 싸움을 건 쪽은 분명 일본입니다만, 예를 들어 김 선생님과 저 개인 사이에는 아무런 앙금이 없어도 이것이 '조선과 일본'이라는 국가적 틀로 묶이면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얼마 전 북한 영해 근처에서 발생한 일본 어선 '쇼세이마루 사건'[13]을 다루는 일본 언론의 태도만 봐도 참 우려스럽습니다. 제가 북한 편을 드는 건 아닙니다만, 일본 언론은 상대방(북한)의 입장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묘하게 '국민 감정'만 앞세워 선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과 맺고 있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는 깡그리 무시한 채 말이죠.

[13] 쇼세이마루(松生丸) 사건 : 1975년 9월, 일본 어선 쇼세이마루가 북한 연안에서 조업하다가 북한 경비정의 총격을 받아 일본 어부 2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일본 사회 내에서 북한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적대적 여론과 혐오 범죄에 대한 우려가 크게 일었다. (역자 주)

물론 희생된 우리 일본 어부들은 참으로 안타깝고 어떻게든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생계 때문이라지만 위험한 북한 영해 근처까지 가서 물고기를 잡아야만 하는 어부들의 열악한 처지입니다. 북한이 처한 극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는 외면한 채 "우리 형편이 어려우니 제멋대로 들어가도 된다"는 식의 태도는 곤란합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미국, 중국, 소련 앞에서는 굽실거리며 눈치를 보면서, 유독 조선(남북한)에 대해서만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며 오만하게 굽니다. 영해 침범 여부를 떠나 당장 위험에 처한 어부들을 구하려는 실질적인 외교 노력은 팽개친 채 말이죠.

□ 김달수: 그런 문제점이 있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제 느낌은 조금 다릅니다. 저는 매일 일본 신문을 조마조마하며 지켜봤는데, 이 정도면 언론이 꽤 자제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지금 일본 내 정치 상황이나 한일 관계가 조금만 더 험악했더라면, 엄청난 규모의 '반(反)조선 캠페인'이 벌어졌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재일 조선인들은 두려워서 길거리조차 마음 놓고 걷지 못했겠죠.

실제로 지금도 우익 단체들이 조선총련 본부에 몰려가 시위를 하고, 조선학교 학생들은 해코지를 당할까 봐 교사들이 하굣길을 동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아까 신주쿠역에서 극우 단체가 "너무해! 사람을 죽이다니!"라며 자극적인 그림을 그려 붙인 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주류 기성 언론들은 그나마 꽤 신중하게 보도하고 있는 편입니다.

□ 구노: 그래도 제 눈에는 기성 신문의 보도 역시 다분히 선정적입니다. "우리 어부들이 불쌍하고 가엾다"는 식으로만 감정에 호소하고 있거든요. 상대방인 북한의 복잡한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사실관계가 명확히 밝혀질 때까지 일본 정부와 국민 모두 냉정하게 이성을 찾아야 한다고 언론이 짚어줘야 합니다.

□ 김달수: 주간지 같은 곳에서는 기성 신문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펜은 검보다 약하다"고 질타하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언론이 감정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전에 해양 경계선인 '이승만 라인'[14] 문제가 터졌을 때, 일본 신문들이 엄청나게 선동 기사를 쏟아낸 적이 있죠. 그때 제가 우연히 들른 술집에서 옆자리 손님이 "우리가 감히 조선 놈들한테까지 무시당할 쏘냐!"라며 분통을 터뜨리더군요. 그걸 보고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 싶었습니다.

[14] 이승만 라인(평화선) :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의 영해와 어족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동해안에 선포한 해양 주권 경계선이다. 이 선을 넘어온 일본 어선들이 한국 해경에 나포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당시 일본 내에서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혐오와 분노를 부추기는 도화선이 되었다. (역자 주)

평범한 일본 서민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이런 적대감이 무슨 일만 터지면 튀어나오는 이유는, 메이지 시대 이후의 편향된 역사 교육 때문입니다. 일본의 지배층이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인 멸시'를 일종의 통치 수단으로 악용해 온 것이죠.

정작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저지른 대륙 침략이나 제국주의의 민낯에는 눈을 감고, 마치 무사들의 숭고한 사명인 것처럼 역사를 미화해 가르쳤습니다. 그런 왜곡된 교육이 100년 가까이 이어지다 보니 일본인들의 내면에 조선에 대한 우월감과 멸시가 깊게 뿌리내린 겁니다.

그래서 언론이 '국민 감정'을 살짝만 건드려도 "감히 조선인 따위에게 무시당할 수 없다"며 맹목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죠. 저는 이게 가장 두렵습니다. 요즘 도쿄에 큰 지진이 날 거라는 소문이 도는데, 우리 조선인들은 그런 기사를 가볍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진짜 재난이 터지면 관동대지진 때처럼 또다시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지 않을까 공포에 떨어야 하니까요.

□ 구노: 관동대지진 때는 국가 권력이 고의로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집단 광란 상태로 몰아넣었죠.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언론이 이성을 잃고 선동하지 않는다면, 대중도 예전처럼 무비판적으로 군중심리에 휩쓸리지는 않을 겁니다.

□ 김달수: 사회가 발전했다는 건 맞지만, 저희가 안심하고 살 수 있을 만큼은 아닙니다. 언젠가 밤늦게 지하철 막차를 탔는데, 술 취한 승객이 "나는 창가학회(종교단체)와 공산당, 그리고 조선인 새끼가 제일 싫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군요. 왜 하필 그 셋을 묶어서 욕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관동대지진 때보다 나아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덮어놓고 혐오하는 세력이 기승을 부릴 때 지배층이 교묘하게 여론을 조작하면, 논리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에 휩쓸려 우르르 따라가는 일본인의 기질상 언제든 폭력적으로 변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 구노: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군중 심리 말이죠. 일본 사회는 다수의 의견에 맞서 자기 주관을 꿋꿋하게 지키는 사람이 유독 적습니다. 그래서 민감한 사건이 터졌을 때 언론이 대중을 흥분시키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번 쇼세이마루 사건 때, 북한 측에서 유족들에게 일종의 위로금을 보내왔습니다. 어선이 영해를 침범했든 안 했든, 일단 자기들 바다 근처에서 사람이 죽었으니 도의적으로 위로의 뜻을 전한 거죠. 일본 사회는 이 성의를 있는 그대로 정중하게 받아들이는 성숙함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 언론은 "저쪽에서 돈을 보내온 걸 보니, 사실 우리 어선은 잘못이 없는데 찔려서 저러는 거 아니냐"며 비꼬고 의심합니다. 참으로 치졸하고 옹졸한 태도죠.

□ 김달수: 자기 나라를 우선하는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은 일본인에게도, 조선인에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교묘하게 이용해 대중의 혐오를 부추기는 현실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몇 년 전 『세계』라는 잡지에서 '일본인이 좋아하는 민족과 싫어하는 민족'을 조사한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건 미국인이고, 가장 싫어하는 건 흑인과 조선인이더군요(웃음).

그 결과가 나온 이유는 뻔합니다. 메이지 시대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정치와 역사 교육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국민들을 그런 방향으로 세뇌해 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계속 역사 교육을 문제 삼는 이유가 이겁니다. 일본 고대사 권위자라는 이노우에 미쓰사다가 쓴 『아스카의 조정』이라는 책을 보면 내용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고대 한반도 남부에 있던 '변한'을 설명하면서, "당시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 대거 진출해 이권을 차지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본의 군사력과 영향력이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씁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메이지 시대의 오만한 시각을 고스란히 답습한 것입니다. 현대의 일류 학자가 쓴 글이 이 지경이니 경악할 수밖에요.

군사력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나라 사람들을 도덕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열등한 미개인 취급을 해버리는 이 제국주의적 오만함은 정말 참기 힘든 치욕입니다. 문화적 식견을 갖췄다는 지식인들조차 이런 왜곡된 우월감에 빠져 있고, 대중들 역시 그렇게 믿도록 세뇌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 사회에서 겪는 가장 뼈아픈 고통의 뿌리입니다.

□ 구노: 이노우에 씨 같은 현대의 학자들마저도 결국 과거 제국주의 시대 학자들이 만들어놓은 편협한 지식의 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군요.

□ 김달수: 바로 그게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일본 역사학계에 뿌리박힌 이 지독한 편견은 당장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캄캄한 현실 같습니다. "펜은 권력의 칼보다 한없이 약하다"는 뼈저린 무력감을 느낄 뿐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제안

□ 구노: 조금 다른 화제로 넘어가 볼까요. 요즘 일본에서 조선 요리(한국 요리)를 맛보고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재일 조선인 청년들뿐만 아니라 일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꽤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 김달수: 맞습니다. 저는 그게 광복 이후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혁명적인 변화 중 하나라고 봅니다. 일본 곳곳에 조선 요릿집이 이렇게까지 널리 퍼질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웃음).

□ 구노: 그런 일상적인 변화를 보면서 저는 무척 큰 희망을 느낍니다.

□ 김달수: 사실 요즘의 조선 요릿집은 우리 같은 조선인들보다는 주로 일본인 손님을 상대로 장사하고 있습니다. 정작 우리 조선인들에게는 가격도 비싸서 자주 가기 어렵고, 솔직히 일본식으로 변형되어서 우리 입맛에 딱 맞지도 않거든요(웃음).

□ 구노: 유명 코미디언인 하야시야 산페이가 TV에 나와 "여러분, 야키니쿠 도카이엔(고기구이 전문점)으로 오세요! 정말 맛있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걸 보면서 참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전 제국주의 시대와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지요.

□ 김달수: 선생님을 '거리의 철학자'라고 부르면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역시 일상의 변화를 짚어내는 통찰력이 남다르십니다. 정말 시대가 많이 변했어요. 요즘은 일본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나 국도변 휴게소를 가도 '야키니쿠(焼肉, 고기구이)' 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 구노: 이건 정말 놀라운 변화입니다. 저는 이런 평범한 일상의 교류에서부터 국적과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민중 간의 진정한 연대'가 싹틀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 선생님께 꼭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 일본 지식인들과 조선인 여러분이 힘을 합쳐서 'NHK 라디오 조선어 강좌 개설'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시작해 봅시다.

□ 김달수: 오, 그거 정말 좋군요! 대찬성입니다.

□ 구노: 저는 아침저녁으로 라디오 어학 강좌를 챙겨 듣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프랑스어나 스페인어 강좌는 매일 방송하면서,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인 조선어 강좌가 없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왜 그동안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에 당당하게 요구하지 않았나 싶어요.

□ 김달수: 사실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런 요구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긴 합니다만…….

□ 구노: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저쪽이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대대적으로 서명을 모아서 큰 사회적 운동으로 키워봅시다.

□ 김달수: 좋습니다. 꼭 한번 해보죠. 구노 선생님께서 앞장서 주신다면 서명도 금방 모일 겁니다. 얼마 전 소설가 나카노 시게하루 씨와 대담할 때도 조선어 교육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일본 사회에서 '조선어'가 이렇게 긍정적이고 일상적인 주제로 떠오른 적은 역사상 없었으니까요.

□ 구노: 그런데 조선어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말이 많이 다른가요?

□ 김달수: 아닙니다, 다르지 않아요.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 근처의 아오모리 사람과 최남단 가고시마 사람이 각자 심한 사투리를 쓰면 아예 대화가 안 통하잖아요? 하지만 조선은 한반도 최남단과 최북단 사람이 만나도 의사소통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 구노: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배우기엔 더더욱 수월하겠군요.
얼마 전 『아사히신문』을 보니 조선어 사전 원고가 다 완성되었는데도 선뜻 출판해 줄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그것은 결국 두 나라 민중 사이의 교류가 여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방증 같아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 김달수: 저도 동감입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자발적으로 조선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꽤 늘고 있습니다. 정작 NHK만 이런 시대의 흐름을 못 읽고 있는 거죠.

□ 구노: 일본의 평범한 청년들이 일상적으로 조선 요리를 즐기고 조선어를 직접 배운다는 건 정말 획기적인 일입니다. 전쟁 전(일제강점기)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 아닙니까?

□ 김달수: 맞습니다. 엄청난 발전이죠.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선어를 꼼꼼하게 배웠던 사람들은 오직 조선을 지배하고 탄압하려던 일본군이나 경찰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웃 나라를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싶어서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배우고 있으니 획기적인 변화죠. 물론 지금도 일본 자위대나 경찰 내부에서는 군사적 목적 등으로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긴 합니다만…….

□ 구노: 과거에 권력층이 그런 억압적인 목적으로만 조선어를 썼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뜻있는 일반 지식인들은 조선어 배우기를 꺼리기도 했습니다. 서양 언어를 배우는 목적이 경찰이나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잖아요. 하지만 당시에 조선어를 배운다고 하면 "저 사람 조선을 감시하는 경찰이나 대륙 진출을 노리는 무역상이 되려나 보다" 하고 색안경을 끼고 봤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워서라도 일부러 조선어나 말레이어 등을 멀리했던 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 김달수: 얼마 전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 씨와 이와쿠니 지역으로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자발적으로 조선어를 공부하는 젊은 목사님 모임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를 유창하게 하는 일본인들은 십중팔구 곁에 두기 께름칙한 특무 기관원이나 밀정이었으니까요(웃음).

그런데 일본 지배층의 치밀함도 참 대단합니다. 광복 이후에도 일본 자위대 내부에 조선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요원이 무려 2천 명이나 된다는 기사를 남한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 구노: 호오, 그 정도나 됩니까?

□ 김달수: 자위대가 그렇게까지 조선어 교육에 투자하는 건 다분히 군사적, 정치적인 흑심이 깔려 있겠죠. 하지만 민간 차원에서도 자위대에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조선어를 배우려 노력한다면, 일본 사회 전반의 조선에 대한 이해도 훨씬 깊어질 거라고 믿습니다.

일본 사회에는 참 기이하고 구조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역사 교육은 왜곡되어 있고 사람들은 여전히 조선인들을 무시하죠. 반면에 예로부터 고려청자나 조선의 백자 찻사발(다완) 같은 예술품은 일본 내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찻사발 하나에 백만 엔, 천만 엔을 호가할 만큼 귀하게 애지중지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빚어낸 조선 사람들은 멸시하고 깎아내립니다. 물건에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정작 그 나라의 사람과 문화에 대한 참된 이해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뼈아픈 모순을 깨기 위해서라도, 구노 선생님이 방금 제안하신 '조선어 강좌 개설 운동'은 아주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겁니다.

□ 구노: 함께 시작해 봅시다! 수백만 명의 서명을 모아 들이밀면 아무리 콧대 높은 NHK라도 결국 움직일 겁니다. 언어가 조금이라도 통하기 시작하면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고 상대방 국가와 사람들에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친근감이 싹트기 마련이니까요.

□ 김달수: 제 이름 '김달수'를 일본어 발음으로 읽으면 '킨 다쓰쥬'가 되지만, 구노 오사무(久野 収) 선생님의 이름을 조선어 한자음으로 읽으면 '구야 스(구노 수)'가 되지요. 이름만 바꿔 불러도 얼마나 친근하고 재밌습니까(웃음).

□ 구노: 꼭 성사시켜 봅시다.

□ 김달수: 네, 지금이 적기입니다. 운동을 시작할 만한 사회적 토양은 이미 충분히 다져졌습니다. 최근 출판계에서도 조선 관련 책들의 기획이 눈에 띄게 늘었고, 독자 반응도 아주 좋거든요.

□ 구노: 사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김 선생님이 주도하시는 잡지 『계간 삼천리』가 큰 호평을 받고 있다니 무척 기쁩니다. 조선을 제대로 배우려는 일본인들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명백한 증거니까요(웃음).

게다가 선생님의 명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를 짓밟았으니 우리도 갚아주자"는 식의 단순한 피해의식이나 보복 논리에 머물지 않고, 아시아 전체의 '세계 문화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통찰하셨더군요. 그런 높은 차원의 시각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일제가 조선에 자행한 끔찍한 만행과 민족 말살 정책의 실태를 낱낱이 밝혀내는 것은 여전히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진실이 은폐되어 있으니 앞으로 훨씬 더 파헤쳐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일 관계를 단순히 정부 간의 딱딱한 정치 외교사로만 보지 않고, 일본 민중의 핏속과 삶의 저변에 이토록 깊고 다채롭게 조선의 문화가 뿌리내려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선생님이 보여주신 그 획기적이고 신선한 시각은 대단했습니다.

□ 김달수: 너무 과찬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웃음).

□ 구노: 당장 출판사를 찾지 못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조선어 사전' 출판 문제도, 김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과 저희 일본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해서 하루빨리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당장 준비를 시작합시다.

□ 김달수: 좋습니다. 꼭 함께 힘을 모아봅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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