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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기 말씀 강해◈

복의 샘터

작성자태민|작성시간26.06.08|조회수15 목록 댓글 0

 

 

복의 샘터

룻기 4:1-22



[1] 샘터와 같은 여인—룻



여름날 샘물에서 솟아난 냉수 한 그릇은 그 맛을 잊을 수 없이 달콤합니다. 어릴 때 제가 살던 동네에서 재를 넘어 산골로 들어가면 행골(살구꽃 골짜기 마을) 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의 집집마다 살구나무가 있어서 봄이 되면 분홍빛 살구꽃 대궐로 변하는 동네입니다. 거기에 저의 먼 친척 형님이 살고 있어서 가끔 놀러 갔습니다.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재를 넘고 골짜기를 타고 오르면 저를 먼저 맞아주는 것이 여름 날에도 손이 시리도록 차고 단 물을 내는 샘터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샘터에서 마시는 물보다 달콤한 물을 먹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 형님의 인심으로 그 샘터에서 키우는 오이라도 하나 얻어 먹으면 세상에 더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도 그 샘터가 하도 그리워서 기차를 타고 또 버스도 타고는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형님도 이사를 가고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샘터만은 그대로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다만 제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깊어보이던 샘이 이제 가보니 아주 나즈막 했습니다. 그래도 그 샘터에서 쏟아내는 물은 여전히 저의 갈한 목을 축여주는 생수였습니다. 저는 샘터라는 소리를 들으면 늘 그곳을 먼저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샘터처럼 복된 물을 쏟아낸 한 여인을 만납니다.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먼저 본문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우리가 읽은 대로 해피앤딩의 장면입니다. 보아스는 전날 밤에 했던 약속을 아침이 되자 마자 실행합니다. 마침 룻에게 있어서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 아무개를 성문에서 만나게 되어 베들레헴 장로들을 청하여 증인으로 삼고 그 친족에게 나오미가 그의 소유지를 팔려고 내놓은 것을 고엘(kinman)로서 사라고 이릅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사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그것을 룻에게 사고 그것을 죽은 자 룻의 남편의 이름으로 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기업 소유주 이전 과정은 이렇습니다. 엘리멜렉->말룐과 기룐->오르바와 룻->룻. (나오미는 엄밀한 의미에서 관할자입니다) 그리고 룻이 결혼을 한다면 예상되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룻->룻의 아들. 그리고 룻의 아들은 새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룻의 남편 기룐, 그 위로는 엘리멜렉 집안의 후예로서 기업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친척은 계산을 해 보고 손해인지라 포기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백마 탄 왕자 보아스가 자기가 그 모든 것을 하겠노라고 나섰고 결국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해피앤딩에는 그저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 끝나지 않고 어쩌면 부록처럼 보이는 것이 첨가되는데 그 내용은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를 칭송하는 내용과 보아스 가계의 후대 족보가 나옵니다. 이 부록처럼 보이는 내용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부록을 통하여서 우리는 한 여인 룻으로 말미암아 나오미와 보아스 등 가족들이, 베들레헴 주민들이, 이스라엘 국가, 더 넓게는 온 세상이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룻 자신이 좋은 신랑 얻고, 부자집에 시집가고, 귀한 아들 낳는 복을 받은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갈한 목을 축인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갈한 목을 축이게 할 샘터가 되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1) 보아스와 그 집안에 복을 끼쳤습니다.

그가 말했던 바, 자기에게 은혜라고 부를만한 (과분하다고 말할만한) 여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현숙하고 아름다우며 그 마음이 지혜롭고 순종하는 여인입니다.

본문 4:11-12에 있는 말씀은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보아스를 축복하는 말이지만 그 말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그 뒤의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제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아름다운 여인은 그 집을 세웠습니다. 잠언에서는 그 집을 세우는 최고의 지혜로운 여인으로 말합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 14:1). 룻은 보아스에게 현숙한 여인으로 그를 명예롭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집안이 이스라엘의 귀한 집안이 되게 하는 복을 가져온 여인입니다.



(2) 나오미와 그 집안에 복을 끼쳤습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복의 근원이 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보아스와 룻이 아들을 낳았을 때 그 동리의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14-15절). 그 아이를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고 부릅니다. 나오미의 생명을 회복하는 아이, 노년에 봉양을 할 아이를 누가 가져다 주었습니까? 룻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가슴은 찢기고 원망과 슬픔이 가득하여 돌아온 여인을, 그래서 내 이름을 기쁨(나오미)에서 쓰디쓴 고통(마라)라고 바꾸라고 하였던 여인이 그의 자부 룻을 인하여 빈손에 풍요가 찾아오고, 찢긴 가슴이 아물고 평화와 기쁨이 찾아왔습니다.그 룻은 실제 핏줄로는 아무 연결이 없지만 나오미를 어머니로 사랑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일곱 아들 보다 귀한 자부라고 불렀겠습니까? 이스라엘에서 일곱 아들이라 함은 자식 농사로서는 최고를 뜻합니다. 룻은 그런 아들들보다 더 많은 복을 나오미에게 주었습니다.

더군다나 대가 끊어질뻔한 나오미의 집안을 잇게 하였습니다. 17절에 보면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어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합니다. 나오미가 받은 복을 칭송하는 것이거니와 한편으로는 이 아이가 나오미의 가계도 이어갈 것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고 보면 룻은 나오미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집안에 큰 복을 가져다 줍니다.



(3) 베들레헴과 이스라엘, 그리고 온 세상에도 복을 끼쳤습니다.

베들레헴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물론 예수님의 탄생지로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수님 탄생 이전에도 이 조그만 마을은 유명한 마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로 룻 때문입니다. 베들레헴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기억하면서 그 마을도 아름답게 기억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구약시대에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이 마을도 들려 보았을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만난 그 타작 마당을 보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담판을 지었던 그 성문가에도 앉아 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여인은 이스라엘 민족에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룻기는 그 마지막이 족보로 끝이 납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두절을 보면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고 합니다. 다윗왕의 증조 할머니가 바로 룻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가가 바로 룻에게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흠모하는 왕은 다윗왕이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시대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입니다. 라헬과 레아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조상을 낳았다면 룻은 그 이스라엘의 왕조를 배출하였습니다. 그것도 위대한 왕가를 배출하여서 이스라엘이라는 집을 세우는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룻이 가져온 축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온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룻기 마지막에 나오는 족보를 어디에서 또 찾아볼 수 있습니까? 바로 마태복음 1장입니다. 이 룻기의 족보가 좀더 광범위한 마태복음의 족보의 한 부분으로 그대로 나옵니다. 곧 룻은 다윗왕가의 조상일 뿐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신 예수님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룻은 온 세상에 복을 가져온 복의 통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정체—복의 샘터



저는 이렇게 복의 근원이 된 룻의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인이 누군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Identity)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그 정체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복의 근원, 복의 샘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흔히들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이 복이라는 말과 연관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저는 그 말도 그리스도인에 대한 옳은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복 있는 자여,” “복된 사람이여” 라고 칭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갖가지의 참된, 그러면서도 영원한 복을 누릴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샘물로 우리 인생의 피곤함과 목마름을 해갈합니다. 그 해갈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우리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복을 연결할 때 바로 그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성경은 더 강조합니다. 곧 우리 자신이 그 샘터가 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고 맛보게 하고 누리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를 때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12:2-3)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을 부르실 때 그에게 복을 주실 뿐 만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고 소망입니다. 아브라함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까지도 그를 인하여 복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배경도 동일합니다.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들어보세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 19:5-6).



제사장의 기능은 두 가지 입니다. 먼저 백성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권이요, 둘째는 하나님이 복으로 다른 백성들을 축복하는 축복권입니다. 제사장의 축복권은 민수기 6:22-27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복을 빌 때에 하나님이 그를 통로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만방에 전하는 그 통로가 되는 것이요, 다른 말로는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기에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스스로 받아 챙길 줄 만 알았지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선민인줄은 알았으나 무엇을 위한 선민인가를 잊고 말았습니다. 자기들만이 존귀하고 나머지의 민족들은 개와 돼지처럼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폐지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의 자리에서도 복을 받는 자리에서도 쫓겨 났습니다.



이제는 복의 근원이 되는 권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습니다. 베드로전서 2:9-10에서 앞선 출 19:5-6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 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 (Kingly Priesthood)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복을 받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복을 전달하는 통로요, 복을 나누어 주어야 할 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장소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대단한 존재가 못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에 형편에 따라 그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는 사람, 혹은 근처에만 작게 미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큰 영향이건 작은 영향이건, 우리 자신에게 룻의 삶이 도전하는 것은 우리가 이웃에게 사회에 이 세대에 복을 주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소금이다 하신 말씀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빛은 세상을 밝히고, 소금은 맛을 냅니다. 세상에 더할 수 없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있어서는 안될 사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있는 이 시대 이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 우리를 통하여 복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복의 샘터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복 받으려고 주님께 나아오셨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를 믿고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고 복을 베푸십니다. 복의 샘터, 이것이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3] 샘터가 되는 사람들의 출신—연약한 사람들



그런데 오늘 본문인 룻기 4장에 나와있는 족보나 특히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 참 특이한 것을 발견합니다. 남자들 중심으로 그 족보가 기록이 되어있는데 (실제로 낳기는 여자가 자손을 낳았을 터인데 남자가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 여인의 이름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일장을 봅시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여인들의 경력을 보십시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말-미안하지만 그 여인은 바로 이 고엘제도의 혜택을 보지 못하자 그의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베레스를 낳았습니다. (본문 4:12에 언급하는 것은 두가지-고엘 제도와 관련되었고, 그 후손의 번성)

**라합-알다시피 여리고 성의 기생(좀더 정확한 표현은 매춘여)입니다.

**룻-이방 모압여인입니다. 모압의 조상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룻이 아니라) 그 딸들과 동침하여 낳은 아들 중 첫째 딸이 낳은 아들 모압입니다.

**밧세바-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마리아를 빼 놓고는 소위 정상적인 믿음의 계통의 여인이 아닙니다. 또한 그 출신이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의 가계에 기록되어 있는 여인들이 대단한 여인들이 아니라, 우리같이 허물 많고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룻의 시어미가 누구겠습니까? 나오미 맞습니다. 그 시어머니 말고 보아스와 결혼하여서 맺어진 시어미니는 누구입니까? 라합입니다.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이 결혼 여인이 바로 여리고의 기생 라합입니다.



메시야의 가문에 범죄한 여인이나 이방 여인의 이름이 들어와 있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자, 곧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 줄 근원이 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잘나고 많이 가지고 고귀한 신분의 사람만이 아니라, 오히려 미천하고 별볼일 없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은 우리의 출신이나 우리의 형편이나 재주나 혹은 가진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룻은 그 출신, 소유, 사회적 위치들을 볼 때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 다 줄 처지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봐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 다 주기는커녕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인 사람입니다. 우리의 처지도 그럴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인 형편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세상에 복을 주는 샘터로 부르셨습니다.



[4] 샘터가 되는 삶의 출발—결단



어떻게 해서 룻이 그런 복의 샘터가 될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효성이다, 희생이다, 성실이다, 신앙이다, 지혜다, 순종이다, 긍정적인 자세다…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연이다 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단어로 말하고 싶습니다. 결단입니다.



신앙적인 결단입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라고 결단하였습니다.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그 하나님 그분을 의뢰하고 순종하면서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 결단을 어떤 난관이 오더라도 끝까지 지켜 나갔습니다. 주위에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들이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하나님을 소개해 주었던 시모까지 포기하게 하는 낙담의 말을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가 말한 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려” 결단하였고 그것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것이 룻이 복의 근원이 되는 출발이자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인생을 바꾸는 것 하나를 말하라면 저는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바꿀 어떤 횡재를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바꿀 어떤 기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삶을 결단하지 않는 사람은 우연이나 횡재나 기회가 찾아와도 그것을 깨닫지도 붙잡지도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팔자소관으로 인생을 바꿀 것을 포기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결단은 위대합니다. 결단은 새 삶의 출발점입니다. 결단은 내려가는 인생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는 반등 점입니다.



오늘로서 그 동안 살펴보았던 룻기를 마칩니다. 룻은 눈물과 비참한 환경 속에 서 있던 가련한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목마른 인생이었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 역시 목마른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였을 때, 그리고 그 결단을 끝까지 견지하였을 때 그의 목마름을 축일 하나님의 샘물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샘터가 되어 많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복을 쏟아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룻기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얼마나 대조되는가를 보십니까? 룻기 일장에는 죽음과 이별과 원망과 불평과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는 결혼과 탄생과 감사와 찬송과 칭송과 웃음입니다. 여러분의 상황이 룻기의 첫 장면과 같습니까? 눈물이 근심이 두려움이 원망이 불평이 이별이 죽음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십시오. 그 보호의 날개를 펴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러면 바로 당신이 당신의 가정에 당신의 처소에 룻으로 서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주위가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복의 샘물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흘러나와 온 주위 사람들을 복되게 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목마른 인생들이 가득찬 이 세상에 시원하고도 달디 단 복된 물을 쏟아내는 샘터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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