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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문학상5편

작성자김두기|작성시간26.06.12|조회수3 목록 댓글 0


1 메뉴

금요일 저녁이었다

어머니는 집 앞 골목에 먼저 나와 계셨다

오래된 코트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골목 입구를 몇 번이나 내다본 얼굴이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친구들한테 자랑했다

아들이랑 데이트하러 간다고

그러며 웃으셨다

식당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어머니는 메뉴판을 펼쳤다가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글씨가 작구나

나는 국 이름을 읽고

생선 이름을 읽고

반찬 이름을 읽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계셨다

중간쯤 읽다가

문득 눈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메뉴판이 아니라

내 얼굴을 보고 계셨다

네가 어릴 때는

내가 읽어줬는데

그 말을 하고는

물컵을 천천히 돌리셨다

창밖으로 차들이 지나가고

유리창에는 식당 불빛이 비쳤다

우리는 오래전 이야기 몇 가지를 꺼냈다가

다시 집 근처 이야기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어머니는 메뉴판을 한 번 더 펼쳐 보셨다

그러다 말고

조용히 덮어 놓으셨다

며칠 뒤

어머니 방 서랍을 정리하다가

식당 명함 한 장을 발견했다

뒷면에는 볼펜으로

갈치조림

된장찌개

공깃밥

그날 먹었던 것들이 적혀 있었다

글씨는 조금씩 흔들려 있었고

된장의 '된' 자는 두 번 덧쓴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나는 명함을 서랍에 넣지 못했다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종이 한쪽이 가볍게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2 학예회 날

제대하고 한동안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기술도 없고

이력서에 적을 만한 경력도 없었다

새벽마다 빗자루를 들었다

골목 끝에 쌓인 낙엽과

젖은 전단지를 쓸어 담으며

하루를 벌었다

사람들은 종종

내 뒤에 대고 말했다

청소하는 사람

그 말은

작업복에 밴 먼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학예회 날이었다

강당 의자에 앉아

무대에 오를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와

마이크 잡음이 뒤섞여 있었고

천장 조명은 유난히 밝았다

그때

어느 아이가 나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쓰레기 아저씨다"

몇몇 아이들이 웃었다

나는 무대를 보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 타일의 금 간 자국만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아들이 서 있었다

그날 이후에도

새벽은 어김없이 왔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거리를 쓸고

골목을 돌았다

시간은 사람보다 빨랐다

아이들은 자랐고

나는 어느새

예순을 훌쩍 넘겼다

몇 해 전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저희 키우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건너편 가로등 불빛이

창문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괜히 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사진장 속 아들 얼굴을

한 장씩 넘겨 보았다

어린애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

교복 입은 얼굴

군복 입은 얼굴

언제 그렇게 컸는지

창틀을 문지르다

손끝에 먼지가 조금 묻어났다

예전 같으면

빗자루를 들고 나갔을 텐데

나는 손을 털지 못한 채

한참 앉아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는데

어디선가 빗자루 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3 미화원으로 살았던 남자

새벽은 오래 몸에 남아 있다

골목 모퉁이에 버려진 종이컵

비에 젖어 바닥에 붙은 전단지

빗자루를 쥔 손보다

허리가 먼저 그 길을 알아본다

스물여덟 해

나는 어둠이 걷힌 자리를 따라 다녔다

가로등 불빛이 꺼질 무렵이면

장갑 속 손가락부터 날이 밝았고

사람들이 출근길에 오를 때

나는 이미 하루를 반쯤 써버린 뒤였다

퇴직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소리 없이 왔다

작업복을 벗어 걸어 두는데

주머니에서 모래 몇 알이 떨어졌다

한동안은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새벽이면 눈이 떠졌다

일어나 창문을 열면

멀리 청소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몸은 이미 출근한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경비교육도 받았다

수첩에 메모도 하고

시험공부도 해 보았다

이력서를 몇 장 써서 냈지만

전화는 잘 오지 않았다

나이는 늘 맨 앞에 적혀 있었고

그 다음은 비어 있는 칸이 많았다

다시 미화원 일을 시작했다

허리가 예전 같지 않았다

빗자루를 오래 쥐고 있으면

허리를 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일 년 삼 개월

퇴직서를 내던 날

창고 벽에 세워 둔 빗자루 하나가

자꾸 눈에 밟혔다

집에 돌아와 통장을 펼쳤다

몇 줄 되지 않는 숫자들

빠져나간 날짜들

납부 표시 몇 개가 남아 있었다

젊은 날에는

산에 들어가 행자 생활도 했다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깨고

마당을 쓸던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손에는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산을 내려와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키웠다

그때는 하루가 길었는데

지나고 나니 짧았다

아내는 말을 아낀다

대신 저녁 밥상 한쪽에

구인광고가 실린 신문을 놓아둔다

나는 모르는 척 넘기고

아내도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한다

밤이 깊어지면

도시락 가방을 꺼내 본다

지퍼는 예전부터 한 번에 잠기지 않았다

몇 번 올렸다 내렸다 하다 보면

겨우 닫힌다

내일도 어딘가로 가야 한다

창밖이 조금씩 밝아온다

나는 도시락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한참 동안 창문 쪽을 바라본다







4 늦은 입학

칠판은 늘 먼저 앞으로 갔다

나는 마지막 줄에서

분필가루만 바라보았다

수업이 끝나면

공책은 하얗게 남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선생님 목소리도 희미해졌다

전교 꼴등

그 말은 성적표보다 오래 남았다

졸업장을 받아 들고도

공부는 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육십을 넘긴 어느 봄

학생증 하나를 목에 걸었다

김해의 교정에는

벚꽃이 지고 있었고

강의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교수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왔지만

내 머릿속 어디쯤에서

자꾸 길을 잃었다

받아 적으려 해도

문장은 중간에서 끊겼다

중간고사 날

시험지를 받자마자

손부터 식어 갔다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쓰려 하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교재를 펼쳐 놓고 앉아 있었다

한 줄을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또 읽고

또 돌아갔다

내 옆자리에는

일흔일곱 살 학우가 앉아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고개가 조금씩 내려갔고

나는 슬쩍 옆구리를 찔러 깨웠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내 눈이 먼저 감겼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강의가 끝난 뒤

복도 창문에 기대어

한참 운동장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학생들은 바삐 지나가는데

나는 강의실에서 들은 말 몇 마디를

붙잡고 서 있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머니 속 메모지를 꺼내 보았다

삐뚤삐뚤 적힌 글씨

나중에 보니

내가 적어 놓고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문장이 있었다

그래도 버리지 못했다

강당 밖으로 나오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빈 운동장 끝에

바람이 지나가고

누군가 두고 간 종이 한 장이

천천히 굴러갔다

나는 학생증 목걸이를 만져 보았다

목에 걸린 것은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인데

가슴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내일이면 또 잊어버릴지 모른다

그래도 아침이 오면

나는 다시 강의실 문을 열 것이다




5「새벽이 남아 있는 몸」

도로 위에서

정년퇴직을 했는데도

새벽이면 눈이 먼저 뜬다

출근할 곳도 없는데

시계를 보면 네 시쯤이다

한동안은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면

도로 건너 가로등 하나가

아직 켜져 있다

그 불빛을 보고 있으면

예전 생각이 난다

새벽 전화 한 통

주소 하나 받아 적고

오토바이를 몰고 나가던 길

이차선 도로 한가운데

고양이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눈은 뜬 채였다

차들은 이미 여러 번 지나간 뒤였다

차가 끊기기를 기다렸다가

도로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못 했다

고개를 돌렸고

속도 뒤집혔다

그러다 어느 날은 까마귀였다

전봇대 위 까마귀 몇 마리가

한참을 울고 있었다

삽으로 흙을 파고

그것을 묻어 주는데도

날아가지 않았다

환경미화원으로 살면서

별것을 다 쓸어 담았다

낙엽

담배꽁초

깨진 병 조각

비에 젖은 전단지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새벽들만은

아직도 치워지지 않는다

가끔은 생각한다

잠들었다가

그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편할까

그러다가도

창밖이 조금씩 밝아오면

괜히 물 한 잔 마시게 되고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다

멀리서 첫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소리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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