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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김두기

작성자김두기|작성시간26.06.16|조회수1 목록 댓글 0

함양에서/김두기

남계서원 담장 아래
오래된 햇빛이 먼저 앉아 있었다.

바람은 대문을 지나
비어 있는 마루를 천천히 건너갔고

글 읽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기둥마다 묵은 문장 하나씩 기대어 있었다.

청계서원으로 가는 길,

낮은 돌담 곁 풀잎들이
서로 몸을 기울이며 자라고 있었다.

누가 옳고 그른지 다투기보다
먼저 자신을 닦으려 했던 시간도
저렇게 자랐을까.

개평마을 골목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한옥 처마 끝에 걸린 그림자와
오래된 우물가의 적막이

몇백 년 전 오후를
아직 놓지 않고 있었다.

일두 정여창 고택 마루에 서니

사람은 떠나도
뜻은 남는다는 말이

낡은 문설주보다 먼저 다가왔다.

고운 역사공원에서는
최치원의 이름보다

한 사람이 평생 품었던 물음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세상 밖으로 나아가면서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던 마음.

함양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에는
시간이 조용히 보관되어 있었다.

닳은 기와 한 장,
빛바랜 문서 한 장에도

한 시대가 기대어 있었다.

해 질 무렵,

산자락 아래 펼쳐진 함양은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원과 고택,
돌담과 오래된 길들은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것이
이름이 아니라 삶의 결이라는 것을

저녁 햇살 속에서
천천히 가르쳐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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