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
풍전등화 앞에서 시를 쓴 적 없다. 사즉생의 눈으로 세상을 본 적 없다. 변방의 병사는 시를 쓰는데 시는 왜 전장으로 나서지 못하는가. 빙충맞은 내 시의 쭉정이들이 하릴없이 세상을 떠돌게 될 것이다.
백련재에서 쭉정이 원고들을 읽고 또 읽는다. 슬프다.
2026년 봄
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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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 심상
립스틱의 새 촉이 마른 입술에 닿는다
날카로운 빛을 받은 위험한 입술 두 장
거울 속 낯선 얼굴이 사랑에 닿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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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서
여기에서 저기까지, 마디에서 마디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대나무가 달린다
바통을 으스러지게 손에 쥐고 달린다
한 마디 넘기고 또 한 마디 받으며
허공의 빈 트랙을 숨 가쁘게 이어 달리며
바통은 손아귀마다 철통같이 달아오른다
트랙이 몸을 엮어 숲으로 휘어질 때까지
몰아치는 바람 속을 뼈대로만 내달린다
마침내 창공을 가르며 바통을 던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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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의 필적
내 말을 밟지 말아요 부러뜨리지 말아요
침묵에도 바늘이 필요한 시간이니
내 입은 내가 꿰맬게요 슬픔도 맡겨주세요
뜯어진 슬픔들을 궁지로 몰지 않을게요
마음도 뚫리지 않도록 솔기를 이어가며
말 없는 말의 필적을 땀땀이 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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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질하는 여자
마루를 닦아내듯 거리를 걸레질하지
치마폭 찢어지도록 다리를 벌리고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오후를 따라붙지
흘려놓은 그림자와 타다 남은 발자국을
허둥지둥 지워가는 퇴근길 성급한데
저녁놀 얼굴에 들이치며
노도처럼 출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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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자라나서
어린 날엔 슬픔도 키만큼 작았는지
슬픔은 늘 엄마 등에 업혀 있곤 했어요
엄마가 내 눈 감기면 슬픔은 따뜻했어요
마음은 몰래 자라 키를 훌쩍 넘어서고
슬픔을 만나면 슬픔인 줄 알게 되어
풀잎에 돋는 이슬도 불처럼 뜨거웠어요
가시들을 키우며 웃자란 한 시절이
일렁이는 덤불 깊이 똬리를 틀 때마다
슬픔도 그예 터질까 볕살마저 삼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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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출
모여선 의자들이 그림자를 방출한다
푸르게 자라난 먼지들도 대방출된다
기억이 안전장치를 풀고 창고를 개방한 날
쏟아진 그림자들 햇살 따라 수거되고
빗장을 부순 바람은 폐기물로 분류된다
창고가 초기화되어 과거를 내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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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모란
젖은 혈穴에 침을 꽂아 뽑아낸 밑불처럼
가물대는 문장 한 올 간신히 물고 앉은
당신의 우울한 아침은 여전히 저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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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폭포
깊은 산 소리를 대서특필로 읽는다
드높은 목청이 궐궐궐 우렁차다
권좌는 등이 쩌렁하고 소맷자락은 사납다
기댈 곳을 버릴까 펄펄펄 날아볼까
구중의 소식은 뿌리부터 완강하여
칼날을 높이 꺼내든 풀잎들도 삼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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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한끼
동전이 뜨거워졌네
먹어 볼까, 먹어 볼래?
비릴까, 더 익힐까
기다릴까, 배고프지?
동전이 왜 이리 많아
밥처럼 쏟아지잖아
저금통이 내뿜는 쇳내가 어지럽군
동전 앞에 엎드려 코를 묻은 봄날 오후
자욱이 이끼 오른 독이 손톱을 파먹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