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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수필 읽기

수필의 이해

작성자양촌자|작성시간26.06.10|조회수16 목록 댓글 0

수필의 이해

 

나는 가끔 함께 수필을 공부하는 도반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 까닭은 조금 일찍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수필 그 자체의 깊이나, 구사하는 문장이나, 사유가 그들보다 앞서 있다는 인상을 지우지는 않았나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몽테뉴가 수필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사람이 수필 쓰기에 동참했어도 우리가 몽테뉴에게 감사할 일이라면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를 개척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그 길로 들어서서 내처 간다는 것은 어렵고 외로운 일이어서 더더욱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와 같은 수필가는 무슨 까닭으로 수필 쓰기를 시작했고, 그 목적이 무엇이고, 목표가 무엇이건 간에 종래에는 몽테뉴가 썼던 글을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언컨대 그럴 것이라 확신합니다. 수필이라는 장르가 대체로 신변잡기로 시작하는 글쓰기입니다. 열에 아홉이 모두 그렇게 시작해 소재가 떨어질 무렵 열에 아홉이 글쓰기를 그만두는 장르입니다. 그 까닭은 소재의 한계와 아울러 소재로부터 오는 사유의 한계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수필가가 할 일이란 소재를 확장하는 일인데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것들, 손에 잡히는 것들은 남아 있지 않아서 앞서가는 글쓰기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지지부진해지고 아예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몽테뉴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유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로 여행하는 동안 몽테뉴는 우주여행을 하고 있었겠지만, 우주여행 역시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몽테뉴의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고전을 섭렵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고전을 읽으면서 얻은 것은 우주여행을 하면서 내려다보는 세상과 같습니다. 이는 비행기 정도로 여행하는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도 그가 본 것, 얻은 것, 느낀 것을 모두 쏟아낸 후로는 더는 해볼 것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짐작하건대 이쯤에서 그만 써야 할 것이라는, 더는 쓸 것이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소재를 다 소진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주여행을 한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수필가입니다.

 

우주여행을 시작하지 않으면 평소의 여행 정도로 소재를 얻는 일은 매우 어려워서 글쓰기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수필가들이 오래도록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으며 더더욱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대부분 철학가였거나 고전문학을 즐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수필을 쓰기 위해 고전을 즐겨 읽은 것이 아니라 고전을 즐기다 보니-직업이었건 취미였건-수필 쓰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다음은 그렇게 얻은 소재를 글로 써내는 능력입니다. 이때부터 문장가의 저력이 드러납니다. 문장가는 어려운 단어, 미사여구, 놀라운 궤변을 구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고 평범한 말을 잘 조합해 상대방의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수필은 지식을 자랑하는 글이 아니며,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글도 아니고, 궤변을 통해 독자를 현혹하는 글은 더더욱 아닙니다.

 

스스로 경험하고 보고 들은 것을 진솔하게 묘사해 내야 하며, 읽는 이가 즉시 알아채고 감동할 수 있어야 하며, 게다가 사유를 더하면 훨씬 좋습니다. 고전을 읽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깊게 사유해야 합니다. 문장가는 단어를 애매모호하지 않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플로베르가 ‘어떤 현상을 표현하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다’라고 한 말은 이에 해당하는 말일 터입니다.

 

수필은 독자를 이해시키거나 깨달음을 주는 교훈적 글이라기보다는 감동을 전달하는 글이어야 합니다. 그 글에 사용된 단어는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작가의 우월한 지식을 드러내는 유식자(有識者)의 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 번을 읽어도 모르는 글은 읽는 이의 무지 때문이라기보다는 글쓴이의 서툰 문장이 원인입니다. 불과 몇천 자의 글 한 편을 읽는데 수도 없이 사전을 찾아야 한다거나 문맥 이해를 위해 진땀을 흘려야 한다면 안 될 일입니다.

 

훌륭한 문장가는 어려운 글을 쉽게 쓸 줄 압니다. 이해가 어려운 철학적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씁니다. 자신의 유식을 드러내지 않고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합니다. 어려운 글은 읽지 않는 글이 될 뿐이지 좋은 글이 될 리가 없습니다. 최근 읽은 어떤 이의 수필 평론이 그렇습니다. 본인이 쓴 글이니 본인이야 잘 알겠지만-사실 이 점도 의문입니다, 코걸이라는 것인지 귀걸이라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글을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논쟁을 벌이거나 설명하는 글이라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언어의 유희를 보는 기분입니다.

 

어떤 글이건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면 마땅히 퇴고입니다. 애매모호한 문장은 독자의 이해를 방해합니다. 자신만의 고집적 사고는 독자의 사고와 충돌해 거부당합니다. 두루뭉술하게 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하게 쓰라는 말입니다. 말인지 얼룩말인지 확정해 주지 않고 말이라고 한다면 이는 논쟁의 빌미가 되거나 다중적 의미가 되어 독자를 혼동시킵니다. 퇴고는 긴가민가함에서 단호함으로, 희미함에서 또렷함으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꼬임에서 풀어냄으로 바로잡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한 편의 수필이 완성됩니다.

 

여전히 그렇게 쓴 수필은 고백(告白)의 문학이며, 치유(治癒)의 문학일 것입니다. 수필은 일기가 아닙니다. 독자를 두고 있기에 그 글에 감동하는 독자는 마치 제가 쓴 글인 양 고백과 치유의 효과를 함께 누립니다. 그렇게 써내려 오고 있는 수필이 고루해 새로운 수필 작법을 창조한다거나 기법을 달리한다고 해도 수필이 지닌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감동 있는 글, 사유가 깃든 글을 쓰면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수필가의 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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