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6월 합평 작

작성자손월빈|작성시간26.06.14|조회수66 목록 댓글 0

집행유예

 

박경자 

 

관절이 더 이상 보수 불가하므로 실내용이 되어 외출불가하고 심장이 혈전제 도움을 받아 현상유지되고 의치가 근무이탈을하여 전시용이되니 직무유기에 해당하며 요실금을 막으니 변실금이 생겨 더 이상 인간의 질을 교화하기 어려우니 최고의 형량을 내리는게 마땅하나 이동수단이 압류되고 부양해야할 가족이있으며 연세가 있으니

주문: 아직 연동작용이 원활하고 냄비를 태우는 재범이 없도록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다

 

 

 

지나간 자리

 

                                                                                    송은영

 

  손가락 사이로 비스킷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던 거친 가루의 감촉과, 코끝을 스치던 들큰하면서도 비릿한 냄새를 기억한다.

  8년 전 겨울, 우리 집 첫째 강아지 송이를 보내던 날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매주 금요일이면 식구들이 우리 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석가탄신일과 대체공휴일이 끼어 연휴가 길었던 그 주말 저녁에는 마침 여동생 내외도 모처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 집을 찾은 동생 내외와의 저녁은 이웃집까지 들릴 만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경상도 특유의 억센 억양과 커다란 목소리는 자칫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싸움이 

난 줄 착각할 정도였다.

이어 후식까지 곁들이며 즐거운 시간은 늦도록 이어졌다.

  우리 집 강아지들은 그저 조용히 오가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큰 소리와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된 봉구와 띵똥이는 귀도 잘 들리지 않고 시야도 흐릿해 별다른 반응 없이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동생은 몇 달 만에 본 봉구를 

“아유, 아직 건강하네.” 하며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사람으로 치면 백 살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런데도 밥 잘 먹고, 잘 걷고, 대소변도 스스로 척척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고마웠다. 그 긴 세월을 큰 탈 없이 함께해 온 시간이 새삼 대견스러웠다.

 

  봉구가 우리 집 아기가 된 건 2008년 여름이다.

대구 시내를 떠돌던 꼬질꼬질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오게 되었다. 너무 작아서 자칫 사람들 발길에 채일까 걱정될 정도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엉겨 붙은 누런 털을 대충 다듬고, 살을 파고든 진드기 몇 마리를 떼어낸 뒤 목욕부터 시켰다.

다음 날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며 두 달 된 푸들믹스 수컷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름을 고민하던 중 복덩이 강아지라는 의미로 ‘복구’라고 지어주려 했지만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들어 결국 ‘봉구’가 되었다.

 

  봉구가 오기 전부터 우리 집에는 한 살 된 하얀 말티즈 ‘송이’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송이는 봉구를 시샘하지 않았고 둘은 금세 형제처럼 지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남편과 나, 아들, 딸, 그리고 ‘송이와 봉구’ 두 강아지 아들 까지 여섯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18년 동짓날 밤, 송이는 천사 같은 하얀 수의를 입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 무렵에야 강아지 장례식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두 손안에 폭 감싸이는 조그마한 유골함을 안고 와 송이가 뛰놀던 방에 올려두었다.

  의외로 가장 힘들어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우리 귀여븐 송이 무서버한다 불은 끄지 마래이.”

 

남편은 밤낮으로 등을 켜 두라고 했고, 한 달 정도는 우리 곁에 두었다가 보내주자고 했다. 

  

  한 달이 지나 송이를 우리 집 앞 동산에 보내주러 올라갔다. 햇빛 맑은 날이었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잡풀 하나 없이 군데군데 눈 조각들이 언 땅에 흩어져 좀 쌀쌀했다. 

유골이라는 것을 실제로 손에 쥐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고운 가루가 아니었다.

바스러진 크래커 가루처럼 조금 거칠었고, 희미한 비린 단내가 났다.

  한 생을 가득 채우고도 마지막에 손안에 남는 것은 한 줌의 가루뿐이었다. 그러나 그 가루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혼자 남겨진 봉구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어느 날, 우리는 동물보호협회 홈페이지에서 한 강아지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곧 안락사 예정이라는 말에 서울까지 아이를 만나러 갔다.

 

  회갈색 무늬가 어우러진 얼굴이 아주 예쁜 공주 강아지였는데, 뒷다리가 불편해 절뚝거리며 걸었다.

  몇 번의 입양과 파양을 겪은 아이라 사람만 보면 눈치를 보며 뒤로 숨곤 했다.

여덟 살이라는 나이와 불편한 다리 때문인지 선뜻 가족이 되어 주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해들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아이를 데려왔고, 이름은 예전부터 불리던 ‘띵똥이’ 그대로 불러주었다.

  남편은 그런 띵똥이를 유난히 안쓰러워하며 아꼈다.

  그 사랑을 알아서였을까.

띵똥이는 영화 [마스크 2]에 나오는 견종 테리어답게 하루가 다르게 밝아졌다. 뒷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계단을 오르내리고 집 안을 극성스레 마구 뛰어다녔다.

  또 그렇게 우리 가족은 여섯이 되었고, 봉구와 띵똥이는 평화로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돌이켜보면 우리 집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고 온 존재들이었다. 버려졌거나 상처받았거나 외로웠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동안 그 상처는 조금씩 옅어졌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서로의 체온 또한 조금씩 높아졌는지도 모른다.

  

  2022년, 유난히 바빴던 여덟 달 끝에 우리 가족은 추석연휴를 맞아 친정 식구들과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며칠 뒤 남편은 갑작스러운 고열로 쓰러졌고, 급기야 폐혈증으로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여행 중 먹었던 생새우를 통해 비브리오균에 감염된 것이었다.

건강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너무 황망했고, 친정엄마는 그 충격으로 결국 공황장애 진단까지 받았다.

 

  평소 남편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가 식구들 받침다리가 돼가 모두 편안하이 건널 수 있도록 할 끼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프게 되면 길게 안 끌고 깔끔하게 한 방에 간다이.”

 

그 말처럼 남편은 정말 순식간에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린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함께 운영하던 사업체를 추슬러야 했다.

그렇게 일상은 바삐 흘러갔고, 우리의 슬픔도 조금씩 말라 갔다.

 

  2년 뒤 딸이 결혼하면서 집에 남은 식구는 아들과 나, 봉구와 띵똥이뿐이었다.

 

  그래도 매주 금요일이면 딸은 가능한 한 집에 들러 함께 저녁을 먹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생 내외가 돌아간 뒤에도 딸은 한참 더 머물다 갔다.

석가탄신일 전날인 토요일에는 나와 둘이 미리 절 두어 곳을 다녀오자며 약속까지 잡아 두었다.

 

  다음 날 아침.

봉구가 이상했다.

누워만 있었다. 어제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봉구가 이제 떠나려 한다는 느낌이 왔다.

 

  "봉구야, 힘들어하지 말고 편안하게 좋은 곳으로 가라. 우리 봉구 행복하게 잘 살았어. 

부처님, 우리 봉구 편안히 좋은 곳으로 이끌어 주세요.“

 

 나는 봉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띵똥이도 무언가 알아챘는지 움직이지도 않고 봉구 앞에 앉아 바라만 보았다.

아들도 봉구를 한참 보더니 시간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딸에게 집으로 오라고 연락했다.

딸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힘겹게 누워 있던 봉구는 세 번쯤 울음을 토해내더니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오래 앓지도 않았다. 흔히들 말하는 강아지 임종 직전 흘리는 대소변도 없었다.  

참으로 깨끗하고 고요한 죽음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는데, 왠지 남편이 봉구를 마중 나온 것만 같았다.

  

  몇 번을 겪어도 임종을 지켜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죽음의 모습은 제각각일지라도, 떠난 뒤 남는 빈자리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나는 봉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나무아미타불'을 되뇌며 좋은 환생을 기원했다.

    

  봉구를 이불 위에 포근히 뉘인 뒤 

 

  "엄마 다녀올게" 

 

하고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절 두 곳을 돌며 식구들의 평안과 봉구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다녀온 후 가족 모두 장례식장으로 향했고, 열아홉 해를 살다 간 봉구를 평안히 보낸 후 우유빛 유골함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봉구가 지내던 방에 사진과 함께 유골함을 두고 장미꽃도 꽂아 주었다. 

스님께서 알려주신 영가천도를 위한 광명진언도 틀어 주었다.

아침저녁으로 봉구에게 인사를 하러 방에 들어가면 띵똥이도 따라와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일주일 후 봉구의 유골함을 안고 4년 전 먼저 떠난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갔다.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그 주변을 천천히 돌며 봉구를 부탁했다.

  회백색의 거친 가루와 비린 냄새는 봄꽃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병치레 없이 긴 시간을 잘 살아 준 봉구가 너무 기특했다.

비록 먼저 보내기는 했지만 슬픔에 앞서 뿌듯함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남아 있는 띵똥이가 걱정되어 곧바로 유모차를 사고 함께 공원 산책도 다니기 시작했다.

띵똥이도 열다섯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전히 건강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제 우리 집 식구는 아들과 나, 그리고 띵똥이까지 셋이다.

 

  죽음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슬픔만으로 남는 일도 아니다.

  죽음 또한 삶이 남긴 마지막 흔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흔적 위에는 함께 보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남는다.

  영혼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오래 아프지 않고 평화롭게 살다 떠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인지도 모른다.

 

  우리 송이도, 봉구도, 남편도 평화롭게 떠났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함께 웃고 사랑했던 시간들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빈자리를 슬픔보다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언젠가 내게도 그런 죽음이 허락된다면, 그것 역시 모두에게 더없는 축복일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김우성

 

 

매일 아침 등교시간

시내버스는 비슷한 냄새로 흔들렸고

 

맨 뒷자리 창가 쪽

언제나 그 자리에

 

하얀 카라는 반짝이고

단발머리 끝에

햇살이 잠깐 걸렸다가 사라지던 순간들

 

몇 정거장이 지나도록

차가운 금속  손잡이에

식은 땀만 고이고,

 

일요일이면 혹시나

자전거 페달이 가벼워져

낯선 골목을 몇 번이나 돌아 나왔고

 

닫힌 가게 유리창에

비친 짧은 머리가

잠시 멈추 듯 지나갔다

 

어느 날 하교 길

 

내 자리 앞으로 걸어오던 발걸음

가방이 내 앞에 멈췄지만

끝내 손을 내밀지 못하고,

 

버스는 다시 흔들렸고

창밖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갔다

 

그날 이후로도

마냥 같은 길을 오갔지만

 

맨 뒷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봉선의 빛깔

빨강으로 곱게 쓰고

님 오실 길에

꽃발 들고 서성이다

 

빨강 몇 잎 따

콩콩 찧어 

당신 그리운 날마다

손꼽아 헤아리며

 

첫째 손톱엔 보고픔을

둘째 손톱엔 기다림을

셋째 손톱엔 사랑을 담아

 

열 손가락 가득

당신 이름 물들이리. 🌺

 

 

 

하늘지문

 

손월빈

 

품바에 자지러지던 엿가락 장단도 이제 그만

온천지 물웅덩이, 거북등처럼 갈라진 땅

시름시름 앓는 푸른 전야

 

해마다 되풀이되는 물난리와 가뭄은

남의 일인 양 흘러가고

찜질방처럼 달아오른 산하에

책상 위 자로 잰 하천들은

제멋대로 몸을 곧게 편다

 

벗길 것은 벗기고 묵힐 것은 묵히되

날 것은 나고 들 것은 드는

그런 어림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굽이굽이 인생길은 옛말이라며 

제 뜻도 아닌 것을

억지로 반듯하게 세우려 했으니

하늘이 울고 

강물마저 속을 태우는 것이오

 

하물며 저 뻥 뚫린 상처는

수천 년 두고두고

제 지문 하나 남기려는 작정인가

 

어찌 그것을

구름이 새기고

바람이 다듬고

강물이 써 내려간

하늘지문에 견줄 수 있으리오

 

장미경 시

 

굳이 나를 설명하지 말자

결코

아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

 

 

 

채희문 선생님께서 일요일 아침 올려주신 말씀

 

*어제의 합평을 되새기며 새벽산길을 오르다가 일출을 맞았습니다.

어제 드린 말씀이 그다지 어긋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詩人님들 말끔히 떠오르는 아침해처럼 어제의 詩心을

말끔히 말끔히 잊으시진 않았지요?

다음 달에 다시 뵈올 땐

어제의 작품들이 훌쩍 자라있길

원합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릴게요.

<박경자 시인 님>

어젠 선생님 주먹이 닿는 자리에 앉아있어서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만..(아플까봐)

외면적인 판결이 끝났으니 영혼의 판결도 내려주시면 좋은 시가 될 것입니다.

 

<김우성 시인 님>

50년 전의 기억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자라난

지금의 사색이 곁들여지면

맛있는 시가 될 거에요.

 

<이종갑 시인 님>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 한 것은

당시 우리들의 보편적인 슬픔이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당신이 보고프기에 봉선화를 사랑한다는 범주에서 좀 넓거나 깊게 봐주세요.

 

<손월빈 시인 님>

어제 드린 말씀처럼~

시에 담겨있는 거칠고 생경한

구호같은 것들을 걷어내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