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빈 가방의 무게』
손병흥
가을볕이 따뜻하게 내려앉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김노인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며느리가 좋아한다는 장아찌를 작은 통에 담고, 아들이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멸치볶음도 정성껏 만들었다. 시장에서 싱싱한 배와 사과를 골라 담고, 손주들에게 줄 과자까지 챙기니 어느새 커다란 보따리 두 개가 되었다.
아내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자식 집에 갈 때면 아직도 옆에서 잔소리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보, 너무 많이 싸 가지 말아요. 애들도 이제 다 알아서 먹고살 텐데."
그 말이 떠오르자 김노인은 혼자 웃었다.
"그래도 부모 마음이 어디 그런가."
지하철을 갈아타고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하는 먼 거리였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들 가족을 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손주들이 먼저 뛰어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문을 연 것은 며느리였다.
"어머, 아버님 오셨어요?"
반가운 표정이기는 했지만 어딘가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김노인은 들고 온 보따리를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며칠 전에 담근 장아찌다. 손주들도 잘 먹을 거야."
며느리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 냉장고가 꽉 차서요. 요즘은 아이들도 이런 거 잘 안 먹어요."
그 말은 칼날처럼 가슴에 박혔다.
아들이 얼른 받아 들며 말했다.
"그래도 두고 먹으면 되지."
하지만 말과 달리 보따리는 냉장고 깊숙한 구석으로 밀려 들어갔다.
김노인은 애써 웃었다.
"그래, 그래. 먹고 싶을 때 먹어라."
그러나 며칠 동안 고민하며 만들었던 반찬들이 순식간에 짐짝이 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거실에 앉으니 더 어색했다.
TV는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함께 보지 않았다.
아들은 노트북을 펼쳐 놓고 회사 일을 하고 있었고, 며느리는 주방에서 분주했다.
손주들은 각자 방에서 휴대전화와 게임기에 빠져 있었다.
김노인은 손주를 불렀다.
"할아버지 왔다."
초등학생 손주는 잠시 얼굴만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그러고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예전 같으면 무릎에 올라앉아 재잘거리던 아이였다.
시간이 흐른 것인지, 세상이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탁에 둘러앉았지만 대화는 길지 않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파트 대출 이야기와 학원비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금리가 또 올라서 큰일이에요."
"애들 학원비도 정말 장난 아니고요."
김노인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누구 하나 그의 건강을 묻지 않았다.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 병원은 다녀왔는지, 혼자 사는 집은 괜찮은지.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힘든 이야기만 이어졌다.
김노인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젊을 때는 고생하는 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손주와 가까워지고 싶어졌다.
가방에서 용돈 봉투를 꺼내 건넸다.
"공부 열심히 해라."
손주는 받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금세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김노인은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자 며느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애가 요즘 예민해서요."
별 뜻 없는 말이었겠지만 김노인은 손을 거두었다.
자신의 손이 괜히 낯설고 불편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저녁 무렵.
더 머물고 싶었지만 더 있으면 짐이 될 것 같았다.
"이제 가봐야겠다."
아들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벌써 가시게요?"
붙잡는 말 같았지만 진심 어린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며느리는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게 전부였다.
예전에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고, 차를 타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현관문 앞 인사가 끝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쿵.
그 소리에 김노인은 잠시 멈춰 섰다.
마치 세상 하나가 닫힌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아들이 뛰어나올까.
"아버지, 조금 더 계시지 그러셨어요."
그런 말을 해줄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 창가에 앉았다.
무릎 위에는 이제 텅 빈 가방 하나만 놓여 있었다.
올 때는 무거워서 어깨가 아팠는데 돌아갈 때는 이상하게 가벼웠다.
그런데 왜 마음은 더 무거운지 알 수 없었다.
창밖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김노인은 조용히 가방 손잡이를 쓸어내렸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아들이 소풍 가는 날이었다.
새벽부터 김밥을 싸고 과일을 깎아 넣어 주며 혹시 부족할까 봐 몇 번이고 도시락을 확인하던 날.
아들은 그 도시락을 들고 신나게 학교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했던 젊은 아버지가 있었다.
그 아들은 이제 중년이 되었고, 자신은 늙었다.
세월은 참 공평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만은 늙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노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잘 살면 됐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눈가에는 어느새 물기가 맺혔다.
집 근처 정류장에 내리자 해가 저물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적막한 공기가 맞아주었다.
누구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노인은 빈 가방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가방은 비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장아찌를 담던 정성도, 손주를 보고 싶던 그리움도, 자식을 향한 끝없는 사랑도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부모는 참 이상하지... 서운해도 걱정되고, 상처받아도 보고 싶고."
창밖에는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김노인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끓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먼 곳에 있는 아들에게 짧은 안부를 건넸다.
"아들아, 나는 괜찮다. 그러니 너도 건강하게 잘 살아라."
부모의 사랑은 때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지만, 그럼에도 끝내 자식을 향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날 밤, 빈 가방보다 더 무거웠던 것은 늙은 부모의 그리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