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나라일 경우 약 500년간 지속이 되고 초대 탕왕에서 마지막 제신( 걸왕 )까지 30대가 지속이 되었는데 초대 탕왕에서 18대 양갑이란 왕까지 무려 수도를 6번이나 옮긴 것으로 봐서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국가로서의 견고함이 그다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상 왕조의 전기前期에 해당이 되는데 왕조의 지속 기간의 약 절반인 250년 정도이다. 이때는 여러 면에서 조용한 변화가 지속이 된 것 같다.
그리고 탕 이후에 왕의 명칭의 호칭에 십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보을(報乙) 보병(報丙) 보정(報丁) 주임(主壬) 주계(主癸) 태을(太乙)같이 이름이 십간十干이 포함되는데 결국 천간은 이미 이 무렵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양갑의 뒤인 19대 반경盤庚이 왕이 되고나서야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은허로 수도를 옮기고 난 후에 나라가 안정이 되고 나머지 멸망할 때까지 지속이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서 나라를 은이라 부르게 되고 갑골문은 여기서 대부분 많이 출토가 된다.
그러므로 진정하고 안정적인 상 왕조는 반경과 은허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전 중에 하나인 서경書經 또는 상서尙書라 부르는 책에는 반경이 수도를 옮기면서 귀족들을 소집하여 한 연설이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뜻을 완벽하게 짐작하기 힘들지만 대략 해석하면 “선대의 왕이 왕조의 기초를 다졌지만 현재는 큰 재난을 당했다. 그것은 우리더러 이곳을 떠나라는 뜻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끝이 좋지 아니할 것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정저우 근처인 샤오솽차오에서 오늘날 안양 근처인 은허로 천도를 한다. 이곳으로 옮긴 이유를 후대 학자들은 많은 해석을 하는데 하나는 청동기 제작에 필수적인 구리 산지가 가깝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때 상 왕조는 드디어 말이 끄는 전차戰車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는데 은허란 곳이 말의 산지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다.
그 무렵에 중국뿐만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는 전차인데 중국에 비해 중동 지역의 경우 이미 많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당시 중국은 말이 거의 없는 것이 문제이었다.
아마 상 왕조는 서북방 쪽의 유목민족에서 전차의 제작 방법을 전수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중국의 전차는 중동에 비해 조잡한 수준이었고 나중에 차츰차츰 개량과 발전이 되었을 것이다.
이 천도遷都( 도읍지를 옮김 )는 당시 분위기로 봐서 분명 점을 치고 계시를 받았을 것인데, 전차의 제작이나 수도를 옮기는데는 이런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계시 이외에 해석하기에 따라 오늘 날에 말할 수가 있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개념을 첨가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추측으로 반경은 초기 상 왕조의 혈통에서 직계가 아니고 다른 계통에서 바뀌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말하자면 상 왕조에 어떤 혁신적인 변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반경의 시대를 거쳐 2대를 내려온 후에 무정武丁의 시대가 오는데 이때 반경이 만든 궁전을 버리고 약간 남쪽으로 다시 이주를 하여, 지금 진짜 은허 박물관이 있는 곳으로 옮긴다. 이때의 세운 궁전이, 즉 수도가 상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무정이 상 왕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칭송을 받는다. 무정의 부인이 유명한 부호婦好인데 이 부호의 무덤은 현대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이 되어 당시의 사정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가 가장 많은 작성된 갑골문이 발굴이 되었다.
이 시기가 상 왕조의 전성 시절이라 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상 왕조의 성격이 완성이 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witpo
상서尙書
고대 중국에서 정식인 역사서가 아니면서 역사에 가까운 책으로 참고가 많이 되는 책으로 두 권을 꼽을 수 있는데 그것은 《 서경書經 》과 《 춘추春秋 》이다.
서경은 원래 이름이 상서尙書이다. 후대에 유교의 경전으로 되었기에 서경이라 하는 것이다.
내용은 요순시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왕들이 내린 포고문, 신하들의 상소, 왕의 연설문 등 각종 기록을 모아둔 것이다.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대의 국가 기록을 정리한 것이라 역사서로 분류하기도 하며, 중국 전통 산문의 전범으로 꼽히기도 한다.
공자가 정리했다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많은 고대의 서적들이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분실이 되었는데 이 상서도 마찬가지이다.
한漢왕조가 집권을 하면서 많은 서적들이 복구가 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상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한 문제 시대에 박사 복승(伏勝)이나 조조(鼂錯 - 후한 시대 삼국지의 조조曹操가 아니다) 등에 의해서 복구가 되었다. 이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한 무제 시대, 공자의 집에서 죽간으로 된 상서가 발견이 되어 내용을 살펴보니 금문상서와 내용이 제법 달랐다. 그래서 이것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부르며 구분을 하였다. 이 고문상서는 나중에 소실이 되었는대 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란 사람이 새로 복구했다고 하였는데 후대에 위작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2000년대 새로운 이 상서의 죽간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청화 대학에 기증이 되었는데 이것을 《 청화간(淸華簡 》이라 한다.
서경은 주 내용은 주 나라 시기에 편찬한 것으로 보이며 주제가 명덕신벌(明德愼罰 “덕을 밝혀 죄 주기를 신중히 하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