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하느님 맛'을 내는 사람 - 방순자 수녀(성가 소비녀회) † 독서 : 1코린 8,1ㄴ-7.11-13 † 복음 : 루카 6,27-38
† 독서 † 형제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8,1ㄷ-7.11-13 형제 여러분, 1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3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4 그런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5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7 그렇지만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11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12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라도 먹을 수 있다. 음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피해야 한다. 이웃 사랑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제1독서).
† 목음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학대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뺨을 때리는 자를 받아 주라고 하신다.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가져가는 이에게는 되찾으려 하지 말라고도 하신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최고봉이다. 먼저 가까운 사람부터 잘 대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차츰 이웃 사랑을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복음).
◈ `하느님 맛` 을 내는 사람 조금 나이 든 분들은 ‘무짠지’의 매력을 알 것이다. 여름철 더위에 지치면 평상시 맛있게 먹었던 갖은 양념의 반찬이 싫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소금에만 절인 무짠지를 물에 담가 적당히 간을 우려내어 먹으면 그 맛이 개운해서 입맛을 되찾게 된다. 생무는 싱싱한 맛을 내지만 썰어놓으면 부러질 수 있다. 반면에 소금에 절인 무는 성질이 완전히 변해 손으로 비틀어도 부러지지 않고 깊은 맛을 낸다. 생무는 ‘사람 맛’이 그대로 살아 있는 본성적인 사람이고, 무짠지는 사람 맛이 다 빠져나가고 ‘하느님 맛’으로 변한 ‘하느님의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생무가 짠지가 되려면 긴 시간 장독 속에서 지독히도 짠 소금물에 잠겨 있어야 한다. 더욱이 물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무거운 돌에 꼼짝없이 눌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무 맛이 쏙 빠져나가 변질되지 않는 짠지 맛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 이기심과 욕심, 교만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나’를 찾게 된다. 내 본성이 살아 있는 한 부러질 수밖에 없다. 내 안의 이런 ‘사람 맛’을 빼기 위해 하느님은 나의 삶에 이른바 ‘원수’들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고 학대하는 사람, 뺨을 때리고 내 것을 가져가는 사람…. 그러나 이들이 나를 가장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하느님의 사신’이다. 나의 교만한 자아는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면서 벗어나려 반항하지만, 사람은 오해와 무시도 받아보고, 육신적·물질적 고통이 무엇인지 겪으면서 기(氣)도 죽어봐야 자기 본성이 정화되고 겸손한 인간이 된다. 무가 소금물 밖으로 나오면 썩어서 버릴 수밖에 없듯이 칭찬받고 인정받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만으로는 하느님 맛을 내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 방순자 수녀(성가소비녀회) -
◈ 참 겸손이란 인생의 금맥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루카 6장 27-38절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산책로를 따라가며 묵주기도를 드리다가 수풀 속에서 날아오르는 반딧불이 무리를 만났습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과 더불어 유년시절을 필두로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더군요. ‘회한(悔恨)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누구나 한 두 번씩은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미성숙한 탓에 저지른 과오나 충족되지 못한 부분에 대한 후회, 안타까움에 흘리는 눈물을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완전히 성취한 꿈보다 못다 이룬 꿈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정복한 산보다 아쉬운 눈물 머금고 발길 돌린 산이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완성, 완전함이란 단어보다는 미완성, 불완전함이란 단어가 더욱 친숙합니다. 환한 대낮보다는 어스름 저녁이, 빛나는 성공보다는 참담한 실패가, 충만한 기쁨보다는 썰물 같은 슬픔이 더욱 정겹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앞에 늘 탄탄대로만 펼쳐주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꿈같은 봄날만 허락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끔씩 칠흑같이 깜깜한 밤을 체험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드시 필요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심연의 슬픔, 나락으로 떨어지는 좌절감, 깊은 상처...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꼭 필요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의 진리는 말이 쉽지 깨닫기 어렵습니다. 납득하기 힘든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할 자세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밑으로 내려서기’입니다. 적당 선에서가 아니라 한없이 깊고 깊은 심연의 바닥으로 내려서기입니다. 내려가는 도중에 우리는 그 알량한 자존심, 웃기는 우월감, 마지막 남은 ‘나’까지도 양파 껍질 벗기듯이 훌훌 벗겨버리고 나서 심연의 동굴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순간 ‘참 겸손’이란 인생의 금맥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작업을 해보라고 우리 각자에게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의 권고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너무 지나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결국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속도 밸도 없는 천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최종적으로 모든 것 훌훌 벗고 알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요셉 신부님의 복음 맛 들이기 -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연중 제 23 주간 목요일 -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 (루카 6, 27-38)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군것질 할 가게도 없는 곳이었기에 가끔 찾아오는 뻥튀기 리어카가 밥 아닌 다른 것을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오면 집에 있는 모든 쇠붙이나 병들을 모아서 가져다주었고 그것 때문에 동네가 깨끗해 질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그 아저씨가 서비스 차원에서 뻥튀기를 거저 준다고 아이들만 다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빈손으로 달려 나갔지만 다른 아이들은 각자 그릇을 준비해 나왔습니다. 한 친구는 세숫대야만한 양동이를 들고 나왔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각자가 들고 나온 것에 가득히 뻥튀기를 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양 손을 벌려 최대한 많이 받아보려 했지만 가장 적은 양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저씨가 불공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들고 나온 그릇의 크기는 각자가 판단했던 뻥튀기 아저씨의 자상함의 크기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각자가 그 아저씨를 판단한 만큼 받아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은 양을 주는 것보다 각자가 판단한 기준대로 주는 것이 더 공평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심판의 잣대대로 심판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남을 모질게 심판했으면 모질게 심판받을 것이고 자비로웠다면 우리의 죄도 자비롭게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무자비한 자는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 2,1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자비롭기만 하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일까요? 물론 죄를 많이 지어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모두 용서했다면 그 죄는 다 용서받을 것이지만, 인간의 본성상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제 처음으로 남을 판단하게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 처음이 아닙니까? 인간은 죄를 지으면 양심의 목소리와 그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남을 더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더 판단하는 사람이 더 큰 죄인입니다. 공기 안에는 좋은 냄새와 안 좋은 냄새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에나는 썩은 냄새만 맡고 그 냄새를 쫓습니다. 상어는 바다에 피가 한 방울만 떨어져도 수 킬로 밖에서 그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꿀벌은 꽃을 보지만 파리는 썩은 것만 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함께 존재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나쁜 것만 찾아내서 그것을 보고 판단하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본성이 이미 하이에나나 상어, 파리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로 나눌 것이지만 심판 때문에 양과 염소로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마태 25장 참조). 이미 그 사람들이 그렇게 변해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남을 심판 할수록 자신은 점점 염소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남을 미워하지는 맙시다. 남을 용서 못하고 미워한다면 나의 죄 또한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도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 로마에서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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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성가 6번 / 찬미 노래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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