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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강론말씀]6월5일 '피 값으로 얻은 영토' - 최인섭 신부

작성자김안나(시화바오로)|작성시간09.06.05|조회수15 목록 댓글 0




☆ 2009년 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피 값으로 얻은 영토' - 최인섭 신부(청주교구 오창 천주교회) 
 
† 독서 : 토빗 11, 5 – 17 또는 사도 26, 19 – 23 
† 복음 : 마르 12, 35 – 37 또는 요한 10, 11 – 16 

보니파시오 성인은 7세기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설교가와 교육자로서 활동하며 많은 이들을 가르쳤다. 
이후 선교사로 독일에 파견된 보니파시오 사제는 많은 수도원을 세웠으며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주교가 되어 모범적인 사목을 펼치다가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 독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토빗기의 말씀입니다. 11, 5 - 17

그 무렵 
5 안나는 자리를 잡고서 자기 아들이 돌아올 길을 살펴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토비야가 오는 것을 알아보고 토비야의 아버지에게,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 하고 말하였다.
7 토비야가 아버지에게 가까이 이르기 전에 라파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잘 알고 있소. 저분은 꼭 눈을 뜨실 것이오. 
8 물고기 쓸개를 저분 눈에 발라 드리시오. 그 약은 눈의 하얀 막이 오그라들다가 
벗겨지게 할 것이오. 그러면 그대의 아버지께서 시력을 되찾아 빛을 보게 될 
것이오.”
9 안나는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얘야, 내가 너를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하면서 울었다.
10 토빗도 일어서서 다리를 비틀거리며 마당 문을 나섰다. 토비야가 그에게 
마주 갔다.
11 물고기 쓸개를 손에 든 토비야는 아버지를 붙들고 그 눈에 입김을 불고 
나서, “아버지, 용기를 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 약을 아버지에게 
바르고서는 잠시 그대로 두었다. 
12·13 이윽고 토비야는 양손으로 아버지의 눈가에서부터 하얀 막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토빗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14 울면서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15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쁨에 넘친 토비야는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여행을 잘 마치고 돈을 가져온 것과 라구엘의 
딸 사라를 어떻게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또 그 사라도 
오고 있는데 니네베 성문 가까이 왔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16 기쁨에 넘친 토빗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며느리를 맞으러 니네베 성문으로 
갔다. 니네베 사람들은 토빗이 오는데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는 사람 없이 
힘차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7 그때에 토빗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그들 앞에서 밝혔다. 이어서 자기 아들 토비야의 아내인 사라에게 다가가 
그를 축복하며 말하였다. “얘야, 잘 왔다. 얘야, 너를 우리에게 인도하여 주신 
너의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빈다. 너의 아버지께서 복을 받으시고 내 아들 
토비야도 복을 받고, 그리고 얘야, 너도 복을 받기를 빈다. 축복 속에 기뻐하며 
네 집으로 어서 들어가거라. 얘야, 들어가거라.” 그날 니네베에 사는 유다인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토빗과 안나는 아들 토비야를 만난다. 그리고 토빗은 라파엘 천사의 도움으로 
눈을 뜬다. 기나긴 시련이 끝난 것이다. 노부부는 며느리 사라를 만나러 시내로 
나간다. 토빗이 장님이었던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토빗은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음을 감동적으로 이야기한다(제1독서).  
 
 
 
† 복음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 35 - 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주님 앞에서 늘 겸손했다. 죄를 지었을 때에도 즉시 뉘우치며 회개하였다. 다윗 
역시 메시아의 출현을 열망하던 신앙인이었다(복음). 

 
 
◈ 묵상 
  
다윗이란 이름은 구약 성경에 천 번 이상 등장합니다. 그만큼 유다인들에게는 
친근하고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으로서 40년 
가까이 통치하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내용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2사무 7,12 ; 
이사 11,1 ; 예레 23,5 등 참조).

율법 학자들이 성경의 이러한 내용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공공연히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반박 이론을 제기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우월한 분이신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편의 예’를 
드셨습니다.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찬양한 시편입니다.

결론은 율법 학자들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대해서는 막힘이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 어느 곳에 어떤 기록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그리스도는 인정하지 못합니다. 메시아에 대해 아무리 정통한들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성경의 지식과 이론은 믿음의 ‘안내자’일 뿐입니다. 신심과 함께해야 ‘살아 있는 
지식’이 됩니다. 이론은 훤한데 ‘행동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눈앞의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있는 복음의 율법 학자와 닮은 모습입니다.  
 
- 매일 미사 -


 
◈ 피 값으로 얻은 영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전쟁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다윗왕 역시 수많은 
전쟁을 통해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우리나라도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우리나라가 분단 국가라는 사실은 최전방 철책에 가야 느낄 수 있다.

에어컨도 가동되지 않는 군용 지프차를 타고 처음 최전방으로 위문을 
가던 날! 북으로 가는지 남으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험한 길을 가면서 
신비로운 곳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이상 비포장 길을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 흥분 반, 두려움 반으로 도착한 곳은 강원도 최전방 동부전선 
1,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였다. 그 높은 곳에 이중 삼중 철책이 한반도 허리를 
두 동강 내고 있었다. 이 험난한 곳에 병사들이 살고 있는 막사는 어떻게 
지었는지, 수도와 전기는 어떻게 끌어왔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북한군과 대치하고있는 최전방 철책!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긴장감과 
적막감으로 저절로 위축되었다. 망원경을 통해 북한군의 움직임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철책 순찰로에 걸음을 내딛지 못할 만큼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았다. 비무장 지대 안 수색대 병사들의 
초소에서 북한군 초소까지는 불과 750미터 떨어져있을 뿐이었고, 손가락만한 
탄알이 장전된 육중한 기관총은 북한군 초소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1년 365일 밤낮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국토방위에 
여념이 없다. 달콤하게 잠을 자야 할 새벽에도 바위보다 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실탄을 장전하여 초소근무에 투입되는 병사들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특히 2,000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밤 근무를 서는 병사들은 
온몸을 적시는 땀방울도, 아픈 무릎도, 숨 못 쉬게 조여 오는 군화도 참아낸다.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외로움도 이겨낸다.
오늘도 우리가 편안히 잠을 자는 새벽 시간, 술 한잔을 하며 즐기는 그 시간에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젊음을 희생하며 피 값으로 얻은 영토를 지키고있다. 
오늘따라 까마귀와 멧돼지를 벗삼아 산속에서 지내고 있을 병사들이 무척 
그립다. 

- 최인섭 신부(청주교구 오창 천주교회) - 



◈ Anyway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마르코 12, 35 - 37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Anyway)

제목도 특별한 ‘Anyway’(켄트 케이스 저, 더난 출판사)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참 의미심장한 구절을 접하고 음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정말 어려운 존재다. 때로 사랑하기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참기 어렵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참으로 어려운 과제 한 가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고마운 것은 부담스런 과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힌트 하나를 
덧붙여주더군요.

“때로 사람들이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때는 그들이 
다른 논리와 다른 이성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관점이나 
다른 경험을 갖고 있으면 같은 사실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수시로 상처 입는 
우리들, 관계 회복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될 말씀입니다.

유다인들 사이에 강생하신 예수님, 공생활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비논리적인 
사람들, 비이성적인 사람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사람들 대하시느라 
무수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율법학자들과의 대립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의 
설전이었습니다. 유다 의회와의 마찰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율법학자들의 
발언에 조금도 분개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기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들은 참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께 올가미를 뒤집어씌우려고 말도 되지 않는 말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계속되는 모함과 시기와 질투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한 길, 
사랑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 자유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원수까지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에 있어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지지하지 않는다 해서, 그들이 비논리적이라고 
해서, 그들이 극단적 자기중심주의를 고수한다고 해서,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해서, 그들을 포기하거나 그들을 향한 사랑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랑은 무한대로 확장되는 특별한 것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말처럼 사랑이란 비타민, 미네랄, 단백질처럼 인간의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상대방이 누구든 사랑을 주고받지 않는 것은 본성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피아노나 풍금을 칠 때라도 그 모든 음표가 주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가 되게 하십시오.”(치맛티 신부)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산을 보려면 산에서 나와라
                                                             
연중 9주간 금요일 - 산을 보려면 산에서 나와라   

외국에 처음 나와서 살게 되면 문화의 괴리를 적지 않게 느끼게 됩니다. 

제가 처음 유학 나왔을 때 머물 게 된 곳은 신부님들이 사는 기숙사였습니다. 
저만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미사 드릴 때 혼자만 밑에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 알아들을 때였습니다. 

한국 신학교에서 나름대로 엄격한 교육을 받은 저로서는 유럽 신부님들이 
미사 드리는 것은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먼저 어떤 신부님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감기가 드셨는지 경문 읽는 소리가 
다 묻히도록 연신 코를 크게 푸셨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팔짱을 끼고 짝 다리를 
집고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런 것들이 여기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유럽이 그래서 참 자유로운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하는 
것처럼 무심코 재채기를 하였는데 또 그것은 여기에서는 예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코를 아무리 크게 풀어도 괜찮지만 재치기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채기를 소리 내지 않고 하는 법을 
익혀야했습니다. 

한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또 다른 나라에서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미녀들의 수다를 보면 이런 문화적 차이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들은 한국 어린이들이 그렇게 공부에 시달리는 것이 
가장 불쌍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공부 안 하고 노는 
아이들을 가장 불쌍하게 생각 할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렇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닐 
수 있구나!’라고 느끼며 마음과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유학생활 몇 년을 하고 한국에서 공부한 사제들이 왔습니다. 저는 
부제였고 복음을 읽을 때였습니다. 한국은 복음을 읽기 전에 손을 합장을 하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그러나 저는 습관대로 손을 벌리면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고 하였습니다. 미사 끝나고 이것에 대해 한국에서 공부하신 
신부님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한국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데 유럽은 좀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일행 중에 전례를 공부하는 신부님이 계셔서 전례 상으로는 손을 벌리던 
모으던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본질보다는 형식에 억매여 살도록 교육을 받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먼저 문제 제기를 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정말 성경에서도 다윗의 별이라든가 다윗의 왕좌를 영원히 이을 메시아가 
예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까지 적혀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 세 사람에게 율법학자들이 
메시아가 날 곳이 베들레헴이라고 일러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마태오는 
그의 복음에 처음부터 예수님의 족보를 쓰며 다윗의 후손임을 명확히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없음을 다윗 
스스로가 쓴 시편을 근거로 들면서 증명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메시아는 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이렇듯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는 이들도 찾아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을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여 성경을 
적용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모자이크와 같은 것입니다. 한 부분을 
떼어내서 전부인양 말한다면 오류에 빠져 이단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아야 더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의지도 없고 잘 살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기준으로 판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의 전부를 본다면 어떤 면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일지라도 
나보다 더 큰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저도 많이도 배우고 변하게 되었습니다. 

장기를 직접 두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 삼자가 되어 훈수를 두면 잘 보이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더 잘 보이게 
마련입니다. 산 속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분을 보지 말고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정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파는 사람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욥은 아무 죄도 없지만 수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당시의 믿음으로 
보면 의인이 고통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까지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욥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뜻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완전한 진리는 오직 하느님 한 분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나와 또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도 하느님의 절대적 진리 앞에서는 틀릴 수도 
있다는 유연한 마음으로 삶과 사람을 보고 이해하려 노력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것에 어느쪽에 비중을 더두고 살아가는지   
 
조금어려울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는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질문으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자신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셨을까요?
  
실제로 다윗왕은 장차 자기 후손으로 나타나실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왕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며 
자신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시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
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의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똑바로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사시는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하느님의 구원자,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망하던 '다윗의 후손'이라는 호칭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 정복을 당하여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의미를 똑바로 알려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과연 다윗의 
후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지상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을 고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가져다주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런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혹시 이렇게 생각해보신적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내 생활안에서 나의 현세적인 평안함과 내가 바라는 일들의 성공을 
위해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신적은 없으십니까?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옛날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똑똑히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가져다주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내 자신은 내 생활에서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것에 어느쪽에 비중을 더두고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부산교구 김동환 신부 -  
 
 
   
◈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증거의 삶인지 고민해 본다. 
자유의지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며 나의 책임이 동반된다.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참 
답답하고 힘들었다. 삼대서원을 깨버리고 싶은 유혹도 종종 받는다.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혹을 나의 신앙과 수도 삶이 
더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다짐한다. 또한 마음이 답답하고 힘든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에 비중을 더 두고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욕심이 
더 우세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전보다는 조금씩 짧아지는 것을 보면서 힘듦이 곧 
고통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유롭게 내 의지를 
발동하고 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선택한 삶, 수도자로서 
자신을 갈고 닦아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이웃에게 빛과 소금으로서 
작은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적 단련과 믿음의 성화 과정 안에서 때론 유혹을 겪으며 평화롭지 못한 시기를 
수없이 반복하지만 그때마다 성령의 이끄심에 내 전존재를 내어 놓을 때 그 
유혹을 굴복시키고 있는 자신을 대면하게 된다. 결국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계속하여 
참된 나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시고 파스카 신비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은혜에 어찌 찬미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 고통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신 성혈을 흠숭하고 사랑하는 이웃에게 다가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선포하는 데 힘쓰는 그런 삶을 산다면 그것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리라. 모든 고통과 유혹을 굴복시킬 때까지 예수님 
함께하여 주소서! 아멘. 

- 김희경 수녀(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 - 
 


◈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 먼저 하기. 

저는 2주 전부터 몸이 별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몸에 두드러기가 나지를 않나, 
온 몸이 쑤시기도 하고, 종기도 나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힘들더군요. 몸이 힘들다고 하던 일을 하지 않고 쉴 수도 없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이렇게 힘들 때는 이상하게도 일이 더 많아지더군요. 다른 성당과 학교에서의 
강의가 있었고, 오랫동안 준비한 성모의 밤 행사도 있었고……. 그리고 지금 
계속해서 해오던 일도 쉴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며칠 전, 문득 예전에 읽었던 바이오리듬이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저의 바이오리듬을 살펴보았지요. 그런데 글쎄 제가 
아프기 시작한 5월 24일과 25일이 ‘위험기’가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저조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부터 괜찮아지는 지를 
보았습니다. 바로 어제부터 지성리듬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조기’로 바뀌는 
것입니다. 

딱 맞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정말로 어제는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과연 
바이오리듬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요?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내 마음이 이를 보고는 ‘이제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즉, 내 마음이 이제 몸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마음 
때문에 실제로 몸도 기분도 좋아진 것이라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그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며, 그래서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 결국 자기 자신까지도 부정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다윗 왕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에 군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성경에는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심에 행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에, 예수님이 주님이 될 수 없다고…….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구원자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음,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과거 이스라엘의 군중들처럼 주님과 함께 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 먼저 하기.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 묵상
 
12-13이윽고 토비야는 양손으로 아버지의 눈가에서부터 하얀 막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토빗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14울면서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토빗 11,12-14) 

묵상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토빗 11,14) 

토빗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외아들 토비야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데다, 영영 되찾지 못할까 우려했던 
돈을 가져온 것은 물론, 가문의 대를 이을 정숙한 신부까지 데리고 왔으니까요. 
게다가 다른 무엇보다도 라파엘 천사에게서 얻은 연고를 가지고 와 눈이 멀었던 
부친을 낫게 해 드렸으니, 토빗이 그토록 열렬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기도가 토빗이 처음 드린 찬미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찬미기도는 기쁠 때는 물론 어려울 때도 늘 실천해 온 평생의 
생활 습관이었지요. 그는 눈이 멀고 오해로 인해 부인에게서 비난을 받은 
후에 자신의 죄와 동족의 죄를 고백하는 비탄의 기도를 하느님께 올렸는데, 
그때에도 토빗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를 잊지 않았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토빗 3,2) 하면서 
말이지요. 

토빗의 찬양 노래는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환희 넘치는 부분에 속합니다. 특히 
13장은 전체가 ‘찬미기도’지요. 토빗은, ‘괴로움’도 주시지만 ‘자비’를 베풀기도 
하시는 하느님께 ‘환희 가득한 찬미’를 드립니다. “나는 내 하느님을, 나의 
영혼은 하늘의 임금님을 높이 받든다.”(토빗 13,2.7) 아들 토비야에게 자기 
뒤를 따르라고 당부한 것 또한 놀랄 일이 아닙니다. “얘야, 평생토록 늘 주님을 
생각하고 … 언제나 주 너의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리고 너의 길을 올바르게 
해 주십사고, 너의 길과 뜻이 성공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그분께 간청하여라.”
(토빗 4,5.19) 

우리가 살면서 하느님의 축복을 경험할 때에는 그분을 열렬히 찬미하는 것이 
마땅하기도 하려니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의 우리의 
됨됨이는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어떤 기도를 드리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우리도 토빗처럼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하지만,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기억하며 찬미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룰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로마 8,28)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당신은 온갖 찬미와 영광을 받아 마땅한 
분이시니, 저를 주님 찬양자로 변화시켜 
주십시오. 당신을 찬미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신뢰하기 원합니다.” 

- 말씀지기 -



◈ 가장 절실한 언어, 희망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 12,35-­37

가장 절실한 언어, 희망

미사 다녀오다 운전 중에 우연히 들은 소식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의 저자이신 신영복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오늘 마지막 
강연을 하신답니다. 

암울했던 지난 세월, 단지 ‘확고한 신념’, ‘맑은 정신’,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외칠 수 있는 ‘의로움’을 지녔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세월을 
차디찬 감방에서 보내셨던 분입니다. 1988년 가석방된 후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신 교수님께서 이제 후학들과 함께 했던 17년간의 세월을 마무리 짓는 
고별강연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궁금증에 확인해보니 한 말씀 한 말씀이 어찌 그리 가슴에 사무치는 말씀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인지요?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은 머리만 있어서는 안 되고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가져야 합니다.” 

“비판적인 담론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인간적 애정이 담겨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담론과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언어가 바로 ‘희망’입니다. 인내가 현재의 
상황을 무작정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망은 견디기는 견디되 곤경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날 강의의 주제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었답니다. 석과란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실이라는 뜻이지요. 결국 석과불식을 풀이하면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지만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입니다.” 

제게 가장 큰 감동과 긴 여운을 남긴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한 기자가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수님께서는 20년간이나 감옥생활을 거치셨는데도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품고 계시지 않은 듯합니다.” 

교수님은 온화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제가 출소하니 서대문 구치소도 없어졌고, 그 무시무시하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박정희 대통령도 돌아가셨더군요. 제가 처음 취조를 받던 
남산 수도경비사령부도 한옥마을로 바뀌고,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도 잔디가 
푸른 체육구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상황에서 증오를 갖는 것은 
증오의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이 
감옥을 채우는 법이고 저는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우리 사회가 겪어나가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제가 해당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내 속의 사회, 시대의 모습을 좀 더 많이, 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환원해 갖지 않도록 노력하지요.” 

감옥에서 보낸 20년의 세월이 당신에게는 의미로 충만했던 대학 학창시절
이었다고 고백하는 교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정말 
큰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이 암시하는 바같이 유다인들은 다윗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아, 힘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의 메시아, 결국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허무맹랑한 기대를 무너트리십니다.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에 반박하십니다. 당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자로 처신하십니다. 
완벽한 평화주의자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왕입니다. 다윗 왕을 
훨씬 능가하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그런 만왕의 왕, 온 누리의 주님께서 어찌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고,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지나갈 이 현세에 기반을 둔 왕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기반을 둔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만왕의 왕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왕,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그런 왕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이’ 즉 ‘메시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이시요, 예언자이시며, 왕으로서 메시아십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이 약속된 메시아의 탄생이라고 목자들에게 알려주었으며, 
요셉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하고 명하심으로써,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 요셉의 아내에게서 태어나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메시아 축성은, 지상 생활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주심으로써’ 
(사도 10,38)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요한 1,31)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업적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또한 말씀과 더불어, “기적과 이적과 표징”(사도 2,22)도 행하심으로써, 예고된 
메시아시라는 것을 증명해보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고, 
부활하신 메시아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박영봉 신부 -  
 




  

♬ 가톨릭성가 202번 / 구세주의 성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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