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교훈과 공의의 판단
천영대
성경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14~24)」
판단하기 좋아함
타락한 인간들은 참으로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좋게 판단하기 보다는 좋지 않게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은 높이고 싶고, 다른 사람들은 낮추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즉, 타락한 인간의 교만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자들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생활했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의 주님에 대한 판단도 그러했다. 주님께서 초막절 중간에 성전에서 가르쳤을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판단하기를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 7:15)’라고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한 갓 마리아의 아들로만 생각했고, 또 그의 육신의 형제들이나, 누이들도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여 그를 배척했다. 요한복음 7장 19, 20절에서는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귀신이 들린 사람,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판단했다. 요한복음 10장 19∼21절에서는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가장 정상적인 예수님에 대해 귀신이 들려 미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고 어찌하여 귀신들려 미친 자의 말을 듣고 있느냐는 투로 다른 사람들까지 책망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죄인이라고까지 했다. 요한복음 9장 24절에서는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고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귀신들려 미쳤는데도 어찌하여 그러한 자의 말을 듣고 있느냐는 투로 말했을 뿐만 아니라, 죄인이라고 까지 했다. 상기의 예수님에 대한 판단은 잘못된 것으로서 비정상적인 것이고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비판이나, 판단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했고, 또 비판 받는 자의 눈 속에는 티가 있지만 비판하는 자의 눈 속에는 들보가 있다고 했다. 이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이다. 로마서 14장 10∼13절에서는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누군가가 판단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형제들은 판단하고 비방한다. 실제로 판단할 진정한 재판장은 우리 주님이시다. 이사야 33장 22절에서는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고 했다. 다른 어떤자가 우리를 심판하는 재판장이 아니고,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의 재판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든 판단을 우리의 재판장이신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용서하며, 섬기며 서로 복종하고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의 교훈
우리 주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요 6:38, 39).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말이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아니했다. 요한복음 7장 15, 16절에서는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배우지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말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이 말하고 가르치는 교훈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배워 그 지식으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곧 자신의 교훈으로 만들어 자신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것이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1장 11, 12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다. 사도 또한 그가 전파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우거나, 사람들로 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주 예수님도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교훈을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자신이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곧 자기 임의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만 구하지만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다고 했다. 요한복음 8장 26∼2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했다. 예수님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말이나, 교훈을 말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을 하고 그의 영광을 구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께 들은 것을 세상에 말한다고 했다. 또한, 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심에 있어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행하심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자신 임의로 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가 항상 기뻐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보내신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하신다고 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다고 했다. 실제로는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계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의 말을 하고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자기 임의로 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순종하거나, 제재를 받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또한 대다수가 그러하다. 이것은 자신이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산 자만 가능하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사도는 그 자신이 그와 함께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사는 것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그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했다. 우리 주님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계실 때에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사셨다. 히브리서 5장 7∼9절에서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사셨을 때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합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자들은 예수님과 그의 이 땅에서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그러한 생각 가운데서 그러한 말을 한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사셨다.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사셨다(빌 2:8).
율법의 충돌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생활했을 때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생명이 없는 율법을 가지고 함부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대적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온전히 율법을 지킨 것도 아니었다. 요한복음 7장 19절에서는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언급했지만 그들 중에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없다고 했다. 요한복음 7장 49∼51절에서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율법을 지키지는 아니했다. 율법에서는 본인의 말을 들은 후에, 곧 사건에 대하여 잘 점검한 후에 판단하라고 했는데, 이들은 당사자인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함으로 스스로 율법을 범했다. 율법을 말하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것은 율법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는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율법, 곧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의문, 곧 율법은 생명을 공급하지 않고 정죄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 21∼23절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침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정죄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안식일에 의료 행위를 함으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님은 주 하나님께서 안식하라고 주신 안식일에 안식을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고 했다(막 2:27). 주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안식일에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침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지었다고 예수님을 정죄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중히 여기는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예수님 자신을 정죄하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율법에서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식일에도 할례에 관한 율법을 지키려고 할례를 행했다. 이것을 그들의 이론에 적용시키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했다. 누가복음 13장 14∼17절에서는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고 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것도 안식일에는 하지 말고 다른 날에 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한 일을 반대했던 무리들은 부끄러워했다.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끌어내어 물을 먹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는 것은 안식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은(요 5:5∼10)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데도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신 선한 일을 비방하고 정죄했다(사람이 소나 나귀보다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율법, 곧 옛 언약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이렇게 보면 서로 충돌하는 면이 있다. 율법에서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팔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할례 받는 날이 안식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에 율법을 따라 안식일에 할례를 받으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는데 그 경우에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아니했고,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끌어내어 물을 먹이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다.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을 때 그 날이 안식일이라도 그 아들과 소를 우물에서 건져낸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다(눅 14:5). 요한복음 5장 16, 17절에서는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안식을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안식일에도 일을 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가 택하고 사랑하는 자들의 구원과 그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계속적으로 일하시고 있다. 주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새언약을 세우셨다. 히브리서 8장 6, 7절에서는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율법, 곧 옛 언약보다 더 좋은, 흠이 없는 새언약을 세우셨다. 이것은 정죄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새언약이다. 그러므로 새언약에서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나, 모순된 것이 없다. 이 새언약의 실재는 우리 주님 곧 그 영이시다. 로마서 8장 3, 4절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생명 주는 영이 되심(고전 15:45)으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뤄지게 하신다. 율법은 정죄하고 충돌을 일으키지만, 우리 주님은 생명을 공급하고 살게 하시고 모순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생명을 주사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 실제로 우리 주님 자신이 진정한 안식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있는 자는 안식을 누릴 수 있고 없는 자는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공의로운 판단
타락한 인간들은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서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선악의 지식의 나무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정죄하고 사망을 가져온다. 또한,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범죄하고, 어두움에 처해 있으므로 합당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우리 타락한 인간은 재판장이 될 수 없고, 오직 우리 주님만이 진정한 재판장이시다. 시편 50장 6절에서는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라고 했다. 하늘이 공의를 선포하고 하나님은 심판장으로서 판단하신다고 했다. 시편 35편 24절에서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주님을 공의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분으로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8장 15∼18절에서는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고, 또 예수님이 판단해도 참된데 그것은 예수님 혼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판단이 아니고 그를 보내시고 그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치 아니한다고 했다(요 8:15). 이 내용에는 판단과 증거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즉, 증거를 판단으로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판단과 증거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외모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진정한 판단자, 어떠한 잘못도 없고 전지전능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리 임의로 판단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하여 주님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무죄한 자를 죄로 정하는, 곧 정죄하는 죄를 범치 않게 될 것이다(마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