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본 연구는 AI 기술사회 환경에서 인간의 고유성측면인 감성과 창의성 신장을 위하여 유가적 전통문화로서의 예악사상 프로그램 효과 분석을 조선 중기 愼獨齋 金集(1574∼1656)의 禮樂(禮學 포함)사상 분석을 통하여 그 창의적 활용방안을 정치, 사회, 행정문화적 시사점을 중심으로제언함을 目的으로 한다.
주요 내용은 신독재의 禮樂的 修己法을 재조명하여 제4차 산업혁명시대 사회를 재구조화 시키는 데 있어 신독재의 예악적 수기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신독재는 예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修身을 해서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모든 행동을 禮에 맞게 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으니 그를 뒷받침하는 것이 禮요, 출발점이 靜坐였다. 愼獨齋는 技藝를 멀리하고, 예학(儒家 理念 權力)에 沒頭한다.
본 연구의 範圍 측면은 禮樂(學)思想과 그 실천 사례를 신독재의 예악의 효과와 한계, 악교 등을 보완하여 AI 시대적 창의, 감성 함양에 미치는 유용성에 한정하고자 한다. 예악과 예학의 관계는 예악과 육예, 향약관계 및 조선 『朱子家禮』, 『五禮儀』, 『鄕禮』 등의 시행에 중점을 두었다.
본 연구방법은 먼저 필자(이종수, 2015∼2025) 명상체험과 음악 활동, 융합연구(이종수, 2005, 2017, 2018, 2019 ; 이종수, 박해봉, 2022) 등 선행연구와 주요 학술지 분석이며, 주요 일간지, 전문가 견해, 필자의 융합명상 경험사례(이종수, 2017.12 ; 2018.9 ; 2018.12 ; 2019.2 ; 2023 ; 2024 ; 2025) 및 주요 학술지 분석(황의동, 2002) 등을 참조하여AI 시대 政治, 行政 등 사회적 示唆点(愼獨, 正己, 不動心, 六藝, 融合冥想)을 중심으로 제언한다.
II. 儒家的 禮樂思想의 意義
제1절 禮樂思想
儒敎의 禮와 樂
(1) 禮樂의 意義
예악사상(禮樂思想)이란 예(禮, 道德, 理性)와 악(樂, 感性)으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교화하여 인(仁)을 실현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유가(儒家)의 사상이다. 중국의 周나라 시대에 형성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순자 등이 발전시켰다.
예악사상은 전한(前漢) 시대 『예기(禮記)』에서 체계를 갖추었으며, '예(禮)'와 '악(樂)'은 각각 '의례(儀禮)'와 '음악(音樂)'을 뜻하는 말로, 모두 고대 신정정치에서 이루어지던 의식(儀式)과 관련된 개념이다. 周나라 시대에는 지배계층의 인물이 닦아야 할 덕목이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이념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禮樂을 풀어 보면, 먼저 禮(節)은 ‘다스린다’는 의미를, 樂(音樂)은 절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스리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으며, 절제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
공자는 “禮와 禮節에만 통하고, 樂에 통하지 못하면 너무 순수하기만 하고, 音樂에만 통하고, 예절에 통하지 못하면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사람이 된다”고 했다.
예악의 目的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절제하여 中庸을 얻게 하는 것에 두었으며, ‘악’의 기능은 개인 차원의 도덕적 수양과 사회적 차원의 정치적 교화에 있었다. ‘禮’가 목표라면 ‘樂’은 수단, 도구라고 할 수 있으며, 樂은 ‘調和’의 원리를, 禮는 ‘秩序’의 원리를 바탕으로, 樂은 ‘統合’을 추구하였으며, 禮는 ‘變異’를 추구하였다.
유가 「樂論」은 禮는 질서를 위한 것으로 ‘구분 짓기 위한’ 기능을 가지며, 樂이란 화합을 위한 것으로 ‘같게 하기 위한’ 기능을 가져 서로 상보적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한다.
禮가 질서를 위한 것이라면, 樂은 조화를 위한 것으로서, 예악은 刑政에 대한 근본과 王道政治의 필수조건이었다. 유가의 통치이념인 禮樂刑政은 “禮로써 그 뜻을 인도하고, 樂으로써 그 소리를 조화롭게 하며, 刑으로서 그 간사함을 막고, 政으로써 그 행실을 한결같이 하게 하여 民心을 화합하는 治道를 내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예악사상은 禮(道德, 理性)와 樂(感性)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적 질서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이다. 그 근거가 공자의 사상으로, 禮란 인간의 도덕적 행동과 사회규범의 토대가 되며, 樂이란 인간의 감정과 표현수단으로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수단이다.
조선의 예악사상은 『禮記』‘악기’에서 출발한다. “樂은 같게 하는 것이고, 禮는 다르게 하는 것이라서, 같으면 서로 친하고 다르면 서로 공경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樂을 통합(內心형성)하여 같게 하고 禮는 분별(外物 형성)하여 다르게 한다는 상보적인 의미다. 예악이 통합(조화)되면 物我一體, 合一, 人倫道德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그 구체적 제도화 사례가 조선왕조『五禮』에서 구현된다.
(2) 樂(感性)의 기능적 측면
『論語』에는 예(禮)를 조화롭게 만드는 수단으로 악(樂)이 등장한다. 공자는 사람이 음악을 즐겨야만 음악 안에 내재된 조화로움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예와 접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노래 가사로 활용되는 시(詩)는 마음을 순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인간의 정(情)에는 순수한 느낌에서 나오는 순정(純正)과 이기적인 계산에서 나오는 욕정(欲情)두 가지가 있다.
공자는 禮樂을 강조함으로써 경직된 사회 질서를 다소 느슨하게 만드는 조화를 주장했다. 평소 가족끼리 세운 규칙을 잘 따라 살다가 갈등이 일어나면 서로 이해하고, 놀고, 술 한 잔 걸치며 화를 푸는 것이 바로 樂이다. 禮를 통해 사회는 유지되고 樂을 통해 사회는 조화된다(< 표 1 > 참조).
< 표 1 > 예악과 조형성
| 구분 | 禮 | 樂 |
| 조형성 | 구별 | 동화 |
| 특징 | 외물 형성 | 내심 형성 |
| 필수조건 | 中庸 | |
| 의미 | 物我一體, 合一 德과 人倫道德의 완성 | |
출처 : 김우영, 정영호, 김개천(2011 : 343)
“삼대(三代)의 임금은 그 세자를 가르치는 것을 반드시 禮와 樂으로 했다”고 하는 것이나 예악이 입덕(入德)의 문호라고 여긴 것도 예악과 인성의 다스림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지를 알게 한다.
樂의 기능과 효과를 < 표 2 >에 예시한다.
< 2 > 樂의 기능
| 이직자량지심생즉락 (易直子諒之心生則樂) | 이(易) | 조화로움 | 樂(즐거움) |
| 직(直) | 바른 것 | ||
| 자(子) | 자애로움 | ||
| 량(諒) | 미더움 |
출처 : 윤병천(2014)「예악 사상과 인성계발에 관한 소고」: 270.
예가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개인의 사욕 때문에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크게 걱정하였던 공자는, 사람마다 私慾을 극복하여 진정한 예를 회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예와 악을 병칭했으며, 악은 예보다도 더욱 중요한 교육적인 작용이 있다고 여겼다.
2. 禮樂과 六藝
(1) 禮樂과 禮學
禮樂은‘禮’를 최고의 이상적 가치로 설정하고, 禮와 더불어 ‘樂’으로 교화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가치체계였으며, 禮學이란 사회적 질서 유지와 공동체 결속을 중시하는 정치, 사회문화적 학문이라고 하겠다.
禮學이란 유교 문화를 의미하는 禮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三禮가 대표적으로 『周禮』, 『儀禮』, 『禮記』가 그것들이다. 우리는 고려시대에 『五禮』가 제정되고, 조선시대에는 『國朝五禮儀』 가 제정, 시행된다.
한편, 六藝는 개인의 다양한 능력과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교육적 접근이자 방법이다.古代의 六藝는 禮樂射御書數(예절 ·음악 ·활쏘기·말타기·글 ·셈)였다. 공자는 군자가 지향해야 할 바를 『論語』「술이편」에서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 道에 뜻을 두며, 德에 웅거하며, 仁에 의지하며, 藝에 노니라’고 하였다.
공자가 편찬하거나 지은 글인 六書(시·서·예·악·역·춘추)속에 담긴 벼리 곧 기강을 말한다. 六書를 익힌다면 “역(易)은 천지 ·음양·사시 ·오행을 밝혔기에 변화를 아는 데 장점이 있고, 예(禮)는 인륜을 세우는 벼리이기에 실천하는 데에 장점이 있고, 서(書)는 선왕의 일을 기록했기에 정사를 펴는 데에 장점이 있고, 시(詩)는 산천 ·계곡 ·금수 ·초목 ·동물의 암수와 새의 암수를 기록했기에 풍속을 살피는 데 장점이 있고, 악(樂)은 사람이 서야 할 바를 음악으로 담았기에 화합하는 장점이 있고, 춘추(春秋)는 시비를 분별하였기에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장점이 있다.”고 하였다.
육예의의의는 中和에 있다(이종수, 2019.12). 오리 이원익 대감의 六藝는 儒家의 이상으로 中和(禮와 樂)에 이르기 위한 학문적 접근이었다. 中은 예(禮)를, 和는 악(樂)을 이른다. 중화(中和)의 중(中)이란 五慾七情이 노정되지 않은 상태를, 화(和)란 오욕칠정에 끌리지 않음이다.
五常과 六藝의 관계적 측면을 보면 六藝는 五常 실천의 방법으로 정좌(명상)을 토대로 한 心身涵養法으로 기능했다.
禮樂이 사회적 修己治人을 위한 仁의 실현 목표, 수단이었다면, 六藝는 사회적 수기치인을 위한 개인적 기초학습 과목이었다.여기에 禮學은 15∼16세기 朝鮮에서 발화된 禮 중심의 사회질서유지 사상체계였다고 정리된다.
(2) 禮樂과 鄕約 關係
유가의 정치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성문화된 節目이 鄕憲(約)이었다. 향헌의 자발성과 규범성은 먼저 덕업상권 속에 내포된 하위 절목들은 自發性(內面性, 入約의 自由)을 내포한다 하겠으나, 예의 規範性(外面性)은 禮는 불변의 원칙이 아니라 시대의 變遷에 대응하여 改廢되어야 맞다고 본다.
조선 중기 禮樂(學)은 排佛을 위한 유교적 접근이었으며, 그 접근법이 禮節과 音樂的 교화요, 예절은 유교의 핵심사상이요 백성들에 대한 직접적 교화장치가 바로 鄕約(憲)이었다. 예악과 향약은 현대사회에도 윤리, 도덕적 가치관, 공동체 정신과 자치 운영원리, 지역사회 규범 및 교육과 문화적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鄕約은 예학에서 강조하는 孝弟忠信(효, 공경과 우애, 충성 및 믿음) 가치를 향촌사회에 구현하고자 한 질서 규범 체계였다. 향약은 禮에 근거하여 도출된다. 향약은 예학적 지식의 실천을 장려하고 교화를 위한 지역적 규범이었다. 그 하나의 사례가 鄕飮酒禮로, 그것은 철저하게 예학에 근거하였다(『論語』, 鄕黨 참조). 향음주례의 음악 사례로는 주인이 손님에게 음악이나 시를 들려주는 악빈(樂賓)의식이 있었다.
15세기 鄕禮에 대한 조선 정부의 시행 양상을 보면, 鄕禮는 州府郡縣의 鄕에서 시행되는 의례로서, 향촌의 유교적 질서 구축을 목표로 하며 향촌민을 참여 대상으로 정하고 있는 의례이다(박사랑, 2016). 그 범위에는 鄕飮酒禮, 養老禮, 鄕射禮가 포함된다. 향음주례, 양로례, 향사례가 조정에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世宗代이다. 세종대에는 국가가 표방하는 이념을 구현하고 그 이념을 주부군현의 향인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향례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그 이념의 내용은 가족 간의 윤리부터 향당에서의 윤리, 군신윤리를 망라한다.
조정의 논의를 바탕으로 지방에서는 留鄕所뿐만 아니라 鄕校, 射廳, 樓臺 등 다양한 장소에서 향례가 행해지고 있었다. 향례 시행의 특징 중 하나는 『五禮儀』의 규정처럼 지방관이 예식의 主人으로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역의 수령들은 향례 시행을 자신의 책무로 자각하고 있었고, 향례를 베풀거나 향례 운영 자금 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지방관을 통해 향례를 시행하고자 하였던 조정의 의도가 구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五禮儀』 鄕禮儀註에 따르면 손님들의 자리 배치가 일차적으로 품계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鄕飮, 鄕射, 養老 등의 鄕禮가 『五禮儀』에 실려 법제화되었다는 것은 이후 시기 지방관이 향례를 통해 교화를 펼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는 의미가 있었으며 士族들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15세기 국가가 구축한 향례 시행의 바탕은 이후에도 유지되었고 16세기 이후 향례 시행 역시 그 바탕 위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3) 공자의 六藝, 暗默知
첫째, 공자의 제자는 3천여 명으로 그 가운데 예禮(규범) • 악樂(음악) • 사射(활쏘기), 어御(말타기, 수레몰기) • 서書(글씨) • 수數(셈하기)의 육예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孔門 十哲을 예시하면,德行으로 뛰어난 제자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며, 言辯에 뛰어난 제자는 재여, 자공, 정사(政事)에 뛰어난 제자는 염구, 자로, 文學에 특출한 제자는 자유, 자하 등이었다.
공자는 체육과 관련 등산과 수영, 말타기, 활쏘기, 사냥, 낚시 등의 운동을 실천했다. 활쏘기는 예절을 익히고, 동시에 마음을 다스리는 훌륭한 육예의 한 기예였다.
행단고슬(杏壇鼔瑟)은 孔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들과 함께 거문고를 즐겼던 스토리텔링이며, 그는 훌륭한 거문고 연주자였다. 29세에 사양(師襄)에게 거문고를 배우고, 34세는 주나라 대부 장홍에게 음악을 배운다. 장홍은 그를 “禮를 행하고, 성인의 道를 행하며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공자는 순임금의 ‘소소(簫韶)’를 듣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한다.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모른 채 “음악을 하는 것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줄은 미처 몰랐구나!”(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하고 감탄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사서(四書), 오경(五經), 육예(六藝)를 텍스트로 삼아 넓고 깊은 학문을 연마하여 지식인이 되었다. 특히 六藝는 전인격적 인재육성의 여섯 가지 요소로서 선비가 반드시 체득해야 하는 필수과목이었다. 오리(李元翼)는 낙산에서 거문고를 즐겼으며 소하동에 彈琴巖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삼봉도 거문고를 즐겨 연주했다.
선비들이 존경하며 그 삶을 본받고자 한 대표적 선비이자 시인인 도연명(365~427)은 '무현금(無絃琴)'의 세계를 '줄 없는 거문고' 無絃琴의 정신을 설했는 데, 그런 그의 가치관은 선비들이 유교 경서와 함께 거문고를 필수 반려로 삼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둘째,暗默知(經驗體得 知識)와 創意 관계를 보면인간 재능은오랜 기간의 숙련기를 거쳐야 AI를 활용하여 창의적인 결과를 산출할 수 있게 된다. 창의적인 성과를 산출하려면 기존 지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습득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축적(암묵지)되어야 창의성이 발휘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끝없이 問題提起(質問)할 수 있는 역량을 함양시켜, AI 시대 주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개인이 될 수 있다. AI 시대 융합마인드와 접근, 창의성 증대 효과 등이다. 유가의 禮樂과 六藝를 기반으로 한 정좌수기법은 AI시대 창의적 ‘暗默知’ 集積을 통한 인간 정체성 涵養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3. 조선의 禮樂과 신독재 수기법 정의
(1) 조선의 예악
조선시대의 기본 禮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국가 의식으로서의 『五禮』의고, 다른 하나는 사대부 가정의 의례 준칙으로서의 사가례(私家禮)다. 사가례의 기본 전적으로서는 주희(朱熹)의 『家禮』를 들 수 있다. 『家禮』는 주희가 재래의 복잡한 가정 의례를 정비해 시대에 맞도록 편찬, 자기 가정에서 시행하는 예라는 뜻으로 『가례』라고 명명하였다.
조선 유학이 朱子學을 숭상하게 되자 의례 준칙에 『가례』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조선 유학자들의 행장에 흔히 “철저하게 가례를 지켰다(一遵家禮)”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家禮』의 내용은 통례·관례·혼례·상례·제례로 구성되어 있다. 종래의 복잡한 예제가 관·혼·상·제의 사례(四禮)로 축소, 정비되었으니 조선의 예학은 대체로 이 사례를 중심으로 전개된 학문이었다.
조선 궁중의 각종 의례는 『五禮』인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로 구성된다. 제사, 혼례, 조회, 책봉례, 존호(尊號)의례, 외국 사신 접대 관련 의례, 활쏘기, 사냥, 죽음과 관련한 의례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러한 의례는 각 시기마다 일정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행해졌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예치(禮治), 예와 악의 정치를 강조하였고 『五禮』의 틀을 바탕으로 의례를 행하게 되었다. 오례는 예와 악의 질서를 외부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예와 악이 서로 보완하는 관계를 이루는 형태로 제정된 각각의 궁중의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종 오례서에 그 외형적 틀이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조선 법전의 효시를 이룬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인(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자리를 인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이 仁을 최고 이념으로 삼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건국하였음을 강조한 것으로, 조선을 건국한 때가 곧 “예악을 흥기시키는 적기”라고 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통치 이념은 건국 초기부터 조선 국가 전례(國家典禮)의 틀을 갖추고자 진력한다.
태조는 예치(禮治), 곧 예와 악을 균형적으로 추구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유습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하고 문묘 석전제를 지냈으며, 각종 의례 시행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여 『儀禮』를 보완, 『五禮』를 정비하여 국가 예제(禮制)를 갖추었다.
세종 이전 예악관의 특징은 건국 초 왕도정치의 이상을 예악을 통해 구현하려는 정도전과 태종의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으며, 그 모델은 바로 고대 중국의 예악제도에 두고 있다(한흥섭, 2013).
유교 국가 의례는 『五禮』로 구성되는데, 조선에서는 자신의 본속에 해당하는 독자적인 오례를 구성하게 된다(강제훈, 2024).『國朝五禮儀』는 의례에서 절차와 음악을 통합된 형태로 정리한 성과였다.
예악은 통치의 주요한 요소로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예와 악은 병행 정리되었지만, 실제의 의례에서 대등하게 위상을 설정하는 작업은 『국조오례의』 단계에서 성취되었다.『국조오례의』는 독자적인 유교 국가 의례를 만들려던 오랜 노력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강제훈, 2024).
文廟祭禮는 고려 시대, 조선 시대로부터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기에, 『文廟祭禮樂』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고찰하는 악이다(조대명, 2023).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에게 올리는 「성안지악」의 가사에서 예악론을 찾을 수 있었다. 중국에는 현존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현재에도 1년에 2번씩 문묘제례를 거행하며 연주되고 있기에 그 가치는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조대명, 2023).
禮樂과 관련 임진왜란(1592)으로 문묘악은 다른 궁중음악과 더불어 흩어졌으며, 광해군 때 『樂學軌範』을 기준으로 복구하였지만 이어서 병자호란(1636)으로 일시 중단되고, 그 뒤 여러 차례 아악 복구사업을 계속하다가 영조 때에 이르러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한다.
(2) 愼獨齋의 禮樂(學)的 修己法 定義
金集의 예학(禮學)을 살펴보면,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예학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김집은 “기품이 청명하고 자질이 온수하였다. 처음 시작은 시와 예의 훈도로써 했으며, 성공은 학문의 공으로써 이루었다. 강하면서 사납지 않았고 굳세면서 굽히지 않았다. 성품은 인자하면서도 뜻을 가짐은 확고했으며 행실은 효제를 근본하면서 의리에 처함에는 엄정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오로지 경학과 독서에만 전념하고 자질구레한 技藝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신독재의 수양법은 첫째, 도덕적 수양을 통한 본성 이해, 둘째, 예학을 통한 학문 성취 셋째, 끊임없는 자기반성의 기반으로 도덕적 기준을 중시했다는 점이었다.
그의 수양법 실천방안은 첫째, 일상생활에서 실천했다는 점, 둘째, 독서와 학습을 병행한 연구활동의 중시 및 셋째, 성현의 가르침을 내외적으로 솔선수범한 사회적 책임 등이다. 선생은 예(禮)란 바로 人慾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법칙으로 인식, 예(禮)의 준수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올바르게 유지하고자 더욱 삼가(愼獨)했던 재야 선비(山林)의 수기 실천, 愼獨 不動心 수행법이었다.
유가적 수양법은 靜坐와 存心法으로 마음을 다스린 결과 고요한 정신으로 학문에 임하는 심신 자세로 종적, 횡적, 사방 팔방으로 심신을 녹여 융합시켜 나온 고요한 정신(정좌, 명상)으로, “신독재의 禮樂(學)사상이란 朱子, 李珥, 金長生 등에 의해 정립된 성리학을 토대로 한 靜坐(修己)修行 등 심신의 수렴과 집중에 의해 내면적,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개인적, 사회적 處士의 정신수행 체계로, 敬을 위주로 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름없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부분에 힘을 써 늙을 때까지 실천한 ‘자기 본질과의 조화로운 생활방식’과 사상체계(愼獨不動心)”으로 정의한다(이종수, 2018, 2019, 2023 ; 이종수 외, 2017 : 107).
제2절 선행연구, 분석 틀
1. 선행연구
본 연구를 위한 선행 연구를 3가지 측면으로 구조화하면, 첫째, 신독재 예악사상은 무엇보다도 윤리적 실천성을 중시하였다는 점이다. 고영률(1991), 16세기 4禮書 성교진(2005), 김집의 三大 유학사상, 윤용남(2001), 김집의 심정설, 우경섭(2007), 김집의 학문세계, 이상은(1994) 유학의 예악관, 김선욱(1998), 신독재의 禮敎, 한기범(1990), 사계와 신독재의 예학, 선우미정(2007), 선진유가의 예악사상 등을 참조한다.
둘째, 예악의 효과로는 박사랑(2016), 15세기 조선정부의 鄕禮, 남상호(2016), 서원의 인성교육, 김혜지(2021), 조선 예송의 교육학적 함의, 양순자(2018), 禮樂에 의한 화합, 강제훈(2024), 예악정비와 『國朝五禮儀』 간행, 박정순(2021), 유가예학의 문화유전자적 작용에 관한 연구, 한흥섭(2013), 15세기 조선궁중의 禮樂觀 등을 참조하였다.
셋째, 예악과 육예 사례는 이종수(2014∼2025), 이원익(2016∼2017), 정도전(2013∼2024), 효령대군 사례(2015∼2025)를 예시한다.
이종수(2014), 유가수양법, 이종수(2015), 템플 스테이 명상, 사찰음식, 이종수(2016), 이원익 청렴행정 효과, 이종수(2017.12), 三峰의 수기관 분석 이종수(2018), 三峰 『朝鮮經國典』의 개헌 시사점, 이종수(2019.2), 삼봉의 融合민본사상과 주민자치, 이종수(2020), 삼봉의 치인관 분석, 이종수(2022), 노년불자의 융합명상법, 이종수(2024), 사계 김장생 수기법의 자기주도학습 시사점, 이종수(2025), 효령대군의 유불동원 수기법 시사점 등을 참조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 표 3 >에 정리한다.
< 표 3 > 주요 내용 분석
| 구 분 | 선행연구 분석과 차별성 | |||
| 연구목적 | 연구방법 | 주요 연구내용 | ||
| 주요 내용 | 愼獨齋 禮樂(學) | 고영률(1991), 16세기 4禮書 | 실록사례 | 16세기 예학 |
| 성교진(2005), 김집의 三大 유학사상 | 질적 | 시문학, 人心道心, 경세사상 | ||
| 윤용남(2001), 김집의 심정설 | 〃 | 유가의 心情說 분석 | ||
| 우경섭(2007), 김집의 학문세계 | 〃 | 성리학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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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의 차별성 | 신독재 예악사상과 특성 분석 | 사료분석 | 신독재 예악 사상과 인성함양 효과 및 시사점 | |
2. 분석의 틀
본 연구는 신독재의 예악적 수기법을 재조명하여 제4차 산업혁명시대 사회를 재구조화 시키는 데 있어 신독재의 예악적 수기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신독재는 예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修身을 해서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모든 행동을 禮에 맞게 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으니 그 예학의 핵심이 통(統)이며, 그를 뒷받침하는 것이 禮요, 출발점이 靜坐였다.
그러나 신독재는 技藝(음악적인 측면)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분석의 초점은 신독재의 禮樂사상을 통한 창의적 활용방안을 신독재 禮學 특성을 바탕으로 오늘날 AI 시대 적응을 위한 창의성, 감성 대응 역량증대를 위한 禮樂回歸 접근법을 중심으로 탐색하고자 하였다.
Ⅲ. 愼獨齋 禮樂思想의 特性 分析
제1절 사례 분석
1. 『實錄』 사례
첫째, 예조가 아뢰기를, "예는 인정에 인연하여 천리(天理)를 품절(品節)한 것이니, 인정에 순응하면 천리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연유하여 예문(禮文)을 세우고 시대에 따라 알맞게 제정하는 것이 예의 본의라고 하였습니다. 삼대(三代)의 예도 때에 따라 손익(損益)했는데, 공자께서 ‘주(周)나라의 禮가 이대(二代)120)를 거울 삼았으니 그 문체가 성대하구나. 나는 주나라의 예를 따르겠다.’ 하였으니, 이는 성인께서도 시왕(時王)의 제도를 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국초(國初) 이후로 『五禮儀』를 편저(編著)하여 열성이 준행한 것이 3백 년이나 되었는데,
하니,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다시 빈청(賓廳, 朝廷)에 모여 의논해 결정하도록 하였다(『孝宗實錄』1권, 효종 즉위년 6월 24일 임자).
둘째, 우의정 조익이 상차하기를, "삼가 살피건대『가례(家禮)』소상조(小祥條) 진연복(陳練服) 주(註)에 ‘남자는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한다.’ 하였고,구준(丘濬)의의절(儀節)에는 ‘복문(服問)에 이르기를 「삼년상의 경우,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공최(功衰)를 입는다.」 하였고, 잡기(雜記)의 「부모상에도 공최를 입는다.」고 한 귀절의 주에 「삼년상을 지내면서 연제를 행한 뒤에 입는 최복(衰服)은 승(升)의 수가 대공(大功)과 같기 때문에 공최라고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하고,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본래 禮學에 어두운 데다가 나이들어 정신이 혼미하니, 이미 정해진 국조(國朝)의 제도에 대해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전 판서 김집(金集)이 아뢰기를, "정복(正服)을 바꾸지 않고 중의(中衣)만 연(練)으로 한다는 것은『禮記』의 주에 나오고, 연제 때 대공포(大功布)로 복을 만든다고 한 것은『의례경전통해(儀禮經典通解)』에 나오는데,통해는 곧 황면재(黃勉齋)가 직접 주자의 지시를 받아 찬정(撰定)한 책인 만큼 그 말이야말로 정론(正論)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에 이미 예전부터 행해온 제도가 있고 원로들도 저처럼 의논을 드리고 있으니, 오직 상께서 재결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孝宗實錄』, 4권, 효종 1년 5월 7일 기미).
셋째, 판중추부사 김집(金集)이 졸하였다. 김집의 자(字)는 사강(士剛)이고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손자이며 참판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이다.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여 학행(學行)이 훌륭한 것으로 등급을 뛰어넘어 6품직을 제수하였으며, 上께서 즉위하시자 특별히 예조 참판에 임명하고 얼마 되지 않아 등급을 뛰어넘어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의 학문은 경(敬)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어 게으른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부분에 힘(涵養)을 써 늙을 때까지 더욱 삼가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으며 예학(禮學)에 더욱 뛰어났다.
나이 80이 되자 특별히 숭정(崇政) 품계에 올려 판중추부사를 임명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여러 생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생사(生死)의 이치를 환히 알아 마음에 동요됨이 없으니, 이에 있어서는 거의 옛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83세로 졸하니 사림(士林)들이 서로 조문하였다. 일찍이 그가 거처하던 집을 ‘신독(愼獨)’이라고 편액하였으므로 학자들이 신독재(愼獨齋)선생이라고 일컬었다(『孝宗實錄』16권, 효종 7년 윤5월 13일 경신).
넷째, 팔도 유생 박한흠(朴漢欽)등이 상소하여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경공(文敬公)김집(金集)을 문묘에 종향(從享)하도록 청하였다. 그 상소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상고하건대, 조헌은 천지의 굳세고 큰 정기를 타고 나서 사물을 궁구하여 앎을 터득하는 성현의 공부를 힘써서, 학문은 하늘과 인간의 경지를 통달하였고 도(道)는 수사(洙泗)의 근원을 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앞날을 꿰뚫어 보는 혜안은 점괘를 잡는 것과 같았고 이치를 보는 명철함은 실이나 털을 쪼개는 듯하였습니다.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수양하는 것은 반드시 공(孔)·맹(孟)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였고, 본체를 완전하게 갖고 큰 작용(作用)을 쓰는 데에는 주자(朱子)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좌우에서 근원을 탐색하여 시종(始終)의 맥락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이민족, 와르카 등)를 배척한 마음과 정도(正道)를 부지하고 사도(邪道)를 배척한 뜻은 또한 평소 가슴 속에 쌓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논설을 개괄하여 보면, 한결같이 모두 이이(李珥)의『성학집요(聖學輯要)』에 근본하고서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으며, 당면한 급선무에 너무나 적중한 내용으로서 모두 다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임금의 학문을 밝히며 풍속을 바르게 하고 예교(禮敎)를 두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가졌던 바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주려는 뜻이자 국가를 다스릴 계책으로서 성현의 사업에서 질정받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들이 또 상고하건대, 김집(金集)은 단정하고 신중하고 정밀한 자질로 온화하고 점잖고 순수한 기품을 타고나 청렴하면서도 격렬하지 않고 개결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리학에 전심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문에 힘쓰고 실천에 독실하였습니다.”
2. 金集의 禮樂(學)的 수기법, 특성
첫째, 산림(山林)의 길을 걷다. 양난 이후 무질서해진 국가사회 기강을 바로 잡기위해 등장한 조선 중기인 16~17세기의 성리학자들에게서 나타나므로 예학은 성리학의 한 분야에 속한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朝廷에서는 김장생과 김집 부자를 산림(山林)으로 초빙하여 불러들이려 하였다. 본래 김장생과 김집은 문과에 응시하지 않아 중앙의 요직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그의 학문은 경(敬)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어 게으른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부분에 힘을 써 늙을 때까지 더욱 삼가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으며 예학(禮學)에 더욱 뛰어났다.
둘째, 김집은 禮學에만 집중하여 상대적으로 樂에 소홀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禮經에 치중, 技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신독재의 학문방법과 실천에서의 요체는 마음을 깨끗하게 갖고 묵묵히 앉아서 신명(神明)을 대하는 것이었으며, 또 자신이 거처하던 방을 ‘신독재(愼獨齋)’라 하였다. 정조대의 명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예와 악은 어느 하나도 폐할 수 없는데, 오로지 禮學만이 극성하고 樂學을 익히지 않아 폐단이 있다”고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예와 악의 불균형을 지적하면, 樂의 欠缺이다. 樂이 미비하게 이유는 예와 악의 본질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며, 예와 악이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양상에 서로 차이가 있는 데 원인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 악기가 훼손되고, 음악을 연주할 악생이나 악공이 다시 궁으로 돌아오지 않아 음악을 연주하기 어려워 樂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궁중에서 악을 담당하는 사람과 그 기예에 대한 저평가 등이 상존했음에도예악정치의 지향만은 조선조 내내 변함이 없었다.
셋째, 김집의 학문적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그는 예를 人慾을 절제하고 天理를 보존하는 법칙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송대 도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예란 인간관계에서 활용되는 질서를 의미한다고 여겼다. 둘째, 정치사상은 왕도정치론에 기반을 두어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였으며, 이는 정당한 정치 권력의 확립을 추구하는 의도로 朱子禮學과 王導政治論의 심화로 요약된다(우경섭, 2007).
김집의 예학은 인간의 의리와 천리의 보편성을 강조하였으며, 왕도정치 사상은 군주의 수양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다.
“예학(禮學)은 인간의 문화와 의례 법칙의 표준이고 국가가 백성을 교화함에 있어서 전범(典範)이 되는 것입니다. 김집은 이 예학에 더욱 많은 공력을 쏟아, 밤낮으로 예경(禮經)에 침잠하여 반복하여 비교 상고하고 구석구석까지 두루 통달하였습니다.”
제2절 신독재 예악사상의 효과와 대응과제
1. 예악사상의 효과, 한계
첫째, 예학 분야가 특별히 중시되었던 점은 분명 이 시대의 학문적 특성이다. 사대부들은 家禮의 禮制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小學』과 향약(鄕約)의 보급을 통해 이를 지역 향촌사회와 국가 전반에 걸쳐 적용하고자 했다.
壬亂과 胡亂이란 유례없는 戰禍를 통하여 양반지배 체제가 송두리째 와해되게 되면서 禮秩序 회복이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자 성리학적 명분론과 예질서 확립을 통한 양반중심 신분제와 사회 기강 확립 필요성에 따라 예학이 태동된다. 김집의 예학은 이이의 사상을 이어 받아 務實을 중시한 예학이었다(황의동, 2020)
맹점은 조선 사회는 왜란과 호란으로 신분제가 동요하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이에 사대부들은 무너진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회복하여 강상(綱常) 윤리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란(1952∼1958)으로 인하여 인구 1/3 감소, 지역파괴, 경제위축, 문화훼손 등을, 병자(1636∼1637)란으로, 인구 1/3 감소, 지역파괴, 경제위축, 문화훼손 등에 따라 북벌론이 대두되나 포기한다.
둘째, 조선조의 유학이 주자학으로 한정되었듯이 조선조의 예학도 朱子的 禮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가례』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계점 관련 역기능(過)으로는 먼저 (1)과도한 규범으로서의 개인 자유 침해 및 창의성, 자율성 상실 및 (2) 사회적 갈등 (3) 규범맹종 등을 든다.
“禮訟論爭(1659-1674)은 정권쟁탈전이었다”라는 의미는 예송은 ‘왕실장례 의식절차’에 대한 다툼으로, 서인(이이, 성혼 등)과 남인(퇴계 등)의 대립구조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대립사건 이었다. 서인은 ‘家禮’를 중심으로 王權을 견제하고자 했으며, 남인은 왕권을 擁護한다.
셋째, 樂이 不在로 禮樂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禮訟問題로 喪禮에 매몰되어 악이 無視되고 말았다. 禮에 함몰된 것은 예학주도(쟁탈)를 통한 기호학파(서인)의 정권확보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공자의 예악사상에서 주희로 기울고, 불균형적인 성리학의 序曲이 되고 만 것이다.
기호학파의 예학은 예에 埋沒된 전란치유 질서와 정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파당 대립으로특성화되고, 결과적으로 정권획득에 몰두되어 禮樂의 불균형과 악의 부재 및 禮訟問題가 격화된다.
따라서 주자 ‘家禮’에 매몰, 유가의 예악사상의 회복과 악의 기능의 사회적 활용을 통하여 악의 르네상스를 기해야 한다(김사랑, 2015 ; 남상호, 2016 ; 김혜지, 2021).
전후 혼란 극복과 질서회복, 사회안전, 경제발전을 위한 禮學의 대두는 일정기간 사회질서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나 당파 간 갈등 격화를 초래한다(고영률, 1991). 성리학의 大義名分은 처해진 입장에 따라 다 다르게 나타났으니, 그것은 가문과 파당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正義나 公益을 도외시 함이다.
넷째, 王朝禮를 중시하고, 鄕禮, 樂은 상대적으로 소홀시했다. 禮樂과 관련 임진왜란(1592)으로 문묘악은 다른 궁중음악과 더불어 흩어졌으며, 광해군 때 『樂學軌範』을 기준으로 복구하였지만 이어서 병자호란(1636)으로 일시 중단되고, 그 뒤 여러 차례 아악 복구사업을 계속하다가 영조 때에 이르러 옛모습에 가깝게 복원한다.
따라서 樂보다 「朱子家禮」에 매몰되어 권력찬탈에만 집중하고 파당적 이해관계에만 몰입했던 대립구조를 본래로 복원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16∼17세기의 한국적 예학은 당시의 사회질서 회복을 목표로 한 방향은 적합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오늘날 국제화, 다문화 사회에서 작동하기는 무리다. 그런 한편 유가의 영향은 孝, 상하질서체계, 공동체 중심문화, 언어의 절제, 수기치인 덕목 등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된다.
현대적인 AI 시대 진단과 처방책으로 공자의 原始儒家 回歸 필요성을 제기한다. 현대적인 예악균형 접근 필요성이다. AI시대에도 한국의 예절은 정(情)과 配慮로 특성화 된다. 16∼17세기는 전후 사회질서회복을 위한 禮學이 사회상황에 부합하였으나, 21세기는 새로운 해법을 요구한다.
2. 대응 進路 과제
유학자들의 학문탐구 접근은 ‘切問近思’접근(『近思錄』참조)과 수기적 측면은 정좌를 통한 窮理를 지향하며, 구체적으로는 主一無適을 수단삼았다.
“세사변이행도이(世事變而行道異)”는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상앙(商鞅)의 말로, “세상이 변하면 그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시대 변화에 맞춰 제도나 정책, 행동 방식도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통찰을 담았다.
특히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주 인용되는 데 예컨대 4차 산업혁명이나 인공지능의 부상처럼 사회 구조가 빠르게 바뀌는 시기에는 과거의 방식만 고수해서는 효과적인 대응이 어렵다는 점을 고뇌해야 한다.
“예의 본질은 과거에 대한 무비판적인 답습이 아닌 인간을 대하는 근본정신의 회복에 있으며, 오늘 열린 세미나가 이러한 정신의 회복과 예의 현재적 의미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유가의 價値는 학문연구를 위한 연구자의 몸가짐, 마음가짐에 유용한 틀을 제공하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 결과를 ‘암묵지’에 연결시켜 창의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세계관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兩亂과 병자, 정묘란 등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예학을 통하여 극복하려고 한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유교(성리학)의 근본적 가르침인 예악사상 중 樂敎(論)을 소홀하여 멀리한 점(우리역사넷)과 당파에 치우친 점 등을 반추하고, 악론과 기초예악사상 재조명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Ⅳ. 愼獨齋 禮樂思想의 現代的 示唆点
제1절 신독재의 예악(학)시사점
1. 신독재 예악의 현대적 의의
첫째, 교육측면의 도덕과 예술교육이다. 정도전이 『몽금척』, 『수보록』, 『납씨곡』, 『궁수분곡』, 『정동방곡』 등의 악장을 지어 바치다(『太祖實錄』, 4권, 태조 2년, 7월 27일). 정도전은 이러한 樂章을 지으면서 동시에 “정치하는 요체가 곧 禮樂에 있다.”고 강조하는 전문(箋文)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예악을 정하여 법칙을 정함으로써 질서 정연하게 차례가 있고, 화락하게 되었으며, 예악을 정함으로써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는 것”이라는 내용이 그 핵심이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과 음악(법보신문, 2022.5.23)사례이다. 이성계는 원년에 문무백관의 제도를 마련하고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세워 악정(樂政)을 시작하였다. 개국과 동시에 음악기관을 설립한 데에는 예악으로 민심을 다스리고 군주의 덕을 고취하고자 함이었고, 이를 설계한 이가 정도전이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정도전이 지은 곡들은 태조와 신의왕후의 혼을 모신 문소전 제사, 설날이나 동짓날 궁중회례연에서 연주되었다. 이들 가사 중 일부는 「龍飛御天歌」 제9장과 10장으로 활용되었고, 성종 때는 악공들의 시험곡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음악이 곧 국가였다. 오늘날 이들 악곡은 『太祖實錄』, 『世宗實錄』,『樂學軌範』에 수록되어 있으며, 『三峯集』에는 가사만 실려 있고 영조대에 편찬된 『大樂後譜』에는 악보만 실려 있다.
둘째, 사회적 갈등 해결 기제 및 공동체 화합과 관련 유교문화 계승(이성무, 2003)점으로 ‘충남유교문화자원의 특성과 미래’에서 도덕적 수양, 교육열, 근로 의식, 인간 친화성, 경로사상 등의 장점을 제시한 바 있다.
조선시대(조은숙, 2020 : 235) 음악교육의 의의는 먼저 개인수신과 국가 경영을 위한 경전 수학과정에서 공자의 예악사상에 바탕한 교육을 시행하였다는 점이다.
예는 특히 교화 수단으로서의 악(樂)과 결합해 禮樂이라는 통합 영역을 형성한다. 예악은 의례와 음악이 서로 침투되고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예는 특히 도덕 규범의 핵심으로서 의(義)와 결합해 예의(禮義)라는 또 하나의 통합 영역으로 나타난다.
셋째, 코뮤니티 공동체 활용과 관련 문화행사 측면 프로그램으로 노원구 「수락 ‘休’」벤치마크(수락 휴 트리하우스, 자연휴양림)(「문화도시 노원」), ‘효령대군의 茅屋정좌 프로그램’(이종수, 2025.6)을 참고하여 ‘愼獨靜坐 프로그램’(新設)을 제안한다.
끝으로, 성리학적 예학과 예악의 사회질서의 심리적 측면 치유이다. 유학교육에서 禮는 인간의 외적인 측면에, 樂은 인간의 내적 심성에 변화를 주는 것으로 상호 대조되어 왔으나, 양자 간의 대조는 사실상 통섭(通涉)과 삼투(滲透)로 표현되는 조화적인 관계에 있다.
예와 악은 상호 간에 내용적인 포함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면서 예식 안에서 조화롭게 인성을 유지시킨다. 禮에 매몰(樂을 경시함)된 조선 중기적 상황(倭亂과 胡亂의 無秩序)의 예학을 균형잡힌 초기 유학적 禮樂思想으로 회귀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