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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순례주택의 불빛

작성자碧 巖|작성시간26.06.19|조회수16 목록 댓글 0

순례주택의 불빛

벽암 이상인

유은실의 《순례주택》을 읽으며 오래전 골목길 풍경이 떠올랐다. 비가 새는 지붕 아래서도 저녁 연기가 오르던 집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사정을 알고 살던 이웃들 말이다. 지금은 아파트 숲이 도시를 덮었지만, 사람 사는 모습까지 달라진 것은 아닌 듯하다.

순례주택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생활비를 걱정하고, 월세 날짜를 계산하며, 내일의 불안을 안고 잠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어깨는 무겁다. 가난은 때로 주머니보다 마음을 먼저 짓누른다. 가진 것이 적다는 사실보다 가진 것이 없다는 두려움이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든다.

소설 속 수림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번듯해 보였지만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자 삶은 순식간에 흔들린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구나 예상치 못한 바람 앞에서 삶의 터전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아파트도, 사회적 체면도 인간의 삶을 영원히 지켜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작가는 절망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순례주택에는 나순례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넉넉한 재산을 자랑하지도 않고, 큰소리로 선행을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힘을 길러 준다. 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는 사람이다. 그의 삶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나눔은 남는 것을 덜어 주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길을 열어 주는 일이라고.

우리는 흔히 베푼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때로는 베풂에도 우월감이 숨어 있다.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 만족할 때가 있다. 하지만 순례주택이 보여 주는 나눔은 다르다. 상대를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한 사람의 존엄한 인격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 나눔에는 따뜻함과 함께 책임이 따른다.

오늘날 우리는 풍요 속의 빈곤을 살아간다. 집은 커졌지만 마음의 방은 좁아졌다. 이웃의 이름도 모른 채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성공은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순례주택은 묻는다. 그렇게 얻은 성공이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하고.

가난은 불편하다. 그러나 가난보다 더 두려운 것은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일이다. 나순례가 보여 준 삶의 방식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의 오래된 지혜다.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배고프면 밥을 나누고,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일이다.

책장을 덮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마다의 순례주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는 듯했다. 시장 상인도, 경비원도, 택배기사도, 연금을 아껴 쓰는 노인도 모두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하루를 견디고 있다. 그들의 삶을 버티게 하는 것은 결국 돈만이 아니다. 누군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함께 나누는 밥 한 끼,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순례주택》은 집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용히 일러 준다. 인생이라는 긴 순례길에서 가장 따뜻한 집은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집이 아니라, 서로를 품어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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