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하게 되면 결과는 어떤 이념과 사상적 큰 틀(대들보)이 형성 되어 집니다.
문제는 이 틀 안에 자신을 스스로 가둠에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가둠 안에서 한정된 신앙의 노선을 걸을때 그것이 평생 습관화 되면서 부터 서서히 화석화 되어 그것이 신앙으로 단단히 굳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앙은 또 똑같은 방법을 반복 하면서 이와 함께 하는 공동체를 형성 하게 되고 더 나아가 교단의 배경이 성립 되니 교단 설립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각 교단이 설립 되어 현실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단 설립에 기초는 신학에 있고 그 신학은 개인의 신앙에 형상(形狀)과 모양을 결정하는 중요한 차원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형상과 모양은 신앙에 질(質)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는 수많은 교단으로 형성 되어짐의 결과로 각 교단 마다에 따라 신앙의 질도 똑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단 대 교단은 동질적인 면과 이질적인 면이 존재 하므로 초록은 동색이라 끼리 끼리 통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질적인 면을 가진 교단과는 신앙에 교류도 어렵고 개인 간의 교제에서도 갭이 따르므로 합의가 어려워 하나 됨에 큰 걸림돌 역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 하나 됨을 가르쳤고 또 그렇게 됨이 마땅함을 선포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선포에 순종함으로 하나 됨을 따라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온갖 잡음이 쉴 새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최고로 더 나아가면 서로 사이비니 이단이니 물고 뜯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
이런 결과는 바로 신학에 이념과 사상에 따른 신앙에 대립 입니다.
따라서 신학과 신앙의 문제는 보통 예사로운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학과 신앙의 결국은 성경의 자리를 꿰차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엄연한 현실 속에 사는 우리들은 이러한 실상을 부인 할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자라면 어떤 경우에도 각 교단 신학과 신앙 중심을 철저히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해결의 첫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첫 실마리에 들지 않고는 개혁을 운운 하는 입도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떠남에 있어 자신의 거처가 교단에 속하였을지라도 교단 신학과 신앙에 한정 되지 않고 화석화 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깨끗이 훌훌 다 털어 버릴 수 있는 질적인 신앙의 노선에 있다면 떠남에 합당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떠남에 서 있어 개혁을 논하는 입장이라면 어떤 신학과 신앙일지라도 그것을 성경으로 재조명 하여 시시비비를 가려서 성경말씀 앞에 모든 무릅을 꿇게 하는 실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가 스스로 자정 능력 부재 라는 고백이 나올 정도 라면 그 부패의 정도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 일 것입니다.
이제 의식 있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결과를 낳은 원인자가 바로 신학과 신앙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부인 할수도 해서도 안되는 양심 고백의 선상에 와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신학과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판단을 하자면 이러한 신학과 신앙의 문제는 성경 앞에서 완전히 죽어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들에게 성경과 신앙을 주셨지 언제 신학과 신앙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신학과 신앙은 성경과 신앙에 유사한 것으로 언제나 적으로 치닫는 것이지 성경과 신앙 앞에 순종의 종류가 아님을 철저히 깨닫지 않는다면 자기 영혼을 함부로 방치 하는 자가 되기에 그 영혼의 미래를 결코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함부로 방치 하지 않음이 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