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시인과 이근우 문화부장
시아버님은 대구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한 후
대구 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하셨다.
교사 시절, 학생 30명을 백일장에 출전시켰는데
그중 29명이 입상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고
당시 심사위원였던 박목월 시인은 이들을 지도한
교사가 누구인지 직접 찾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두 분의 소중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시아버님은 교직을 떠나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고, 훗날 대구일보
문화부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1960년 2월 28일(일요일)
당시 대구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대구 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를 지시하게 된다.
고등학생들이 최초로 주도한 민주화운동인 2.28은
시위 당시 대구 시민들이 가세 하며 총 2천여명이
참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2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당시 경찰에 연행되는 학생들의 모습을 목격한 시인 김윤식은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이라는 시를 쓰고 다방에서 아버님께 이 시를 전달하게 된다.
다음 날인 1960년 3월 1일.
청마 유치환의 「인간이라는 기계」와 김윤식의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을 아버님은 대구 일보에 나란히 게재하시고 곧바로 경북 도경에 연행되어 문초를 겪으신 후 해직 당한다.
훗날 이 게재는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일장기 말소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언론인의 용기 있는 실천이자,
시대정신을 지켜낸 버금가는 상징적인 필화 사건으로
회자된다고..
이후 대구일보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 전전긍긍하다 내외경제신문 국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시절 신문 백지 발행을 하시며 몇개월 만에 언론계를 또 다시 떠나게 된다.
시어머님은 박목월 시인과 사제 지간으로
인연을 이어가다 아버님을 만나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디며 가정을 이루었고, 교수직으로 생계를
책임지며 가족을 지켜내셨다고..
아버님은 결혼 이후에도 여러 언론사를 거치며 언론인의 길을 이어가시다, 결국 1984년 향년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다.
남편이 2024년 스웨덴에서 귀국한 이후 아버님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데 누구보다 힘써 왔고 이는 지난 4월 19일 시아버님의 건국 포장 수훈으로 이어졌다.
시아버님, 친정아빠 두분 모두 세상에 안계시지만
이를 쭉 옆에서 지켜 보며 나 또한 우리 아빠의 업적을
알리고 기업문화에 기여하는 뭔가를 하는 것이 내 몫!
아빠를 향해 서로 상반된 길을 걷고 있는
두 딸을 바라보며, 하늘에 계신 아빠가
미소 지으며 "수고했다"라고
말씀해 주실 그날을 떠올리며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리라.
아버님과 같은 정의로운 분들이 내 곁을
지켜 주시길 기도하며..
다음달에 아버님의 국립묘지 이장을 얼마 앞두고
애들과 함께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뵙고 기도 드린후
밥상머리 담화를 나누며 애들과 시부모님과
친정 아빠의 업적과 애쓰심을 한참 이야기 하였다.
“어머니의 글 [시로 쓴 유언] 중
“꿋꿋하게 힘차게 살아라~ ” 라는 내용을
늘 말씀하셨다고.. 이 구절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머니가 글로 대신한거
같다”는 유투브 속 남편의 인터뷰 내용에 울컥하며
토요일 갑자기 요양 병원에서 위독하시다는
전화 한통에 달려가 어머님 뵈러 갔다가
아직까지 눈맞춰 주심에 감사하며 ..
어머니~ 일 평생 그러셨듯이
잘 버텨 주시길 ..
시부모님 故 이근우, 우당 김지향 (본명 김복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