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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힘이되는좋은글]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닥쳐오는 죽음을 어떠한 각오로 맞을 것인가

작성자약수터|작성시간26.06.15|조회수5 목록 댓글 0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닥쳐오는 죽음을 어떠한 각오로 맞을 것인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닥쳐오는 죽음을 어떠한 각오로 맞을 것인가는

노인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놀랍게도 많은 노인들은 죽음이라는 이 준엄한 사실에 대하여 너무나 어른답지 못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70세의 어느 노인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죽음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른 그 자리를 피해버리곤 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모차르트가 서른 할 살 때 죽음에 관해 쓴 편지를 읽어보도록 권했다.

그는 자기 나이의 절반도 안 되는 연부역강(年富刻握)한 시절에 벌써 죽음을 예감한 모차르트가

침착한 태도로 쓴 글을 읽고 부끄러움을 느껴 그 후로는 생각을 고쳤다.

모차르트는 서른다섯 살 때 죽었지만, 그 4년 전에 자기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분명하게 말해서) 죽음은 확실히 인생의 최종목적이기 때문에

지난 수년간 나는 인간의 가장 훌륭한 벗인 죽음과 친근해지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친구(죽음)의 일이 생각나도 별로 무섭지 않고 오히려 큰 위로와 마음의 평화를 느낍니다.

 

참된 행복의 열쇠인 죽음과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젊은 나이라고해도

내일은 벌써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습니다.

내 주변의 친구들 가운데,

내가 우울하고 슬프게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게 이런 기쁨이 주어진 것을 나는 매일 감사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기쁨이 주어지기를 빌고 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좁은 내세관을 가지고 있어서,

천국이란 '영원한 안식'의 나라, 혹은 '하나님을 직관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다 할지라도,

천국이라는 것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며, 영생의 올바른 의미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

 

물론 천국에서는 땀을 홀리며 일할 필요도 없고 넌더리나는 단조로운 작업을 계속할 필요도 없이

이른바 '지복직관'(聖福底觀)의 환희에 넘쳐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천국의 행복은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그리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변용(變容)된 인류 공동체와의 사이에 영원히 되풀이되는 잔치다.

 

한창 일할 나이 때에는 저마다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천국의 행복만 생각하며 현실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겠지만,

그런 일들을 어지간히 마무리 지은 사람들은 쓸데없이 고독한 처지를 한탄하지만 말고,

약속의 땅을 향해 광야를 더듬어 나아간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전진하는 자세로 여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부귀나 공적도, 미모나 건강도 모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상함을 느끼더라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물의 표면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 뒤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결합된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인간은 늙어서 육체가 쇠약해짐에 따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현재의 생활은 영겁의 미래로부터 새어나오는 부드러운 빛을 받으며 새로운 희망으로 넘치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는 육체적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별하여 말한다(마 10:28, 눅 12:4).

육체적인 죽음은 '육체적 생명의 종결'(눅 6:9, 요 12:25),

또는 '신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말해지기도 한다(약 2:26).

최초의 인간은 죽지 아니하는 '생령'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 함으로 인해 그 값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해 교회사적으로 펠라기우스파와 소시니안파 등은 사람이 원초적으로 자연을 사멸 법칙에 종속되어 있었고

죽음을 당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육체적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고(시 90:7,11),

심판이며(롬 1:32), 정죄요(롬 5:16), 저주(갈 3:13)라고 분명히 밝힌다.

 

즉, 하나님은 범죄 직후에 인간에게 죽음을 부과하셨고 자연 법칙에 따라 유한한 존재가 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첫째로, 이는 부활을 위한 과정인 것이다.

즉, 새롭고 영원한 삶을 향해 유한한 기존의 삶에서 떠나는 것이다.

 

둘째로, 완성으로 향하는 길이며 준비된 시민권을 얻는 것이다(고후 5:1).

 

셋째로, 성화의 한 과정이며 영화롭게 사는 길(롬 8:1-2).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슬픔의 대상이 아니며 마지막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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