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윤봉길의 벗 김학무를 아는가.
김학무는 상해에서 윤봉길과 같은 집에 함께 살았다.
그들은 둘도 없는 동지였지만 노선이 달랐다.
김학무는 사회주의자였고 윤봉길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김학무가 상기된 표정으로 ‘인터네셔널가’를 부르면, 윤봉길은 ‘애국가’를 격정적으로 부르며 맞섰다.
안중근을 숭배하는 윤봉길은 적의 수괴를 처단하는 ‘의열’투쟁의 길을 갔다.
김학무는 적의 수괴 몇 잡는다고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를 폭사시키고,
노무라 연합함대 사령관의 한쪽 눈을 앗아내고,
뒷날 일본외무대신이 된 시게미쓰 마모루의 한쪽 다리를 떼어냈다.
오사카로 압송당한 윤봉길이 ‘태연자약하게 싱긋 웃음을 날리며 교수대에 올랐다’는
마이니치 신문을 보고 가장 뜨거운 눈물을 흘린 동지가 김학무였다.
김학무는 누구보다 뜨겁게 윤봉길을 믿고 사랑했지만, 윤봉길이 간 길로 가지 않았다.
황포군관학교 졸업하고, 김구특무대와 민족혁명당, 전위동맹을 거쳐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했다.
그는 윤봉길과 다른 길을 갔지만 소심해서도 비겁해서도 아니었다.
1936년, 김학무는 독립투쟁전선을 분열ㆍ파괴하는 공작을 벌이던
일본 밀정 리옹의 집에 혼자 대낮에 찾아가 단호하게 처단했다.
김학무도 적과 밀정을 처단하는 무자비한 ‘의열투쟁’이 필요할 때는 주저하지 않았다.
윤봉길도 다른 투쟁방법이 더 절실하다고 믿는 순간이 닥쳤으면 그리했을 것이다.
윤봉길이 적의 포로가 되어 당당하고 여유만만하게 최후를 맞이했던 것처럼
다른 길을 갔던 그의 동지 김학무는 1943년 5월, 태항산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시체도 남기지 못한 채 태항산의 바람이 되었다.
그가 함께 싸우던 국민당 군대를 떠나 태항산으로 간 것은 국민당 군대의 하는 꼴을 더는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민당 군대는 치열하게 싸우면 일본군을 충분히 격퇴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졌다.
일본군의 공격이 예상되면 오히러 있던 주력군을 빼내고 전투력이 형편없는 인근의 지역대를 대신 투입했다.
국민당 군대의 사령관들은 자기가 거느린 직할대의 희생을 치르며 승리하는 것보다,
일본군에게 지더라도 자기의 직할대를 보존하는 쪽을 선택했다.
자기의 직할 부대를 보존하기 위해 무력한 지역대를 총알받이로 삼으며 밀리고 또 밀렸던 것이다.
김학무는 그런 꼴을 보고 치를 떨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함께 싸우던 국민당 군대의
“가짜 항일전선”을 떠나 피흘리며 목숨바쳐 일본군과 싸우는 “진짜 항일전선”을 찾아 태항산으로 이동했다.
김학무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우다가 죽기 위해서 태항산으로 갔고, 거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김학무가 다른 길을 간 벗 윤봉길을 비난했던가.
윤봉길이 김학무를 비난했을 것인가.
그들은 다른 길을 갔지만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진짜 항일전선”에 서 있었던 동지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기어코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진짜 항일전선”의 사람들이 치를 떤 것은 "다른 길"이 아니라
“가짜 항일전선”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제 잇속을 차리기에 여념이 없는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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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세력들이 당당히 귀환하고 있는 이 참담한 상황을 지켜보며
100년 전 두 전선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러라고 우리 국민들이 그 추운 겨울 거리에서 떨며 싸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이제 겨우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1/5이 지났을 뿐이다.
아직은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재명 대통령은 며칠 전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전직 대통령들이 탄핵 또는 구속된 잔혹사와 관련해
자신도 이 악순환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꽤 높다(pretty high)"고 한 기사를 보았다.
등이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