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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되는좋은글]태고종에서 태고보우 법통설을 내세우면서 조계종과 종조논쟁이 재현되고 있다.

작성자약수터|작성시간26.06.18|조회수0 목록 댓글 0

태고종에서 태고보우 법통설을 내세우면서 조계종과 종조논쟁이 재현되고 있다.

 

종조논쟁 이전에 먼저 알아야할 우리 역사가 있다.

고려 광종의 법안종 수입을 위한 유학승 파견과 허균의 청허당집 서문의 내용이다.

고려 광종이 중국( 오월국)에 36명의 엘리트 스님들을 유학 보낸다.유학의 목적은 법안종(法眼宗)의 법맥을 도입하여 고려 불교를 개혁하고 통합하기 위함이었다.

​고려 제4대 국왕 광종은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불교계 역시 호족들과 결탁하여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왕권 중심으로 통합할 새로운 사상체계가 필요했다.

​그 카드가 바로 중국의 법안종이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오대십국 시대로 중국 남쪽에서는 법안종의 제3대 조사인 영명연수(永明延壽, 894~975) 선사가 불교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법안종은 참선을 중시하면서도 화엄학, 천태학 등 경전 공부와 염불을 모두 포용하는 선교일치(禪敎一致)와 융합을 핵심 사상으로 삼았다.

광종은 영명연수선사의 만선동귀집을 보고 불교의 융합 사상이야말로 분열된 고려 불교를 하나로 묶을 최고의 방편이라고 판단했다.

광종은 960년대 초 도의(道懿)와 영소(永昭·도봉국사)를 비롯한 36명의 엘리트 스님들을 오월국으로 유학 보내 영명연수 선사 밑에서 법안종의 가르침을 배우게 했다.

​유학을 마친 스님들이 귀국하면서 고려 불교는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영명연수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온 36명의 스님들은 고려에 법안종의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특히 도봉영소(道峯永昭) 국사는 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성 개태사 등에 머물렀고, 왕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들은 겉도는 선종과 교종의 갈등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려 했다. 이 법안종의 선교통합 가풍은 훗날 고려 중기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사상으로 계승되었고, 실질적인 조계종의 뿌리가 되었다.

​허균은《청허당집》 서문에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읊을 때 가장 먼저 도봉(道峯·영소)의 교화가 이에 이르러 더욱 밝아졌고, 보조 지눌 스님이 조계의 근원을 열었다.라고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조반정 이후의 유학자들과 승려들은 오직 중국 임제종의 법맥만을 정통이라며 사대주의적으로 매달렸다.

허균은 고려 광종 때 영명연수의 법을 받아온 도봉영소 스님과 그를 이은 보조지눌 스님이야말로 한국 불교의 참된 주체적 정통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결국 광종이 보낸 36명의 유학 스님들은 외국 문물을 배우러 간 것이 아니다.중국 법안종의 법맥을 수입하여 한국 불교의 독자적인 '선교통합 가풍'을 확립하기 위한 주역들이었다.

​조선 전기까지 불교계의 법맥은 지공.나옹.무학으로 이어지는 법통설'이 대세였다.

조선 후기에 '태고보우법통설로 완전히 뒤바뀌는 과정에서 인조반정이 큰역할을 하게된다.주자학적 사대주의 심화는 불교법통설에도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西人) 세력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맹렬히 비판하며 친명배청(親明排淸)을 국시로 내세웠다. 이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극대화하면서, 중국 성리학의 정통 맥이 조광조, 이황, 이이를 거쳐 자신들에게 이어졌다는 도통론(道統論)을 확립하고 문묘종사를 강행했다.

​이 시기 불교계 주류로 부상한 서산대사의 후손들은 유학자들의 지식 체계와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학습해야 했다.

​유학자들이 "우리는 중국 성리학의 정통 적자(嫡子)"라고 자랑하니, 불교계도 우리도 중국 임제종의 정통 맥을 이어받은 적자라고 증명해야만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인연 덕분에 인도 지공스님과 나옹혜근으로 이어지는 법통이 주류였다. 허균이 살던 광해군 때까지만 해도 나옹 법통설에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과 양대 호란을 거치며 이 평가가 완전히 뒤집힌다.

나옹의 스승 지공은 '인도' 출신이었다. 주자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조선 후기 사대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도에서 직수입된 법맥은 중국의 정통 맥에 비해 권위가 떨어지는 변방의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태고보우는 원나라로 건너가 중국 선종의 가장 정통파인 임제종의 '석옥청공' 스님에게 직접 법을 받아온 인물이었다. 유학자들의 시선에서 보면 태고보우야말로 '중화의 정통 맥을 조선에 이식한 인물'로 완벽하게 부합했다.

​인조반정을 주도하고 남한산성 등에서 청나라에 끝까지 저항했던 서인 대문장가로는 이정구, 이식, 장유 등이 있다.당시 의승군을 이끌며 국방의 한 축을 담당했던 불교계 고승들의 비문(碑文)을 많이 써주었다.

​17세기 전반, 서산대사의 제자인 편양언기(鞭羊彦機)를 비롯한 청허문중 스님들은 조선 조정에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임제태고법통설을 정립했다.

​반청파 서인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주자학적 도통론'과 구조가 딱 맞아떨어지는 불교계의 '태고 정통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비문에 기록해 주었다.

​이로 인해 태고보우가 중국 임제종의 정통을 이어왔고, 그 맥이 서산대사에게 이어졌다.는 주장이 불교계의 거부할 수 없는 정론으로 확정된 것이다.

​결국 인조반정 → 친명배청 사대주의 극대화 → 유교의 주자학적 도통론 유행 →

불교계의 생존을 위한 모방이라는 흐름 속에서, 중국 정통 법맥을 강조하는 태고법통설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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