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장 후새의 모략과 아히도벨의 모략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15장에서 19장아지 이어지는 압살롬 반란 사건 기사의 연속 부분에 해당하는 장으로서 압살롬이 다윗 성을 차시한 뒤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으로 군림하기 위해 부친 다윗을 살해하기 위한 막바지 추격전을 전개한 사실과 다윗이 극적으로 압살롬의 추격을 따돌리게 된 경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헤브론의 모사 아히도벨의 모략(1-4절), 다윗의 모사 후새가 거짓 모략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을 꺾음(5-14절), 다윗을 미리 도피하도륵 하기 위한 후새의 밀사 파견(15-20절), 다윗의 도피 및 아히도벨의 자살(21-23절),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침(24-26절), 다윗이 마하나임에서 퍼로를 품(27-29절) 등의 순으로 그 내용이 전개된다.
이상의 일련의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얼마나 세밀히 역사하셨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사실상 후새의 모략 보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그것 자체만으로 볼 때에는 훨씬 더 정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따음이 거의 모두 압살롬에게로 쏠려 있었기 때문에 다윗만 죽이면 모든 백성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왔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다윗 일행은 극도의 피로로 인해 요판을 채 건너지 못한 상태에서 곧장 추격한다면 얼마든지 따라 잡을 수가 있었다(2. 3절). 그러나 하나님은 후새를 통하여 다윗에게 유리한 모략을 내게 하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시고 다윗을 압살롬의 손에서 구하셨다.
또한 사악한 아히도벨의 생명은 거두어 가시되 다윗에게는 위로와 도움으로 인노해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먼저 전날의 죄의 대라로 엄청난 시련을 주겼지만 동시에 회개하는 다윗을 위하여 더 큰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겼음을 발견한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칭의와 사랑으로 항상 세심하게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엄정함과 자상하심을 동시에 발견한다. 그리고 그 언제라도 악인의 궤계를 파하시고 의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비록 날마다 연약함으로 인해 쓰러지는 죄인일지라도 당신을 신뢰하는 자에게 구원과 평안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긍흘을 새상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과 긍휼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구속사가 계속되는 동안 그 섭리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변치 않으실 것이므로 영원히 변치 않으며 세계 만민에게 적용될 것이다.
외울 말씀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삼하 17:14)
아히도벨의 모략
1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2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3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아히도벨의 모략을 꺾은 후새
5 ○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저의 말도 듣자 하니라
6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저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히도벨이 여차여차히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않거든 너는 말하라
7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 때에는 아히도벨의 베푼 모략이 선치 아니하니이다 하고
8 또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 용사라 저희는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9 이제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좇는 자 가운데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10 비록 용감하여 사자 같은 자의 마음이라도 저상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부친은 영웅이요 그 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11 나의 모략은 이러하니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12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13 또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한 작은 돌도 보이지 않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후새의 밀사 파견
15 ○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고 나도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으니
16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기를 오늘 밤에 광야 나룻터에서 자지 마시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 좇는 자들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17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계집종은 저희에게 나와서 고하고 저희는 가서 다윗에게 고하더니
18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19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도무지 알지 못할러라
20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저희가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의 도피 및 아히도벨의 자살
21 ○ 저희가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나이다
22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에 미쳐서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3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24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장을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저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미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6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치니라
마하나임에서 선대받는 다윗
27 ○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본문 & 자료노트
신학용어-17:1-14 모사(Counselor)
본문에는 반란자 압살롬이 최후로 부친 다윗을 살해하고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되기 위해 여러 모사들과 함께 군사 회의를 소집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는 자주 '모사'(謀士)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1. 원어적 의미
성경에서 모사'로 번역될 수 있는 원어로는 신 ․ 구약 모두 합쳐서 다음의 다섯 가지가 있다.
① 요에츠( ): 이는 '상담하다', '계획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아츠'의 분사형으로서 '상담자'라는 뜻이다(시 119:24; 사 40:13).
② 드타바르( ): 이는 아람어로서 '법관', '재판관'이라는 뜻이다(단 3:2,3).
③ 하다바르( ): 이 단어도 아람어이며 의미는 '상담자'라는 뜻이다(단 3:24,27).
④ 쉼불로스( ): 이는 문자적으로 '함께 의논을 나누는 사람'이란 뜻으로 역시 '상담자'로 번역된다(롬 11:34).
⑤ 파라클토스( ): 이는 문자적으로 '곁에서 부르는 자', '조언하는 자', '위로자'라는 뜻으로서 보혜사 성령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2. 모사의 역할
성경에 기륵된 바 모사의 일차적인 역할은 왕의 보좌관 역할로서(왕상 12:6-14) 국가의 중대사(잠 11:14)나 법에 관한 조언(단 3:2,3), 전시(戰時)에 전략을 세우는 일(대하 22:5; 잠 24:6) 등을 담당했다. 이같은 모사는 왕정(王政) 국가에서는 어디서나 있었으며(스 7:14; 에 1:14; 사 19:11; 단 3:2), 이들 모사들에 의해 왕의 통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사는 '부모'(잠 1:8), '장로들'(겔 7:26), '선지자들'(대하 25:16). '현인들'(렘 18:18)을 가리키기도 한다.
3. 모사에 관한 교훈
성경은 여러 모사들에게 자문하는 일을 매우 지혜로운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잠 11:14; 15:22). 특별히 왕들에게 있어서는 지혜로운 모사에게 많은 모략을 듣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렇게 할 때 지혜로운 왕이라고 일컬어진다. 특히 전쟁에서의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다(잠 24:6)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왕이 악한 모사를 곁에 두었을 때 그는 크게 잘못될 수 있으며 폭정이나 악정을 행하기가 십상이다(대하 22:3; 잠 12:5). 그리고 어리석은 자는 모사들의 모략이나 교훌을 멸시하며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다(잠 1:25,30)고 교훈하고 있다.
4. 성도의 모사, 하나님
성경에서는 자주 하나님을 모사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시 16:7; 32:8; 33:11; 73:24).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가리켜 모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시 119:24).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친히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더욱이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은 가장 완전한 모사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가 결코 그분의 모략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사 40:13).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모사라고 칭했으며(사 9:6), 여호악의 신 곧 성령을 가리켜서도 모사라고 칭했다(사 11: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에게 보헤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요 14:16), 이는 보혜사 성령이 곧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모사가 되심을 보여 준다. 결국 성경은 삼위 하나님이 모두 우리에게 모사가 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완전한 모사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교훈을 늘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원어연구-17:10, 저상하리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히메스 이마스'( )이다. 이 두 단어는 모두 '녹다'(사 34:3), '떨어지다'(신 20:8), '낙심하다'(신 11:8; 20:8)를 의미하는 '마사스'( )를 원형으로 한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고체가 '녹는' 상태를 표현하는 이 단어가 거듭하여 사용된 것은, 원래 다윗의 마옴이 쇠처럼 단단했으나 격심한 충격으로 인해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감'(사 10:18)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 단어가 은유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낙담하다'(나 2:10), '낙심하다'(신 1:25)로도 번역된다.
더불어 이 단어는 그 용례에 있어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수 2:11). 여기서도 후새는 다윗이 과거의 용기를 모두 잃어버리고 실의에 차 있으며 겁쟁이가 되었다고 다윗의 상태를 과장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히브리어에서 동일한 단어를 반복시키는 것은 그 상태가 아주 심각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이 말을 직역하면 '녹음이 녹았다'(melting shall melt)이나 이는 '완전히 녹았다'(shall utterly melt). 혹은 '간담이 서늘해졌다'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적인 힘이나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상황이 바뀌거나 더 큰 힘이 적대시할 때 필연적으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탈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만왕의 왕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출 14:13; 막 7:31).
신학용어-17:4 이스라엘의 장로들
삼하 3장 자료노트 참조
지도-17:11, 브엘세바의 위치
창 20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7:1-23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들
1. 악에 동조하는 자들(레 10:1-6; 대하 19:2)
2. 우상 숭배자(신 29:20; 수 23:16; 렘 44:3)
3. 율법의 도덕성을 파괴한 자(삼하 16:22; 스 10:10-14)
4. 배교자(대하 34:24,25; 히 10:26,27)
5. 하나님의 사람을 모욕하는 자(대하 36:16)
6. 하나님을 버린 자(스 8:22; 왕하 22:17; 사 1:4)
7. 복음을 반대하는 자(시 2:2,3,5; 살전 2:16)
8. 회개하지 않는 자(시 7:11; 사 9:13; 롬 2:5)
9.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시 21:8,9; 사 3:8; 13:9)
10. 그리스도께 대적하는 자(시 69:21-24; 사 66:14)
11. 불신앙 자(시 78:21; 요 3:36: 히 3:18)
12.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버리는 자(시 89:30-32; 99:8)
보감-17:23 자살 금지의 근거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몸이므로(창 9:5,6)
2. 자신을 죽이는 것도 일종의 살인 행위이므로(출 20:13; 롬 13:9)
3.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해야 하므로(욥 14:14, 15)
4.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므로(욥 27:3)
5. 생명은 온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므로(마 16:25,26)
6.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므로(고전 6:19)
7. 자살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므로(삼하 17:23)
보감-17:1-14 인간 지혜의 특성과 한계
1. 인간 지혜의 특성
1) 경험을 통해 더 풍부해짐(욥 32:7)
2)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기 쉬움(약 3:16)
3) 악을 위해 사용되기 쉬움(골 2:23)
4) 도터적인 죄를 짓게도 함(삼하 16:21)
5)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함(잠 23:4)
6) 하나님을 대적하게도 함(렘 8:9)
7) 탐욕을 위해 사용하기 쉬움(약 3:15)
2. 인간 지혜의 한계
1) 하나님의 허락 하에 있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함(잠 16:2)
2)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함(약 4:14)
3) 하나님의 비밀한 일을 도무지 알지 못함(마 11:25; 눅 10:21)
4) 하나님의 심판에 전혀 대비치 못함(사 47:10,11)
보감-17:27-29 성도 상호간 섬김의 자세
1. 성도가 어려움을 겪을 때 더욱 섬김(삼하 17:27-29)
2. 일시적이 아닌 지속적인 자세로 섬김(시 37:26)
3. 자기 것을 나누어 주며 섬겨야 함(사 58:7; 행 4:32)
4. 인간적인 보상을 기대하며 섬기지 말아야 함(눅 14:12)
5. 사랑이 담긴 마음으로 섬겨야 함(요 13:34,35)
6. 약한 형제들을 세워주며 섬겨야 함(행 20:35)
7. 서로 존경하며 섬겨야 함(롬 12:10; 잠 14:31)
8. 성도의 필요를 채워주며 섬겨야 함(롬 12:8,13; 히 13:2)
9. 마음과 뜻을 같이 하여 섬겨야 함(롬 12:16; 고전 1:10)
10.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며 섬겨야 함(고전 12:4-11)
11. 이웃을 자기 몸처럼 여기며 섬겨야 함(고전 12:25,26)
12. 서로 복종하며 섬겨야 함(엡 5:21; 골 3:18-22)
13. 주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함(엡 6:7)
14. 다른 성도를 위해 기도하며 섬겨야 함(엡 6:18)
15.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섬겨야 함(빌 2:3)
16. 말뿐이 아닌 행위로 섬겨야 함(약 2:15,16)
도표-17:21,22 요단 강과 관련된 사건들
수 4장 자료노트 참조
풍습-17:18,19 동양식 집의 뜨락
삼하 11장 자료노트 참조
17:1-14 아히도벨과 후새의 모략 전장에서 우리는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무협 입성(無城)했을 뿐 아니라 다윗의 후궁을 취하는 등 거의 다윗 왕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았다(삼하 16: 15, 20-23). 그러나 본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서서히 사태가 반전되는 상황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께선 압살롬의 반역을 파하시고 다윗의 왕권을 다시금 확립케 하시기 위하여 섭리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다윗을 해하려 한 아히도벨의 모략(1-4절)이 다윗을 돕는 후새의 모략(5-13절)에 눌려 성사되지 못하는 장면이다. 이는 실로 압살롬의 반역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이루는 예기치 못한 광경이다. 사실 아히도벨의 모략은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정확했고 성공할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다윗 일행은 뜻하지 아니한 도피 생활로 인해 매우 지쳐 있었고 (2절) 다윗의 추종자가 후새의 말(10절)과 같이 모두 용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히도벨 같은 모략가가 일만 이천의 군사를 데리고 다윗의 후미를 친다면 필경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1-3절). 그런 까닭에 압살롬을 비롯한 장로들도 처음에는 그 의견을 매우 옳게 여겼던 것이다(4절). 그러나 압살롬은 돌연 후새를 청하여 그의 의견을 물었다(5,6절). 이것은 실로 다윗을 보호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다. 즉, 비록 압살롬은 신중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후새를 부른 것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다윗을 돕는 후새를 부르게 하시고 후새로 하여금 다윗에게 위협적인 아히도벨의 모략을 방해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결국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자신의 영웅심을 자극하고 명예심을 추켜 세운 후새의 모략을 더 낫게 여기게 되었고 그 의견을 채택하므로써 스스로 몰락을 재촉하고 만 것이다(7-14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악인의 궤계에서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지혜를 폐하심으로 그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게 역사하곤 하신다(욥 5:12; 시 33:10; 사 8:10). 더욱이 하나님께선 이 세상 모든 역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작정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며 그 같은 하나님만을 의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7:1 오늘 밤에… 다윗의 뒤를 따라. - 여기에서 '오늘'밤'은 다윗이 도망을 하고, 또 압살롬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그날 밤이다(Keil). 이러한 아히도벨의 계략은 다윗이 급히 도망하느라 매우 피곤하여 쉬고 있을 '오늘밤'에 습격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계획은 상당히 정확한 계략이었다. 만약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군사를 급파했다면, 예루살렘에서 불과 1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던(Pulpit Commentary) 다윗과 그 일행의 생명은 위태로운 지경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Wycliffe). 한편 우리는 여기서 다윗과 압살롬의 현격한 '인간성의 차이'를 보게 된다. 즉 다윗은 자신의 죄를(삼하 11:4-27; 13:21; 14:33) 뉘우치고, 자신의 도피 생활을 마땅하게 받아들인 반면(삼하 16:911), 압살롬은 자신의 이복형 암논을 살해한 죄 때문에 죽어 마땅했지만(삼하 13:23-29) 3년의 유배 생활(삼하 13:37,38)로 그치게 한 아버지 다윗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히려 그의 아버지 다윗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점이다(Matthew Henry). 비록 같은 혈친(血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同行)한 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는 엄청난 인간성의 차이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창 5:21-24;6:8-10). 이러한 사실에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영위하여 일그러진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함을 깨닫게 된다(롬 6:4; 28:1; 고후 5:7; 엡 4:1;5:2, 15; 골 2:6; 요일 1:7; 2:6).
17:2 약할 때에. - 이 말은 원어로 '르페 야딤( )인데 직역하면 '손들이 풀릴 때'란 뜻이 된다(렘 38:4). 또한 여기에 쓰인 '손들'이란 성경에서 '기운'을 상징하고(사 8:11) 있으므로 다윗이 반란을 피해 도망하느라고 곤비(困憊)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다윗 왕만 쳐죽이고. - 이 구절은 아히도벨이 상당한 모략가임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당시 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온 백성들이 압살롬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5:12). 또한 다윗의 장자와 차자가 모두 죽어 세번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이 실제적인 왕권 계승자였다(대상 3:1-9).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아히도벨은 다윗 외에 불필요한 살육을 피하려고 하였다. 아마 아히도벨은 여기서 두 가지 결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① 다윗이 죽음으로써 그를 따르던 백성이 무력화(無力化)되어 흩어지도록 유도하고, ② 그 흩어진 무리들이 압살롬에게로 재차 모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地位)를 격상(格上)시키려 하였다. 하여튼 다윗의 생명만을 노린 아히도벨의 음모는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또한 설득력이 있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편, 아히도벨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사단의 한 술책을 발견할 수 있는 바, 그것은 '목자를 죽임으로써 양들을 흩으려는' 것이라 하겠다(요 11:45-52, Matthew Henry).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함으로써 영혼은 물론이거니와 육신까지 파멸하도록 충동하는 것이다(눅 9:42:13:16). 따라서 성도는 이러한 사단의 술책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절제와 순종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여야 하겠다(엡 4:26-27; 6:11; 약 4:7; 벧전 5:8-9).
17:3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 즉 '백성들은 모두 신부가 신랑에게로 돌아 오듯이 임금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70인역, 공동번역)란 뜻이다. 물론 여기서 '모든 백성'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왕만 죽이면 그를 지지하고 따르던 무리들이 마치 신부가 신랑을 찾아오듯 압살롬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다윗을 따르던 무리들이 돌아와야만 압살롬의 반란이 비로소 완전히 성공하고 더불어서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아히도벨의 모략이라 하겠다.
왕의 찾는 이 사람. - 여기서 '이 사람'은 다윗 왕을 가리킨다. 즉 백성들이 압살롬에게로 다시 모이는 여부가 다윗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히도벨은 다윗을 속히 죽여 그 무리를 압살롬에게로 오도록 간언(懇言)하는 것이다(Keil, Pulpit Commentary).
17:4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 여기에 사용된 '옳게 여기다'(야샤르)는 '옳다', '합법적이다'의 의미로(렘 27:5), 이 단어는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고(신 32:14),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시 33:1),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또한 하나님이 의로운 인간을 평가하실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왕상 14:8; 15:5). 따라서 아히도벨의 계략을 듣고난 압살롬과 그의 신하들(이전에는 다윗의 신복이었던)은 그의 음모를 옳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부패된 인간들의 한 전형(典型)을 목도하게 된다. 육(肉)의 눈과 육의 지식을 좇아 사망의 어두운 그늘로 달음박질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 아버지를 죽이면서까지 왕의 권좌(權座)를 탐내는 압살롬의 썩어빠진 영혼과 이전에 다윗에게 충성했으나 이제는 다윗을 죽이는데 동조하는 그의 신하들을.
17:5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 이 구절은 압살롬의 후새에 대한 신뢰도를 보여 준다. 즉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한 비밀 계획에 후새를 참여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압살롬 자신의 믿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후새에 대한 압살롬의 믿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전히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압살롬의 계획에 정반대되는 방향으로(14절). 결국 후새의 등장으로 압살롬의 반란은 실패했으며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역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후새의 등장 역시 겉보기에는 인간의 생각에 의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도가 관철된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출 15:18; 왕하 19:28; 대하 20:6; 욥 12:19; 시 24:10; 잠 21:1; 사 44:25; 계 19:6).
17:7-10 아히도벨의 계략을 파(破)하기 위하여 후새는 두 가지로 그의 음모를 지적했다. ① 다윗이 훌륭한 전략가임을 인식시켰다(8절). 즉 아히도벨의 언급처럼 다윗과 그 신복이 '약하고 두려워 떠는 존재'(2절)가 아님을 확신시켰다. ② 다윗과 그의 신복들이 어떤 함정에 잠복하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해 주었다(9절). 즉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다윗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후새의 지적은 암살롬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받았고(14절), 결국 다윗에게 있어서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히도벨의 계략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실로 놀라운 바, 성도는 그분의 주권적인 섭리를 매순간 인정하여야만 할 것이다.
17:7 이 때에는…선치 아니하니이다. - 이 말은 지금까지의 아히도벨의 모략은 적절한 것이었지만, 지금 다윗을 엄습하자는 모략은 잘못되었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7:8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격분하였고. - 후새의 모략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병법(兵法)으로는 최상이었던 아히도벨의 전략에 반대하여 자신의 전술을 전개한다. 즉 다윗과 그의 일행이 기진해 있으니 빨리 추격하면 이기리라는 아히도벨의 의견에 반대하여 다윗과 그 추종자들은 모두 용사(勇士)들이며, 또한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피난길에 있음으로 해서 독기(毒氣) 충천해 있을 것이므로 지금 공격하면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압살롬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여 아무도 대적치 못할 맹렬한 기세로 싸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후새의 주장은 실제로 전력(戰力)이 약화된 다윗 진영에 대한 압살롬의 정확한 상황 판단을 흐리게 하여 다윗을 위기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편, 후새가 인용한 '새끼를 빼앗긴 곰'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발견되는 시리아의 갈색 곰을 의미하는데(Wycliffe) 매우 사나운 특성을 갖고 있다(삿 18:35; 호 13:8).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 다윗의 뛰어난 병법을 주장하는 표현이다. 실제로 사울 왕의 추적을 받을 당시 다윗은 많은 추격 부대를 교묘하게 따돌린 적이 있었고(삼상 24:1-22; 26:1-25) 또한 많은 전쟁 경험을 통하여 체득한 여러 가지 병법이 뛰어나므로 기습 공격을 가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호락 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후새의 주장이다. 사실 이러한 후새의 주장은 다윗의 전적을 이미 알고 있었던 압살롬과 그의 부류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주었을 것이다.
17:9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 다윗이 피난 중에 있다 할지라도 추격군에 대한 대비는 물론할 것이므로 압살롬의 추격 부대가 오히려 기습을 받아 패하게 될 수도 있음을 예측한 말이다. 결국 최초로 공격할 때에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고 패하게 되면 아무리 많은 군사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승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17:10 사자 같은 자의 마음이라도 저상하리니. - 압살롬의 부대가 다윗의 부대의 기습 공격에 패배했다는 소문이 각 처에 퍼져서 이 소문을 들은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저상하리니'(히메스 이마스)는 '절망하다', '녹다'(수 2:11; 시 322:14?)의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아무리 압살롬의 군대가 용맹스럽고 두려울 것이 없는 사자와 같은 군대라 할지라도 최초의 전투에서 패하여 일단 사기가 저하된 뒤에는 싸울 마음이 없어져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후새는 다윗을 빨리 추격하여 죽이자는 아히도벨의 주장이 오히려 압살롬 자신의 부대를 혼비백산(魂魄散)케 할 것이라는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여 압살롬의 작전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17:11 온 이스라엘을…왕께로 모으고. -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군사를 모집하라는 후새의 제안이다(Matthew Henry). 즉 후새는 이렇게 온 지파에게 군사를 모집함으로써, 압살롬이 전체 이스라엘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과시하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허영과 교만에 들뜬 압살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Clericus). 한편, 후새가 압살롬으로 하여금 왜 온 이스라엘에서 군사를 모집하게 했는지 그 근본 의도를 3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압살롬의 동태가 다윗에게 전달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② 다윗과 그 일행이 쉬어야 할 만큼의 시간과 또 병력을 갖추어야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③ 다윗 일행이 요단을 건너갈 수 있을만한 시간을 주기 위해서이다(Matthew Henry).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Dan)은 '심판관'이란 뜻이며, 이스라엘 북쪽 경계 지방에 있던 성(삿 18:19)으로 가나안 점령 때 '단'족속의 큰 부대가 점령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브엘세바(Beer Sheba)는 '언약의 우물'이란 뜻으로 팔레스틴 남쪽 경계에 있는 헤브론 서남쪽 55km 지점(삿 20:1; 삼상 3:20; 대상 21:2; 대하 30:5)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스라엘 전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훗날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령할 때도 역시 이 표현법을 사용하였다(삼하 24:2).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 이 구절은 압살롬이 전체 이스라엘의 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진두 지휘(陣頭指揮)할 것을 제안한 후새의 요청이다. 물론 후새는 이렇게 함으로써 반역의 주모자인 압살롬을 전쟁터에 끌어내어 포로로 잡거나 또는 죽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안 역시 당시 성취감과 영웅심에 만취된 압살롬을 사로잡기에 넉넉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 다윗도 전쟁에서의 결정적인 수훈(首勳)으로 말미암아(삼상 17:4-54; 30:1-30) 왕으로 추대되었기에 압살롬 자신 역시 그처럼 행동하여 왕으로서의 입지(立志)를 확실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악인의 귀는 항상 아첨과 파괴적인 술수에 열려져 있다. 그리하여 그것만을 좇는다. 그러나 바로 이것 때문에, 즉 교만과 명예욕 때문에 압살롬은 자기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삼하 18:9-15).
17:12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 후새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모집한 군사들을 통해 이슬이 일시에 온 지면에 내리듯이, 또는 메뚜기 떼가 농작물을 덮치듯이(출 10:14) 일시에 다윗 일행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기 위한 것이며 그 결과 다윗의 전열이 정비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다.
17:13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 이 구절은 압살롬의 공격을 피해 다행히 다윗이 어느 성으로 도피할 경우에는 그 성과 모든 시설물을 끈으로 묶어 강으로 끌어 내리자는 후새의 과장된 언급이다. 아마도 후새는 자신의 계획이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려고 이러한 과장을 사용하였을 것이며(Keil), 또한 압살롬에게는 성을 통채로 끌어내릴 만한 강력한 힘이 있음을 부추기어 그의 영웅심을 자극하고 그 결과 그의 판단 능력을 흐리게 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다하여 후새의 지략이 전혀 근거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고대의 성(城)건축 위치가 식수(食水)로 사용될만한 강을 끼고, 또 적(敵)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유리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새는 요새화된 성의 일반적인 지리적 조건을 염두에 두고서 이러한 과장을 했던 것이다.
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 압살롬과 그의 신복들이 아히도벨의 승리할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을 버리고 후새의 주장을 채택하는 장면이다. 이같은 사건 전개는 후새의 주장의 담대성과 압살롬의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성격이 일치하여 이루어졌는데 세밀이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후새가 말한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 대한 평가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도 공감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후새가 압살롬을 속인 부분은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즉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집하자는 것인데, 이것이 압살롬과 그의 신복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 결국 생각보다 쉽게 예루살렘을 점령한 압살롬은 영웅심에 사로잡혀 상황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압살롬은 전국적인 모병을 시도하였고 그 기간 동안 다윗은 전열을 정비하여, 결국 압살롬은 패배하고 만 것이다.
여호와께서…작정하셨음이더라. - 이 구절은 후새의 명석한 계획 배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Matthew Henry). 실제로 아히도벨은 당시 후새보다 더 명석한 모략가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사(謀事)가 아닌 후새의 계획을 선택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의한 결과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때로 약(弱)한 것을 드셔서 강(强)한 것을 파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날 우리처럼 연약하고 비천한 자들을 택하시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게 하심을 보라!(출 15:1-18; 눅 1:51-53).
17:15-23 위기에서 벗어난 다윗
앞 단락에서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파해지는 대신 후새의 모략이 채택되므로 압살롬의 반역 사건에 일대 전기(轉機)가 마련되었음에 대하여 살펴보았다(1-14절). 그에 이은 본문은 다윗이 일전에 구축한 정보망(삼하 15:34-37)에 의해(15-17,21절) 압살롬의 추격을 피하고 위기에서 벗어나는 장면이다(18-20,22절). 그리고 이에 자기의 모략이 실패로 끝나게 된 사실을 안 아히도벨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반역자의 최후를 장식하고 말았다(23절). 우리는 이상과 같은 본문을 통해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는 전령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의 군사들에게 붙잡혔다면 다윗은 물론이거니와 다윗을 추종하는 세력은 모두 제거되어 압살롬의 반역이 완전히 성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후림의 한 슬기로운 여인을 예비하사 압살롬의 뜻을 저지하시고 다윗과 그 측근들을 보호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세미한 부분에서까지도 섭리하시고 역사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스 8:31; 눅 21:18). 한편 압살롬의 모사(謀事) 아히도벨이 자살한 사실(23절)은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이 자살한 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예견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아히도벨이 자살한 표면적인 이유는 단지 그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은 데 대한 불만(14절)과 그로 인해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아히도벨은 사태를 직관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의견이 압살롬에 의해 거부당하고 다윗을 제거하려 한 일이 여의치 않자 압살롬의 반역 기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하여 모반에 가담한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예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무튼 아히도벨의 자살 사건은 죄의 결과, 곧 악을 행한 자는 그 죄악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시 7:15,16).
17:15-20 후새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군사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아히도벨의 모략(1-4절)을 파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후새는 즉시 다윗과 그 일행에게 이와 같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전달하도록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지시한다. 이러한 지시에 접한 사독과 아비아달은 자신의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다윗에게 보낸다. 그러나 이들은 압살롬의 첩자에 의해 발각되는 등, 천신 만고(千辛萬苦) 끝에 다윗에게 전갈을 보내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일련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보게 된다. ① 의로운 일은 그 일을 맡은 자가 자신의 일을 충실히 감당할 때 비로소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전 12:4-11; 벧후 1:5-11). ② 의로운 일을 하는 자는 언제나 이것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대적 당한다(출 10:15; 사 5:1-7; 눅 19:20-27; 약 4:3). ③ 의로운 일은 그 사명을 맡은 자의 충실함도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해야 비로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고 또한 대적하는 세력을 이기게 된다(요 12:24; 15:2-8; 롬 6:13-23; 7:4: 벧후 1:5-11).
17:15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 - 사독(Zadok)과 아비아달(Abiathar)은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서 당시 유력한 종교 지도자였다. 사독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후손이며 아비아달은 본시 놉 땅의 제사장으로 엘리 제사장 계열에 속한다. 왕상 2장 자료노트 '엘르아살 계열의 영원한 대제사장직 계승 예언 성취' 및 대상 24장 연구자료 '대제사장의 계보' 참조. 한편, 이들은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에 남기어진 다윗 진영에 속한 자들이다(삼하 15:24-29).
나도 여차여차히 모락을 베풀었으니. - 후새가 다윗과 함께 있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이유가 바로 압살롬 진영의 작전과 정황(政況)을 파악하여 알리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아히도벨이 주장한 내용과(1-3절), 또한 자신이 압살롬에게 올린 모략을(7-13절) 자세하게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설명해 준 것이다(삼하 15:35,36).
17:16 오늘 밤에 광야 나룻터에서 자지 마시고. - 압살롬 진영의 전략 회의의 내용을 전하면서 대책을 덧붙여 전하는 장면이다. 일단 다윗에게 닥칠 큰 재난을 지연시켜 놓긴 했지만, 아히도벨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모사를 베풀 것이고, 따라서 결정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대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광야 나룻터'는 전(前)에 예루살렘에서 어떤 기별(奇別)이 올 때까지 머물겠다고 사독에게 약속했던(삼하 15:25-29) 요단 강을 가장 빨리 그리고 건너기 쉬운 장소인 듯하다.
17:17 에느로겔. - 이 곳은 '샘'으로서 예루살렘 근처 기드론 골짜기의 한 우물을 가리킨다. 에느로겔(En-rogel)은 '마전장이의 샘', '방랑자의 샘' 혹은 '첩자의 샘'이라는 뜻으로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했다(수 15:7; 18:16). 또한 이 우물은 바위 속으로 깊이 파여져서 지하수에까지 도달하였는데 풍부한 겨울비가 오고난 후에는 이 지하수가 지표로 용솟음쳐 나와 골짜기로 흘러 내릴 정도로 물이 풍성했다. 따라서 여행객들의 중요한 쉼터가 됐음이 당연하다. 한편 예루살렘의 남쪽 힌놈의 골짜기와 기드론 골짜기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비르 아룹(Bir-Arrub) 즉 '욥의 우물'과 동일시하기도 하는데(Keil, Pulpit Commentary) 그 이유는 예루살렘과 감람 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비슷하기 때문이다(Bonard).
어떤 계집종. - 히브리어로는 '대제사장의 집에 속해 있는 여종'이라는 뜻이다. 특히 '계집종'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하'( )가 붙어있는데, 히브리어에서 정관사는 '어떤 임무'를 나타낼 때 사용되곤 하였다(Ewald). 따라서 이 여종은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는 사독과 아비아달 대제사장과 에느로겔에 있는 아히마아스와 요나단 간의 연락책 임무를 띤 인물인 것이다. 여기서 다윗 진영의 연락 체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독과 아비아달(예루살렘)→어떤 계집종(연락책)→아히마아스와 요나단(에느로겔 샘)→다윗(요단 나루터).
17:18 비후림. - 은 사람들'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근처 감람 산 동편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삼하 3:16 및 16:5 주석 참조.
17:19 그 집 여인이…덮고…널매. - 기서 '그 집여인'이라 함은 18절에 기록된 '어떤 사람'의 아내를 의미한다(Matthew Henry). 이 여인의 지혜로운 행동은 두 사람 즉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살렸음과 동시에 다윗과 그 일행들까지 구한 담대한 행동이었다. 비록 이 여인이 말한 것이('그들이 시내를 건너 가더라') 거짓으로서, 선을 위해 악을 범한 경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Matthew Henry)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이 확실하다 하겠다. 이 담대한 여인을 통해서 우리는 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자 하면 자신의 생명 뿐 아니라 이웃의 생명도 건질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요 12:25). 한편 본절에 기록된 '우물'은 실제 우물이라기보다는 빗물을 저장하는 수조를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는 바(Pulpit Commentary), 이 견해가 타당하다 여겨진다. 그 당시 마침 건기(乾期)이어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숨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찧은 곡식'은 '껍질깐 보리'인 듯하다(잠 27:22, Keil, Pulpit Commentary). 마치 여인은 우물 뚜껑 위에 이것들을 말리는 체 하면서 우물 안에 숨은 두 사람을 보호하고 압살롬의 첩자를 자연스레 따돌렸던 것이다(Hertzberg).
17:20 시내를 건너 가더라. - 여기서 '시내'는 히브리어의 '미칼 함마임'( )에 해당하며, 그 뜻은 '작고 얕은 물가'이다(Keil). 따라서 이 '작은 시내'는 바후림 근처의 작은 개울을 의미한다 하겠다(Pulpit Commentary).
17:21 당신은…물을 건너 가소서. - 한 여인의 도움으로(19,20절) 구사 일생한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러 후새가 세운 대책(16절)을 전달하고 있다. 당시 다윗은 사독의 연락을 기다리기 위해 요단서편 광야 나룻터에 머물고 있었는데(삼하 15:28), 이제 그곳을 떠나 요단 동편 안전한 곳으로 건너가라는 의미이다.
17:22 요단을 건널새…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 여기서 '새벽에 미쳐서'는 밤 동안 계속해서 요단 강을 건넜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윗 진영의 밤샘 도하(渡河)는 군사 전략상 그 의미가 매우 깊은 것이었다. 단기적으로는 다윗 자신과 자신의 일행을 구하는 삶의 길이었고, 장기적으로는 군사력을 재정비할 시간적 여유를 갖음으로 해서 압살롬이 반란을 진압할 모사(1-3절)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는 후새의 작전(11-13절)이 성공했다는 차원에서도 요단 도하는 그 의미가 있다하겠다. 한편, 본절은 우리에게 커다란 영적 진리를 교훈하고 있는 바,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어떠한 인간의 계략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성도는 본절을 통해 어떤 삶이 현명한 삶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17:23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 이 구절은 다윗과 그 일행이 요단 강을 건너갔다는 정보를 압살롬과 그 신복들이 알았음을 반영한다. 아마 암살롬이 보낸 정탐자('한 소년', 18절)가 이러한 상황 변화를 보고했을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실패했다고 판단하여 예루살렘 성을 떠날 채비를 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 아히도벨의 고향은 '길로'(Giloh)였다. 이 곳은 유다 산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 삼하 15장 12절 주석 참조.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 이처럼 아히도벨이 죽음을 택한 것은 그가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탁월한 모략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만 그의 능력을 선(善)을 위해 사용치 않았다는 것이 그의 비극적 운명의 원인이었다 하겠다. 아마도 그는 다음 두 가지 이유로 해서 자살하였을 것이다. ① 아히도벨은 수치심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한 지혜롭다는 명성을 일시에 잃어버렸다는 수치감과 모욕감 때문에 죽은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② 스스로 자기 자신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자살했을 것이다. 즉 그는 압살롬의 반역 행위가 성공할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며, 따라서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당연히 죽게 될 자신의 처지를 미리 예견하고 자살한 것이다(Keil). 여하튼 아히도벨의 자살은 압살롬 반란 과정에 있어서의 상향선이 하향선으로 바뀌는 꼭지점이었으며, 이제부터 본서 기자는 압살롬의 파멸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Hertzberg). 한편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인(善人)을 어떻게 후대(厚待)하시며 또한 선인의 기도를('여호와여 원컨데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삼하 15:31) 어떻게 응답하시는지를 교훈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후새를 세우셔서 응답하시었고(5-14절) 마침내 아히도벨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심으로써 온전한 응답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17:24-29 다윗을 돕는 세 사람
앞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덕분에 다윗이 압살롬의 추격에서 벗어나 위기를 극복한 사실을 살펴보았다(15-23절). 그에 이은 본문은 다윗이 압살롬과의 결전(26절: 삼하 18장)을 앞두고 또다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덧입는 장면이다. 즉 다윗은 비록 후새가 보낸 정보에 의해 일단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조만간 압살롬과의 최후의 결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끝까지 다윗을 뒤쫓아 와이제 마하나임에 있는 다윗과 대치하여 길로앗에 진을 쳤기 때문이다(24-26절), 그러나 사실 다윗은 압살롬을 대항하여 싸울 형편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다윗 일행은 그 동안의 오랜 피난길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을 버리지 않으셨다. 즉 암몬 사람 소비와 로데발 사람 마길과 길르앗 사람 바실래를 보내 다윗을 돕게 하셨다. 그들은 다윗과 그 일행이 먹고 쓸 수 있는 물자를 충분히 공급한 것이다(27-29절). 물론 이들이 어떻게 함께 왔는지를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많은 백성들이 등을 돌린 다윗을 도울 마음을 갖게 하여 마하나임까지 이르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뜻하지 않은 때에, 뜻하지 않은 의외의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곤경에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곤경에 처할지라도 그러한 하나님을 바라보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창 32:2).
한편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다윗이 이들 세 사람의 도움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즉 그것은 다윗 자신이 뿌린 이전의 선행에 대한 열매를 거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 세 사람은 평소 다윗이 공의로써 백성을 다스리고(삼하 8:15)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푼 데 대하여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인격을 흠모하다가 이제 다윗이 곤경에 처한 소식을 듣고선 그를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만사는 그 심은대로 거두는 법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과 지혜, 재능 따위를 십분활용, 부지런히 선을 행하되 그에 따른 당장의 보응이 없다해서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이다(갈 6:9; 약 5:7,8).
17:24 마하나임에 이르고. - 이 곳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경계를 이루는 요새화된 성읍 중의 하나였다(수 13:26,30). 그런데 다윗이 이 성읍으로 이동한 것은 군사 모집에 유리한 장소였기 때문이다(Keil, Lange). 즉 지파 간의 경계였었고 게다가 요새화되어 있어 병력 충원에 적합한 장소였다. 한편 이 곳은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난 후 얍복을 건너기 직전, 이 곳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던(창 32장),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장소여서 온 백성들에게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라는 상징을 보여 주기에도 적합하였다. 아무튼, 마하나임은 전략적으로도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민심을 다윗에게로 돌릴 수 있는 종교적 성읍으로서 다윗의 망명 정부가 들어서기에 적당했다고 하겠다. 혹자는 여기에 고대 성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Jamisn).
압살롬은…요단을 건너니라. - 이 구절은 압살롬이 후새의 계략에 따랐음을 보여 준다(Keil). 즉 여기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압살롬이 각 지파별로 군사를 모집했음을 반영하는 말이고 또한 압살롬이 직접 병력을 지휘한 점 역시 후새의 계략을 그대로 시행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압살롬은 후새가 노린대로 다음과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① 다윗은 마하나임 성읍에서 그의 군사를 지휘했던 반면 압살롬은 직접 전투에 나섬으로써 다윗보다 죽음의 위험이 더 컸다. ② 다윗과 그 군사들은 요새 성읍인 마하나임에서 전투를 치르는데 반해 압살롬은 전혀 방어물이 없는 들에 진을 침으로써 패할 가능성이 더 많았다('길르앗 땅에 진치니라', 26절). 결국 다윗이 살기 위하여 건넜던 요단을 압살롬은 교만과 탐욕에 가득찬 마음으로 건넜으며, 그 결과 압살롬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삼하 18:14,15). 같은 길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는 생명의 길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다윗과 압살롬의 요단 도하를 보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고전 1:18).
17:25 아마사. - 다윗의 조카이면서 요압의 사촌이다(대상 2:13-17). 그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Ithra) 혹은 이스마엘 사람 예델(Jether)이며, 어머니는 스루야(Zeruiah)의 동생 아비갈(Abigal)이다. 혹자는 아마사가 아마새와 동일한 인물로서(대상 12:17,18) 다윗의 30인(人) 용사의 두령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Ewald, Bertherau, Pulpit Cornneitary). 훗날, 아마사는 요압에게 살해당하고 만다(삼하 20:10).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 - 이 구절은 성경에서 모순이 발견되는 구절이다. 대상 2:17에서는 이 인물을 '이스마엘 사람 예델'로 쓰고 있는데, 혹자는 '이드라'가 '예델'로 축약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드라의 국적(國籍)이 문제로 남는다. 확실히 이드라는 이방인이었음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외국인의 경우 성경 기록자는 항상 그의 국적을 표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드라는 대상 2:17의 기록대로 '이스마엘 사람'일 것이다(Keil, Hertzberg).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기록이 그를 '이스라엘 사람'으로 기록한 것은 그의 아내가(아비갈) 이스라엘 여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아마 이드라는 자신의 아내의 국가인 이스라엘로 귀화하였을 것이다.
나하스의 딸 아비갈. - 아비갈(Abigal)은 일명 아비가일(Abigail)로도 불리웠는데(대상 2:16) 스루야와 자매지간이다. 이들은 이새의 아내된 자가 첫 남편이었던 나하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로서 다윗의 이부동복매(異父同腹妹)이다. 즉 다윗의 아비는 이새였으나 아비갈과 스루야의 아비는 나하스였던 것이다. 삼하 2:18; 대상 2:16 주석 참조.
17:26 주석 내용 없음
17:27 랍바사람…소비. - 이 인물은 다윗이 랍바를 죽인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의 아들이다(삼하 10:1). 랍바를 정복한 후 다윗은 나하스의 아들 중의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했을 것인데, 그가 바로 소비일 것이라는 추측이다(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소비는 자신에게 은전을 베푼다윗에게 지금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마길. - 이 인물은 사울의 손자 즉 요나단의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을 따르던 자이다(삼하 9:4). 이전에 마길은 다윗이므비보셋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는 지금 위기에 빠져 위태로운 지경에 있는 다윗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다(Payne, The Interpreter's Bible).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 -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로글림에 사는 길르앗 사람 바실래'라고 해석된다. 특히 '로글림'(Rogelim)은 길르앗 땅에 위치한 성읍으로서(삼하 19:31) 바실래(Barzilai)는 로글림에서 요단을 거쳐 마하나임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행군하면서까지 다윗을 대접하였다. 그러면 어째서 늙은 바실래가 초라한 다윗을 공궤하였는가? 그것은 아마도 다윗의 강력한 통치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것이다(Payne). 즉 바실래는 당시 부자로서(1932) 그가 살던 길르앗 지역이 항상 아람 족의 침략에 피해를 입어왔던 까닭에 불안했었다. 그러던 차에 다윗의 세력이 이곳에까지 미쳐 안정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8장) 바실래와 같은 그 지역 사람들은 다윗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바실래는 그 감사의 표시를 전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17:28,28 침상. - 히브리어 미쉐캅( )의 번역으로, 야영에 필요한 담요 및 침구를 의미한다.
대야. - 본시 히브리어 사폿트( )는 그릇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전쟁에 필요한 야외용 가마솥을 의미한 듯하다(Lange). 아무튼, 전쟁의 다급한 상황에 몰린 다윗 진영에 있어서, 소비, 마길, 바실래 세 사람의 물질적 원조는 그들이 사기 충천(士氣衝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위기에 처한 의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즉 ①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겸손하게 징계를 받는 자를 결코 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것과 ② 뜻하지 않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만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기에 가능했었다. 따라서 성도는 일시적인 안일을 위하여 악을 도모하지 말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성실하게 선을 행하여야 할 것이다(빌 4:16-19; 골 3:23,24; 히 10:36 ; 계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