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사무엘하 16장 그랜드 종합 주석

작성자유익과 가치|작성시간26.06.23|조회수31 목록 댓글 0

제 16장 다윗의 시련과 압살롬의 다윗 성 입성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15-19장까지의 압살롬 반란 사건 기사의 연속 부분에 해당하는 장으로서 다윗이 본격적인 피난길에 오른 사실과 압살롬이 마침내 다윗 성에 입성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그 내용상 크게 다윗이 감람산 마루턱을 막 지날 즈음 므비보셋의 시종, 시바로부터 므비보셋이 다윗을 비방했다는 거짓 보고에 접함(1-4절),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너기 직전 바후림에서 게라의 아들 시므이로부터 심한 욕설꽈 저주를 들음(5-14절), 헤브론의 다윗 성 입성 및 아히도벨의 악한 모략에 따라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취함(15-23절) 등의 세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이상과 같은 내용에서 우리는 반역자 압살롬을 피해 피난 길을 떠난 다윗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하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비록 다죗을 따르는 몇몇 충신들 곧 잇대, 사독, 아비아달, 후새 등이 있었지만 다윗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신정 왕국의 정통성 있는 주권자 다윗을 버리고 옛적 인본주의적인 사울 왕가를 그리워하기까지 했다(3, 5절). 특별히 시므이의 통렬한 저주는 다윗이 그런 비참한 처지에 처하게 된 것은 그가 사울 왕가를 무너뜨림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백성들의 냉대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드디어 압살롬이 다윗성을 차지하고 또 다윗의 후궁들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왕권 획득을 온 백성에게 공표하였고, 이제 누가 보아도 다윗이 패배하고 압살롬이 승리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상황이 엉망이 되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남은 정치적 힘이나 칼로 그 상황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렇게 혹독하게 비난하는 시므이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시련이 근본적으로는 신정 왕국의 왕으로서 신실치 못한 자신의 과거 범죄에 대한 징계로서, 모두 다 하나님에게서 은 줄 알고 끝까지 참았다. 그리고 오직 회개하여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결되기만을 간구하였다. 이처럼 다윗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며 오직 그분이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돌아보사 구원하시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겉으로 보기 에는 반역 자 헤브론이 절대 숭리 한 듯한 상황 속에 서 도 다시 금 회 개 하는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시고 압살롬의 반역을 파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렉 사람 후새를 통해 점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16-19절).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범한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사실과 아울러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께 회개하는 자는 끝내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과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게 된다(엡 2 8-10). 태초부터 종말까지 구속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이 이처럼 구속사의 한 위대한 주역이었던 다윗의 삶을 통해 보여 주신 죄와 구훤의 원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외울 말씀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 16:12)

 

므비보셋의 시종 시바

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2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3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4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가로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에 대한 시므미의 저주

5 ○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9 ○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3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14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후새의 거짓 투항

15 ○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올 때에 저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거할 것이니이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압살롬의 다윗 성 입성

20 ○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

23 그 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0:7, 비루한 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하벨리야알'( )은 '사람'(창 2:7)을 뜻하는 '이쉬'( )와 '비루한'을 뜻하는 '하벨리야알'( )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이쉬'는 성경에 2,166회나 사용된 사람을 가리키는 가장 보편적인 용어이다. 한편 '비루한'을 뜻하는 '하벨리 야알'은 정관사 '그'를 의미하는 '하'( )와 '벨리'( )와 '야알'( )이 합쳐진 단어이다. 여기서 '벨리'는 '낡아지다'(수 9:13), '소멸하다'(시 49:14)를 뜻하는 '발라'( )에서 유래하여 '멸망'(사 35:17), '중단'(시 72:7)을 의미하며, 주로 다른 단어차 합성되어 '~없이'(without, 신 4:42; 렘 2:15), '~가치가 없는'(~less, 욥 30:8)이란 뜻을 지닌다. 이는 옷이 낡아지고 해어지면 아무 쓸모가 없이 되므로 버려야 하는 것처럼 다윗도 이스라엘에서 이제는 더 이상 필요없는 왕임을 선포하는 시므이의 저주이다.

또한 '야알'은 본래 '올라가다'에서 유래한 말로 '유용하다'(be of use, 삼상 12:21), '이익을 얻다'(get profit, 렘 12:13)를 뜻한다. 즉, 생산성이 끊이지 않아 생활의 윤택함을 제공해 주는 것을 말한다. 시므이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부흥시킨 과거는 인정하나 이제는 이러한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됨을 비꼬는 의미로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벨리야알'을 합하여 해석하면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또는 '유용하게 사용할 가치가 없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불의하고 불경건함을 지적할 때도 자주 사용된다(삼상 2:7). 이러한 사실은 '이쉬'와 '벨리야알'이 연결되면 '배교자' 또는 '배반자'를 뜻한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여호와 신앙의 공동체였던 구약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를 극심하게 모욕할 때 쓰던 말이다. 즉 시므이가 다윗에게 한 말은, 다윗이 죄를 범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하게 되었다는 의미의 아주 심한 욕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반성의 기회로 삼음으로써(11절) 스스로가 비루한 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다윗에게 이러한 욕을 하였던 기회주의자 시므이가 다시 다윗에게 자비를 구하며, 솔로몬 왕 때에 항명을 어겨 비참한 최후를 맞음으로써 스스로 비루한 자임을 입증하였다(삼하 19:16-23; 왕상 2:39-46).

 

풍습-16:1 수송 수단으로서의 나귀

창 42장 자료노트 참조

 

풍습-16:1, 포도주

민 18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10:7-13, 저주

민 22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6:5-13 핍박에 대한 자세

출 1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6:7,8 피 흘린 자의 결과

레 17장 자료노트 참조

 

풍습-16:21, 왕의 후궁

본문에서 헤브론은 그 아비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 두었던 첩들을 온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취하였다. 이는 부친 다윗의 중오를 극대화하석 부자지간의 정을 끊어 놓고자 한 아히도벨의 모략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후궁에 대한 당시의 풍습이 바탕되어 있다. 이에 본문의 배경이 된 당시의 관례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왕의 특권으로서의 후궁

일부다처를 허용했던 고대 근동에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남자들의 경우 많은 첩들을 거느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왕국이 시작되면서부터 첩은 왕의 부(富)와 권세를 상징하게 되었고, 이에 첩, 곧 후궁은 왕만의 특권과 같이 되었다.

초대 왕이었던 사울도 최소한 한 명의 첩을 두고 있었으며(삼하 3:7). 다윗은 헤브론의 반란을 피해 도망할 때, 예루살렘에 10명의 첩들을 남겨 놓았다(삼하 20:3). 솔로몬의 경우는 무려 700명의 아내와 300명의 철들이 있었고(왕상 11:3), 르호보암은 18명의 부인과 60명의 첩들을 두었다(대하 11:21). 또한 이외의 다른 왕들도 맡은 첩을 두고 있었음을 성경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왕위 이양에 따른 후궁 인수

이스라엘 왕정 초기에는 왕권이 바뀔 때 그 계승자에게 왕의 후궁들을 넘겨 주었다. 고래서 왕위 찬탈자들은 자신의 왕됨을 나타내고자 전왕의 후궁들을 취하였다. 곧 후궁의 소유는 자신의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의 부하 장군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첩 하나를 차지했을 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그에게 화를 내었던 것이다. 곧 아브렐이 사울의 첩을 차지한 것은 이스보셋의 통치권 탈취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삼하 3:6-8). 또한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첩인 아비삭을 취하고자 원했을 때, 솔로몬 왕은 그의 간계를 파악하고 그를 처형한 바 있다(왕상 2:13-25).

 

3. 의의

이상 살펴본 사실을 통해 헤브론이 다윗의 첩들을 백성들 앞에서 취한 것은, 이제 자기가 왕이 되었다는 것을 공식 선포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성경 기사 속에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풍습과 상황이 바탕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보감-10:5-14 성도가 인내해야 할 이유

1.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살후 3:5)

2. 말씀의 결실을 얻기 위해(눅 8:15)

3. 현재의 환난을 이기기 위해(롬 5:3,4)

4. 믿음의 연단을 받기 위해(약 1:3)

5.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고전 13:4,5)

6. 죄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계 2:2,3)

7.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가르치기 위해(살전 5:14)

8.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딤전 6:11,12)

9.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하기에(사 37:18; 눅 18:7)

10.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는 길이기에(히 6:12; 10:36)

11.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되기에(고후 6:6; 딤후 4:2)

12. 선악간에 모든 판단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롬 12 :19)

13. 인내케 하시는 성령님의 뜻에 순종키 위해(갈 5:22; 엡 4:2)

14.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므로(히 12:12)

15.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마지막 심판이 있기에(약 5:7-11)

 

신학용어-16:18, 선민

출 12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6:21, 악한 자들의 특징

삼하 4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18:12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장 자료노트 참조

 

인물연구-16:20, 아히도벨

삼하 15장 자료노트 참조

 

 

16:1-4 시바의 거짓 술책

앞장에서 우리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를 들고 반역 정부를 수립한 사실을 보았다(삼하 15:1-12). 그리고 이에 다윗이 황급히 도피길에 오른 사실도 보았다(삼하 15:13-37). 그에 이은 본장은 그 같은 도피 상황 중에 일어난 일들로서 다윗의 마음에 괴로움을 더해 준 인물들의 행동을 보여 준다. 이는 특히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의 반역 즉시 도피하게 했던 이유 중 하나인,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서 압살롬에게로 많이 돌아섰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다윗이 감람산을 지날 즈음에 므비보셋의 사환인 시바가 각종 음식물을 실은 나귀를 이끌고와 다윗을 맞이하는 장면이다(1,2절). 그리고선 므비보셋의 근황을 묻는 다윗에게 그가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증거함으로써(3절), 다윗으로부터 므비보셋의 전재산을 넘겨받는 장면이다(4절).

그런데 사실 위와 같은 시바의 증거는 주인의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삼기 위한 모함이었다(삼하 19:24-37). 즉 시바는 므비보셋의 재산을 착복하기 위해 위기에 처한 다윗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접근하여 자기 주인을 모함하는 거짓 증거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인 다윗이 시바의 거짓 모함에 쉽게 넘어간 것은 아마도 당시 위급함과 피곤함에 지쳐 있던 자신에게 그가 따뜻한 위로와 더불어 때마침 필요했던 음식물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더욱이 많은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나 반역자 압살롬에게로 향한 외로운 상황 속에서 겉으로 보기에 호의적인 듯한 시바의 행동에 쉽게 말려들었던 듯하다.

이처럼 인간은 아침하는 자의 뇌물과 간사한 말에 쉽게 넘어갈 소지를 다분히 갖고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경우를 교훈삼아 자신의 지혜로움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신중히 행동하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16:1 마루턱. - 여기서 '마루턱' 이란 감람 산의 꼭대기를 가리킨다(삼하 15:30).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다윗을 맞는지라. 본절의 '시바'(Ziba)는 원래 사울의 종이었으나(삼하 9:2), 사울이 죽은 후(삼상 31:1-6) 다윗의 명령에 의해(삼하 9:9-11)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사환으로 일하던 자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곤경에 처한 다윗의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음흉한 목적, 곧 주인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 다윗 일행을 맞이한 것이다(Matthew Henry). 한편 시바가 들고 간 '여름 실과'는 오늘날의 '야자수 열매'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갈증을 해소시키는데 매우 적합한 실과이다(Keil). 그리고 '포도주’는 쇠약해진 사람을 위한 강장제로 사용되었던 바(잠 31:6, Matthew Henry) 당시 괴로움에 처해 있던 다윗에게 최상의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16:2 시바가 가로되…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 음흉한 시바는, 비록 지금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삼하 15:10-12) 피해 피난 길에 올라 있는 상태이지만 곧 그가 능히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리라 예상하였던 것 같다. 때문에 훗날 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지금 적절한 음식물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Lange).16:3 저가 나라를…돌리리라 하나이다. - 여기서 '저'는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 (Mephibosheth)을 가리킨다. 므비보셋의 안부를 묻는 다윗에게 시바는 마치 므비보셋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왕권 찬탈을 위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는 절뚝발이로서 도저히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삼하 9:3). 따라서 시바의 그와 같은 거짓말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즉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강탈하려고 한 모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삼하 19:24-30, Keil). 이러한 시바의 교활한 행동에서 우리는, 사악한 자들의 특성을 알 수 있는 바, 그것은 그들이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달성하는 호기로 삼는다는 것이다. 16:4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 시바의 거짓 진술에 휘말린 다윗의 경솔한 결정이다. 평소에 그렇게도 지혜롭던 다윗이 사실 확인도 없이 이처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① 재난의 상황에서 시바가 가져온 음식에 현혹되었기 때문에 다윗은 공정한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② 다윗은 거의 침체된 사울가(家)의 세력이 자신이 위기 중에 처해 있는 지금 다시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③ 다윗은 당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괴로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사려깊은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상의 제반 이유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결정은 큰 실수였다. 따라서 이에서 교훈을 얻은 우리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인간적인 실수를 경계하여야 한다(마 4:4-10; 약 1:19).

16:5-14 시므이의 저주 전단락에서는 므비보셋의 사환인 시바가 다윗을 속이고므비보셋의 재산을 착복한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1-4절). 그에 이은 본문은 또다시 다윗이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으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장면으로, 사울과 같은 족속인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부분이다. 즉 다윗이 압살름을 피해 계속 도피하는 중 바후림에 이르자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5-8절).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즉 자신의 악행의 소치로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에게서 떠난 민심을 확인하고는 슬픈 마음으로 묵묵부답피난 길을 재촉한 것이다(9-14절). 여기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된다. 하나는 편견과 만용에 사로잡힌 시므이이다. 즉 시므이는 자기가 속한 사울 가문에 대하여 지나친 우월감을 갖고 다윗을 사울의 왕위를 찬탈하고 아브넬과 이스보셋(삼하 3,4장) 등을 죽인 살인자로 매도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저주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7,8절). 그런데 다윗에 대한 그의 그러한 중오는 순전히 혈통과 지연(地)등에 사로잡힌 자의 개인적인 감정일 뿐 다윗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와는 반대로 아브넬과 이스보셋을 살해하지 아니하였으며 왕위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삼상 16:1-13). 따라서 지금 시므이의 행위는 다윗에 대한 무고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는 두가지의 중대한 죄악을 저지른 짓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차후 이 같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다윗의 용서를 받았다(삼하 19:16-20). 그러나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만은 면하지 못했다(왕상 2:36-46). 이는 이웃에 대한 편견과 독선을 버리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관용과 아량을 가지는 것이 성도의 기본 자세가 되어야 함을 교훈해 준다(출 23:4; 마 5:44; 롬 12:20). 다음으로 다른 하나는 원수의 저주까지도 하나님의 징계의 일환인 줄로 깨닫고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이다. 즉 그는 시므이를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아비새의 요청까지도 만류하며(9, 10절) 모든 것을 자기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여겼던 것이다(11절). 이것은 모든 환경과 일의 성패까지도 주관하시고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한 다윗의 신앙과 인내에서 나온 자세였다. 여기에 바로 다윗의 위대한 면모가 있다. 즉 그는 비록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긴 하나 그로 인해 낙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바라고 그분의 주권적인 은총만을 간구하는 보다 한 단계 높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할 모든 성도(엡 4:13)가 필히 본받아야 할 모본이 아닐 수 없다.

 

 

16:5 바후림. - 삼하 3:16 주석 참조.

게라의 아들…시므이. -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인 시므이(Shimei)는 사울 왕에게 충성을 다했던 자로 유다 지파인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항상 다윗을 '반역자'로 여겨 왔었다. 그러던 차에 이제 다윗이 왕궁을 버리고 도망하는 처지가 되자 이것을 기회로 다윗에 대한 저주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시므이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에 대한 베냐민 지파의 일반적인 태도라 하겠다(삼하 20:1; 왕상 2:8,9). 한편 반란이 수습되고 다윗이 개선하였을 때 시므이는 잽싸게 다윗 왕 앞에 나아와 지난날 자신의 허물을 고하고 용서를 빌어(삼하 19:16-23)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솔로몬 왕 때에 왕명 거역을 이유로 처형당하고 말았다(왕상 2:3646). 16:6 다윗과…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 본절은 시므이의 다윗 가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보여 준다. 특히 '돌을 던지는' 행위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하는 것으로서(Wycliffe), 유대인들은 죄인을 향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돌을 던졌다(요 8:1-11). 한편 시므이가 이처럼 다윗에게 돌을 던지면서까지 적개심을 보인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① 다윗이 사울 가문의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에서이다(7, 8절). 즉 시므이는 사울 가문의 인물로서 그의 문중(門中) 사람인 이스보셋의 죽음(삼하 4:1-12)과 아브넬의 죽음(삼하 3:8-27)을 다윗의 소행으로 판단했다. ②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 주었던 일(삼하 21장)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즉, 그의 돌팔매질은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사울가(家)의 몰락이 다윗의 책임이었음을 강하게 추궁하는 것이었다(Hertzberg). 그러나 다윗은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에 사실상 무관했다(Keil). 따라서 시므이는 자신의 주관적 판단, 즉 선입견으로 사실의 명확한 근거도 없이 애매하게 다윗을 저주하였던 셈이다. 이처럼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의인을 악인으로, 악인을 의인으로 낮추거나 높이는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사람에 대한 무리한 판단은 성도들도 경계하여야 할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이다(마 7:1-5, Matthew Henry). 16:7,8 다윗에 대한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고 다윗에게 그 자격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삼상 15:23; 16:1-23). 그런즉 시므이의 행위는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정하고 지파와 혈연에 근거한 이기주의의 결과이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시므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지었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하므로('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8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였다. 그가 훗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왕상 2:36-46)은 바로 이러한 그의 죄악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반역하는 자의 비참한 종말을 예시하여 주는 한 예라 하겠다.

비루한 자. - 이것은 문자적으로 '벨리알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벨리알'(Belial)은 '무익한 것', '무가치한 것'을 뜻하므로 본절은 '헛된 일을 일삼는 쓸모없는 놈'으로 직역할 수 있다(Wycliffe). 따라서 시므이는 다윗에게 엄청난 독설(毒舌)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가거라 가거라. - 다윗을 완전한 죄인으로 취급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저주받은 이방인들의 땅으로 '꺼져버리라'고 욕한 말이다. 이같은 욕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가장 천대당하고 멸시당하는 자들을 아주 혹독하게 욕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16:9 아비새. - 다윗의 이복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로서 요압의 동생이자(삼하 2:18) 다윗의 조카였다(대상 2:15,16). 특히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죽이려다 다윗의 제지를 받기도 하였으며(삼상 26:59), 블레셋의 장대한 자의 아들 이스비브놉을 죽여 다윗을 구하는 충성을 보이기도 하였다(삼하 21:16, 17). 여기서는 다윗의 충실한 군장(軍長)으로서 다윗을 호위하고 있다.

죽은 개. - 천(賊)하고 사악한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로 인간 중 가장 하찮히 여김받을 정도로 타인의 지탄과 경멸(輕)을 받는 자를 가리키던 당시의 은어(隱語)이다(삼하 9:8). 16:10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9절에서 아비새가 제안한 내용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나는 너희들의 생각과 다르다'라는 의미이다(수 22:24). 즉, 시므이의 행위가 단지 그를 죽임으로써 해결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행위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하리라고 믿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수준높은 신앙의 표현이라 하겠다.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저주하라 하심이니. - 이 구절은 시므이의 심한 모욕을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결국 그의 수준높은 신앙의 발현(發現)이라 여길 수 있는 바, 그가 그러한 모습을 견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다윗이 자신에 대한 저주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지었던 과거의 죄(삼하 11:1-27; 13:21; 14:33)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 이해했다는 말이다. ② 다윗이 그러한 모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12절). 즉 그는 온갖 모욕과 저주를 통해서라도 자신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다는 말이다(Matthew Henry).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으면 그 어떠한 일도, 그것이 비록 고통과 모욕을 주는 저주라하더라도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신앙의 결과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Wordsworth). 이것을 통하여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① 경건한 성도는 재난을 통해서 인내심을 배우는 자이다. ② 경건한 성도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고 침묵하는 자이다(욥 1:22:2:10). ③ 경건한 성도는 고통을 자신의 연단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는 자이다(잠 17:3; 롬 5:4; 히 5:14).

 

16:11 내 몸에서 난 아들도…하거든. - '내 몸에서 난 아들'은 다윗의 세번째 아들 압살롬을 가리킨다. 압살롬은 외모가 뛰어난 미남자로서(삼하 14:25) 다윗이 남달리 총애했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들에게 쫓기어 유랑길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런즉 본절은 인륜까지 무시되어지는 부패한 현실 아래서 토해내는 다윗의 절규라 하겠다.

저주하게 버려두라. - 다윗이 주변 사람들에게 시므이의 행위를 그대로 용납하라고 명령하는 부분이다. 이는 곧 첫째, 자신의 아들도자기를 죽이려 하는데 하물며 사울 가문의 족속이야자기를 저주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는 그의 인생관 때문이었으며, 둘째, 시므이의 저주가 다윗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기는 그의 신앙관 때문이었다.16:12 나의 원통함을 갚아 주시리라. - 여기서 '원통함'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인'( )은 맛소라 본문(Masoretes)에서 '나의 눈물'로 번역되어 당시 '다윗의 비참한 신세'를 의미하는 것처럼 쓰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실상 '사악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윗의 원래 지은 죄'를 의미한다(Keil). 즉 다윗은 시므이의 악의에 찬 모독을 밧세바와의 간통 사건(삼하 11장), 암논의 다말 추행 사건(13: 10-14)을 관망한 행위(삼하 14:33) 등의 다윗 자신의 범죄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다윗이 이러한 궁지에서 조차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 내지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다윗은 ①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분노라고 여겼으며 ② 인간의 범죄를 하나님이 결코 좌시(坐視)하지 않으시나 ③ 범죄로 인한 고통의 기간이 경과한 후 분명 그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점이다(Keil). 다시 말해 다윗은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던 것이다('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16:13 저를 향하여…티끌을 날리더라. - 시므이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침묵이 계속되자 시므이는 더욱 흥분하여 다윗 일행을 따라가면서까지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다. 마치 골고다 언덕 위에 매달린 침묵의 예수와 그를 조롱하는 무리들의 모습을 미리 보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시므이의 패역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티끌을 날리다'란 말은 '먼지를 일으키다'는 의미이다. 시므이는 다윗과 그 수행원을 모독하는 의미에서 짐짓 그들 앞에서 먼지를 일으킨 것이다.16:14 곤비하여. - 이 말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①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예핌'( )은 '피곤하다'의 뜻으로 육신적, 정신적으로 지친 다윗과 그의 백성을 묘사한 것이라는 견해(KJV, Jamison)이다. ② 히브리어 '아예핌'을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이러한 해석은 문미(文尾)에 번역된 '거기서'(개역 성경)가 다윗과 그 백성이 휴식을 취한 한 장소를 지시한다고 해석하여 '아에핌'을 그 일행이 휴식한 장소로 보는 견해이다(Keil, Lange, Böttcher). 이들 두 견해 중 어느 것을 취해도 문맥은 크게 손상되지 않는다. 단지 2 외견해를 수용할 경우 다윗과 그 일행이 쉰 장소가 정확히 어딘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 대두될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선 '아예핌'이 바후림을 지나(5절) 요단 강 근처 길갈과 여리고 가까이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16:15-23 후새의 거짓 환대와 아히도벨의 모략

전단락에서는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본 사실을 살펴보았다(5-14절). 그에 이은 본문은 후새가 앞서 다윗의 지시대로(삼하 15:34-36) 예루살렘에 들어온 압살롬을 거짓 환대하는 장면이다(15-19절). 그리고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좇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장면이다(20-23절). 여기서 우리는 압살롬의 어리석음과 추악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압살롬의 어리석음은 그가 후새의 거짓 환대에 속았다는 점이다. 물론 압살롬은 혹시라도 있을 다윗의 계략에 대비하여 후새를 의심하기도 했다(17절). 사실 후새는 다윗의 절친한 친구였기에 압살롬이 그에게 의심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후새의 거짓 충성 맹세에 속아 결국 후새를 자신의 측근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 것이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신 결과이긴 하나 압살롬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실수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압살롬의 반역 정권은 장차 후새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퇴락의 길을 걸어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기 때문이다(삼하 17:6-14,3). 다음으로 압살롬의 추악함은 아히도벨의 간악한 모략에 미혹되어 온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21,22절). 물론 근세에 이르기까지 왕위찬탈자들이 패망한 전왕의 처첩을 취하는 것은 왕위장악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이자 관례였다. 그러나 그같은 관례가 있다 해도 압살롬의 행위는 지나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부친의 후궁들과 동침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이 엄히 금하는 일종의 근친 상간을 저지른 것이자(레 18:7,8), 기본적 인륜에도 어긋나는 짓이었다(고전 5:1). 따라서 이처럼 도덕성을 결여한 압살롬의 정권이 마침내 몰락하고 말리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예상되는 일이었다. 한편 이러한 압살롬의 범죄는 하나님의 예언(삼하 12:11)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모략과 행동을 통해 다윗의 범죄에 대하여 이미 예고했던 징계를 내리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히도벨과 압살롬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불의를 용납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삼하 17:23:18:9-18).

 

16:15-19 후새는 다윗의 조치에 따라(삼하 15:34-37) 압살롬과 그의 모사 아히도벨이 이끄는 반란군이 점령한 예루살렘 성에 사생(死生)을 무릅쓰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후 후새는 압살롬의 반역 무리들을 와해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삼하 17:6-14, 23). 이처럼 자신의 주인(다윗)에 대한 후새의 충성과 나라(이스라엘)에 대한 헌신은 모든 성도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즉 후새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 역시 늘 충성과 헌신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수 2장; 마 24:45; 눅 16:10-12; 계 2:10).

 

16:15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 이 말은 압살롬을 추종하여 따르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데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 '이스라엘', '이스라엘 무리'(삼하 17:14; 18: 6,7) 등으로 표현되었다. 결국 우리는 본절에서 다윗의 세력은 미미한 반면, 압살롬의 세력은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있었음을(Pulpit Commentary)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 승리자는 다윗이었던 점을 감안해 볼 때, 본절은 때로 실수하여 범죄하기도 하며 또 보잘것없는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세력이 절대 다수의 악한 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본서 저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아히도벨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 압살롬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뒤에 나오는 후궁 겁탈 사건이 일어났음 (20-23절)을 암시해주는 구절이다.

 

16:16 왕이여 만세. - 다윗을 돕기 위해 거짓 투항한 후새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왕이여 길이 사시옵소서'라고 압살롬을 환영하고 있다. 여기서 '만세'는 우리말로는 감탄사로 자주 사용되어 승리나 번영을 축복, 기원하는 말로 쓰이는데, 공동 번역은 '임금님 만수무강을 빕니다'라고 역(譯)하고 있다.

 

16:17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 여기에 쓰인 '후대' (厚待)라는 말은 임금과 신하 사이의 충성을 맹세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의 막역한 친구였던 후새가 자기에게로 와서 협력하는 것이 다윗의 신하된 자로서 합당한 일이냐는, 후새의 의중(意中)을 파악하고자 하는 질문이다.

 

16:18 여호와와…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 - 후새는 압살롬의 의심을 말끔하게 없애버리고 신임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압살롬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압살롬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당시 시대적 상황(압살롬 천하) 아래서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압살롬의 신임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아무튼 젊은 군왕 압살롬은 후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압살롬의 신임을 얻기 위해 마지못해 압살롬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는 후새의 아침에 눈이 어두워 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압살롬은 후새를 그의 핵심 참모로 인정하고 말았다(삼하 17:5).

 

16:19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같이. - 후새가 압살롬을 완전히 속이는 장면으로, 계통(系統)을 따라서 충성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다윗이 엄연히 이스라엘 왕으로 살아있긴 하지만, 반역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압살롬에게 있어서 다윗의 강자요 후세사건 그를 섬기겠다는 후새의 말은, 대외적인 모양새로 보아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명분을 제공받는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하여 압살롬은 다윗의 친구였던 후새를 자기의 편으로 생각했으며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16:20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 여기서 '가르쳐라'(하부)는 단어는 복수형으로 쓰여, 결국 이 말은 '너희는 모략을 베풀어라'는 뜻이 된다. 죽어 말은 아히도벨을 중심으로 한 여러 모사들에게 이미 탈취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비책을 생각해내라는 알살롬의 요구라 하겠다(Lange, Keil).

 

16:21 왕의 아버지가…궁을 지키게 한. - 다윗이 도망갈 때 궁을 관리하고 지키게 하려고 궁에 남겨 두었던 열 명의 후궁들을 가리킨다(삼하 15:16).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 이것은 압살롬이 명실 상부(名實相符)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표시로서, 압살롬에게 일러준 아히도벨의 모략이다. 당시 근동 국가에서는 차기 왕권 계승자가 전(前)왕의 후궁들을 자신의 후궁으로 취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전왕의 소유물 전부를 인수(引手)했다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아히도벨은 이러한 고대 근동의 일반적 관례를 압살롬에게 주지시킴으로써 그의 왕권을 가시화(可視化)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계략 속에 나타난 아히도벨의 궁극적인 의도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① 다윗과 압살롬과의 화해를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계략이다. 즉 아히도벨은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할 경우 자신이 반역죄로 처단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다윗과 압살롬이 전혀 화해할여지를 갖게 못하게 하기 위해 다윗이 가장 증오스럽게 여길만한 행위를 압살롬에게 권한 것이다(Matthew Henry, Keil). ② 압살롬을 따르는 반역 무리들의 기세가 더욱 등등하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③ 다윗의 밧세바에 대한 간통 사건과 관련, 다윗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다. 즉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로서(삼하 23:24: 대상 3:5), 그의 손녀에 대한 다윗의 간음 행위를 압살롬을 통해서 복수하고자 한 것이다(Eerdmann, Matthew Henry). 그러나 이러한 아히도벨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략은 다윗을 징치하고자 한 하나님의 섭리를 실현시키는 수단이 되었을 뿐이었다(삼하 12:11, Keil).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두가지 속성을 알게 된다. ① 전우주적인 영역을 포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출 15:18; 대하 20:6; 시 24:10; 잠 21: 1; 사 44:25; 계 19:6)과 ② 악인의 행위를 의인을 위한 막대기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잠 26:3; 욥 9:34) 등이다.

 

16:22 지붕에. - 이 장소는 다윗이 범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곳이다. 즉 이곳은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던 모습을 보므로써 욕정에 사로잡힌 장소인 것이다(삼하 11:2). 바로 이곳에서 그의 아들 압살롬이 또다시 욕정에 사로잡힌 행위, 즉 아비의 후궁들과 동침을 행한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지붕'이라는 한 장소가 우상 숭배의 처소로 사용되면 멸망당할 곳으로(왕하 23:12; 습 1:5),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되면 그의 계시와 축복이 임하는 곳으로(수 2:6-8; 막 2:4; 13:15: 눅 17:31; 행 10:9), 변화됨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선용하여야 한다.

장막을 치니. - 왕과 그의 가족들이 집의 평평한 지붕 위에다 햇볕을 피하고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또한 비를 피하기 위해 천막(tent)을 친 것을 가리킨다.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동침하니라. -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삼하 12:11) 아히도벨의 모략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고 있는 장면이다. 즉 다윗 자신이 우리아의 집에 대하여 저지른 것과 똑같은 일을, 이번엔 그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되돌려 받고 있는 것이다.

 

16:23 아히도벨의…모략은…이와 같더라. - 다시 말해서, '아히도벨의 모략은 아버지 다윗에게나 그의 아들인 압살롬에게 있어서 똑같이 절대적 영향력이 있었다'라는 뜻이다(Eerdmann). 특히 본절에서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이란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알았던 '하나님의 뜻'이다(5:19,23; 삿 1:1; 18:5; 20:18,23,27). 이는 곧 아히도벨의 모략이 실제로는 매우 인간적인 지식의 소산(所産)이었음에도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아히도벨의 모략이 왜 악하게 쓰였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아히도벨의 마음 중심이 '선'(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결과었다. 즉 그는 훌륭한 지혜와 지식을 소유했지만, 선한 양심 그리고 바른 신앙이 결여되었기에 악인으로 전락(轉落)된 것이었다(Lange, Hertzberg, Wycliffe).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얻기에 힘쓰되, 이것을 '바른 신앙'이라는 그룻에 담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선한 곳에 쓰여지도륵 노력하여야 한다(엡 2:10; 골 1:10; 살전 2:12; 벧후 3:14; 요삼 1:3,4).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