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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기차

작성자JaeminPark|작성시간22.02.11|조회수61 목록 댓글 0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

 파트 원: 새벽

 챕터1: How to Get Out of Bed like Marcus Aurelius

 

 작가는 기차 객실에서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기차가 거세게 흔들리는 바람에 그는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한 상태였다. 식당 칸 안내원, 미스 올리버 때문에 다시 잠에 들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비몽사몽한 분위기에서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떠올린다.

 마르쿠스는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인 특이한 인물이었다. 마르쿠스는 50만 명에 달하는 군대,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거주하는 대제국을 지배했다. 작가와 마르쿠스는 전혀 비슷한 인물이 아니다. 수백 년의 시간은 물론이고 엄청난 권력 차이도 있다. 작가는 자신의 책상 대략 절반 정도만 지배하며, 평생 명함, 잡지 구독 알림, 고양이 털, 3일 된 참치 샌드위치, 고양이, 자질구레한 불교 장신구, 커피 머그잔, 개, 세금 보고 서류, 다시 고양이, 그리고 도대체 왜 책상 위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모래의 반란을 물리치는 중이다. 그럼에도 마르쿠스와 작가에게는 공통의 적이 있었다. 바로 아침이다.

 <패스트>의 저자 알베르 카뮈는 자살이 '유일하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라 말했다.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을까?라는 이 질문이 가장 진지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작가가 생각하는 '유일하게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까?이다. 우리는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까? 우리는 침대 위에 편안함을 느끼며 그 안락함에 머무를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침대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처럼 침대 위야말로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아니 잠깐, 과연 편안함과 안락함이라는 이 쾌락이 우리가 삶을 사는 이유일까? 우리의 이 짧고 귀한 인생을 평생 가로로 누워서 보내고 싶은가? 마르쿠스의 책 <명상록>은 온통 이런 이야기로 둘러싸여 있다. 진실을 찾아가는 마르쿠스의 고뇌로 말이다.

 작가의 열세 살 난 딸 소냐도 자는 걸 좋아한다. 주중 아침에 소냐를 침대 밖으로 끌어내려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로 보지 못한 자원의 집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주말에는 아주 벌떡 일어난다. 이렇게 주중과 주말이 다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릴 침대 밖으로 꺼내는 것은 '활동'이지 '알람시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처럼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쿠스에게는 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사명'이지 '의무'가 아니다. 의무처럼 나를 보호하고 나만을 생각하는 일이 아닌 '사명', 나와 타인을 높이는 자발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작가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는 일어날 사명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일어나는 것은 굉장히 쉬웠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기차가 흔들려 그는 다시 침대로 넘어졌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5분만 더."

 챕터2: How to Wonder like Socrates

 생각은 마치 기차와도 같다. 기차가 여러 칸이 줄줄이 연결되어 있듯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이어진다. 작가는 유명한 철학자 제이콥 니들먼을 찾아갔던 일을 회상한다. 제이콥은 질문은 경험해야한다 말하며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경험한 대표적인 예라 말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철학자들은 많았고 질문을 던진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은 하나 같이 우리의 지구는 어떻게 생겨난걸까? 세상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물질이 무엇일까? 등 우리 삶에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질문이 아닌 우리의 삶에 대한 질문이 가장 중요하고 경험할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했다.

 이 질문은 시리나 빅스비에게 질문하는 것과 다르다. 삶이란 뭔지 질문이란 뭔지 아무리 질문해봐도 그들은 정의만을 내놓을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알려주는 정보가 아닌 그 이면에 있는 의미이다. 마치 초콜릿을 만드는 방법이 아닌 초콜릿을 먹어야 하는 이유 같이 말이다. 빠르게 답을 찾는 것이 아닌 천천히 심사숙고하며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 삶은 의미 없는 삶일 뿐이다. 이런 고민과 질문이 쓸데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도, 의미있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도, 당신이 원하는 그 어떤 사람도 될 수 없을테니까. 당신이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기에.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챕터2를 마치겠다. 좋은 사람이란 무엇일까?

(나의 답은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렇게 되길 노력하는 사람이다. <데미안>에서 얘기하듯 세상은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행동에 따라서 좋은 사람이 되기 보다는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고민할 때야 말로 좋은 것에 다가갈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챕터3: How to Walk like Rousseau

 빅터 휴고는 기차를 타고는 너무 속도가 빨라 온 세상이 흐릿한 줄로 보인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그 기차의 속도는 무려 시속 약 24킬로미터 정도였다. 자전거도 그 정도 속도는 된다. 우리가 이 점에 크게 놀라는 것처럼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컴퓨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이제는 누구나 손에 컴퓨터가 들려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장 자크 루소는 변하기를 거부했다.

 장 자크 루소는 일을 끝내고 밤에 도시 밖을 나갔다가 도시 출입구가 닫혀 밖에서 잠을 잔 이후로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의 시선, 사회의 요구를 신경쓰지 않고 걸었다. 방방곡곡을 걸어다니며 사회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루소는 amour-de-soi, 즉 자신을 위한 사랑, 행복을 느껴야한다 생각했다. 사회가 원하는 행동, 모두가 따르는 유행이 아닌, 내 감정과 내 생각에 따라 말이다.

 작가나, 나나, 그렇게 자연과 연관된 사람은 아니다. 우리 모두 캠핑을 좋아한다거나, 낚시를 간다거나, 등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도시 토박이라 자연에 대한 경험이라곤 집 앞에 있는 호수 공원뿐이다. 이렇게 자연과 떨어져있는 우리에게 그나마 가장 자연스러운 원초적인 행동은 바로 걷기다. 루소가 했던 것처럼 그냥 목적지에 가거나 운동을 위해 빠르게 걷는 것이 아닌 적당한 속도로 걸으면서 내 마음과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 마이클쌤은 챕터 3를 읽고(비록 끝까지 읽지는 못하셨지만) 중요한 질문을 하셨다. '도시와 시골 중 어느 것이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 유익할까?' 이것은 절대적인 답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좋은 곳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쌤은 시골이 더 좋다고 생각하셨다. 시골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적어도 지혜를 얻기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삶의 진리를 통달한 사람들은 대부분 산이나 동굴에서 나온다. 자연은 도대체 무엇일까? 루소 같은 사람들이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자연 때문일까? 자연은 어떻게 지혜를 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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