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근본, 하지만 근본은 없다.
애벌레는 애벌레답게 살아야 한다. 작고 연약해도 열심히 잎을 뜯어먹으며 결국 번데기가 된다. 번데기는 번데기답게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서 열심히 나비가 될 그 날을 꿈꾸며 일한다. 그렇게 자신 답게 산 그 생물은 나비가 된다. 나비가 되려면 애벌레 때에는 애벌레답게, 번데기일 떼에는 번데기답게 살아야 한다. 어떨 때는 욕망을 누르고, 어떨 때는 더불어 살며 결국 나비가 된다. 하지만 그 존재가 하나 몰랐던 점이 있다면 나비의 날개는 오래전부터 잘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자신답게 살았던 생물의 마지막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추락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공자는 분명 원인을 통해 결과가 나온다는 인과론을 신뢰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려면 분명히 그 결과가 나오기에 옳은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어떤 결과의 기반에 옳은 원인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을 넘어 결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면서 인하지 않으면 예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면서 인하지 않으면 악이 무슨 소용인가? (팔일편 3장)”
악(무용, 시, 음악 등의 예술)은 당시 지식인, 정치인 계층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할 덕목이었고 또한 공자의 관심사이자, 즐거움이기도 하였다(3.23,3.25). 이런 악의 근원은 인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이라는 원인을 통해 악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악이 인이라는 원인을 통해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무이다.
“계시는 팔일무를 뜰에서 추게 했으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차마 할 수 없을까? (팔일편 1장)”
오로지 천자에게만 허용되는 의식인 팔일무를 제후의 제사에서 추게 한 계평자를 공자는 나무란다. 제사에 있어서도 결과는 옳은 원인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옛날부터 이어져온 원인(천자에게만 허용되는 의식)이 없는데 결과(팔일무)가 나오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임방이 예의 근본에 대해 여쭈었다. 예는 상례는 손에 익게 처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낫다(팔일편 4장)” 제사의 원인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슬픔이다. 그런 제사를 손에 익게 별다른 감흥 없이 형식과 절차처럼 행하는 것은 그 원인 예에 반하는 결과이다. 만약 제사의 원인이 조상에 대한 슬픔이라면 그것은 예의 근본으로 불린다.
이제 공자의 인과론은 단순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닌 근본과 결과의 관계다. 이런 근본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수단이 된다. 공자는 관중이 왕과 비슷한 호사를 누리며 아내를 부고, 집안일을 하는 가신을 둔 것을 보고 “관중의 그릇은 작았구나! 관씨가 만일 예를 알았다고 한다면 누군들 예를 몰랐다고 하겠는가? (팔일편 22장)”하고 나무란다.
또한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않고, 예를 행하면서 공경하지 않고, 상을 당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으로써 그런 사람을 관찰할 수 있겠는가? (3.26)” 하며 자리만 윗자리지 그 근본이 없어 관찰할 것이 없는 거짓 군자들을 말하기도 한다.
이토록 강조하는 근본 그 근본은 예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그런 예의 근본은 무엇일까? 팔일편 8장에서는 자하와 공자의 대화가 나온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만든 이후의 일이다.’ ‘예는 인의 다음에 온다는 것입니까?’ ‘나를 일깨우는 자는 상이로구나!’”
예의 근본은 인이다. 그렇다면 인의 근본, 곧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이면서 인하지 않으면 예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면서 인하지 않으면 악이 무슨 소용인가? (팔일편 3장)”
인이라는 결과를 행할 수 있는 원인은 곧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인을 하고, 인하기 때문에 예로 행하고, 예로 행하지 때문에 악을 하고, 제사를 드리고, 위 아래를 지키며, 윗자리에 올라가 신하를 예로 부리는 것이다(3.19). 반대로 올라가 본다면 임금은 예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성으로 섬기며, 온전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고, 예로 악을 하고, 예하고 인한 것. 이것이 곧 사람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이것이 모든 일의 근본, 옳은 원인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놀랍다. 그 이유는 공자의 말이 결국 다시 성경을 펼치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 프로이트의 이론을 공부하였다. 프로이트도 인과론을 극한으로 수용하여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인을 찾기에 평생을 투자하였다. 프로이트의 결론은 인간의 모든 행동은 무의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무의식은 인간의 본능이며, 열정이자 욕망, 욕구였다. 그런 무의식의 욕망을 프로이트는 리비도로 정리하는데 리비도는 성적, 육체적 욕구이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신 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파괴적 욕구로 정의한다. 이런 욕구는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사라지거나 줄어들지 않고 항상 무의식속에 남아 있어 어떤 형태로든 표출되는 현상을 목격한다.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러 비판적인 이론이 많고 그의 직속 제자인 칼 융도 반박하는 책을 냈다. 나도 프로이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무의식과 그 속의 욕망과 욕구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굳이 무의식까지 가지 않아도 평범하게 의식할 수 있는 나의 정신속에도 역겨운 욕망과 욕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인하고 예가 있어서 아름답게 서로 아울려져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그 안에는 개인적이고 파괴적인 욕망과 욕구가 있어서 모든 것을 무너트린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공자의 가르침까지 무너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자는 지금 인간의 근본 상태가 인하고 예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 인간의 근본 상태가 인과 예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지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의 가르침에 큰 상처를 내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인간이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모든 일의 옳은 근본인데 그 인간답게 사는 것이 사실 그 안에 역겨운 욕망과 욕구가 인다면 어떻게 그것이 옳은 근본이 되겠는가? 만약 공자가 말하는 인간답게 하는 것이 욕망과 욕구를 배척하고 인과 예를 지켜 상호간에 덕과 예의를 지키며 사는 것이라면 그것은 애초에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닌 공자의 이론속의 군자처럼 사는 것 아닌가? 즉 공자는 그토록 근본을 강조했지만 사실 근본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이상형인 군자에 맞추어져 사람들이 변하길 바란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론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냥 근본의 기준을 인간답게에서 군주답게로 바꾸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문제가 된다. 인간은 인간답게 산다.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이것이 인간의 근본이자 인간 존재의 원인이다. 만약 이 원리에서 인간을 때어 놓으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 하다. 왜냐하면 올바른 인과관게,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않으면 군주처럼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분명 군주처럼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물에 불과할 것이며 그 근본은 뒤틀리고 엉클어진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
공자의 말을 따라가다가 찾은 근본은 인과 예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지만 정말 인간인 나를 보면서 찾은 근본은 욕망과 욕구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다. 공자의 말처럼 근본을 바꾸려 노력해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이다. 애벌레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나비가 되려고 해도 그 나비의 날개가 잘려져 있으면 어찌 애벌레 그것을 바꾸겠는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정도는 있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성경을 찾는다. 성경도 똑같이 이상을 말하지만 그 이상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닌 신이자 인간인 예수답게 사는 것이며 그 삶은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신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 은혜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욕을 먹지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인간이 아닌 이상적인 군주로써, 예수로써 살 수 있는지를 정확히 설명할 하고 실행하는 법을 안다면 왜 살지는 그렇게 살 지 못하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신만이 그 파훼법을 알고 인간에게 그것을 오로지 은혜만으로 베풀고 인간은 받을 뿐이라는 설명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매력적이다. 이 미련한 진리가 위대한 공자의 말씀보다 달콤한 이유는 공자는 인간의 비참함과 그 파훼법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미련한 진리는 설명해내기 때문이다.
군자보다는 다윗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