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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빌립보서]기쁨은 어디서 오는가(빌립보서 강론 1)

작성자김기현|작성시간19.10.06|조회수756 목록 댓글 0

말 씀 : 빌립보서 11- 11

제 목 :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일 시 : 2019. 10. 5.

 

잃어버린 기쁨을 찾아서

 

한국은 기적을 일구었지만, 기쁨을 잃었다.”

 

1.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인 다니엘 튜더의 말이다. 세계 최빈국에 가까웠던 한국은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그야말로 기적의 나라이다. 경제뿐이겠는가. 민주주의도 발전했고 정착했다. 전후에 독립한 나라 중에 저 둘 중 하나를 이룬 나라도 많지 않은데, 하물며 경제와 민주주의 둘 다를 쟁취한 나라는 드물다. 어쩌면 예외적인 국가가 우리나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빛나는 성취는 그에 따른 대가지불이 있었다. 튜더는 무한 경쟁으로 성공하고 성장했지만, 그로 인해 정작 중요한 인생의 행복과 기쁨 같은 정신적인 유산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경제적 기적은 일구었지만, 내면적 기쁨은 상실하였다. 오로지 물질적 풍요를 위해 내달리다 보니, 그리고 어느 정도 정상에 올라 돌아보니 영혼과 정신 세계가 가난하기 이를 데 없다. “단군 이래 최대의 물질적 풍요의 시대, 단군 이래 최고의 정신적 빈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기쁨의 상실, 경제적 풍요 속에서도 기쁨의 상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정신과 내면의 서글픈 진풍경이다.

 

2.

문제는 이것이 우리 사회 전체에 편만할 뿐만 아니라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론에서 말한 대로 예수 믿는 것이, 교회 다닌 것이 기쁨일까? 마지못한 억지요 의무일까?

 

그런데도 많은 신앙의 선배들과 책들은 신앙의 본령이 기쁨이라고 주장한다. 대중적으로 최고의 히트를 친 릭 워렌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목적을 두고, 그 목적을 완수하도록 이끄신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다섯 가지인데, 그 중 제일이자 첫 번째가 요 제일은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이다.

 

기쁨의 신학자라는 타이틀을 보유한 존 파이퍼 목사는 기독교 희락주의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웨스터민스터의 신앙고백 중 첫 번째 것의 순서를 뒤집은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그 고백문에서 영광 보다 기쁨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먼저이고,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저 말은 우리 신앙의 목적과 방향을 지시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저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매일의 일상 속에서도 기쁨을 맛보며 살아야 하는데, 신앙은 의무와 강요가 되었고, 생활은 이러저러한 스트레스로 무거운 짐을 지며 살고 있다.

 

3.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쁨, 그 기쁨을 어디에서 잃었는지를 보고자 한다. 긍정적으로 질문을 바꾸어 보자. 참된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가? 기쁨의 기원, 또는 출처를 아는 것이 첫 출발지일 것이다. , 잃어버린 기쁨을 찾으러 가볼까?

 

첫째, 그리스도에게서 온다(1-2).

 

그리스도인에게서 기쁨의 발원지는 그리스도이다. 너무나 빤한 대답이다. 언제나 그렇듯 익숙하고 진부한 그것에 오래된 진실이 감춰져 있는 법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인가? 왜 그분에게서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1.

먼저 본문을 살펴보자. 1-2절은 편지의 인사말이다.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정체를 밝히고 인사를 건넨다. 우리 동양에서는 발신자는 편지의 제일 뒤쪽에 배치하는 것과 다르다.

 

이런 인사말이기에 가벼이 여기고 다음 본문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맹수는 사냥감을 위해 전심전력 질주한다. 만약 실패하면 성공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비행기는 막 이륙하는 그 순간에 최고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모든 글은 첫 문장에서 성패가 갈린다. 첫 문장은 마치 맹아, 곧 씨앗과 같다. 모든 것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미완이기도 하지만, 완성을 품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일체의 수식도, 자신에 대한 강력한 수사나 화려한 장식이 없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바울이 쓴 다른 서신을 보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장황하게 말하는 것을 종종 본다. 대표적인 것이 갈라디아서이리라.

 

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이

 

거울 독법이라고 한다. 저 말의 반대편을 생각해보면, 저렇게 길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여건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바울의 사도됨과 복음에 대한 심각한 이의제기가 있었다.

 

그러면 왜 빌립보서는 심플한가? 갈라디아서가 신적 저주를 퍼부을 만큼 갈등 상황을 있었기 때문이라면, 빌립보서는 그런 어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이심전심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겠다. 자기가 자기를 변호하지 않아도 충분한 존중과 권위를 인정 받는 마당에 뭣 하러 그리 기다랗게 자기를 소개하겠는가.

 

그런데 빌립보서의 자기소개에는 다른 서신과 비교해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대로 장황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딱 한 단어로 자기를 표현했다. 바로 이다. 먼저 이 번역어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야겠다. 종이라는 단어의 영어는 slave이다. 헬라어는 단수로는 둘로스복수로는 둘로이이다. 문자적 번역을 취한다면, 아니 의미에 맞갖는 번역을 한다면, ‘노예가 적절하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는 이라고 읽지만 마음으로는 노예라고 읽어야 본문의 의미가 확 살아난다.

 

이런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이다. 지금은 십자가야 우리를 장식하는 액세서리로 그만이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1세기 당시의 최악의 사형도구이었다. 17세기 프랑스 혁명 당시의 단두대, 아니면 총살형, 또는 교수형의 그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십자가라는 말을 단두대 또는 총살형으로 바꾸어 읽는다. 그러면 그야말로 소름 돋는다. 전율이 인다. 내가 믿는 바, 내가 본 받고자 한다고 말한 그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수백 쪽의 두터운 신학 서적보다 더 확실하게 깨닫게 해 준다. 본회퍼의 말대로 예수 믿는 것은 죽는 길이구나, 죽어야 사는 길이구나, 라는 것을 절실하게 다가온다.

 

아무튼, ‘노예로 바꾸어 읽을 때, 우리는 목회자를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호명하는 것이 얼마나 해괴망측한지를 알게 된다. 물론, 노예의 히브리어의 사용 용례는 구약의 선지자나 왕, 제사장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다. 특별한 호칭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종은 따로 구별된 존재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노예라고 호명하는 순간, 그의 존재는 자기 스스로에 의해 규정하지 않는다. 주인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누구인가? 저 물음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2.

그러면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예수는 누구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 11절에는 예수에 대한 어떤 장식이 없다. 그것을 편지의 중간 부분에서 분명히 알려줄 것이다. 잘라 말하자. 예수도 종이다. 빌립보서 25-11절을 보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되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자처한 분,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노예이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철두철미 노예의 삶을 사셨다.

 

노예라 함은,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였거나 소유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기 의지와 의도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내 맘대로 사는 게 아니고 주 맘대로 산다. 예수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예수가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을 좋아하고, 예수가 열심을 내는 일에 나도 열심히 일한다. 예수가 내게 구하는 열매를 맺는 것이, 주인된 예수가 하라고 하는 일은 마치 내 일처럼 헌신하는 것이, 아니 내 일이기에 마땅히 해야 하고,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 나는 예수의 노예이니까.

 

3.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은 왜 기쁨은 예수에게서 오는가? 그리고 그냥 예수가 아니고 당신 자신도 노예인 예수, 우리를 노예로 삼는 예수, 그가 왜 기쁨의 근원인가?

 

나는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두 가지로 말하려고 한다. 먼저는 예수 자신에게서 이다. 1절 안에서 발견한 대답이다. 예수가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정적인 형태로 말하면 이렇다. 예수가 아닌 것에서 기쁨을 구하지 말라!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가 있으니 빌립보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도행전 16장의 스토리이다. 당시로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던 빌립보는 그 동안의 선교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곳은 로마의 세계관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로마의 식민지(Colony)이다. 그곳에서 예수를 전한다는, 로마의 풍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그들은 감옥에 갇혔다. 그러고보니 빌립보에서 투옥되었던 바울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그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감옥 안에서 바울과 동역자 실라가 한 일은 노래하는 일이었다. 엄청난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처량한 노래를 불렀지 싶다. 그러나 성서는 그들의 노래를 찬송이라고 지명한다. 찬송이라. 찬송의 영어, praise는 칭찬이다. 누군가를 높이는 말이고 노래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를 믿는 신앙으로 감옥에 갇혀도 그 예수를 찬양한다. 그들의 노래는 뜨겁고도 강렬했을까? 아니면 음유시인의 그것처럼 나지막하고도 읊조리는 듯한 것이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하여간 그 노래는 감옥을 뒤흔들었고, 열려진 문으로 그들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죄수들마저 해방된다.

 

그렇다. 그들 가슴 속에는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예수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만 있으면 기쁨이 있고, 예수가 없다면 기쁨은 없다. 상황과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깊고도 깊은 바다처럼 흔들리지 않는,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와 기쁨의 관계를 성찰해야 한다. 공식으로 말하면, 예수 = 기쁨일까? 나의 대답은 예 그러나 아니오, 이다. 정녕 예수 외에는 기쁨은 없다는 점에서 이다. 그러나 예수는 기쁨 보다 더 크고, 근원적이다. 그러기에 아니오인 것이다.

 

4.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이가 있으니,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라는 칭호의 사람, C. S. 루이스이다. 그는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마침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일련의 과정을 느릿느릿 기술한다. 특이한 것은 자서전의 제목이다. 예기치 못한 기쁨이다. Surprised by Joy이다. 기쁨으로 인해 깜짝 놀랐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어릴 적 북유럽 신화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바로 그 기쁨을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진정하고도 참된 기쁨을 발견했다는 스토리이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판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자기 자서전에서 기쁨이라는 말이 사라졌고, 왜 그것이 안 보이는가를 묻고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 주제에 거의 흥미를 잃고 말았다.”(340) 그는 하나의 비유를 든다. 길을 잃고 헤맬 때 길을 찾는 법은 표지판을 보는 것이다. 다시 길 위에 섰을 때, 그는 표지판을 다시 한 번 흘낏 쳐다볼 수는 있어도 언제까지나 그것을 보고 있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이전에 그가 문학 작품에서 느꼈던 그 기쁨은 하나의 표지판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 것에서 경험했던 그 기쁨은 참된 기쁨의 빛으로 보면, 그 역시 기쁨이다. 속된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진정하고도 영원한 기쁨을 가리키는 지시봉이요, 손가락이요, 방향등인 것이다. 그것 없이는 기쁨 중의 기쁨을 알 수도, 만날 수도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다. 지금껏 누렸던 기쁨의 근원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기쁨에 비하면 이전의 기쁨은 정말이지 하찮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루이스 이야기를 하나 더 하도록 하자. 루이스의 유명한 설교 중 하나인데, 제목이 영광의 무게이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의 편견 하나를 지목한다.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고 간절히 누리고 싶어하는 것은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 말이다. 그것은 칸트나 스토아 사상일 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는 진짜로, 진실로 행복하고 기뻐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작고 어이없는 것들에 우리의 진액을 쏟는다. 무한한 기쁨 대신 술과 섹스에 집착하고, 바닷가에서의 하루의 휴일 보다 빈민가 한 구석에서 진흙 파이를 만들며 놀고 싶어 하는 아이와 같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경험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털며 일어설 수 있다. 기쁨이 될 수 없는 것, 잠시 잠간 기뻐했다가 결국은 쓴 웃음을 짓게 하는 그런 것들을 저 영원한 기쁨의 관점에서 내려놓음, 버려두고 돌아설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예수가 기쁨이며, 예수는 기쁨 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노예이고자 한 예수처럼, 그리고 예수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는 노예들에게 기쁨은 주인에게서 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5.

두 가지를 말한다고 했으니 이제 두 번째 것을 보자. 다시 말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른 데서 찾으면 안 된다. 1절 다음은 2절이다. 1절을 읽었으면 응당 2절을 읽어야 하고, 1절에서 대답도 얻었지만, 질문도 생겼다면, 이 또한 대답은 2절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2절은 아다시피 수신자들에게 건네는 바울의 축복의 인사말이다. 가장 중요한 말은 은혜와 평강이다. 물론, 은혜와 평강 보다 은혜와 평강을 주는 하나님과 예수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중요하다. 예수에 대해서는 1절에서 말하였기에 2절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예수가 주는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복잡하게 말하지 말자.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나는 이라는 말을 노예로 바꾸어 읽자고 말했는데, ‘은혜선물로 고쳐 읽었으면 좋겠다. 은혜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남발하는가,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시작하면서 grace가 얼마나 상투적인 말이 되었는가를 고발한다. 차라리 기프트로 읽으면 뜻이 환해진다.

 

루이스의 말을 빌리면 예기치 못한 선물이고, 얀시의 단어를 사용한다면, ‘어메이징한 선물이다. 입이 딱 벌어지고,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는 그런 황홀한 선물이다. 어떤 이는 귀한 줄 모르고 방치하거나 내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반응했다. 어찌 아니 기뻐할까? 어찌 아니 기쁘리오! 그래서 은혜는 기쁨이고 은혜를 받은 자가 기뻐한다. 예수가 주는 선물에서 기쁨이 오고, 예수가 주는 선물 꾸러미를 열었더니 포장 안에 곱게 담긴 것의 이름이 기쁨이었다.

 

다음은 평안이다. 은혜가 헬라인들의 인사말을 기독교화한 것이라면, 평강은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만나면 샬롬이라고 인사한단다. 들은 바에 의하면,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한단다. ‘샬롬, 샬롬, 샬롬!’ 이 샬롬의 번역어를 고르기는 여간 까다롭지 않다. 아니, 평화, 평강, 평안이라고 하면 되지 않나? 그런 반문이 생길 것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책에서 샬롬은 대략 80개의 뜻이 있다고 한다. 평화만이 아니라 복지, 건강, 안녕, 행복 등등. 인간 삶의 최고의 이상이자 목표가 저 것이 아닐까? 바로 샬롬 말이다.

 

어느 것 하나 빠짐 없이 총체적인 행복이 바로 샬롬이다. 그 샬롬이 기쁨인 것은 어느 하나 부족함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갖추어도 건강이 나쁘면 기쁨의 강도가 줄어드는 것이 인간이다. 다 갖고 있어도 돈이 없으면 어깨가 움츠러든다. 예수만 있어도 행복하지만,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고 동물이기 때문에 육체적 욕망이 충족되어야 기쁨을 누린다. 그러니까 충분조건은 아니어도 필요조건이다. 해서, 바울은 은혜만 말하지 않고 평화도 강조한다. 어느 하나만 있어도 부족하다. 은혜와 평강이 함께 있어야 우리는 기뻐한다.

 

6.

내가, 그대가 기쁨을 잃었다면, 다니엘 튜더가 말한 대로 기적같은 외적인 성공과 형통함을 얻었을지라도 예수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예수 아닌 것에서 기쁨을 구하지 말자. 예수를 구하면 기쁨도 생기거니와 기쁨을 구하면 예수도 떠나고 기쁨도 놓친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세상에서 오는 것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왜 기쁨을 잃었는가? 예수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대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와 여러분의 기쁨이다. 예수로 기뻐하는 나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한다.

 

둘째, 성도의 교제에서 온다(3-8).

 

참된 기쁨은 하나님에게서도 오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온다. 나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수직과 수평이라는 두 가지 차원 또는 지평을 자주 사용한다. 수직이 신적 차원과 신과의 관계라면, 수평은 인간적 차원이자 인간과의 관계이다. 벼락 같은 축복은 하늘에서도 오지만 땅에서도 존재한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고, 신적 차원과 인간적 차원이 겹쳐질 때, 우리의 기쁨은 확고부동해 지는 법이다.

 

1.

3-8절에 제목을 붙인다면 뭘까? 편지의 형식으로 보면, 감사이다. 바울은 수신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인사말이 끝난 다음 단락이 시작하는 첫 구절, 3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가 뒤에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감사할 때 기쁨이 오고, 기뻐해야 감사가 온다.

 

나는 여기서 감사라는 편지의 형식 보다는 감사의 내용물에 더 주목하련다. 바울은 무엇을 그토록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말을 하는 걸까? 본문 외에서, 학자들이 알려주는 것을 살짝 귀띔을 하련다. 빌립보서는 영수증’(receipt)이다. 그러니까 돈을 잘 받았다는 영수증이다. 그리고 돈을 보내주어서 고맙고, 잘 사용하겠다는 말을 전달하는 서신이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 선교 초창기부터 후원을 했다. 그러다가 확정할 수 없는 어떤 이유에 의해 중도에 중지되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가 정부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극심한 핍박과 지역 사회로부터 받은 경제적 억압, 그리고 교회 내분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시 로마 감옥에 가택 연금되어 있는 바울의 사역을 후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에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영수증 겸 감사 인사를 담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사 보다는 새번역에서 동참’, 개역 개정은 참여’, 공동번역은 협력’, 개역에서는 교제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니아를 핵심이라고 말해도 된다. 실제로 코이노니아는 저렇게 번역하기 전에 일차적인 의미는 동업자이다. 사업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어떤 목표를 위해 몇 명이 분담금을 내고 사업을 같이 하는데, 그 사람들을, 그렇게 하는 행동을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코이노니아를 하고 있어라는 말은 동업자라는 것이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같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야 교제 혹은 동참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저것의 본래적 의미는 물질적 나눔이다.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 바울에게 물질적 후원을 한 것을 가리키는 딱 어울리는 단어가 바로 이 코이노니아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저 단어의 의미를 심화시킨다. 나는 물질적 나눔이라는 일차적 의미에서 영적 나눔과 동역자로 심화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박영호목사는 빌립보서(홍성사)에서 다른 용어로 그 심대한 의미를 표현한다. ‘존재론적 합치이다(46).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이다. 학자들은 요한 문헌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요한은 우리의 신앙을 예수와 하나됨 일치됨으로 묘사한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 안에 내가 거한다(15:4). 우리와 예수는 서로를 영접한다(1:12).

 

이 본문에도 존재론적 합치를 보여주는 표현이 있다. 8절이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을 향한 자기의 연정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표현 보다도 주 안에’ ‘예수 안에를 많이 사용한 바울 사도답게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와 존재론적 합치를 이루어냈다는 말이다. 이미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일에 동참하는 자, 코이노니아하는 자이다. 그것은 그에게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며, 가장 좋은 일이다.

 

2.

그러면 구체적으로 빌립보 교인들은 어떻게 코이노니아 했는가? 일단 물질적으로 후원했다. 이는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이것이 코이노니아의 일차적 의미에 부합한 행위라면, 존재론적 합치를 보여주는 코이노니아도 있어야 하리라. 그들은 복음의 사역을 물질로만 후원하지 않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도 받았다. 7절을 보자. 바울은 갇혀 있는 실정이다. 해서, 그는 법정에 수시로 불려가서 조서를 꾸미고, 변론을 한다. 이 편지를 쓸 당시만 해도 신체적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가택연금 상태이었으나 미구에 그는 사형수가 되고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일단 바울은 예수님과의 존재론적 합치를 그의 전 삶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바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디 바울만 고난 당했으랴. 빌립보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로마 황제가 있는데도 다른 황제 예수를 전하고, 엄연히 로마 제국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도 바실레이아,’ 곧 예수의 왕국이 도래했다고 주장하는 위험천만한 반국가적 선동을 하고 다니는데, 빌립보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성할 리 만무하다. 이후의 서신을 고난 받고 있는 빌립보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뜻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기쁨이라는 것이 고난 없는 기쁨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기뻐하는 것, 고난을 뚫고, 헤쳐 나온 기쁨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는 코이노니아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했는데, 6절의 선한 일이라는 키워드도 퍽 유용하다. 그러니까 빌립보 교인들의 코이노이나가 물질적 후원이고, 고난을 통한 하나님과 바울과 존재론적 합치라면, 그것을 착한 일이라는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 바울 사도가 마지막 날까지 해야만 하는 착한 일은 다름 아닌 바로 저 두 가지이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서로 물질적 나눔을 지속하고, 주님이 받은 고난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코이노니아이고, 착한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동역자요 동업자가 되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 우리의 주제인 기쁨으로 돌아오자. 바울이 이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기쁨을 얻었던 것은 빌립보 교회와의 교제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 홀로 고군분투하는 상황에서, 그 많던 동역자들이 하나 둘 떠나간 마당에, 내 편에 서 준 고마운 사람들, 첫 사랑이었던 빌립보 사람들의 코이노니아가 얼마나 큰 기쁨이었겠는가. 누군가 나의 물질적 어려움을 후원해 주고, 내가 하는 일이 그르지 않다는 것을, 내가 하는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7절에 나온 복음을 변호하고 입증하는 일이다. 변호한다 함은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고, ‘확정한다함은 그것이 거짓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꼼짝없는 진실이라는 주장을 말한다. 이 얼마나 든든한 우군이었을까. 이럴 때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은 백만 대군을 만난 것 같다라고 한다. 바울의 심정을 잘 대변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3.

로고스교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수정로교회 시절 이야기다. 그 당시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교회가 지역 사회를 도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추수감사절 헌금의 일부를 동사무소가 결정한 대로 독거노인들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동사무소에서 오셔서 직접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는 수없이 가서 사진도 찍고 인사도 나누었다. 그때 할머니가 내게 해 준 말은 잊을 수 없다.

 

죽으려고 했는데 죽지도 못하게 하시네요.”

 

그분은 얼마 되지도 않는 작은 돈인데도 두 손으로 꼭 쥐고 가슴에 안다시피 좋아하시며 울먹이셨다. 나는 오히려 미안했다. 작은 교회고 목사 사례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교회인데 드리면 얼마나 드렸겠는가. 내 기억으로는 각 1인당 10만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분에게 드렸고 그 할머니는 그 중 한 분이셨다. 저 할머니의 말을 나의 말로 변주하면 이렇다.

 

나눔을 안 하려고 했는데, 안할 수 없게 만드시네요.”

 

내가 왜 기억하겠는가? 그분이 내게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돈을 드리고 큰 힘을 얻었다. 위로를 받았다. 기뻤다. 참 기뻤다. 이런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목사가 되었고, 이런 일을 하자고 교회를 한 것이 아닌가. 빌립보 교회처럼 내외적 시련의 한 복판에 있던 때인데도 그 하나가, 고작 그것이 내가 하나님의 일에 동업자가 되었다니 부끄럽고 창피하다. 그래도 기쁘다. 참 기쁘다. 나눌 때에 기쁘다. 움겨 쥘 때에 두려움이 오고, 나눌 때에 기쁨이 증폭된다.

 

위의 것이 물질적 나눔을 실천할 때 기쁨을 얻는 것을 말해 준다면, 나의 경험을 하나 더 말함으로써 영적인 또는 정신적 나눔이 주는 기쁨을 말할까 한다. 그것은 바로 로고스서원이 진행하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이야기이다. 그것의 발단 중 하나는 둥지센터의 임윤택 목사님에게서 들은 말이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이제는 어느 정도 챙겨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아이들의 내면적 허기를 채워주는 것은 참으로 어렵네요. 바로 그 부분을 김목사님이 책읽기와 글쓰기로 도와주신다니 더 없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사실, 나는 저 일을 하면서 형언할 수 없이 신난다. 지난 약 2년의 시간 동안 마음이 아려서 울기도 했고, 울먹이기도 자주 했다. 그리고 비행 청소년들이 책을 열심히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지켜보면서 실로 흐뭇했다. 글 쓰는 실력도 팍팍 늘고 있다. 그 아이들이 대략 6개월의 회복센터 생활 중, 희망의 인문학과 저자와의 만남을 가장 기억한다는 말을 남길 때면, 주체할 수 없으리 만치 황홀하다. 아픈 과거를 글로 토해내고는 자신의 고통의 일부가 씻겨나갔다는 말을 들을 때면, 좋아서, 행복해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 아이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돕고 구원하고 있다.

 

4.

이런 나눔의 정신을 극명하게 입증하는 사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우분투’(Ubuntu) 정신이다. 이 사상을 그저 남아공화국의 한 부족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것으로 확장한 사람은 바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이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헤이트 정책의 철폐를 위해 복음의 비폭력적 정신을 따라 투쟁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 의장으로 넬슨 만델라와 함께 새로운 남아공화국을 건설한 신학자이다.

 

본디, ‘우분투는 반투족이라는 부족의 말이라고 한다. 그 뜻은 말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라고 한다. 그 내용을 투투 대주교는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우분투에 따르면, 내가 작은 빵 한 조각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당신과 나누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라는 것입니다.”(<기쁨의 발견>, 예담, 78)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고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너 없이 나 없고, 너 또한 나 없으면 없다. 혼자 태어난 존재 없고, 혼자 사는 존재도 없다. 그러니 너를 통해 나는 내가 되고, 나를 통해 너는 너가 된다. 그래서 우분투 정신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법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인류학자가 나무 위에 맛난 과일을 잔뜩 담은 바구니를 걸어두고 가장 빨리 달려가서 먹는 사람에게 전부를 주겠다고 했다.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이게 웬일인가. 아이들ㅏ.이 모두 손을 잡고 같이 뛰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그 맛난 과일 바구니를 내려서 모두 둘러앉아 나누어 먹는다. 놀란 인류학자는 왜 이렇게 행동했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이 합창하듯 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분투!”(>기독교사상>, 2013.9, 248) 우리 함께 외쳐 볼까? “우분투!”

 

셋째, 분별력에서 온다(9-11).

 

참된 기쁨은 세상의 어떤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고 했다. 그리고 내 것을 내 것이라 우기지 않고 남에게 기꺼이 베풀 때에 우리의 기쁨은 배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무엇이 착한 일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인지, 금방 사라지고 말 세상의 것에서 오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견고한 기초 없이 약간의 풍파에도 뿌리채 뽑히는 나무가 되거나 통째로 뒤집히는 배가 되기 십상이다.

 

1.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사의 말을 기도로 전환시킨다. 한편으로 잘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잘해야 하고, 자칫 하다가는 중도에 꺾일 수도 있으니 주인이요 주권자인 하나님께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기쁨이란 내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거저 오는 것이기에 그는 기도를 드린다.

 

기도의 주어는 사랑이다. 길게 이어지는 여러 단어들을 정리해 보면, 결국 하나를 가리킨다. 바로 사랑이다. 1-2절에서 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 3-8절에서 말한 바로 그 사랑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노예가 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기쁨이 퐁퐁 솟아나는 샘의 근원지이다.

 

그런데 바울이 사랑이 풍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인데, 몇 가지 수식과 조건을 따라 붙인다. 지식, 통찰력, 분별이라는 세 단어이다. 저 셋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사랑이 그저 감정과 맹목적인 것으로 빠지지 말도록 경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저 유명한 칸트의 말을 변주하면, 사랑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지식 없는 사랑은 맹목이다.

 

교사들의 교사라고 하는 파커 팔머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IVP)1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에서 지식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호기심과 지배욕에서 발원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자비에서 연원한다(54). 호기심은 도덕과 무관하고, 지배는 권력이고 부패하기 쉽다. 반면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지식은 깨어진 자아와 세계의 재연합과 재구축이다.”(55) 다른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타자를 포용하고 서로에게 스며든다. 그리하여 팔머는 이렇게 단언한다. “지식의 기원은 곧 사랑이다.”(55)지식과 사랑의 일치를 교육과 교사에게 탄원하는 그에게서 현실은 저 둘의 통합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깨닫는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저 둘 중에 하나를 구태여 고르라고 한다면, 사랑일 것이다. 바로 이 본문에서의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선택을 쉽게 만든다. 또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공동체의 덕을 세운다는 고린도 지역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말도 동일한 결정을 하게 만든다(고전 8:1). 사랑이란 애시당초 맹목이 아니던가. 그냥 사랑하는 거다. 이유가 없다.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거래이고 장사일 터.

 

2.

그럼에도 바울이 여기서 사랑이 사랑 답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지식을 콕 집어 지목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듣고, 어디에나 갖다 붙여도 통용되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된다. 바로 이 본문과 이 맥락에서 특정할 수 있는 사랑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랑의 결을 찾아내지 못하면 이 텍스트에 대한 제대로 된 읽기가 아니라 해도 된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무언가? 어떤 사랑인가? 지식 있는 사랑이라고 앞에서 했는데, 지식이라는 말도 약간은 추상적이다. 해서, 나는 저 세 개를 분별이라는 단어로 집약하려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사랑이 예수에게서 온 것인지, 은혜와 평강인지, 하나님의 일에 물질과 영혼으로 동참하는 일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면, 그 사랑은 인간적인 것, 아니 육적인 욕망으로 전락하고 만다.

 

저런 분별력이 없다면 사랑은, 그리고 우리의 주제인 기쁨은 그저 감정이 되고 만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 요동치고 만다. 투투 대주교는 행복은 외적인 것에 좌우되지만, 기쁨은 내적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개념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나의 환경에도, 감정에도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이 내 형편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필요한가?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다. 사랑을 넘치게 하는 지식인지를 판별하면 된다. 우리를 순결한 하나님의 신부로 지내게 하는 것이면 합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가도 탁월한 기준이다.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하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나는 그 중에서 10절의 한 표현,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이 적절한 대답이요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저기서 가장 좋은 것이란 또 무언가? 이 맥락에서는 6절이 말한 바, 착한 일이다. 그 착한 일의 실체는 물질적 나눔이고 영적인 교제요 하나됨이다. 우리의 사랑이 사랑이기 위해서는 나의 물질은 이웃을 위해 사용했는지를 분별하면 된다.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물질적 재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잔치일 따름이다.

 

어쩌면 빙빙 도는 것이 당연하지만, 성경 속의 많은 진리고 서로 물고 물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태이긴 하지만,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허나, 그러다가 길을 잃기도 하다. 너는 어디 사니? 똘이 집 옆에 살아요. 그럼 똘이는 어디에 사니? 우리 집 옆이요. 이런 미궁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해서, 나는 한 대학생선교단체가 자신의 이름으로 내 건 단어, 우리의 주제인 기쁨의 영어로 대답하려 한다. 바로 죠이이다. 죠이선교단체는 자신들의 모토를 철자 J, O, Y를 첫 글자로 하는 세 단어로 포명한다. J는 예수이고, O는 이웃이고, 마지막 Y는 자기 자신이다. 그리하여 참된 기쁨이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고, 누려야 할 기쁨이란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third! 이다. 예수가 첫 번째 이고, 이웃이 두 번째, 나는 맨 마지막 꼴찌로 둘 때 하늘의 기쁨을 맛본다. 이 사랑이 기쁨을 주는 것인지는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는 지에 따라 판가름 난다.

 

사람들은 실용서라고, 자기계발서라고 치부하는 책인데, 내게는 영향을 미친 책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책 제목 때문이데, 스티븐 코비의 것이다. 우리말로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김영사)이다. 영어로는 First thing first 이다. 첫 번째 것을 첫 번째로! 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성공한 인생은 시계가 아니라 나침반을 따라 산다는 것이고, 그 나침반이란 소중한 것, 자기 인생에 있어서 제일 우선 순위에 둘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먼저 하고, 후순위의 것을 해낼 때, 많고 많은 과업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우선 순위야 사람마다 다를 터인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죠이선교회 모토처럼 예수를 우선으로 하고,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을 따라 생활하면 예수의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유명한 기도문을 하나 읽겠다. 제목은 평온을 비는 기도”(The Serenity Prayer)이다.

 

God,

하나님,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무엇은 받아들여야 할지를 분별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나는 신앙 생활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은 참으로 어렵다. 그만큼 쉽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저것은 미국의 정치학과 신학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이다. 저 기도가 나와 우리의 기도가 되길 바라고, 저 기도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죽음 뒤에 남는 것

 

그래도 우선순위를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마치려 한다. 대학 시절 존경했던 스승의 투병 소식을 듣고는 매주 일정한 시간에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스승의 말에 제자는 되묻는다.

 

그러면 죽음과 직면하면 모든 게 변하나요?”

그럼. 모든 것을 다 벗기고, 결국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매사가 아주 다르게 보이네.”

 

기쁨이 어디서 오는가? 세상의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예수에게서 오는 하늘의 기쁨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웃을 위해 나의 돈과 시간을 넉넉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무엇이 예수를 위한 것인지, 이웃을 위한 것인지 분별하면 기쁨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지를 분별하고 싶은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도 부족한가? 그렇다면 죽음 뒤에도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이 우리에게 참 기쁨을 선물할 것이다. 죽음 이후에도 남을 것이 기쁨 너머의 기쁨인 예수, 이웃을 위한 자기 희생적 사랑이라고 대답하면 좋겠다. 참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 이웃을 섬기는 데서 온다.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따라 사는 자에게 온다. 그 기쁨이 나의 것, 너의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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