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해 보면 압니다. 당신은 실력 있는 의사와 신앙 좋은 의사 중 어떤 의사를 찾아가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을 각기 제 모양대로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나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도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이것은 교만이 아닐까요?) 그래도 뭔가 하나 정도가 빠진 느낌이 듭니다. 후자는 너무 보편적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 말입니다. 전자는 너무 현실적입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성취를 마치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환원하기 십상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너무 다양해서 정형화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언젠가 한번 인용했던 작은 책자, 「왜 하나님은 무디를 사용하셨는가」에서 R. A. 토레이는 7가지를 제시합니다. 완전히 항복한 사람, 기도의 사람, 깊으면서도 실제적인 성경 학생, 겸손한 사람, 금전 사랑으로부터 완전 자유를 누린 사람, 영혼 구원에 대한 불타는 열심, 위로부터 능력을 확실히 받은 사람입니다. 무디는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들 때문에 위대한 일꾼으로 역사에 이름을 등재합니다. 하지만 이렇듯 무디 한 사람이 7가지라면, 다른 신앙 위인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이유를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토레이가 하나님이 무디를 널리 사용하신 까닭으로 첫 번째 언급한 것은 모든 성인들의 공통점일 것입니다. 바로 완전히 항복한 사람 말입니다. 이 말을 혹자는 오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디는 아무런 결점이 없단 말인가? 그의 인격에는 결함이 없단 말인가? 무디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무디 또한 부족한 것이 참 많지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구둣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안수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의 강력한 일군이 된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무디의 친구가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일을 하실 것이다”는 말을 듣자 그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될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한 번은 “만일 하나님이 내게 저 창문으로 뛰어내릴 것을 원하신다면, 나는 뛰어내릴 걸세”라고 해서 주변을 놀라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개중에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도 있고, 흠모할만한 은사의 사람도 있습니다. 토레이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았을지언정, 하나님에게 완전히 항복하지 못했고, 그 결과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최종 결론은 이렇습니다. “무디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항복을 하였으며, 완전히 항복된 사람이었다. 만일 여러분과 내가 사용받기를 원한다면, 여러분과 나는 온전히 항복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능력과 은사는 남들 비해 100%일지라도 헌신이 99%인 사람보다도, 1%의 능력이라도 100% 헌신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시고 사용하십니다.
제가 장경동 목사님이 시무하는 중문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입니다. 장목사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전도사님이 담임목사라면, 어떤 사람을 사용할건가요?” 제 딴에는 똑똑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과 헌신된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러자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고르겠느냐고 반문합니다. 희미한 기억으로 저는 준비, 곧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헌신이라고 했습니다.
그 대화가 오래 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왜 그분은 준비보다는 실력이라고 했을까요?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화두였습니다. 그리고 둘 중에 어떤 사람을 나는 뽑을까? 둘 다를 겸비한 사람이야 더 바래 무엇하겠습니까마는, 그리고 나 자신 그런 일군이 되고, 그런 동역자를 만난다면 더 없이 기쁜 일입니다마는 현실이란 그리 이상적인 것이 아니어서 무언가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조금 부족합니다. 해서, 실력이 출중하지만 헌신이 결여된 이와 그 반대로 들끓는 열정이 있지만, 일할 만한 자질과 능력이 없어서 아쉬운 경우가 있습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이 쉽지 않는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토레이는 열정을 선택합니다. 토레이는 장목사님과 마찬가지로 지식 보다는 열정에 주안점을 둡니다. 그래서 지식 없는 열정이 열정 없는 지식보다 훨씬 더 좋다고 확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풍부하지만 일 년 내내 그것으로 한 영혼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헌신하고, 영혼들을 향해 속이 불타는 사람이 무디였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난처합니다. 이를 두고 딜레마라고 한다지요. 바울은 이스라엘이 숱한 영적인 유산을 갖고서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것은 그들에게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이 없었다고 합니다.(롬 10:2) 맹목적인 충동이, 스스로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 철저히 하나님을 거역했으니 지식의 중요성을 이 보다 더 깨우치는 사례는 없을 듯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못 박고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 중보기도하실 때 그들의 무지를 지적합니다.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시면서 그 까닭을 무지에서 찾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행동하는 철부지입니다.(눅 23:34) 그러고 보면 지식이 앞서야 합니다.
하지만 지식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이 주님 앞에 얼마나 혹독하게 비판을 받았는지를 안다면, 그리 쉽게 지식의 편에 손을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날지를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동방박사들과 함께 경배하러 가지 않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보면, 그 지식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데 헛된 지식만 앞세우다, 그것만 맹목적으로 집착하다가 제 무덤을 판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식이든 열정이든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토레이가 말한바 완전히 항복한 사람의 참 의미이리라 여겨집니다. “무디가 그의 영역에서 사용된 것처럼 여러분과 내가 우리의 영역에서 사용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유 모두와 우리의 됨됨이 모두를 하나님의 손에 드려야 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으며,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보내실 수 있으며,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다루실 수 있으며,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명하시는 것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온전히 내려놓은 사람, 바로 그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후서 2장에서 말한 깨끗한 그릇의 본 뜻이라 확신합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2:20-21)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은 여러 종류입니다. 그 재질에 따라 구분한다면, 금, 은, 나무, 흙입니다. 아무래도 가격이나 인기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귀한 그릇을 금과 은을, 천한 그릇을 나무와 질그릇으로 해석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두 가지 실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문맥상 귀히 쓰는 그릇은 그것이 금과 은이라는 선천적 조건이 아니라 깨끗하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깨끗하다면 사용될 것입니다. 주부들이 잘 압니다. 아무리 값나가는 좋은 그릇이라도, 제 아무리 예쁘고 보기 좋아도 깨지거나 닦지 않아서 더럽다면 당연히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다른 하나는 제 각각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귀한 그릇은 자주 사용하지 않는 반면에 천한 그릇은 거의 항상 사용합니다. 아무리 금 그릇이 좋다고 해도 술을 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술맛을 잃게 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용도에 맞는 그릇을 사용하면 귀하게 활용되는 것이지, 비싼 그릇이라고 해서 귀히 쓰는 그릇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주인이 음식을 담기에 최적인 상태인 그릇입니다. 주인의 의도대로 쓸 수 있는 그릇입니다. 설거지를 잘 해두어서 주인이 원하는 때에 재깍 쓸 수 있는 그릇입니다. 자기 생각과 욕심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는 그릇은 그분이 눈여겨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항복하고, 날마다 자신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깨끗한 그릇이 하나님이 찾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극적으로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훈련과 연단 받는 자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그릇의 크기는 내 몫이 아니라 주님의 결정입니다. 내가 할 일은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그릇에 주님을 담는 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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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의현 작성시간 15.04.23 *^^*
담임목회 10년차를 지나면서 더욱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완전히 항복한다는 것!
글로는 다 표현해 낼 수 없는
삶의 현장에서 체득하며 깨달아 가는
신비의(?) 영역인듯 싶습니다.
사부님 귀한 글 맛있게
배부르게 행복하게 읽고 갑니다.
감사드려요! -
답댓글 작성자김기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4.23 도토리목사님, 잘 읽어주어서 고마워요. 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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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온상원(davidon30) 작성시간 15.04.28 이제사 글 읽네요.. 가슴에 또 새겨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앎인데요..그게 쉽지가 않네요.. 잘 좇아가보렵니다..늘 감사합니다...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