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의 3월호 원고입니다
사람을 찾아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열린책들) 중 “대심문관” 읽기
1.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뭘까? 사람답게 사는 것 말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아닌 사람은 없지만, 살아도 산 것 같은 삶, 참다운 삶을 사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의미 있게, 보람되게 살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산다는 것도 벅찬데,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괴롭기만 하다. 하루는 버겁고, 인생은 헐겁다. 어디서 길을 잃은 걸까?
그 옛날 지혜자가 그랬듯이 이럴 때는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전 7:14). 곤고하니 생각하게 된다. 이럴 때 나는 톨스토이의 인생의 세 가지 질문을 끄집어 읽는다. 가장 중요한 때, 가장 필요한 사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이 셋은 한 개인으로 잘 살기 위한 질문이다. 이것보다는 좀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할라치면 어김없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가장 유명한 “대심문관”을 읽는다.
이념적 무신론자이자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에 심취한 형 이반이 수도자의 길을 걷는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소설 속 소설에서 인간의 존재와 본성에 관한 응축된 질문은, 그리고 인류 역사의 과거와 미래, 현재를 포괄하는 질문은 우리 주께서 광야에서 받았던 세 가지 유혹 사건이다. 러시아에서 전설의 고향처럼 전해오는 이야기를 도스토예프스키가 완벽하게 재창조한다. 빵과 자유 사이에서 결국은 빵의 노예가 되는 서글픈 인간들, 인간을 빵에 종속시키는 종교와 권력, 체제에 대한 서슬퍼런 비판으로 재각색된다.
2.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무더위로 푹푹 찌는 한낮.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로 눈빛이 형형한 한 젊은 사내가 걷고 있다. 아무 말도, 어떤 일도 하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금세 그의 정체를 알아본다. 웅성거림과 함께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질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눈먼 장님이 눈을 떴고, 무덤을 향해 가던 예쁜 딸아이가 살아났다. 그렇다. 그는 예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단자를 처형하는 장작더미의 불이 꺼지지 않던 중세 말기의 어느 날, 무려 100명에 달하는 이들을 화형시킨 바로 다음 날이었다.
군중들 사이로 조용히 등장한 또 한 사내가 있었다. 사람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비켜서고,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 아흔 살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광채로 빛나는 눈빛으로 신앙의 적들을 모두 무찌르는 이 추기경 역시 아무 말 없이 예수를 응시하기만 한다. 숨 막히는 침묵도 잠시, 이 신앙의 전사가 손을 들어 예수를 가리키자마자 군병들은 복종한다. 체포된 예수는 종교재판소 건물의 음습한 지하 감옥에 갇힌다.
후텁지근한 밤, 짙은 어둠 사이로 늙은 대심문관이 예수를 찾아온다. 그는 자신이 가둔 이가 예수임을 잘 안다. 아니, 예수이기에 지하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 옛날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처럼 자신의 종교 사업과 제도의 근간을 위협하는 불온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빵의 노예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자신들은 감당치 못하는 자유를 빼앗고 빵을 주어 고민을 덜어주었는데, 예수가 다시 와서 인간에게 자유라는 그 버거운 숙제를 떠안길 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한다. 예수는 끝내 말이 없다.
3.
나는 저 영악하다 못해 간악한 대심문관의 논리에 저항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렇다. 무신론을 비판하는 작품임에도 무신론을 설명하는데 더 공을 들였다고 한다. 실제로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의 논리는 반박 불가다. 가난한 사람을 등쳐먹는 사악한 전당포 노파 한 명을 살해함으로 수십, 수백의 사람들에게 돌아갈 이익을 계산한다면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는 수십만, 수백만의 인구를 학살했음에도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체 무엇이라 논박하리오.
대심문관의 입을 빌어 말하는 무신론자 이반의 생각도 그렇지 않은가. 빵을 원하는 장삼이사들에게 자유라는 고상하고 추상적인 것을 선사하는 순간, 그들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빵을 더 원하는 자신들의 욕망을 억눌린다고 여기고 저항한다. 한 마디로 빵만 주면 되지 자유라는 이상은 관심이 없거나 버거워한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아가 자유를 위해서 빵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저버리고,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대가도 지불하는 고작 수백, 수천의 사람의 길을 제시했다고 예수를 추궁한다.
그럴 거다.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지만, 손으로는 빵을 움켜쥐는 것이 우리다. 머리로는 빵과 자유가 어찌 양립 불가냐며 대들지만, 온 몸으로는 자유고 뭐고 빵이면 다지 뭐가 더 필요하냐고 웅변하지 않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가슴을 치는 이는 극히 드물지만, 월급이 줄고, 아파트 가격과 자녀의 성적이 떨어지면, 울상이다 못해 숫제 난리다. 예수는 빵만을 주는 경제적 메시아가 아니라, 빵을 통해서 그리고 빵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메시아적 경제를 말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신앙한다고 말하지만, 저 높디 높은 성전 첨탑에서 뛰어내려도 한 터럭이라도 다치기는커녕 천사의 호위를 받는 광경을 본다면, 구름떼처럼 몰려들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예수로 믿는 걸까? 아니면 기적을 바라서일까? 다닐 교회를 결정할 때 무엇이 최고의 기준인가?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예수를 잘 따르고 예수를 잘 믿게 해 주는 교회인가? 아니면 주차장, 교통, 안락한 부대시설 등등인가? 예수가 그걸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예수는 목수와 석공으로서 으리으리한 성전 건축에 앞장 섰을 테니까.
예수님이 왕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이 세상을 진정으로 구원하고 혁명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라고 주구장창 찬양하면서도, 어느 정당, 어느 정치인이 세상을 확 다 바꿀 것이라고 믿고 열변을 토하고, 반대편은 적대시하지 않는가? 정치가 국가와 사람을 근본적으로 갱신할 수 있다면, 예수는 골고다 언덕이 아닌 헤롯 궁전을 차지한 다음 로마로 진격했을 터. 그분은 성전으로도, 궁전으로도 가지 않았다.
4.
나도 그러하고 소위 의식 있다는 목사들의 설교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한 용어가 있으니, ‘욕망’이다. 그 욕망의 바벨탑을 무너뜨려라, 욕망을 신앙으로 둔갑시키지 말라고 끝없이 외치지만, 말하는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지 않는가.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잠시 유보할 줄 아는 마시멜로 이야기를 주구장창 읊어대도, 저 노회한 심문관의 말처럼 그리 살 수 있는 “당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소?” 하늘의 뭇별과 바다의 모래알 같은 이들은 하늘의 말씀 보다 한 끼 식사를 더 사랑한다. 몇 푼의 돈을 위해 양심도 신앙도 거뜬히 모른 체할 수 있다.
대심문관 이야기의 백미는 마지막 예수의 행동이다. 말을 끝낸 아흔 살의 노인은 예수의 대답을 기다린다. 듣기만 하던 예수는 조용히 다가와 심문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부르르 떨며 떠나라는 노기어린 외침에 예수는 일어나 영영 사라진다. 왜 예수는 이 악마적 인간의 말에 침묵하고, 독기어린 입술에 입맞춤하고, 떠나갔을까?
예수의 대답은 그런 너를, 최고의 성직자이지만 현실 속의 악마가 되어 버린, 순수했던 열정이 타인을 화형대에 세우는 열정으로 변질되어 버린 이 심문관마저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라스꼴리니코프의 회심은 자기 몸을 팔아서라도 가족을 부양하는 소냐의 사랑 때문이 아니던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개, 돼지와 다를 바 없어서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개, 돼지와 달리 윤리가 있고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빵 이상의 것을 충족하지 못하면, 헛헛해서 살 수 없다. 물질적 가난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도 부지기수지만, 정신적 가난 때문에 허허롭게 사는 이들 또한 즐비하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걸까? ‘사랑’이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람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다. 사람도 사랑이다. 삶도 사랑이다. 사람 = 사랑이다. 사랑해야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