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토론 대상이다
1. “하나님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이다. 소위 잘 나가는 무신론자와의 방송 토론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거절하면 한 대답이다. 박영선목사님께서 조주석 목사님과의 인터뷰 도서인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서 본 구절이다.
2. 로이드 존스의 저 말을 평가하려면 그의 전 사상과 신학 체계 내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설교와 설교자」 등의 몇 권을 보았을 뿐, 그에 관해 말할 만한 것이 그다지 없다. 그냥 액면 그대로, 내가 생각한 바를 말할까 한다.
3. 미루어 짐작건대, 하나님의 주권을 드높이고 그에 반하여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는 그의 신학적 배경과 입장에서 보자면, 영광스러운 하나님에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지, 왈가왈부 토론하는 것은 그리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4. 나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토론해봐야 소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기보다는 설득하기 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청중이나 시청자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토론 대상이다.”
6. 첫째, 하나님 자신이 토론의 대상을 자처하셨기 때문이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이사야 1장 18절 말씀이다. “let us reason together.” 서로 논리적으로 따져 보자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의 토론에서 기꺼이 토론 상대가 되고자 자청한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를 초대한다. 시쳇말로 한 번 붙어보자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죄에 대해서 치열하게 논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청이다.
7. 둘째, 예수님은 논쟁의 달인이시다. 존 스토트의 책, 「변론자 그리스도」(성서유니온선교회)는 예수가 당대의 제 세력과의 토론을 정리한 책이다. 예수는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선포하신 분이 아니다. 당신의 권위로 상대방을 내리누르려고 하지 않았다. 하여, 스토트는 이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본서의 제목을 ‘변론자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변론을 좋아하는 인물이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닌 그가 변론에 관여하였음을 지적하려 함이다.”(5쪽) 나는 예수는 변론을 좋아했다, 아니 변론을 즐겼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성경의 진실에 부합하다. 가만히 있는 바리새인들을 들쑤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한 방에 날려 보낸 것이 예수님 아닌가, 말이다. 예수는 변론에 관여하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논쟁의 달인이시다.
8. 사도 바울은 또 어떤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들 등에서 자신의 적대자들을 심하다 싶으리만치 반박하고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공회 앞에서 논란의 중심부로 뛰어 들었고, 총독 벨릭스 앞에서는 더둘로와의 말다툼을 피하지 않았다. 왜, 그리고 무엇을 두고 그리 다투었는가? 간단하다.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에 관해서다. 하나님을 토론한 것이다.
9. 열 번, 백번을 양보해서 하나님이 토론 주제로 삼을 수 없다고 하자.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믿음은 토론할 수 있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 3:15) 베드로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믿는 바에 관해 많은 질문이 있고, 그 이유를 묻거들랑 피하지 말고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성도의 의무라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그런 질문을 받을지 모르니 미리 준비해 두라고 당부한다.
10. 정작 문제는 다른 것에 있다.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아는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본 자는, 아는 자는, 만난 자는 할 말이 있다.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기탄없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 4:20) 자, 이제 내가 본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