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왕따였다. 90년대 초반, '왕따'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지만, 촌에서 이사 온 나는 도시 놈들에게 '따'를 당하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크던 시절, 나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 깡촌의 촌놈이었고, 대도시 울산의 아이들은 옷과 말투부터 다른 나를 무시했다. 학업도 문제였다. 같은 지역 학교도 저마다 진도가 달랐는데, 경계를 넘어온 나에게 그들이 배우는 것과 방식은 완전 새로웠다. 1991년 여름, 일어선 자리에서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빨개졌던 그때가 수치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다.
한동안 힘들었다. 친구도 없고 학업도 따라가지 못했다. 어른도 힘든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을 꼬맹이로 감당하기 벅찼다. 아침 등교 시간이면 아버지 방에 몰래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며 제발 부모님이 나를 잊어 주길 얼마나 바랬던지... 그러던 어느 날, 기어코 일이 터졌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앞자리에 있던 놈이 손톱으로 내 얼굴을 할퀴어 제법 큰 상처가 난 것이다. 다혈질의 아버지는 앞뒤 가리지 않고, 학교로 달려와 그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뭐, 지금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는 그런 행동이 제법 잘 먹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학교는 여전히 괴로웠지만, 아버지의 폭주 괴롭힘은 현저히 사라졌다.
진짜 반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돌 다섯 개 '공기놀이' 덕분이었다. 초등학생들의 놀이는 유행에 민감하다. 도대체 누가 그 유행을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큰 서클로 돌고 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무렵, 하필 유행하던 놀이가 바로 '공기놀이'었다. 전에만 해도 여자아이들의 놀이로 인식되었지만, 유행 앞에 그깟 성별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연히 그 유행에 합류한 나는 '공기놀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같은 반에 공기 좀 한다는 아이와 일대일 대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놀라운 나의 공기 실력은 학교에 퍼지기 시작했고, 쉬는 시간에 종종 다른 반 ‘공기 짱’들이 나를 보기 위해 원정을 나오기도 했었다. 그럴 때 나의 승리는 반 전체의 승리요, 큰 자부심이 된다. 지금 기억으로 그 위대한 대전에서 내가 패배를 기록했던 적은 없었다.
나의 이 재능은 어디서 왔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어린 시절 이미 지독한 공기놀이 트레이닝을 받았었다. 그곳 촌에서 말이다. 특별한 장난감이나 오락거리가 없었던 아이들은 방과 후 우리 집, 정확히는 교회 마당에 모여 함께 뛰어 놀았다. 그런데 웬걸 우리 마을에는 상수와 돈오를 빼면 모두가 소녀들인지라 자주 그녀들의 놀이에 참여 했었는데 공기놀이도 그중 하나였다. 시골에 제대로 된 공기가 있을리 만무했기에 우리의 공기는 그냥 돌멩이였다. 지방 방언으로 '짜게'라고 불렀는데, 주변의 자갈을 수십 개 주어다 놓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것을 집어던지고, 받으며 공기의 내공을 쌓았던 것이다. 곱상하게 자라온 도시 놈들은 상상도 못할 훈련법이었다.
덕분에 나는 핵 인싸가 되었다. 그렇게 화려한 3학년을 보내고 4학년이 되자 어린 시절 찌질했던 시골 놈은 사라졌다. 친구들의 추천으로 반장선거에 나가기도 하고, 베프도 생기기 시작했다. 인기가 많던 친구들이 나를 자신의 생일에 초대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의 중심이 되었다. 어찌 보면 나를 구렁텅이에서 구한 것은 ‘2할의 아버지 폭주’와 ‘8할의 공기놀이’가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이 두 가지가 수치를 경험한 소심한 촌놈의 마음에 자신감의 씨앗이 되었다.
“학교 가기 싫어!” 오늘 아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던 첫째가 갑자가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내와 나는 순간 얼어붙는다. 무엇보다 학교와 친구를 좋아하던 녀석이기에, 무슨 일이 나도 크게 났구나 싶었다. 출근길도 멈추고,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불안한 마음에 뭐라도 캐내려고 부드럽게 아이를 볶는다. 한참 후 무겁게 아들이 입을 연다. “공부가 힘들어”… 솔직히, 학교 가서 노는 것 밖에 없는 Kindergardener(미국의 유치원)에게 공부가 힘들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만, 미국에서 영어도 어려운데, 영어로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아들의 특별한 상황이 있기에 마음이 울컥한다. 알고보니 지금까지 기초적인 것만 배우다가 얼마 전부터 새로운 Project를 시작했는데 영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온 학생들과 달리 이제 갓 배우기 시작한 아들에게는 이것이 버거웠나 보다. 아들 친구들의 놀림도 있었는듯 하고…
'욱'하고 분노가 올라온다. 이것들에게 한국 아버지의 지랄을 한 번 보여줄 시간이 왔구나 싶다가도, 30여 년 전의 수법이 지금 통할 리 만무하다며 이성의 끈을 부여잡는다. 그리고 유튜브를 틀어 BTS와 삼성, LG의 위대함을 아들에게 설명하며, 까짓것 프랑스어 좀 못해도 된다고 말한다. 괜히 태권도 아니, 공기놀이라도 미리 가르치지 않았던 나를 원망한다. 동시에 나의 학창 시절은 어떠했나 돌아보며 뭔가라도 찾으려 노력했다.
마음을 다잡자. 아들에게도 아빠의 20% 지랄이 필요하겠지만, 80%는 내 손 밖의 영역일 테니. 공기놀이가 날 살렸듯, 아들에게도 그를 구할 은혜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러니 조금 기다려보자. 지금은, 지금은 조금 더 기다려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