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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오전반

슬픔이 기쁨에게

작성자김영호|작성시간22.05.30|조회수90 목록 댓글 0

슬픔이 기쁨에게

 

김영호(월요일 오전반)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 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가난은 슬픔이고 슬픔은 고통이다.

하지만 우리는 짐짓 외면한다.

 

현란하게 돌아가는 자본과 상품과 정보와 일상 속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다는 이유로, 간단히 그들의 가난에 등을 돌린다.

 

그리하여 때로 우리는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거라 말하면서도

그 피할 수 없는 게 왜 하필 그들이고

왜 당신은 아니냐는 질문에는 슬쩍 답을 피해간다.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나라가 세금을 조금이라도 올리는 날이면 당장에 흥분한다.

나한테 세금의 혜택이 돌아오는 것은 공평한 일이고

내 돈이 타인의 혜택으로 돌아가면 불공평하다고 여기 일쑤다.

 

더 가공할 일은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시선 곧 무관심이다.

그것은 또 다른 가난, 곧 마음의 가난이다. 

 

슬픔은  사랑보다 소중할 수 있다.

아픈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르는 건

아픈 것보다 더 큰 불행이다.

 

이가 썩으면 통증을 느끼게 해주는 치아의 신경 덕에

충치를 치료할 생각을 하게 된다.

통증을 모르면 우리는 죽는다.

 

슬픔을 알게 되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다.

 

공감은 공명이다.

공명은 남과 더불어 우는 일이다.

남이 울면 따라 우는 것이 공명이다.

남의 고통이 갖는 진동수에

내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이 공명이다.

 

오늘 나는 얼마나 공명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얼마나 공명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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