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도를 잃어버린 한국 교회(?)
요즘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이야기 가운데 자주 듣는 것이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특히 부모 세대가 가졌던 기도의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도에 대해서 더 근본적인 고민과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배웠고,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항상 생각나는 추억이 하나 있다. 단풍 여행을 갔다가 어느 유명한 고찰을 방문한 적이 있다. 절 입구에 기왓장들이 쌓여 있었고, 한 장당 얼마씩 내면 그 기왓장에 기도제목들을 적을 수 있었다. 나는 궁금해서 사람들이 적어 놓은 기도제목들을 모두 읽어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적어 놓은 기도제목들에 이질감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친근감마저 들었다. 아니 어려운 말로 하면 ‘데자뷰’(deja vu)이고 더 어려운 말로 하면 ‘기시감’(旣視感)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새벽기도회와 수요, 금요 기도회에, 심방할 때 내놓는 헌금봉투에, 부흥회와 송구영신 때에 적어내는 기도제목과 완벽하게 똑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부처에게 기도하나 하나님에게 기도하나, 제목과 내용은 거기서 거기였다. 대상만 달라졌을 뿐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은 모두 똑같았다.
그럼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다른 종교인들과 다른 것은 무엇이 있을까? 왜 한국 교회는 기도의 열정을 잃어버렸을까? 후자부터 답을 한다면, 우리 부모 세대가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고 부르짖었던 기도의 제목이 응답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렇게 잘 살게 해 달라고, 돈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진짜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원했던 풍요로움이 찾아옴과 동시에 반비례로 기도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힘들게 금식하며 새벽과 저녁으로 부르짖지 않아도 돈이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전자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깊이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도하면 우리는 그저 우리의 소원과 간구와 소망을 절대자에게 부르짖고 간청하는 것으로만 이해했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그런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었다. 생존이 달린 문제 앞에서 금식이라도 하면서 신을 협박해야 했고, 목사들은 그런 교인들에게 과부의 기도, 야베스의 기도, 야곱의 기도, 다니엘의 기도를 가르쳐주면서 들어주실 것을 믿고 밤낮으로 기도하라고 외쳤다. 물론 이런 기도가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머물러서 더 깊이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2. 기도의 깊이를 더하라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딤전 2:1)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된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네 가지 기도를 하라고 권한다. 첫째는 간구이다. 헬라어로는 ‘데에시스’(δέησις)인데, 자신의 문제와 필요를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간청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둘째는 기도이다. 헬라어로는 ‘프로쉬케’(προσευχή)인데,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의미하며,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에 대한 구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명사형과 동사형을 합쳐서).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의 시작이자 기본틀로 제시되고 있다(딤전 5:5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셋째는 ‘중보’ 기도이다. 헬라어로는 ‘엔툭시스’(ἔντευξις)인데, 왕에게 다가간다는 의미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반영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보다 하나님의 소원이 땅과 인간에게 반영되도록 기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넷째는 ‘감사’ 기도이다. 헬라어로는 ‘유카리스티아’(εὐχαριστία)로서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뜻이 관철되거나 성취되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기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뜻이다.
간구와 기도가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중보와 감사는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분명 우리의 필요와 문제로 인해 간구와 기도를 시작한다. 성경은 그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시선을 들어서 주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앞에 놓인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뜻을 가지고 일하시는 주님에게 시선을 맞추라는 것이다. 그저 우리의 문제만 바라보고 그것만을 구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다. 우리의 기도는 그 분의 마음과 그 분의 시선과 그 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자의 기도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그런 기도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오직 ‘주여’ 삼창을 하며 부르짖는 기도 외에는 배운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것이 한 때 ‘K-기도’의 열풍을 일으킨 적이 있다. 선교단체에서 사역을 할 때 자주 겪는 일인데, 외국 사람들과 기도를 하자고 하면 그들은 거의 대부분 안경을 벗거나,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고개를 숙이며 침묵한다. 우리에게는 그 침묵이 너무 어색했다. 이런 한국 사역자들의 기도 습관을 아는 잘 아는 외국 리더는 ‘Korean-Style Prayer’를 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겐 침묵이 어색하고, 그들에겐 부르짖는 것이 어색하다.
3. 마음을 열고 배워야할 기도 : 예수의 기도
최근에 다섯 쌍의 목사 부부들이 모여서 파커 파머의 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와 마틴 레어드의 책 ‘침묵수업’과 ‘기도수업’을 함께 나누며 적용과 실습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사실 개신교 목사들에게 메노나이트의 전통이나 수도원 전통의 관상기도(향심기도/침묵기도)는 매우 생소한 것이다. 개신교는 보통 하나님의 음성이나 인도하심을 인간의 내면에서 찾지 않고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파머의 책은 ‘영혼의 목소리’에 집중하라고 강조하면서 인간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가르친다. 더 나아가 그것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을 공동체 안에서 행하도록 안내한다.
관상기도는 더욱 낯설뿐만 아니라 이질감(거부감)마저 들었다. 한 때 리차드 포스터와 고인이 되신 달라스 윌라드가 주도하는 레노바레 운동을 한국 소개한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가 곤혹을 치르고 ‘침묵기도’ 혹은 ‘묵상기도’라는 용어로 수정한 적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묵주를 돌리며, 호흡을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짧은 기도문을 무한반복 한다는 것은 동양의 명상운동을 연상 시키기에 충분하다. 과거 어느 단체가 문화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서구사회에 불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을 강력하게 비판한 적이 있고, 그것이 한국 교회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결과 우리 안에 형성된 선입견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강력하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 한계에 도달했다는 증상들이 곳곳에서 감지되었고,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기본적인 윤리 의식이나 역사 인식의 문제에서부터,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 예배, 전도와 선교, 기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부실했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성경 읽기’와 ‘기도생활’ 자체에 심각한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부모 세대가 가졌던 기도의 열정을 회복하라고 비난하고 정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도의 문을 열어주고,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안내 해주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그런 안내서가 없다는 것이다.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다. 이럴 때 우리는 성경과 전통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도를 다시 배워야 하고, 이천년이라는 기독교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기도의 전통을 다시 재발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예수의 기도’는 매우 이질적이지만 조용히 인내를 가지며 경청해야 하는 책이다. 넘어야할 산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그저 우리의 필요만을 관철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분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진짜 깊은 기도는 단순한 기도이며, 잠잠히 그 분의 임재 안에서 기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급하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더 수정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