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노인들만을 위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데….” 사랑나무 정영석
- 칼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문정은 목사/기독공보/2020년7월4일 발행)를 읽고
이 글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공식 주간신문인 기독공보 제3242호 19면에 실린 논설위원 문정은 목사의 칼럼이다. 현재 필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협력기관인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CA)의 프로그램 코디 역할을 하고 있다. CCA는 한국교회협의회(NCCK)를 비롯 16여개국 아시아교회협의의 연합체로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이라는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프로그램과 연합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필자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신앙선교일치국 국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 등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가운데서 일해왔으며, 통합 총회의 행정지원본부 기획국 간사를 맡는 등 교단 총회 실무에도 밝은 행정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필자의 에큐메니칼 사역과 총회 간사 경험이 이 글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본문은 2020자 정도로 신문 칼럼 한 꼭지로서 적당한 분량의 글이다. 사이토 다카시의 2000자를 쓰는 힘에서 말하는 원고지 10장, A4용지 한 면에 부합하는 글쓰기이다.
형식에 따른 분량으로 이 글을 분석해 보자면 크게 ‘여는 말-몸 말-맺는 말’ 세 문장으로 나눌 때 <1. 여는 말 826자-이음 말 145자 (971자), 2. 몸 말 490자-이음 말 87자 (577자), 3. 맺는 말 453자> 로 여는 말:몸 말:맺는 말이 약 5.5대 3.0대 1.5의 비율로 배분되어 있다. 물론 중간에 잇는말(이음말)을 어디에 붙이느냐에 따라 약간의 분량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문단과 내용을 구조 분석해 보았다.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 여는 말- 예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년/ 코헨형제 감독) <제목 따오기>
(1) 영회에 대한 줄거리 소개
(2) 영화에서 노인의 역활에 대한 해석
*이음 말- ‘노인’ 에 대한 사전적 의미와 ‘청년’과 대비<몸말로 넘어가기 위한 의미부여>
2. 몸 말- 코로나 19 팬데믹 사태가 교회와 기존 조직에 미친 영향 <콘텍스트,현상화>
(1) 코로나 19에 변화하는 사회 현상 분석: 거리두기, 언택트
(2) 교회에 미친 영향 분석: 온라인, 비대면 모임으로 권위와 위계질서 와해
(기존 교단, 교회, 직분등 중요한 권위들이 무의미해짐)
(3) 사제나 신학자의 전유물이던 문제(생명,죽음,구원)를 다른 곳에서도 찾게됨
(다영한 온라인 플랫폼이 생기고, 죽음도 기술적(의학)인 문제가 됨)
*이음 말- 문제 제기: 팬데믹 뉴노말 시대 교회와 총회 조직은 과연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는가? <글의 핵심 주제를 드러내기,질문하기 >
3. 맺는 말- 문제 제기에 대한 핵심 쟁점 분석과 결과 유추 <우리 문제로 여기게 하기 >
(1) 비대한 총회 기구와 총대수(1500명)의 비효율성에 대한 반성, 컨설트 결과
(2) 총대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짐으로 노화돼가는 총회에 대한 문제점
(사회 변화에 둔감, 보수적 조직으로 고착화)
(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서문의 제목과 수미상관 구조, 재강조, 열린 결말>
(사회에서 은퇴당할 수 밖에 없는 교회 현실)
사실 여는 말이 너무 길다. 자신의 논지를 제시하기 위해 비유를 영화에서 가져왔기에 줄거리와 해석 등 설명할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보통 주요 논지를 앞에다 두는데 문단 뒤쪽 결론부에사 중심 주제를 피력하고 있다. 좋은 글쓰기는 아니다. 이마져도 강하게 자신의 주장과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 과거와 현재 팩트에 입각하여 문제 의식을 제기하는 수준에서 글을 마무리하고 단지 문학적 수사로 끝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문장력이 빈약해서 일까? 신문 지면에 맞춰 짧게 써야만 했기 때문이었나?
그러면서 조심스레 열린 결말을 두고 있다. 본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독자에게 문제 의식만을 던져 주고 있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영화처럼 어떤 세상을 맞이할지에 대한 것을 고민하고 결단하도록, 독자가 속한 공동체에게 숙제로 주고 있다.
이는 이 글이 이미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단지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한계가 있다. 총회 구조 개편이나 총대수 조정등은 해묵은 과제이며 조금씩 이루어져 가고는 있지만 60여개가 넘는 노회들과의 총대 협의 과정, 여러 기구와 부서, 직원들의 생존과 이해득실이 걸린 문제라 해법이 쉽지않은 것이 문제다.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다. 필자가 이렇게라도 다루어 준 것이 용기라고 본다. 총회를 얼마 남겨 놓지않는 상황에서,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의 체질 개선이 시급한 시대에 머뭇거리고만 있는 총회와 교회의 급소를 잘 건드려준 것이다.
현대 세상의 기업과 많은 조직이 소외되었던 젊은이와 여성, 사회적 약자를 의사 결정 구조에 참여시키려 발빠르게 움직이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교회와 노회, 총회는 쉽게 변하지 않고 남자 60대 이상 노인들로 입법, 사법, 행정을 독식하고 있다.
우리내 총회에는 꼰대 인턴(노인) 들만 가득하다. 교회에도 총회에도 청년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 노인들이여 이제 그만 노욕을 거두고 은퇴할 때가 되면 뒷모습도 아름답게 은퇴해 주는게 좋지않을까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첨언(사족)*
오늘 교회 밖 세상에서는 노인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 들고 있다.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 속에 조기 은퇴로 퇴물 신세가 되고, 설움많은 비정규직 노인 일자리에 내몰리고 그럼에도 수명은 길어져 요양원이나 가정에서 힘없는 약자로, 치매 노인으로 학대 받는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노인에게 치명적인 전염병 코로나-19 시대에 소위 복지 국가라는 나라들 (유럽,일본)에서 생산성이 없는 노인들이 공공연하게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스웨덴은 코로나 걸린 노인은 병원 치료도 해주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단다.
그들의 지혜와 살아온 여정들은 존경받을 일이지만 앞에 영화에서 은퇴를 앞둔 보안관 ‘벨’ 처럼 한치앞도 모르는 스피드 시대와 혼돈의 시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요즘 것들이란... 나 때(라테)는 말이야 ’라며 과거 타령, 시대 탓만 하고 있는 소위 꼰대로 보여 질 수 밖에 없다. 필자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를 가져와 이 시대를 빚댄 것은 주요했다고 본다.
그런데 오늘 교회 내 회의기구, 노회나 총회에는 노인만 가득하고 그들 소리만 너무 크다.
교회는 노인들을 위한 나라인가? 천국이 가까와서 인가? 어느덧 나도 노인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꼰대 소리 안들으려면 열심히 이 시대 문화를 공부하고 젊은 글쓰기로 청년 정신을 잃지 말아야겠다. 그러다 젊은이의 나라를 위해 제때 물러가리라.
2020년 7월 3일 정영석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