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2:7-17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버린다
2017. 10. 10.(火)
1. 야, 묵상이든 연구이든 간에 성경은 다양한 번역본으로 읽어야 하는가 보다.
평상시 영어성경부터 읽는다. 영어공부도 하고, 성경을 조금 낯설게 보기 위해서 이다. 아무래도 영어로 읽으면 처음 읽는 것 같다. 그래서 기존의 내 선입견이 지워진다. 영어로 서너 번 읽고, 새번역을, 마지막으로 개역개정을 읽는다. 적어도 7회에서 10회는 동일 본문을 다른 번역본으로 읽는다.
2. 오늘따라 웬일인지 개역개정을 먼저 보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7절부터 읽는데, 10절에서 걸린다.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목자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든다.
에고, 그렇지. 제사장이나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문제지. 그리고 우리 시대도 다르지 않아서 목사들이 문제야. 그리고 우리 교회만 해도 그래. 내가 문제지. 누가 문제겠어. 목사지. 아이고.
14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한 다음에 회복시키시는가보다, 그랬다. 역시 우리 하나님 짱이닷!
3. 근데 그게 아니다.
개정의 ‘많은 목자’는 새번역본처럼 ‘이방의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제국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14절에서 회복되는 것은 이스라엘도 포함되지만 이방 나라들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심판한 제국들이 다시 심판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도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는 내용이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버린다!’
나는 7-9절의 내용을 저렇게 요약해 보았다.
7절은 버리고, 포기하고, 넘겨주었다는 일련의 단어가 매섭다. 무섭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것을 고치고 고쳐도 고쳐지지 않는 것을 더 이상은 손댈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그냥 쓰레기 통으로 내던지는 아이 심정이 이럴까? 골이 잔뜩 났을 테고, 그래도 아깝고 아쉬운 마음 가득하리라.
그러고보면 앞에서는 예레미야가 탄식하였다. 불평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이 탄식하고 불평을 하시는구나.
5. 8절은 하나님 마음으로도 읽고, 백성의 마음으로도 읽었다.
처음 전도사할 때, 어느 집사님이 그러신다.
“내 배로 낳은 자식이 바락바락 달려들 때는 죽이고 싶더라고요.”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인가 보다. 사자처럼 달려든단다, 하나님에게. 얼마나 독하고 악하게 대들었으면 사자라는 단어를 골랐을까.
나도 자식이고 학생이고 교인이었을 때는 사자처럼 개겼으나, 부모가 되고, 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보니, 그렇게 개기며 달려들면 안 이쁘다. 저게 내 모습이지, 그래서 잘 받아주는 면도 있지만, 그게 싫어서 안 받아주고 싶다. 하여간에, 나란 놈은........
하나님이 상당히 뿔났다.
‘무늬가 있는 매’(개정)라고 되어 있는데, 독법에 따라 ‘무늬가 있는 것의 굴’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이에나일 가능성도 있다.
그게 뭐든, 요는 같다. 다른 것들의 눈에 잘 띄어서 표적이 된다는 뜻이다. 안도현의 「연어」에서 은빛 연어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른 맹수들의 눈에 잘 보이게 한다는 거다.
6. 10절에서 13절의 주제는 ‘이방인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이다.
하박국 선지자, 그러니까 예레미야와 동시대를 살았던 그 예언자가 고민했던 사안이다. 그게 하박국 1장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작은 죄를 심판하기 위해 열배, 백배나 더 악한 이방 제국을 통해 심판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하는 일입니까, 라고 당당히 따져 물었다, 하박국은.
그것이 내 책,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에서 밀도 있게 다루어 보았다. 그게 내 문제이었으니까. 내가 잘못했기로서니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을 통해 나를 심판하고 교육하고 훈련한다니, 기가 막혔다.
그때는 열불 나서 나도 주께 대들었는데, 하박국을 읽으며, 책을 쓰며, 그 신비가 깨달아졌다. 그럴 수 있다. 그래야 한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을 보도할 뿐이다. 그러니 이 문제는 하박국서에 넘기고 여기서는 묵상을 하면 안 된다. 패스!
7.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박국보다 한 수 앞선다고 해야 하나, 서로의 시선과 관점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하박국은 심판의 도구로 삼았던 이방 제국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기준과 원칙을 그대로 적용해서 그들도 심판 받는다는 일관된 하나님의 정의를 내세웠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다르다. 그들은 정녕 ‘악한 이웃’(14절)도 이스라엘과 똑 같이 대우를 받는다. 그들도 불쌍히 여긴다. 이스라엘이 언젠가 심판의 날이 끝나면 고토로 돌아오듯이, 그들도 돌아갈 것이다.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것이고, 역으로 주의 도로 살아야 회복될 것이다. 이방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꼬드겨서 바알을 섬기게 만들었으나, 주의 진리로 살겠다고 맹세하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다.
하박국이 ‘보편적 정의’에 초점을 두었다면, 예레미야는 ‘보편적 사랑’에 방점을 찍는다.
하박국이 예레미야에 비해 국수적이라면, 예레미야는 보편적이다.
하박국에게 이방 제국과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반면, 예레미야는 그들에게도 마음을 준다. 앞에서 마음의 할례를 말한 예레미야로서는 그들이라도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누구나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나 보편적이기에 그들에게 요구하는 기준도 보편적이다.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그대로다. 그게 11장 4-5절에 있다. 그것과 똑 같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도(道)를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도(道)란 9장 24절에 명시되어 있다. 긍휼, 공평, 공의!
이런 모습이 갈라디아서랑 연결이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하자.
8. 보편적이라는 말을 듣고 누구나 사랑한다는 것을 쉽게 여길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기서 보편에 해당하는 이들은 하나님 백성의 원수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7절에는 ‘원수’ 14절에는 ‘악한 이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들도 사랑한다는 거다.
내 원수를, 나를 못살게 군 놈을, 그 놈 때문에 죽도록 고생했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지랄발광을 떨었는데, 그런 새끼를 사랑한다고? 나랑 동등한 조건과 자격으로 구원하고 사랑받는다고?
내가 그런 조건으로 구원과 사랑을 받으면 좋지만, 내 원수가 나랑 똑 같이 대접을 받으면, 그냥 싫다. 그러면 안 되는 줄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튕겨낸다. 몸이 알아서 거부한다.
사실 답은 안다.
내가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에서 썼듯이, 그리고 요나서를 강론할 때마다 외치듯이, 내가 이방인이, 원수가 구원받지 못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고스란히 내게로 적용된다고. 나도 구원 받을 수 없고, 사랑 받을 수 없다.
그건 안다.
그래서 감사하지만, 그게 내가 설교한 대로 안 된다. 말처럼 쉬우면.........
자동적으로 실천/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고군분투해야, 아주 조금 된다.
9. 그냥 기도 한다.
“하나님, 내가 이래요. 나쁜 놈입니다. 아는데 싫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다, 라고 쓰고 마치고 출력하려고 하는데, 제목이 눈에 밟힌다.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버린다.
아이고, 주님. 잘못했습니다. 안 그럴게요. 잘못했습니다. 저를 버리지 않는 주님, 감사합니다. 저도 버리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