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에스겔 16장
제목 : 피투성이라도
일시 : 2019년 8월 4일
1.
왜 이럴까?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까지 거북한 본문도 잘 묵상했는데. 기이한 환상을 보는 1장부터 엽기적인 예언자의 행각과 메스꺼운 성전 내부에서 벌어지는 우상숭배와 죄악을 똑똑히 보면서 통탄도 하고, 분노도 하고, 그러면서도 우리 한국교회 안에, 내 안에 저런 모습 없는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때로 아팠고, 울었고, 욕했다.
그런데 16장의 알레고리는 도무지 읽혀지지 않는다. 아니, 읽고 싶지 않은 게다. 자꾸만 외면하려 든다, 내 마음이. 고개를 돌리고 싶다. 정면으로 마주하기에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내 죄를 내가 알기 때문이며, 그 죄를 직면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아니 끔찍하고 섬뜩하다. 그래서 이리 꽁무니를 내빼고 주변을 서성거리는 거다. 달아날 길도 없고, 그렇다고 내쳐 달리기에는 너무 버겁고.
그래도 이것이 나의 숙명인 것을. 이 길을 걷지 않으면 갈 곳이 없는 걸.
16장은 분량만 놓고 보면, 에스겔 전체에서 가장 길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양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내용은 또 어떻고. 내 영혼을 탈탈 털어댄다. 그도 그럴 것이 16장은 우리 영혼의 실사이기 때문이다. 16장은 12장부터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영적, 정치적 실상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흐름에 서 있다. 하여, 이 말씀 앞에 선 나는 오줌 지리기 직전이다.
2.
16장의 줄거리는 상징적이고 알레고리 형식이지만 구약성경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별 볼 일 없는 천하고 천한,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핏덩이를 살려내서 정성을 다해 키워주었고, 다 자란 후, 그를 사랑하여 왕후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거기까지.
그 이후는 오만방자하여서 소싯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몸을 함부로 굴렸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맡겼다. 이런 경우가 전무후무한데, 돈을 받고 자기 몸을 파는 경우는 있어도, 돈을 주면서 그런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비난해 마지않던 북이스라엘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작게 보일 정도이고, 오히려 무죄 방면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그렇지만 결말은 해피엔딩, 아니 해피엔딩으로 마치겠다는 지독한 하나님의 사랑과 결심이다. 북이스라엘과 소돔도 회복하고, 이스라엘도 일시적인 언약이 아니라 영원한 약속을 맺고 지키겠다는 하나님의 서약이 이 스토리의 최종 결말이다. 이것이 앞부분에서 지독히도 외설스러운 비난의 결말이자 하나님의 본심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말이다.
3.
14절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알레고리로 시작해서 그 천한 존재를 왕후의 지위까지 격상시키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의 기원으로 지목된 가나안, 아모리, 헷의 공통점은 뭘까? 이방인이고 이교도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너희가 그토록 혐오하는 이방인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이들을 위한 제사장 국가가 되라는 사명을 슬쩍 환기시킨다.
이스라엘의 출생 스토리는 애잔하다. 어느 생명인들 귀하지 않을 리 없건만, 저리 버림받은 아이, 태어남 자체가 죄악이고 짐덩어리인 아이. 그냥 불쌍하다.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고 딸로 태어나서 아예 던져놓았다는 분을 알고,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의 사고사가 있었고 그래서 네 년이 아비 잡아 먹은 년이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한 분도 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사랑받지 못하고, 저쪽 구석에 밀쳐놓은, 투명인간 취급받으며 자란 이들의 삶의 내력이 포개진다.
태어나면 그냥 기본적으로 해 주어야 할 것들, 탯줄을 잘라주고, 피를 씻어주고, 포대기로 감싸주는 그런 것도 받지 못한, 그뿐인가, 차라리 죽으라고 들판에 갖다 버렸으니, 굶주린 들개의 먹잇감으로 갖다 바친 것과 같으니, 그렇다, 저주라는 말 밖에는 딱히 어울릴 법한 단어가 없다. 오직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만장일치로 이 아이의 유기에 암묵적 동의를 했다. 오직 한 분, 하나님 빼고 말이다.
아이는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그것은 원초적 본능이다. 살려달라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을까? 얼마나 울었을까? 경기하지 않았을까? 그 소리를 듣고 저 주변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들개나 하이에나의 움직임을 포착이나 했을까?
하나님이 발버둥치는 아이를 보고 한 말은 내내 내 가슴을 울린다. 이번에는 개역개정이 더 실감나는 번역을 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은, 아이를 핏덩이라 부르고, ‘살아라’(Live)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나는 의미랄까, 뉘앙스를 살려서 번역하면, 네가 피투성이라도, 핏덩이라도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니 어찌하든지 살아라, 버텨라, 로 읽힌다. 그러니까 피투성이일지라도, 핏덩이임에도 불구하고, 핏덩이니까 무조건 살아~
4.
사람답게 사는 것은 이차적이고 후차적이다. 내면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야유하는 자의 사타구니를 통과해서라도, 미친 척하며 침을 질질 흘리더라도, 그리하여 삶이 비루먹은 개와 같이 너덜너덜해지더라도 죽지 말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사실, 나는 그렇게 내 고난의 연대기 5년을 버텼다. 죽고 싶을만치 힘들었지만,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살고 싶었다. 안 죽기만 하면 되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호강이고 사치일 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벅차고 버거웠다. 그때 내 내면은 영락없는 비루먹은 똥개이었다.
간혹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죽을 고생하는 후배 목사들 보면, 내 이야기를 하면서, 에스겔 보다는 다니엘 이야기를 해 주면서 어찌하든지 살아남으라고, 버티라고, 견디라고 말해준다, 속으로는 울면서. 살아 있어야, 살아야 살 수 있으니까. 죽으면 끝이니까. 살아 있으면 언젠가 볕 뜰 날 오니까. 죽는 것이 죄지 사는 것이 죄가 아니다. 죽음은 사탄이고, 생명 부지하는 것은 거룩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 날, 내 삶이 달라져 있었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내게 건네주셨고, 언제까지나 징징거리며 살 것 같았던 나를, 하박국서 말씀처럼 내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셨다. 할렐루야!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게 말한다. 살아 있어 고마워.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내게 말한다. 살아 줘서 고마워.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같은 이에게 말한다. 살아만 있으세요. 살아 있으면 살게 된답니다. 스스로 죽지 마세요. 내면에 철철 흐르는 피눈물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속으로 삼키며 삼키며, 아무 일 없는 듯이, 그냥 살아만 있어주세요.
그리하여 내가 좋아하는 시인, 시바타 도요의 “약해지지마”의 한 싯구처럼, ‘살아 있어 좋았어’라는 말을 할 수 있기를.
5.
이것이 3-6절 이야기이었고, 7절부터는 그 비루한 인생의 황홀한 역전 스토리가 전개된다. 하나님은 이 아이가 태어나면서 받지 못했던 것을 모두 경험하게 하시고, 도무지 상상 가능하지 않을 일을, 판타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마구 벌이신다. 9절부터 묘사된 치장은 씻어주지도 않고 포대기로 감싸주지 않았던 것을 정확하게 대비한다. 살아남겠다고 버둥거리던 들풀 같던 아이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게 눈부시게 빛나는 보석이 되게 하신다.
그런데 이 소녀를 치장해 주는 장식들은 주석자들에 의하면, 종교적인 용어란다. 성전과 관련된 언어이다. 특히 10절이 그러하다. 이것은 뒤의 알레고리에서 나오겠지만, 자신의 수놓은 옷, 그것을 산당과 우상숭배에 사용하는 것과 연결되면서 비극미를 한껏 올려준다. 또한 제사장 나라, 가시적이지만 움직이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되라는 부르심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저 대목은 다윗과 솔로몬 치세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어차피 이 알레고리는 우리 모두의 각자 이야기이니까.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던 몇 년의 시기를 어찌어찌 통과했더니 눈부신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5년의 고난의 연대기, 5년의 무심한 잠복기, 도합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언제부턴가 외적인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책도 쓰고, 인정도 받고, 로고스서원은 번창했고, 로고스교회는 활기찼다.
내게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기대가 뭔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껴입은 듯, 거북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싶어 외려 죄스러웠다. 나 같은 놈은 행복할 수 없어, 나란 놈은 행복하면 안 돼, 그런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모를 터무니없는 생각을 아주 이따금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내가 미쳤다, 그리고 그런 내가 장하다.
이것이 이스라엘 이야기만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듯, 그대의 이야기가 되기를, 조용히 손 모아 기도한다.
6.
아, 우리 인생이 저기서 끝나면 얼마나 좋으련만. 실제 현실이 그 모든 동화와 신화처럼 000이는 000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똑똑히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피 엔딩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한편으로 동화처럼 끝나면 현실이 아니라고 나무라고, 새드 엔딩이면 너무 현실적이라고 나무라고.
그런데, 로 시작하는 15절부터의 이야기는 반전의 드라마다. 앞 부분이 인생 역전의 이야기이었다면, 그리하여 저 나락에서 뒹굴던 아이가 아름다운 소녀가 되고, 존귀한 왕비가 되는 역전극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더 이상 추접할 수 없는, 끝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반전의 이야기이다. 그다지 읽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그러나 그래서 읽어야 하고, 알아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반전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앞 부분을 정확하게 뒤집으면 된다. 지극한 사랑으로 베푼 것을 지극히 역겨운 짓에 쓸어넣는다. 너는 보석 같은 존재라고 보석을 주었더니 그 보석으로 돌을 사고, 나무를 사서 우상을 만들지 않나, 너의 벗은 몸을 가리고, 너의 아름다운 몸매를 돋보이게 하려고 주었던 옷으로 산당을 꾸미는데 사용하지 않나, 굶주렸던 추억으로 먹는 것을 좋아하는 너를 위해 최고의 음식을 끼니마다 주었더니 죄다 산당의 제물로 바치지 않나. 무엇보다도 버림 받은 자식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듯한 네가 아들딸을 제물로 바치다니.
7.
23절부터 29절은 이스라엘이 바람 피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알레고리일뿐.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너무나 성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민망할 정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스라엘,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분단 이후 남쪽의 나라,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남 유다 왕국과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그들은 조국과 정권의 안위를 위해 사대주의로 일관했다. 친애굽으로, 친앗시리아로, 친바벨론으로 국가의 운명을 걸었다. 정치학자들이나 외교학자들이 본다면, 국제관계의 기본인 외교인데, 저걸 비난하는 것은 정치의 ABC도 모르고,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무지한 자라고 볼 법 하다. 실제로 어느 정치학자가 무심히 그렇게 내뱉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시각은 좀 다르다. 저 정책은 한편으로 국제외교상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친애굽으로 정권을 지켰다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버림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와 정권의 존망을 외국, 그리고 강대국에 의존하다보니까 공물을 많이 바쳐야 했다. 자, 이쯤이면 왜 예언자들이 분노하는지를 이해할 거다. 공물이 어디서 나왔을까? 왕? 귀족? 아니다. 평민들이다. 그러니 예언자들이 비난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현명한 외교 정책도 아니거니와 사회 경제적으로 약자의 고혈을 짜내는 정책이기에 맹폭을 가하는 거다.
예언자들이 국제 정치 역학을 전혀 모른 채, 그냥 종교적인 언술을 되풀이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사야는 추후 중근동의 패자로 부상할 바벨론에게 아무 생각 없이 이스라엘의 군사와 무기, 경제력 등을 남김없이 다 까발린 히스기야를 강력히 비판했다. 예레미야는 어떤가. 친바벨론만이 살 길이라고, 모두가 애굽을 의존할 때에도 그만 홀로 바벨론에 투항하라고 외친 덕에 지금 우리에게는 선견지명이 있는 선견자로 대접받지만, 당시는 매국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역적이었다.
위에서 사대주의로 인한 공물 폐해를 살짝 언급했는데, 그 내용이 30절부터 34절 내용이다. 바람피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귀부인 이야기로 빗대었지만, 실은 정치와 외교에 관한 것이다. 읽어보면 내용은 어렵지 않다. 창녀는 돈 받고 몸을 판다. 그래서 매춘이 아니고 매매춘인 거다. 그런데 이 멍청하고 음탕하기 그지 없는 이 여인은 돈을 주고 몸을 판다. 이런 사람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토록 무참히 짓밟은 사람 없다. 그런 사람 사랑하는 하나님도 또 없지만.
화대로 주는 그 돈이 바로 종주국에 갖다 바치는 것이고, 그렇게 해도 보호를 받기는커녕, 천대받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 소용없고 도리어 버림 받고 말았던 것이 이스라엘 역사이고, 정치가들의 정치이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예언자들과 달리 문외한인 내가?]
그 결과를,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는 35절부터 43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의존했던 국가들부터, 그들이 연모해 마지 않았던 국가가 ‘동맹’이 아니라 ‘외적’이 되어 침략을 당했다. 무시당했다. 그리고 멸망당했다. 저 구절에서 인상적인 단어는 벌거벗음과 벗겨버림이다. 수치이자 부끄러움을 강조하는 것인 동시에 원래 상태대로 되돌림이다. 태어날 때, 그때로 원상 복귀시켜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의 발현이며, 음탕한 짓거리에 대한 정당한 심판이다.
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려나?
8.
44-52절은 남유다의 동족이자 친족인 사마리아와 소돔과 견주어 비판하는 대목이다. 저 둘의 특징은 남유다가 경멸하던 이들이다. 소돔이야 창세기 18장에 나오듯이 타락과 음란함의 대명사가 아닌가. 그리고 사마리아는 이제는 망해버린, 앗시리아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수도인데,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그들은 신앙의 정통성은 없는, 겉으로는 히브리인이지만, 실제로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결론은, 그들보다 남유다가 더 죄가 많다, 크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남유다의 죄와 견주면, 훨씬 적고, 무죄를 선고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얼마나 심한 조롱이고 비난인가. 내가 깔보았던 이들이 나보다 더 의롭다니, 내가 그들보다 더 악하다니. 아마 에스겔의 이야기를 듣던 당시의 청중들 중에는 야유와 함께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렸으리라.
그런데 그들이 듣기에 더 환장할 것은, 사마리아와 소돔이 내 형제, 내 자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저들은 형제도 아니고, 자매도 아니다. 이제는 남남이다. 한때는 가족이고 친족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남남인 수준을 떠났고, 차라리 원수이다. 그런데 에스겔은 그들이 너와 가족이라고 명토박아 말한다. 다시 한 번 선교적 차원, 즉 제사장 국가의 사명이 이 알레고리의 이면에도 은밀히 작동하고 있다.
9.
나는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는 대목을 보고 옛 일이 생각나서 눈물이 흘렀다.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의 끝 부분에 잠깐 언급되어 있는 내용이다. 어머니에게 버림 받고 자란 이 친구는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늘 걱정했다. 남편의 학대와 폭력, 노름에도 버티고 버텼건만 결국 아들을 두고 도망가야 했다. 야반도주하듯 떠났다가 조용히 나를 만나러왔다. 우리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우리 서로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갔다. 잘 사는지, 어찌 지내는지. 보고 싶다.
지난 주에 처음으로 보육원 아이들과 ‘희망의 인문학’ 모임을 했다. 처음이라 낯설고 어색했든지 아이들이 말을 잘 안해서 약간 힘들었다. 총 4명 중 2명이 간단히 자기 소개가 되는 글을 썼다. 발표는 하지 않았다. 대화 중 슬쩍 읽어보아다.
첫 문장이 이랬다.
“나는 부모님의 폭력으로 이곳에 왔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나중에 커서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버림 받은 아이들, 그리고 또 다시 버림 받을까 노심초사하는 아이들, 버림 받았기에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아이들.
회복센터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대개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방치로 상처란 상처를 다 받은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글에 단골처럼 나오는 것은, 나 때문에 부모님이 고생한다, 그 부모님 위해 사고 치지 말고 잘 살아서 효도하겠다는 말이다. 누가 이 아이들에게 그런 죄책감을 심어 주었나, 너는 왜 피해자로 자라서 가해자가 되었니?
아이고, 주님.
10.
그럼 소망은 없는 걸까?
44절에서 52절은 그런 그들을 비판하는 듯이 보여도, 53절부터는 그런 그들도 회복된다는 예언으로 분위기가 다시 반전한다. 예전상태를 회복할 것이다. 여기서 예전상태는 벌거벗은 피투성이 시절이 아니라 고귀하고 고결한 왕비의 지위이다.
언약을 잘 지키라는 것,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영원한 언약에 관해서 조금 더 쓸 것]
나는 기억하라는 말이 마지막 포인트라고 읽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것 말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최고의 방법은 자서전적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버림 받았던 피투성이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멀리 떠나갔다는 것, 그런 나를 끝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셔서 회복해 주신 은혜이다. 내가 지은 죄와 주가 주신 은혜를 동시에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부끄러웠던 기억이다. 나의 어두웠던 시절과 부그러운 죄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말하는 것, 그것이 대답이다. 내가 얼마나 못난 놈이고, 못된 놈인지를 어떤 쪽팔림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피투성이라도 살고,
피투성이라도 사랑하고,
나는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에 부끄럽다.
그래도 나의 마지막 말은 사랑한다, 감사하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