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올바름은 누군가에게 표준이 되고, 올바른 사람을 보며 배우고 싶어진다.
이번에 읽은 책 『국가』에서는 올바름이 흔히 정의(δικαιοσύνη, 올바름)로 번역된다.
참 어려운 단어다. 왜나면 “누가 정하냐”에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해도 언젠가 잊혀지니까 필요가 없다.
이 단어를 플라톤의 『국가』로 되는데 까지 파해쳐 보겠다.
플라톤의 『국가』는 아까전에 말했듯이 ‘정의(δικαιοσύνη, 올바름)’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적 탐구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탐구는 단순한 개념 정의의 나열로 정리되지 않는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여러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정의에 대한 인간의 서로 다른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정의에 대한 각자의 사유가 어떻게 심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여정으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케팔로스와 나눈나. 그는 정의를 “거짓말하지 않고 남에게 빚진 것을 갚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정의관은 오랜 세월 사회 속에서 살아오며 그에게 녹아온 전통적 도덕관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의란 약속을 지키고 법을 어기지 않는 성실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안정적이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항상 옳지는 않다며, 예화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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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있다. 그의 친구가 정신이 멀쩡할 때 위험한 무기를 그에게 맡긴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의 친구가 정신이 맛이 간 상태에서 무기를 돌려 달라고 억지로 때를 쓴다. 이 때 그의 친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1번. 무기를 돌려주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친구들 달래 돌려보낸다.(이미 예전에 돌려 줬다는 거짓말로)
2번. 위에서 말한 케팔로스의 정의처럼 거짓말 하지 않고 돌려준다.(뒤에 어떤 일이 있을지는 보장 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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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선택은 어떠한가?
나라면 1번을 고를 것이다.
소크라테스 또한 거짓말로 돌려보내야 모두가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케팔로스의 생각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다고 설명한다. 정의가 단순히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상황과 목적을 고려해야 하는 더 깊은 원리임을 드러낸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인정하며, 좋은 예화라고 칭찬하며 자리에서 물러난다. 다음으로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논의를 이어받는다. 그는 시인 시모니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정의란 친구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에게는 해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박한다. 이 말은 당시 그리스 사회의 명예와 우정, 적대 관계에 기반한 윤리관을 반영한다.
그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에게 질문한다.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나는 이 질문을 듣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앞에 폴레마르코스의 정의관을 보면, 친구에겐 선을, 적에겐 해를.
영웅과 적이 나눠지는 걸로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적을 정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판단을 잘못할 수 있고, 정의로운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말이 길들려지지 않으면 다루기 어렵듯이, 사람 역시 해를 입으면 더 불의해 질 뿐이라고 한다.
정의는 누군가를 더 나쁘게 만드는 행위일수는 없다.
집단의 이익을 위한 편파성이 아니라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드는 보편적 가치로 발전한다고 볼 수 있다.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트라시마코스가 격렬하게 개입하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 그는 소피스트답게 냉혹하게 현질주의를 내세운다. 그의 유명한 주장에 따르면 정의란 “강자의 이익”일 뿐이다. 지배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트라시마코스에게 정의는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권력의 산물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보다 불의한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고 더 행복하게 산다고까지 말한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단순한 궤변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와 권력의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도전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민주주의가 아닌 공산주의 나라에서는 최고 통치자의 말이 법이니 그럴 수 있다.
법을 맘대로 정하고 힘이 약한 자는 그 안에서 고통을 받는다.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생각할까.
소크라테스는 통치 기술의 본래 목적은 통치자 자신이 아니라 백성들의 이익에 있다고 주장한다. 의술이 의사의 이익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을 목적으로 하듯, 참된 정치 역시 시민의 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불의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단순한 도덕적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와 영혼을 조화롭게 만드는 원리라는 점이 강조된다.
트라시마코스는 또 진정한 전문가라면, 실수를 안 한다고 주장한다.
실수는 그 방면에서 지식이 부족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수를 하면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며 진정한 지배자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강자의 이익을 따르는 게 올바름이 맞다고 주장한다.
방금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통치 기술의 본래 목적을 생각하면,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억지로 밀어 붙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대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케팔로스는 전통적 도덕을 상징하고, 폴레마르코스는 공동체적 충성심을 상징하며, 트라시마코스는 권력 중심의 현실주의를 상징한다. 플라톤은 이들을 단순한 논쟁 상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리며 많은 시대를 보여준다.
책에서는 정의의 최종 정의를 제시하지 않으며, 나는 이 대화를 보며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잘못된 정의관들을 하나씩 소크라테스가 검토하며 더 높은 차원의 상상을 얻을 수 있었다. 케팔로스의 관습적 정의, 폴레마르코스의 편파적 정의, 트라시마코스의 권력적 정의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거치며 한계를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나는 정의가 단순한 규칙 준수나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공통체 전체의 조화를 묻는 근본적 질문임을 깨닫게 했다.
『국가』의 첫 대화는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인간 존재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 정의를 하나의 정답으로 제시하기보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탐구해야 할 삶의 과제로 남겨 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철학의 세계를 이어나간다.
정의(δικαιοσύνη, 올바름). 왜 이렇게 중요할까?
나는 어쩌면 그것이 단순히 “무엇이 맞는가”를 알려주는 것 보단,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를 보여주는 기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