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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지방(충주) 답사자료

작성자David|작성시간09.09.25|조회수265 목록 댓글 0

중원지방(충주) 답사자료

 

중원지방(충주) 답사자료 

 

  

 

 

1. 중원지방 개요-시대별 변천사, 남한강을 통해본 역사, 주요문화재, 조동리선사유적박물관, 조동리지

                      석묘, 신청리지석묘, 중원탑평리 7층석탑(중앙탑), 충주박물관

 

2. 충주의 고구려유적-국원성, 중원고구려비, 봉황리마애불상군

 

3. 우륵과 탄금대-명승지 탄금대, 우륵, 가야금

 

4. 중원미륵사지-미륵대원, 사원의 창건과 인물, 미완성과 좌절된 전설, 수학적 질서의 폐허, 온달장군

                     의 공기돌, 자연에 순응과 인공적 변형, 지형을 바꾼 인공운하 건설, 복원된 가람의 구

                     성, 마지막 석굴사원, 폐허의 감동, 석조보살의상, 미륵사지 귀부,

 

5. 청룡사지-보각국사 정혜원융탑, 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 석종형부도, 위전비

 

6. 불교문화재-봉황리마애석불군, 단호사철불좌상, 충주철불좌상, 미륵리석불입상, 백운암철조여래좌

                   상

 

7. 산성-장미산성, 대림산성, 충주산성, 견학리토성, 주정산봉수

 

8. 임경업장군 유적지-임경업장군, 여진과 조선의 관계, 충렬사, 어제달천충렬사비, 임경업장군묘, 무

                            예수련장 삼초대, 임경업장군 사우

 

9. 석탑-미륵리오층석탑, 미륵리삼층석탑, 추평리삼층석탑, 중원탑동오층석탑, 단호사삼층석탑, 창룡

          사다층청석탑,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억정사대자국사비

 

10. 기타-계립령로하늘재, 충무공이수일장군묘, 충무공이수일신도비, 택견, 김생

 

 

 

1. 중원지방 개요

 

(1) 시대별변천사

 

[구석기시대]

석기나 뼈연모를 주된 생활도구로 하여 사냥과 식량 채집으로 삶을 꾸리며 이동생활을 하였다. 이 시대의 주거 형태는 대부분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을 이용하거나 강가에서 막집 등을 짓고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경우도 있었다. 중원지역은 내륙을 관통하는 남한강이 흐르고 주변에 석회암 지대가 널리 발달되어 동굴과 바위를 이용한 구석기 시대의 주거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유적으로는 사기리, 명오리, 금능동, 용탄동, 조동리 유적 등이 있다. 특히, 남한강 주변의 유적과 연결된 동굴유적은 석기 제작과정과 문화 발달과정을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강을 낀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 지역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과 편리한 주거환경을 제공하여 인간 생활의 시작부터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게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고아시아족의 한 갈래가 시베리아, 북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이주하면서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주민들은 물과 식량 자원이 풍부한 큰 강이나 바닷가에 정착하여 주로 수렵, 어로, 야생 식물의 채집을 생계수단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의 중요한 유물은 토기와 석기로서 신석기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면 일부 지역에서는 조, 피 등의 곡물이 재배되고, 돼지 등 동물도 사육하게 되었다. 우리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 움집터가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강안대지에서 신석기 문화층이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남한강 상류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충주지방의 선사시대 문화는 하나의 독립된 문화권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각시대의 문화유적이 그 주변지역과 맥을 같이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중원지역의 민무늬토기 문화를 살펴보면 깊은 바리·구멍무늬토기·골아가리토기·붉은간토기 등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방 계통의 문화가 북한강, 임진강 상류와 남한강 중류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새롭게 변화 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한편 서북지방의 팽이형 토기문화는 황해도, 경기도의 연안지방과 해안지방인 예성강, 임진강 하류, 강화도를 거쳐 역시 충주지방으로 흘러 왔다.

 

이러한 동북·서북지방 문화를 흡수해서 새롭게 변화된 경기도, 충청도 지방의 민무늬토기 문화는 여러 가지 다양한 기형의 토기를 출현시키면서 중부 이남지방으로 전파되었다. 충주지방에서 출토되는 각종 민무늬토기가 차지하는 학술적 가치는 남부지방으로 문화가 변화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어 문화의 지역적 공백을 메꾸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유적으로는 동량면 지동리·사기리·함암리·용교리, 금가면 우러상리·오석리, 가금면 장천리·탑평리 유적 등이 있다. 출토유물로는 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덧띠토기·변형팽이토기·깊은바리형 토기 등 민무늬토기와 바퀴날토기·돌도끼·돌칼·화살촉 등의 각종 석기류가 있다.

 

이상과 같이 충주지역의 선사문화는 남한강변을 중심으로 구석기부터 신석기까지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강을 따라 교통이 열리고 인류가 살기 좋은 제반 조건을 갖추고 취락이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것이 또한 중원문화의 중심지로서 충주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삼한 중 마한의 일부였으나 백제가 성장하여 근초고왕 5년(350년경) 백제의 영역으로 낭자곡성(娘子谷成)으로 불리다가 그 후 5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남하하여 들어오자 백제는 한강변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후퇴하게 되었으며 고구려는 중원지방을 석권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해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 세력을 한강유역에서 물리치게 되었다. 이 작전 중에 신라는 단양지역을 확보하고 단양적성비를 세워 새 영토의 주민들을 회유하였다. 신라는 이어서 백제가 수복한 한강 상류지역까지 빼앗아 전 한강유역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중원지역은 자연 신라의 장악 하에 들어 신라 진흥왕은 557년 국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다음해에 중앙 즉 경주의 다음가는 부도(副都)로 삼았다. 또한 통일후 새로 편입된 백제, 고구려의 진호를 목적으로 불사를 일으키며 중앙탑을 세웠다.

이상과 같이 중원지역은 삼국이 번갈아 차지함으로써 삼국의 문화가 재융합되는 특성을 지니게 되어 독특한 중원문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문화유산으로는 중앙탑, 고구려비, 건흥 5년명 금동불, 누암리 고분 등이 있다.

 

[고려시대]

신라의 지배력 약화를 틈타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호족들이었다. 충주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은 충주유(劉)씨로 유긍달의 딸이 태조 왕건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등 충주의 위상은 고려시대에도 중부지역의 중심도시로 지속되었다.

 

왕건은 나라를 건국한 후 전국의 주·부·군현의 제도를 도입하는데, 이때 중원을 충주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 지명이 이어오고 있다. 13세기에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의주와 개경이 함락되는데, 고려는 일단 몽고와 강화를 맺고 돌려보냈다. 이때 일부의 별동부대가 광주·충주·청주 등 여러 성을 공격하였는데 오직 충주만은 충주성을 지키는 노군잡류별초에 의해 끝까지 항진하여 몽고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5차 침입(1252)때는 처인성(용인)에서 살리타이를 사살한 김윤후가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재직하면서 몽고군과 70여일 동안 혈전을 벌여 몽고군을 격퇴시키게 되었다. 고종 42년(1255)에는 몽고병이 남쪽을 석권하고 다시 하늘재를 넘어 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주의 다인철소(지금의 이류면)의 사람들이 몽고군을 물리쳤다. 이러한 사실은 중원인들이 외세로부터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뚜렷한 의식의 발로로 얻어진 결과라 할 것이다.

 

한편 충주지역은 남한강이 관통하고 있어 강을 이용한 조운이 성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13조창 가운데 이 지역에는 덕흥창(德興倉)이 있어 경상도 지역과 충청도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조운을 통하여 운반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일제시대까지 계속 되었다. 이시대의 문화는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한 미륵리 대석굴사원, 문숭리의 숭선사지·법경대사자등탑비, 송계의 사자빈신사지석탑, 월광사 원랑선사탑비 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충청도라 개칭하고 좌감사를 배치하였으며 세조 3년(1457) 충주진영이라 개칭하고, 전국을 7도로 분할하여 충주영장으로 하여금 단양, 영춘, 제천, 청풍, 음성, 천안 등 8군의 군정사무를 관장하도록 하였으나,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신립장군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8천 군졸을 거느리고 왜적과 대적하였으나 애석하게 패전하고 이후 내우외환을 간접적으로 받으면서 충서 충원현 또는 충주목으로 불리어 오다가 고종 33년 행정을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충주목사를 폐하고 충주는 도청 소재지로 된지 14년 만에 교통 불편을 이유로 순종 2년 도청을 청주로 이전하고 충주는 군청소재지로 군수를 배치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1913년 군면 폐합으로 충주는 충주군 읍내면에 속하다가 1917년 충주면으로 개칭하고 1931년 5월에 지방제도의 개정에 의하여 충주읍으로 승격한 후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일제 침략기에 우리지역의 항일 운동의 시작은 3월 11일 달천리 천주교인이 독립선언서 낭독으로부터였다. 이후 4월 1일 이희갑이 중심이 된 용원장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20년대에 들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확산으로 대소원 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또한번의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다.

 

[해방이후]

해방된 지 12년 만인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은 충주시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변경조치에 의하여 괴산군 상모면이 중원군으로 1973년 7월 1일 이류면 하문리는 괴산군으로 신니면 광월리의 일부는 음성군으로 1987년 1월 1일 제천군 한수면의 사기리·명오리·서운리·포탄리·함암리·호운리는 충주시 동량면으로 1989년 1월 1일 산척면 원월리가 제천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에는 도농통합에 의하여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충주시로 발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남한강을 통해본 역사

[남한강 줄기]

한강의 물줄기는 크게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과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남한강으로 나뉜다. 오대산에서 나온 물은 정선에 이르러 조양강(朝陽江)이 되고 영월, 영춘을 돌아 단양에서 소백산맥의 등을 타고 남서쪽으로 흘러 황강(黃江)이 된다. 황강은 충주 분지에 들어와 달천(達川) 물과 합해지고 여기서 다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기도 여주로 향한다. 남한강은 여주에서 섬강(蟾江), 청미천 등등의 물을 모아 여강(驪江)이 되며, 다시 마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지형적 특성으로 보아 남한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영월∼충주 사이의 약 120km 구간이다. 이곳은 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퇴적암층이 발달한 곳인데, 일반적으로 깊은 협곡을 이루어 약 80개의 여울이 있다고 한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졌기에 근처에는 고수동굴 등 유명한 석회암 동굴도 많다. 여울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청풍 근처에 있는 황공탄(惶恐灘 : 으시시비비미여울)인데, 반세기 전만 해도 뗏목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곳이 이곳이다. 또 단양 구담에서 연속되는 협곡은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그러나 뱃길로는 매우 어렵다.) 이곳에 '단양팔경(丹陽八景)'이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충주 댐 건설로 인해 황공탄과, 단양팔경의 3분의 1이 날라 가버렸다.

 

둘째, 충주∼마재 사이의 약 100km 구간이다. 이곳은 주로 화강편마암, 편마암 등으로 덮여 있는데, 이런 암석들은 오랜 기간 침식을 받았기에 충주 하류의 산들은 별로 높지 않다. 또 강폭도 넓고 수심도 깊고 잔잔하며 도처에 비옥한 충적지가 발달하였다. 한편 수심이 얕고 암초가 드러나는 여울도 13개 정도 있었는데 조운(漕運)상의 이유 때문에 일찍부터 강바닥을 파내는 '뱃골'이란 공사를 벌이기도 했다.

 

남한강 물줄기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지닌 교통, 군사적 중요성이었다. 한반도 하천의 대부분은 산맥과 일치하여 동북-서남으로 흐른다. 예컨대 남한강도 소백산맥을 경계로 낙동강과 정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그러나 다른 하천이 유역간 연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편에 비해 남한강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낙동강과 정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두 하천 사이의 거리는 약 40km. 이 거리만 육로(陸路)로 연결하면 남한강과 낙동강을 합하여 500km가 넘는 한반도 중앙부의 한강-낙동강 수로(水路)가 형성된다. 이 수송로를 따라 남쪽으로 (경기도) 광주, 충주, 상주, 대구, 동래 등의 도시들이 형성되고 배열되었다. 이렇게 보면 삼국시대 (남)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를 지배하였다는 이유를 수긍할 만도 하다.

 

[조선시대 이전 남한강]

남한강 유역에 살았던 우리 조상 중에 가장 먼저 역사에 등장하는 이들은 삼한(三韓)에 속한 몇몇 부족 국가이다. 백제국(佰濟國), 노감국(奴監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등인데 이들은 대개 서울에서 경기도 이천까지 세력을 미쳤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 중 서울과 광주군 일대에서 발전한 백제국은 주변 지역을 병합하여 한반도 중심지방의 새로운 영역국가 즉 백제(百濟)로 발전했다. 이후 백제는 남한강 상류로 진출한다. 그들은 64∼76년 충주·보은 일대에서 진한계(辰韓系) 신라군과 접전을 벌여 2세기 이후에는 이들을 중원 지방 소백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이 과정에서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이 열렸다.) 이로써 백제는 중원 지방의 철 생산지와, 서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를 확보하여 한반도 중부의 최대 강자로 등장한다.

 

다음의 지배자는 잘 알듯이 고구려이다. 5세기 이후 남하정책을 편 고구려는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고, 낙동강 상류까지 진출하였다. 이제 고구려는 남한강 수로를 통해 전략물자를 남방으로 용이하게 수송하게 되어 한반도 중부 이남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미곡을 원활히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어염무역을 독점하는 경제적 이익도 동시에 얻었다.

 

6세기 들어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남한강 상류에 진출하였고 이어 백제를 축출하고 한강 하류까지 점령하였다. 경제적 이익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중국과의 직통 교역로가 열렸다는 점에서 삼국통일의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신라가 이 교통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남한강 유역의 충주와 원주에 소경(小京)을 두었고, 이천과 여주에는 군사기지인 정(停)을 설치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남한강 조운(漕運)]

고려에 들어서면 남한강은 내륙 수로(水路)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조운제(漕運制)의 설립이었다. 고려 초 정종 대에 전국에 12개의 창(倉)이 세워졌는데 그 중 2개가 남한강변의 충주(德興倉)과 원주(興原倉)에 있었다는 사실로 남한강이 중부 내륙의 중요한 교역로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왜구의 준동으로 해로(海路)가 막히자 내륙 수로의 역할은 더욱 중요시되었으며 충주와 원주는 영남과 강원 일부, 충청 일부의 전세(田稅)가 모이는 곳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조선 초기에도 지속되어 조정에서는 새로 경원창(慶原倉)을 세우고 영남 60여개 읍의 세곡을 받았다. 기존의 덕흥창(德興倉)에선 충주와 주변 읍의 조세를 받았으며, 흥원창(興原倉)에선 원주 영월 강릉 등 강원도 8개 읍의 조세를 받았다. 하류인 여주 언저리에도 몇 개의 수조처가 있었다. 15세기 초에 총 8개의 수조창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왜구의 준동이 가라앉고 해로(海路)가 다시 열림에 따라 내륙 수로를 통한 수송량은 상대적으로 감소되었고 이에 따라 내륙 수조창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 세조대에 경상도는 북부 7읍을 제외한 모든 읍의 전세가 해로로 전환되었으며, 1465년(세조 11)에는 충주 지방의 모든 창이 통합되여 가흥창(可興倉)으로 통합되었다. 여주 언저리의 수조처는 대부분 폐쇄되었으니, 결국 16세기에 들어서 남한강 유역의 수조처는 가흥과 흥원의 2개로 압축된 것이다.

 

그렇다고 수로의 중요성이 감퇴된 것은 아니다. 경창, 흥원창, 가흥창에 수납된 조세 총액은 약 10만 석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전의 전세 총액인 30만석의 1/3에 해당하는 대단한 규모였다. 따라서 정부에선 남한강 수운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경기 좌도에 수참전운별감(水站轉運別監)을 설치하여 조운을 관장하게 했다. 이 기구는 영조 대에 조운사(漕運司)가 신설됨에 따라 각 창에 주재하며 수세를 감독 검사하는 전임판관(專任判官)으로 변해 나갔다.

 

정부는 또 조운선을 직접 운행하고 수로를 정비하는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7개 참(站)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수부(水夫)과 참선(站船)을 배치하였다. 참선에는 사공(沙工)과 격군(格軍)을 두었으니 이들이 바로 실질적으로 배를 운행하는 사람들이다. 수부들은 화물의 선적과 수로 정비를 담당하였다. 수부들은 원래 양인(良人)이었는데 일이 하도 고되 점차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로 되었으며 지정된 장소에 거주하였는데 20세기 초까지 이들이 거주한 곳은 일종의 천민 취락으로 간주되었다.

 

[수운(水運)의 쇠퇴]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가장 치열한 공방 지역이었으므로 각 국은 수로가 잘 보이는 강 언저리의 높은 지대에 산성(山城)을 쌓았다. 이중 여주의 파사성(婆娑城), 충주의 장미산성(薔薇山城)·대림산성(大林山城), 제원의 망월산성(望月山城), 단양의 적성(赤城)·온달산성(溫達山城) 등이 유명하다.

 

고려, 조선 이래 조운이 발달했음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생필품의 교역도 나름대로 발달했다. 그러나 정부의 일관된 억상정책(抑商政策)으로 조선 전기까지 일반 상인이나 백성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는 힘들다. 단지 임진왜란 전에 충청감영(忠淸監營)이 있었고 이후에 목(牧)으로 편제된 충주, 강원감영(江原監營)의 소재지인 원주, 경기도 여주 등지를 중심으로 장이 서서 물산이 교역되었음을 추정해볼 따름이다.

 

조선 후기 들어 전국적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교통의 결절점에는 시장이 서는데, 남한강 유역도 대개 18세기 중반까지 시장망(市場網)이 형성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병란의 영향, 유랑민, 종교인들이 은거지로, 벌목(伐木) 등을 이유로 남한강 상류 지방으로 인구가 이동하는 현상이 부쩍 눈에 띈다.

 

이런 이동과 산지 개발은 단양 상류의 수운 발달을 촉진하지만, 나름의 부작용도 발생한다. 즉 상류지방의 삼림남벌로 인한 토양 침식과 토사의 퇴적, 그에 따른 강바닥의 상승과 물의 고갈로 갈수록 배의 운행이 어렵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남한강 상류 여러 곳에 봉산(封山)을 지정하여 삼림 남벌과 화전개간을 금지하였고, 또 수시로 뱃골을 파게 되었다.

 

개항기를 맞아 교통기관의 근대화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다른 교통로와 마찬가지로 남한강의 수로 역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전통과 근대를 제대로 연결하지 못했다. 1904년 개통선 경부선은 기존 한강-낙동강 수로와 겹치는 것이지만 경유지가 다르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이어 계속 완공된 철로로 인해 남한강 수로는 1920년대 이후 거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1948년 이후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제는 과거의 흔적만이 깃들게 된 것이다. 그나마도 댐이 완공된 후에는 옛모습을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3) 주요 문화재

시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국보 3, 보물 9, 사적 5, 중요무형문화재 1, 민속자료 1),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34, 기념물 15, 무형문화재 3), 문화재자료 6점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산척면의 신석기시대 유적지와 가금면 탑평리, 동량면 용교리 등의 청동기시대 유적, 동량면 하천리의 철기시대 유적이 있다. 삼국시대 유적으로는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는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를 비롯해 가금면의 누암리고분군(충청북도 기념물 제36호) 등 많은 고분들이 있으며, 산성으로는 칠금동의 탄금대토성(彈琴臺土城), 직동의 충주산성(忠州山城: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대림산성(大林山城) 등과 성내동의 충주축성사적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가 있다. 성터로는 가금면의 장미산성(薔薇山城), 살미면의 대림산성(大林山城), 상모면의 달마산성(達馬山城) 등이 있다.

 

이 지역은 불교문화재가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중요 불교유적으로는 가금면의 중원탑평리7층석탑(국보 제6호)·중원봉황리마애불상군(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중원창동마애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6호)·중원창동5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소태면 오량리의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국보 제197호)·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보물 제658호)·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보물 제656호), 동량면 하천리의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보물 제17호), 상모면 미륵리의 괴산미륵리5층석탑(槐山彌勒里五層石塔:보물 제95호)·괴산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미륵리3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미륵리석등(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엄정면 괴동리의 억정사대지국사비(億政寺大智國師碑:보물 제16호), 상모면 미륵리의 중원미륵리사지(中原彌勒里寺址:사적 제317호)·제원백운암철불좌상(提原白雲庵鐵佛坐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이 있으며, 그밖에 신니면의 원평리미륵석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 앙성면 모점리의 오갑사지석불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주덕읍 삼청리 용화사의 석불상, 단월동에 있는 단호사의 단호사철불좌상(丹湖寺鐵佛坐像:보물 제512호)·단호사3층석탑(丹湖寺三層石塔: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지현동의 충주철불좌상(忠州鐵佛坐像:보물 제98호), 목행동의 미륵불, 직동의 창룡사청석탑(蒼龍寺靑石塔)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교현동의 충주향교(忠州鄕校: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7호), 임경업 장군의 사당인 단월동의 임충민공충렬사(林忠愍公忠烈祠:사적 제189호), 용관동의 한남군사우(漢南君祠宇), 금가면 오석리의 충훈사와 충무공이수일묘소(충청북도 기념물 제21호), 신니면 신청리의 박팽년사우(충청북도 기념물 제27호), 엄정면 괴동리의 경종대왕태실(景宗大王胎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호), 엄정면 신만리의 유인석신도비, 주덕읍 사락리의 충강공이상급신도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등이 있다.

 

주요건축물로는 옛 관아 건물인 성내동의 충주청녕헌(忠州淸寧軒: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충주제금당(忠州製錦堂: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 및 가금면 가흥리의 창고터, 살미면 용천리의 최함월고택(崔涵月古宅: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 엄정면 미내리의 중원윤민걸가옥(중요민속자료 제135호), 금가면의 모현정 등이 있다. 그밖에 단호사 경내의 소나무와 아울러 관아 공원 내에 수령이 50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전통 무술인 '택견'이 전수되고 있다. 또한 유물·유적과 더불어 탄금대(彈琴臺: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와 충주8경 등이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중원문화권을 형성하는 역사의 고장이며, 남한강의 중상류지역으로 명승지가 많아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상모면의 수안보온천·문경관문·미륵리유원지·월악산 송계계곡 등과 칠금동의 탄금공원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며 즐겼다는 탄금대를 비롯하여 충혼탑·우륵기념비·대홍사·탄금정 등이 있어 대표적인 관광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탄금대는 북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절벽으로,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하며, 수안보온천은 수질이 좋고 주변경치가 뛰어나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또한 충주호 일대에는 충주 댐 건설에 따라 단양까지 뱃길이 생겨 단양군 일대의 수상관광자원이 개발됨으로써 충주관광권이 형성되어 있다. 월악-청풍-구단양-신단양으로 이어지는 54km의 뱃길에는 여객선이 1일 왕복 8회 운항되고 있다. 그밖에 신니면의 신덕저수지는 낚시터로 유명하며, 산척면의 삼탄유원지는 주변의 기암절벽에 돋아난 수목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 여름철 피서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살미면의 노루목유원지, 엄정면의 목계솔밭도 관광객이 많다.

 

(4) 조동리선사유적박물관

선사시대 대규모 마을유적지에서 발견된 토기류와 화살촉, 그물추 등의 석기류와 당시 생활모습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으로 충주지역의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남한강변의 충적대지에 위치한 선사시대 대규모 마을유적으로 신석기·청동기시대의 문화층이 잘 보존된 곳이다. 신석기시대의 문화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는 민무늬토기 외에 집터, 불땐자리, 움, 도랑 등의 다양한 생활유적이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며 생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로는 각종 토기류와 화살촉, 돌도끼, 대패날, 그물추, 가락바퀴 등의 석기류가 나왔고 쌀, 보리, 밀 등의 곡물과 복숭아 씨앗, 도토리 등이 나와 당시의 식생활도 가늠해 볼 수 있는 유적지로서 지금까지 충북지방에서 확인 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의 존재를 확인하여 중원지방 신석기 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전문 박물관으로써 박물관학교, 특별전, 각종 발굴을 주관하여 1992년에는 단월동 1차 발굴조사를, 1994년에는 호암동 1차 발굴조사를, 1995년에는 단월동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95년 11월부터 호암동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용안내-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날

- 관람시간 : 하절기(09:00 ~ 18:00), 동절기(09:00 ~ 17:00)

- 이 용 료 : 입장료(무료), 주차료(무료)

 

(5) 조동리지석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된 선사시대 유물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3층 구조의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조동리 지역의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과 인접하고 있어 충주지역 청동기시대 생활문화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러 개의 활석을 고임돌로 사용하였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 (450×350×100㎝)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덮개돌 위의 2층은 본래 고인돌 축조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불교 전래 이후 탑의 모습을 모방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되어 형성된 독특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바둑판식 고인돌로서 특이한 외부구조를 갖추고 있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며, 청동기 시대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학술자료를 제공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고인돌은 동량면 조동리 탑평마을 중심부에 위치하는데 마을에서는 탑이라 부르고 있어 여기에서 마을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6) 신청리지석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되었으며, 충북도내에서 발견된 고인돌로서는 큰 편에 속하며 덮개돌(482×370×125cm)의 윗면에는 지름 10~4cm, 깊이 3~1cm가량 되는 크기의 구멍이 약 80여개 나있다. 이 구멍들을 당시의 가족인 씨족수로 보는 경우와 별자지로 해석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이 고인돌은 개ㅓㄱ식으로 덮개돌의 긴 방향은 남북이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원래 여기에는 여자와 남자로 상징되는 2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여성고인돌은 예전의 하천공사시 깨어 사용되었다고 하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남성고인돌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요도천의 맞은편에는 견학리 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7) 중원탑평리 7층석탑(중앙탑)

국보 제6호로 현재 남아있는 신라석탑으로는 가장 높은 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석탑이지만 탑신에 비해 기단부의 너비가 넓어졌다. 기단은 각부를 몇 장의 돌로 조립하였는데 아래위층 기단이 모두 면석에 탱주 네 개씩을 세워 놓았다. 탑신부 역시 각부를 몇 장의 돌로 구성 하였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들면서 중첩되었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으로 되었으며, 옥개석 각층마다 낙수 홈이 파여져 있다. 상륜부는 노반을 이중으로 포개어 쌓았고 그 위에 복발 앙화만이 남아있다. 세부수법에 있어서 약식과 섬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의 형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의 비례가 적어서 지나치게 높은 느낌을 준다.

 

1917년의 보수 때에 제6층 옥신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 되었는데 제6층 옥신 에서는 경감 2매, 칠합 1개, 은제사리병과 그 안에 들어있던 유리제사리병 하나씩이 발견되었다. 기단에서는 청동제 유개합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 중 경감은 고려경으로 창건이후 2차적인 사리납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지리적으로 한국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이라는 속칭으로 불리어지는데 신라 원성왕대(785~798)에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양식으로 보아 그 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7) 충주박물관

중원문화권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충주박물관은 남한강과 국보 6호인 중앙탑(중원탑평리7층석탑)과 아울러 위치하고 있으며, 중원문화권 내에 산재한 유적·유물과 민속자료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각종 특별전, 박물관학교 및 전통문화학교 운영 등 활동을 통하여 시민과 함께하는 박물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충주박물관은 1986년 11월 25일 개관하였으며 1996년 시군 통합에 따라 중원 향토 민속자료 전시관과 통합 운영되고 있다. 전시실 규모는 약 765m²로 1층(제1전시실), 2층(제2전시실)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주요 소장자료는 청자탁잔(고려시대), 불화(조선시대) 등이 있다. 제 1전시관에는 역사1실, 역사2실, 민족1실, 민족2실이 있고, 제 2전시관에는 선사·삼국실, 고려·조선실, 충주면현실, 충주항쟁실이 있다.

[이용안내]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날

-관람시간 : 하절기(09:00~18:00), 동절기(09:00~17:00)

-이 용 료 : 무료

 

2. 충주의 고구려 유적

전통 역사지리학으로 살필 적에 한강은 삼각형의 꼭짓점을 돋보이게 한다. 북한강 쪽의 춘천과 남한강 쪽의 충주, 그리고 두 강물이 합수되는 서울이다. 한강 역사기행은 치밀하게 탐구해 보아야 하는 대장정 기획인데 A.D.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보이는가. 춘천(우수주)은 영동·영서 산악지역의 전방지휘소를 이룬다.

 

한강 하류에서 개국한 백제를 견제하는 역할과 함께 고구려를 간접 방어케 하는 지정학이었다. 서기 475년 백제의 왕경 한성이 고구려 군에 함락되어 ‘한산주’가 된다. 이어서 충주와 원주에 고구려 군사도시 국원성, 북원성이 들어선다.

 

충주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의 마애불상. 고구려 계통의 미륵 마애불로 추정하는데 높이는 2.6m이다. 각이 진 얼굴에 도톰한 볼, 감은 눈, 다문 입의 표정이 근엄하지만 ‘고구려 미인상’을 대면하는 듯하다. 고구려는 이로부터 서기 550년쯤까지 70여년 동안 ‘남방경략’을 이룩해낸다. 그리하여 남한강의 삼국사 지리지는 맥동을 친다. 새 주인 고구려와 본디 주인이던 백제 및 장래의 주인이 되고픈 신라 사이의 삼각 대각선이다. 한강 패권시대에 관한 역사 추적은 곧 ‘국토학’의 원류를 탐색하는 프로젝트가 된다. 근대도로와 산업국토 풍경을 걷어내 삼국지지(三國誌地)의 한강사를 복원해보아야 하지만 개인으로서는 벅차고 문화산업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부분적인 도상연습을 시도해볼 수는 있겠다.

 

(1) 고구려 국원성

고구려 문화유산들이 한강 하류에서부터 상류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는데 ‘아틀라스 한국사’의 ‘명장면’들을 오늘에 되찾고 싶다. 정선에서 영월로 흐르는 동강 기슭의 고성산성과 완택산성,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 등은 절경 중의 절경이다. 자연환경을 역사환경에 적응시키는 정치군사 지리학의 지혜와 함께 두 환경 사이의 오묘한 조화에 경탄하게 된다. 호반 도시 충주의 역사지리는 특히 파란만장하다. 새 주인 고구려는 내륙지대의 젖가슴 남한강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운다. 압록강의 국내성에 못지않다고 살피어 국원성이란 이름부터 부여하여 강항(江港)의 군사기지를 건설한다.

 

남한강이 달천(달래강, 괴강)과 만나 에돌아 나가는 지리환경의 이북 방면 요처이다. 지금의 충주시가 그 이남 쪽에 다운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 흥미롭게 비교된다. 고구려가 합수머리 하류의 가금면 일대에 고대도시를 구축한 것은 남한강 쪽으로 신라를 압박하고 달천 너머로 백제를 공략하려는 입지조건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자세’의 지정학을 오늘에도 음미해볼 수 있다.

 

국원성 유적의 전체 윤곽과 규모는 방대하면서도 조밀한데 오늘에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는 못하다. 가금면 강변 일대는 ‘중앙탑 공원’이라 불러 신라의 ‘중원문화’를 상기하게 하는데 고구려의 ‘국원문화’를 복원시키려는 노력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고구려 병선들이 어떻게 정박하고 있었으며 군사시설들의 배치와 요새 구축이 또한 어떠하였는가. 이러한 기본 설계의 ‘역사지도’를 장만해볼 수 있다면, 그 명칭도 가령 ‘국원나루’ 또는 ‘국원진(國原津)’이라 부르게 할 수도 있다. 충주시는 충주댐 이북의 ‘충주호’와 구분시켜 조정지댐 호수라 부르던 이곳을 지난해부터 ‘탄금대 호수’라 개명하였는데 여기에다가 ‘고구려 국풍대회’를 기획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5부 귀족 출신 장군들이 부임하고, 장수왕의 아들 조다(助多)로 추측되는 ‘태자’가 방문하기도 했던 도성 ‘국원성’은 고구려 산성으로 개축된 장미산성과 보련산성을 배후로 거느린 요지에 있었을 것이다. 중앙탑 공원의 강변을 진두지휘하는 위치인 데다가 장미산성을 뒤통수 쪽에 건사하는 탑평리 입석마을에서 ‘고구려비’가 1979년 2월 발견되었는데 이 도성의 위치와 관련지어 살필 수 있다. 국보 205호로 지정받은 남한강의 ‘고구려비’는 장수왕대의 유적으로 압록강의 ‘광개토왕비’와 대비되기도 하는 중요한 고구려 문화유산이다. 충주 국원성 유적지의 고구려비(국보 205호). 남한강의 고구려비는 압록강의 ‘광개토대왕비’와 비교 연구되기도 한다. 장수왕 시대의 유물로 ‘한강 고대사’의 비밀열쇠 코드이다.

 

국원성은 고구려 남방경략의 대본영(大本營)이었다. 국원성주는 ‘총독’처럼 군림하여 신라를 통제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비문 속에는 신라 매금(왕)을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직접 국원성으로 찾아와 예의 갖추어 인사를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순종해오던 신라가 차츰 대항의 자세를 갖춰가고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예속민의 상태에 놓여 있던 이 지역 일대의 신라 백성들을 풀어주려 한다는 내용도 보인다. 울진 봉평 신라비에 나오는 고구려 계통 생민들의 처지와 대조되는데 비교 연구해봄직하다.

 

(2) 중원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리(可金面) 용전리(龍田里) 입석(立石)마을에 있으며,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4월에 충주의 문화재 애호가(예성동호회)들이 입석(立石)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제보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전면과 좌·우측면에 글자를 새겼음을 확인할 수 있고, 뒷면에서는 판독되는 글자를 발견할 수 없다. 뒷면에도 글자를 새겼는지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려 있다.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마멸되어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현재 5세기 전반 광개토왕대부터 6세기 중·후반 평원왕대(559~590)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최근에 앞면 첫째 줄의 몇 글자(高麗太王祖王令)를 새롭게 판독하여 495년(문자명왕 4)으로 보는 견해와 비문에 보이는 ‘십이월삼일갑인(十二月三日甲寅)’이란 간지와 날짜를 고려하여 449년(장수왕 37)으로 보는 견해가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다.

글자의 마멸이 심하여 비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는 견해, 문자명왕의 중원지역 순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는 견해, 고구려 태자 공(共)이 신라와 싸워 다시 우벌성(于伐城:충주지방)을 되찾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회맹(會盟)한 사실을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이며,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특히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란 표현은 중원고구려비 건립 단계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주어 당시 양국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서 주목을 받았다. 이밖에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인명과 관등은 고구려 정치제도사 연구의 사료로,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부른 표현은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석비의 형태는 석주형으로서 자연석의 형태를 이용하여 각 자면을 다듬고 비문을 새겼는데, 비두부터 광개토대왕비와 흡사하여 두툼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글체는 고졸한 예서풍이다. 비문은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이 정확한 판독 가능한 상태이나 석비서두의『고려대왕』이란 명문의 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킨다.

 

『전부대사자, 제위, 하부, 사자』등 고구려만의 관등과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보는『고모루성』이 있고,『모인삼백신라토내, 모인신라토내』라하여『신라토내』란 명문이 두 곳에 있어, 이는 신라 아닌 다른 나라 곧 고구려가 신라 쪽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여 이 비가 고구려비임을 확신케 해 준다. 4면 석비인 이 비의 자, 행에 있어서는 앞면이 10행 23자씩이고 왼쪽 측면이 7행 23자씩이며 오른쪽 측면은 6행이 분명하지만 뒷면은 너비로 보아 9행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건비 년대는 고구려 최성기인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단양의 적성비에 의하면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빼앗을 수 있었고 비문에 보이는『개로』는 백제의 개로왕을 말하며『신유년』은 장수왕 69년(481)으로 보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이 비의 성격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여러 성을 빼앗고 개척한 척경비로 보이지만, 앞면과 왼쪽 측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앞면 상단의 비명을 비롯하여 비문의 판독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여서 확실한내용은 계속적인 조사연구를 요하고 있다. 오른쪽 측면에서의 글자는『임자(壬子) 벌(伐), 공(公) 중잔(衆殘), 불(不), 사(使), 소(小), 소(少)』자 등이 뚜렷하게 보이고 뒷면은 각자(刻字)의 흔적만 확인 되었다.

 

<前面>

五月中高麗太王祖王令▨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亏桓

奴主簿貴道[德][ ][類][王][安][ ]▨[去]▨▨到至跪營天(大?, 夭?)太子共[ ]

尙望上共看節賜太霍鄒敎(授?)食[在]東夷寐錦之衣服建立處

用者賜之隨▨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大位諸位上下衣服[束(來)]受敎跪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太使者多亏桓奴主簿貴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疏奴[ ]▨[凶]鬼盖盧共[ ]募人新羅土內衆人跓[動]▨▨

<左側面>

▨▨▨[忠]▨▨[于]伐城不▨[ ]▨村舍▨▨▨[ ][胜]▨[沙]▨▨

▨▨▨▨▨▨▨▨刺功▨▨射▨▨▨▨▨節人刺▨▨」

▨▨▨▨▨▨[辛][酉]▨▨▨▨▨▨▨▨▨▨太王國土▨」

▨▨▨▨▨▨▨▨▨▨▨▨▨黃▨▨▨▨▨▨▨[安]▨▨」

▨▨▨▨▨▨▨▨▨▨上[右]▨▨辛酉▨▨▨▨東夷寐錦土

▨▨▨▨▨▨方(万?, 右?)袒[故]▨桓)▨沙▨斯色▨太古鄒加共軍至于」

▨▨[去]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右側面>

▨▨▨▨▨▨▨▨▨前部[大]兄▨▨▨▨▨▨▨▨▨▨

▨▨▨▨▨▨▨▨▨▨[ ]▨▨部[小▨+▨▨泊▨▨▨▨▨

▨▨▨▨▨▨▨▨▨▨容▨▨▨▨▨▨▨▨▨▨▨ ▨▨▨▨▨▨▨▨▨

▨▨▨▨▨▨▨▨▨▨▨▨▨▨▨▨▨▨▨▨▨▨

▨守[自]▨▨▨▨▨▨▨▨▨▨▨▨▨▨▨」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수정]

 

(전면)

5월 중 고려대왕(高麗大王)의 조왕(祖王)께서 영(令)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려고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주부(主簿) 귀도(貴道) 등이 ...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 ...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建立處 用者賜之 隨者 ... . 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東夷) 매금(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게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東夷) 매금(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귀도(貴道)가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 내의 주민을 모아서 ... 로 움직였다.

 

(좌측면)

... 中 ... 城不 ... 村舍 ... 沙 ... 班功 ... 節人 ... 신유년(辛酉年) ... 十 ... 太王國土 ... 上有 ... 酉 ... 東夷 寐錦의 영토 ...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홍(共)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3) 봉황리 마애불상군

중앙탑-고구려비와 함께 누암리의 ‘누암 고분군’도 주목된다. 원래는 현지 고구려인들의 묘역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봉황리의 ‘마애불상군’이 참으로 특이하다. ‘고구려 반가사유상’을 남한강 유역에서 만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남한강은 중앙탑-고구려비를 지나 목계나루에서 방향을 틀어 서북 방향으로 휘돌아나간다. 그 만곡(彎曲)의 지경에 봉황리 햇골산이 놓여 있다. 깎아지른 바위벼랑에 어떻게 ‘큰 바위 얼굴’을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일까. ‘보물 1401호’로 지정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마애불상들은 두 군데로 나누어져 있다. 하부 쪽의 8구는 훼손이 심하지만 삼존상 좌상과 함께 ‘반가상’이 그려져 있다. 상부 쪽에는 여인 모습의 불상과 이를 떠받드는 5구의 화불(化佛·아기부처)이 새겨진 마애불상군이 있다. 그런데 이 마애불에 대한 해설이 난해하기만 하다. 여기에서는 자의적으로 ‘다섯 아기부처에 둘러싸인 고구려 미인 불상’이라고 표현코자 한다.

 

다섯 아기부처는 수호천사들처럼 ‘미인 불상’을 공중에서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마애불상은 2.6m 높이로 양각되어 있다. 나발 머리에 각이 진 살찐 얼굴이다. 도톰한 볼, 두터운 눈꺼풀과 감고 있는 눈, 기다란 코에 다물고 있는 입술, 묵직한 아래턱으로 형상화된 모습은 ‘종교미술’의 경건함과 함께 ‘고구려 귀부인 인물상’의 풍모를 연상해보게 하기도 한다. 목에는 3도가 없고 넓은 어깨에는 통견의를 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두 발을 맞댄 무릎이 아주 넓고 크게 표현돼 결가부좌의 자세와는 다르다. 기품있는 고구려인들의 삶, ‘미인 불상’을 찾을 적마다 ‘고전적인 단순성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낀다.

 

고구려의 ‘국원 문화’는 장기간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접수시킨 신라의 ‘중원문화’는 충주지역 지리학을 더욱 업그레이드시킨 것이었다. 소백산 너머 ‘계립령’ 바깥 자락에 놓인 남한강 유역을 신라가 ‘중원경’으로 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신라 왕실은 ‘안방’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지만, 서라벌이 국토 중심부에서 비켜나 있음을 성찰한 것이다. 국토인식체계의 대단한 전환인데, 분단시대인들에게 일깨움을 준다. 오늘의 충주는 ‘국원’ 그리고 ‘중원’이란 국토인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남한강 수운교통이 막힌 데다 근대도로의 메커니즘이 국토환경을 인위적으로 제조해내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그럴수록 남한강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중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중원문화’는 이 도시에 살아 흐르고 있지 아니한가.

 

3. 우륵과 탄금대

(1) 명승지 탄금대

충주에서 서북쪽으로 3km 지점에 충주사람들에게 추억을 심어주는 명승지 탄금대가 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탄금대 북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강이 한강과 합수되는 지점에 자리한 탄금대는 대문산, 견문산이라 부르기도 하는 해발 100m 정도의 나즈막한 산이다. 지금부터 1400여 년 전(AD 536년경) 신라 진흥왕 때에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고 해서 탄금대라고 불려졌다. 우륵선생은 가야국 가슬왕 당시의 사람으로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하니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며 신라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에게는 춤을 수습시켜 우륵을 보호케 하였으며 우륵선생은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탄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팔도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장병 8천여 명을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 왜장 소서행장을 맞아 격전 끝에 전운이 불리하여 참패하게 되자 장강백파에 투신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탄금대에는 현재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탄금대기비,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궁도장, 대흥사 등이 있고 조각공원과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탄금정]

2층 누각형태인 탄금정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로 본래 충주관아 내 연못에 천운정이란 정자가 있던 것을 사직산에 지건되었다가, 1955년 다시 이 자리로 이건되었는데, 목조로 된 정자가 낡고 헐어 지금 이 정자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쪽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탄금대에서도 가장 절경인 열두 대에 이른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은 질펀하게 호반이 되어 물안개를 일으키고, 서번 박재륜 선생의 글에 죽사 박충식선생의 글씨로 세운 '신립장군 순국지기"비가 외롭게 서 있다.

 

[열두대(남한강변 절벽)]

임진왜란 때 팔도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조총으로 무장된 십 수 만의 왜적을 창과 활로 무장한 훈련되지 않은 팔천 군사와 함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려면 배수진 전법이 아니면 불가하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곳 열두 대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47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순절한 곳이다.

 

부여의 낙화암이 금강변에 있듯이 탄금대 열두대가 남한강변에서 분위기를 갖게 한다. 열두대란 가야금이 12현 열두 줄이기에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신립장군이 왜병과의 전투에서 군사들을 독전하면서 열기에 달아오른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려고 이 대(절벽)를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전설이 숨어 있기도 한 곳이다. 이 곳 열두대를 오르내리는 지금의 콘크리트 계단을 12단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감자꽃 노래비]

일제시대인 1930∼40년대 충주가 배출한 아동문학가 권태응 시인의 시비에 새겨진 <감자꽃> 전문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평범하고 짧은 노래지만 한국 사람은 한국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항일정신을 담고 있는 저항시로도 읽힌다.

 

자주꽃 핀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

 

(2) 우륵

악사 우륵이 신라의 귀족사회에서 기야고 음악으로 활동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가 음악적 재능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학식도 고루 갖추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사회에서 악사 정도의 음악인은 단순한 기능보유자라는 역할을 뛰어넘는 학식을 지닌 지식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고의 창제 이전에 고라고 불렀을 고대 현악기를 연주한 물계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떡방아소리를 고대 현악기로 연주하면서 세모를 맞았던 백결선생의 사회적 지위도 이러한 신라사회의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악사 우륵은 가야고를 위한 열두 곡을 작곡했다는 음악성에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신라 본기 진흥왕 12년조에 의하면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는 그의 뛰어난 예술성이 주목을 끈다.

우륵이 가야고 음악을 배우러 온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의 재능을 헤아려 각자의 재능에 따라 계고에게 가야고를, 법지에게 노래를, 그리고 만덕에게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사실은 6세기경 가야고 음악의 성격에 관한 이해에 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도적 위치에 있었을 악사는 악기, 노래, 춤 세 가지를 종합예술로 통달해야만 했다고 보인다. 더 나아가 6세기경 만 해도 가야고 음악예술은 악기, 노래, 춤으로 독립된 예술장르로 있었다기 보다도 종합적 무대예술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법지에게 가르쳐주었다는 노래나 만덕에게 가르쳐준 춤이 어떤 종류의 가무였는지는 불분명하나, 그러한 노래와 춤이 가야고라는 악기와 관련된 종합공연예술의 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악기, 노래, 춤의 종합공연예술의 형태는 신라 초기의 각 지방의 향토음악에서 확인되는 바로써 예술적으로 덜 분화, 발전된 단계의 것으로 해석되는 음악문화이다.

우륵이 가실왕의 명령을 받고 창작했다는 열 두 악곡의 이름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伎),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이다.

이 열두 곡명 중에서 아홉 곡명이 가야국 당시 낙동강 주변에 자리잡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지방의 이름으로 밝혀졌다. 하가라도는 경남 함안지방의 이름으로, 상가라도는 경북 고령지방의 이름으로, 달기는 경북 예천군의 다인(多仁)지방의 이름으로, 사물은 경남 사천지방의 이름으로, 물혜는 경남 함안군 이안(利安)지방의 이름으로, 하기물과 상기물은 경북 금릉군 개령(開寧)지방의 이름으로, 거열은 경남 거창지방의 이름으로, 사팔혜는 경남 합천군 초계지방의 이름으로 각각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우륵의 가야고를 위한 악곡들이 가야국 당시 여러 지방의 민요를 비롯한 향토색 짙은 음악들을 가야고를 위한 기악곡으로 편곡했든지, 아니면 성악곡을 위한 가야고 반주음악으로 개작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어느 지방의 이름을 악곡명으로 사용하는 관례는 비교적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륵이 그 당시 가야국의 향토색이 강한 지방음악을 다양하게 취하여 가야고를 위한 악곡으로 지은 것도 가실왕의 지시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다. '지방마다 방언이 있는데 음악을 획일화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는 가실왕의 음악관이 우륵의 열두 가야금곡에 잘 반영됐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가야국의 향토적 색채를 담았을 우륵의 아홉 곡이 음악적으로 어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번거롭고 음란했다는 말로 미루어보건대, 빠르고 복잡한 가락으로 이루어지고 한편 감정을 너무 지나치게 드러낸 악곡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번거롭고 음란했던 우륵의 가야고 음악이 6세기경 신라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만덕, 법지, 계고 세 사람이 우륵에게 배운 가야고 음악을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도 즐겁게 해주는 아정(雅正)한 음악으로 개작했다는 기록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신라 사람에 의해서 자기 사회풍토에 알맞게 개작됐다는 것은 우륵의 가야고 음악에 나타난 가야국의 향토적 특색을 덜어내고 좀 더 예술적으로 다듬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륵의 가야고 음악이 그런 개작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라왕과 귀족사회에서 대악(大樂)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수용과정을 거쳐서 가야고가 6세기 중반부터 신라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됐고, 후에 신라음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륵당이 설립되어 있고, 우륵국악단이 창단되어 전통국악예술의 발전과 보급을 위해 정기연주회 등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3) 가야금

[가야금의 형태와 유래]

가야고는 요즘 흔히 ‘가야금’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가야고’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거문고’에 고라는 말이 들어 있는 점과 기야고와 비슷한 악기가 일본에서는 ‘고도’라고 불리는 것이라든지, 우리나라의 옛기록에도 ‘가야고’라고 나타나는 것을 보면, 원래의 우리 말의 이름은 가야고였기 때문이다. 요즘 쓰고잇는 가야고에는 풍류가야고, 산조 가야고, 개량 가야고의 세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가야고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야국의 가실왕은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서 가야고를 만들었다. 가실왕이 이르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그 성음에 있어서 서로 다르거늘 어찌 똑같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면서,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악사 우륵(于勒)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짓도록 하였다. 나중에 우륵은 가야국이 장차 어지러워질 기미가 보이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의탁하니, 진흥왕이 우륵을 받아들여 국원(지금의 충주)에서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곧 대나마 법지(法 知) 와 계고(階古), 대사 만덕(萬德)을 보내서 가야고를 이어받도록 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가야고를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전하지만, 가실왕의 연대는 알 수 없으므로 신라의 진흥왕(540∼576)때라고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대략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74년에 경주의 황남동에서 출토된 장경호(長經壺:목이 긴 항아리)에 가야고를 연주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 항아리는 신라 미추왕(262∼284) 능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장경호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가야고가 이미 3세기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가야고의 연대를『삼국사기』보다 300년 정도 소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거문고'에 '고'라는 말이 들어 있는 점과, 가야고와 비슷한 악기가 일본에서는 '고도' 라고 불리는 것이라든지,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도 '가야고'라고 나타나는 것을 보면, 원래의 우리말 이름은 가야고였기 때문이다. 요즘 쓰고 있는 가야고에는 풍류 가야고, 산조 가야고, 개량 가야고의 세 가지가 있다.

 

[풍류 가야고]

1) 유래 : '정악(正樂) 가야고' 또는 '법금'(法琴)이라고도 부르며 세 가지 중 가장 크다.

2) 형태 : 통 오동판의 뒷면을 파내어 잘 울리도록 만들고, 앞면에 비단실을 꼬아서 얹어 만든다.

3) 특징 : 양(羊)의 귀 모양을 본뜬 양이두(羊耳頭)가 있음. 양이두의 모양에서 우리 민족의 조상이 유목 민족이

             었다는 사실과 가야고의 먼 조상은 유목 민족의 악기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선조 가야고]

1) 유래 : 산조 음악을 연주할 때 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2) 형태 : 산조음악의 특징인 깊은 농현과 빠른 가락을 연주하기 쉽도록 줄과 줄 사이를 좁게 만들었기 때문에

             작다.

3) 특징 : 성종(1469~1494) 5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서 오늘날의 산조 가야고와

             똑같은 모양의 악기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산조 가야고는 가야고 산조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개량 가야고]

1) 유래 : 이성천이 1986년 21줄 가야고를 만들었는데,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개량 가야고를 쓰지 않

             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2) 형태 : 21현 가야고는 고음이나 저음이 완전한 음을 내기 힘들고, 17현 가야고는 아무런 무리가 없으리라 생

             각되고 있으며 박일훈은 15현의 가야고를 만들었다.

3) 특징 : 다양한 가야고가 개발됨으로써 가야고 음악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4. 중원미륵사지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림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죽향으로 펼쳐진 절터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미륵리사지는 사적 제317호로 1987년 7월 10일 지정되었다. 이 미륵리사지 내에는 보물 95호인 5층 석탑과 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지방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석탑이 있다. 이곳의 석불은 국내 유일의 북향 불상이며 석불이 있는 석굴의 방형의 주실은 가로 9.8m, 세로 10.75 m 의 넓이이며 높이 6m의 석축을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고 그 가운데 불상을 봉안하였다. 석축 위에는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 있었으며 전당은 목조로 된 반축조석굴이다.

 

모든 조영계획은 석굴암을 모방하였고 규모가 웅장한 반면에 퇴화과정이 역력한 석굴이라 하겠다. 본 사지는 1977년과 79년 두 차례에 걸쳐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져 그 윤곽이 다소 드러나게 되었고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미륵대원 등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이라는 것이 확실히 고증되므로,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찰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병의 침입으로 소실된 듯하며 사찰 이름은 미륵대원이었다.

 

(1) 미륵대원-폐허 속의 상상력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월악산 송계계곡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미륵대원은- 정확히 말하자면 미륵대원의 옛터는- 상상력으로 충만한 건축적 장소다. 이곳은 돌로 만든 석탑들, 석등들, 파괴된 당간지주, 몸통이 없어진 부처머리, 해학적인 형태의 돌거북, 어지러운 초석들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교하면서도 웅장하게 쌓여진 석굴사원의 폐허와 그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미륵부처가 서 있다. 한국의 폐허로서는 특이하게도 남아 있는 유적만으로도 충분히 입체적이며 건축적이다. 절터 서쪽에 가건물로 지은 세계사의 건물들이 있지만 관광객은 물론 참배신도들까지도 세계사의 법당에는 들르지도 않고, 이 폐허의 석굴과 석탑에 불공을 드린다. 그만큼 석굴의 잔재는 감동적이며 공간적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는 한반도의 동쪽 척추를 이루며 뻗어내려와 지리산에서 일단 끝을 맺었다가, 바다 건너 한라산에서 다시 한번 솟아오른다. 예부터 이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불러왔다. 통일운동의 구호가 된 ‘백두에서 한라까지’란 다름 아닌 백두대간을 지칭하는 것이며, 한반도의 지리적 터전은 백두대간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지리학자들은 산맥의 개념을 도입하여, 한반도의 지리체계를 어지럽혔다. 백두대간은 마천령-함경-낭림-태백-소백산맥들로 토막이 나 버렸다. 특히 태백산맥을 원산에서부터 부산까지로 설정해 소백산맥과 다른 줄기로 만든 것은 최악의 잘못이었다. 금강산에서 태백산으로 내려온 백두대간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소백산맥은 북으로는 영남과 충청지방의 경계를 그었고, 서로는 영남과 호남의 경계를 형성했다. 따라서 영남지방에서 서울 쪽으로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는 모두 소백산맥에 걸쳐진 큰 고개들을 통과해야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지름길에 해당하며 남한강 수로교통의 출발지인 중원지역은 요지중의 요지였고, 여기에 위치한 미륵대원의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은 대단히 높았다. 북방정책을 시도했던 신라왕권은 일찍이 이 지역에 지릅재(鷄立嶺)를 개척해 중요한 통로로 삼았다. 지릅재는 미륵대원과 수안보 쪽을 잇는 고갯길이며 현재도 중요한 교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또 미륵대원 동쪽 길은 경북 문경 쪽으로 넘는 하늘재(寒喧嶺 혹은 大院嶺)로 연결된다. 미륵대원은 중요한 두 교통로인 하늘재와 지릅재 사이에 위치하여, 순수 불교사찰의 성격 외에도 군사 경제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큰 고개 밑에도 복합 용도의 사찰이 경영되었다.

 

예를 들어 죽령의 보국사, 마아령의 부석사, 주항령의 봉암사 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찰에는 사찰건물 외에도 여관, 역원, 시장, 병영 등이 시설되었고, 이를 통칭하여 ‘사와 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원(寺院)이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현재 미륵대원 동쪽 하늘재 길가에 장방형으로 축조된 두꺼운 돌담과 건물지가 남아 있는데. 이곳이 아마 미륵사에 부속된 부대시설 또는 병영이었을 것이다.

 

(2) 사원의 창건과 인물들

전해오는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는 이 절이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고, 언제까지 유지되었는지, 한창 때의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단지 남아 있는 유구들의 모습으로 미루어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기간에 창건된 것임을 확신할 수는 있다. 신영훈 선생은 여러 가지 정황과 역사적 배경을 추론하여 창건시기를 901년에서 937년 사이로 잡았다. 또한 1238년에서 1256년 사이의 기간 중에 몽고군의 침략과 방화에 의해 종말을 맞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유구가 심한 화재를 겪은 흔적이 뚜렷하고, 충주지역에서 몽고군과의 격렬한 전투가 몇 차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매우 타당한 추론이라 보인다.

 

미륵대원이 창건된 후삼국시대에 특히 이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지릅재와 하늘재가 교차하는 요지에 위치한 미륵대원을 누가 장악하는가에 따라 국운의 판도가 달라질 정도였다. 유명한 문경새재는 아직 개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해안과 중부 내륙을 연결할 수 있는 최단 통로의 관문에 이 절이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이 중요한 지역을 놓고 내노라 하는 영웅호걸들이 힘을 겨루고 있었다. 따라서 누가 미륵대원을 창건했는가도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다.

 

우선 중부내륙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를 공략했던 궁예, 그는 신라의 왕족출신이지만, 자신을 버린 신라왕실을 최우선의 타도대상으로 삼았다. 죽령을 넘어 영주 부석사에 들러 신라왕을 그린 벽화를 훼손한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더 가까운 중원지역을 넘나들었을 것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그 자신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칭할 정도로 미륵신앙의 신봉자였고, 미륵대원의 신앙적 맹주로 손색이 없다.

 

궁예의 뒤를 이은 고려태조 왕건, 그는 전국의 호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그 자신 온 몸을 바쳐 26명의 호족 딸들과 결혼했다. 그 가운데 제1부인은 바로 충주 유씨 집안의 유씨 왕비였다. 다시 말해서 중원지방의 호족을 가장 중요한 연합세력으로 선택한 것이다. 왕건의 할아버지가 속리산 일대에 은거하면서 불공을 드렸을 만큼 이 지역에 공을 들였다.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신라의 목줄을 죌 수 있었고,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신라의 항복을 얻을 수 있었다.

 

후백제의 견훤은 경상도 상주출신이다. 그 역시 죽령과 하늘재의 전략적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고향을 장악하기 위해 이 지역 진출을 끝없이 시도했다. 무공으로만 친다면 견훤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건과 같이 타협을 할 줄 안는 현실적인 지략이 부족했다. 이 지역 세력의 지원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관할아래 있었던 전라도 나주지역의 조고들에게도 배신을 당했다. 왕건의 회유와 공작이 주효하여 나주의 호족들은 견훤의 등뒤를 공격하여 치명타를 입혔고, 후백제에 대해 계속된 공작은 견훤과 그 아들의 이간질에도 성공하여 정권내부의 붕괴를 유도할 수 있었다.

 

망해가는 신라의 마지막 왕세자인 마의태자. 그의 아버지 경순왕은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써 최고의 귀족으로 여생을 편안히 보냈지만 끝까지 투쟁을 주장한 그는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망국의 한을 대신했다. 역사상 가장 불행한 주인공으로 묘사된 그가 금강산으로 향한 통로는 바로 하늘재였다. 이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마의태자가 미륵대원에 잠시 머물러 미륵부처를 만들었고, 동행했던 그의 여동생 덕주공주는 송계계곡의 북쪽 끝, 미륵대원과 마주보이는 벼랑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이절의 미륵신앙과 연관하여 신라 부흥의 전초기지였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날개잃은 왕자(마의태자)에게 그만한 재력과 여유가 있었을 까닭도, 옛 집권세력의 부흥운동을 장치할 만큼 호락호락한 왕건도 아니었다. 비운의 왕족에 대한 민중들의 보상이랄까, 단지 전설로만 그친다.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삼국시대부터 하늘재와 지릅재를 관장할 이 요충지에 어떤 형태로든지 사찰이나 객원이 경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후삼국시기에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점령한 궁예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고려가 건국된 후 충주 유씨 세력들이 왕건의 지원을 받아 석굴을 쌓고 여러 시설들을 조성하여 대대적인 사원으로 확장 중창했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창건의 역사가 될 것이다.

 

 

(3) 미완성과 좌절된 전설

미륵대원과 관련하여 당대 모든 영웅들이 등장하는 것은, 이 절의 전략적 중요성과 더불어 명확한 기록이 없는 폐허만이 가질 수 있는 상상의 특권이었다. 이 절과 얽힌 또 한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고구려의 장군 온달이며, 미륵대원에 있는 보주탑이 - 자연 암반위에 놓여진 직경 1m 가량의 공 모양으로 가공된 바위돌 - 바로 온달장군이 가지로 놀던 공기돌이라는 것이다.

 

바보 온달로 알려진 그는 평민계급출신으로 평강공주와의 결혼에 성공했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모든 전투의 선봉을 자원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급기야 신라 공격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야망을 이루지 못한 한과 부인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사무쳤던지 시신을 담은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평양에서 달려온 평강공주가 도착해서야 비로소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온달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는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고증되었고, 미륵대원과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이 절에 얽힌 전설상의 인물들은, 왕건을 제외하고, 모두 중도에서 좌절된 회한을 간직한 이들이다. 아마 이 전설들은 미륵대원이 불에 타 폐허가 된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목조건물은 깡그리 없어지고 돌들의 잔해만 남은 깊은 산중의 폐허에 대한 호기심은 이 지역에 관련된 가장 유명한 두 인물로 비약되었다.

미륵대원은 원래부터 미완성된 사찰이었다. 반쯤만 다듬어진 돌거북, 채 완성되지 못한 5층 석탑, 석굴 뒤 개울가에 방치된 가공하다만 석재들, 심지어 정교한 석굴안에서 조차 여러 가지 형태의 초석들이 발견된다. 이나마 다시 불에 타 사라졌다. 좌절된 영웅들의 전설무대로는 가장 적합한 미완성의 폐허가 된 것이다. 폐허는 전성기의 모습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미완성은 완성을 상상케 하며, 좌절된 역사는 온갖 가정과 회한을 남기게 된다.

 

(4) 수학적 질서의 폐허

미륵대원은 송계계곡 상류 남쪽 끈체 위치하여 월악산의 주봉을 향해 북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람의 좌향 만으로는 남쪽 신라가 북쪽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기위해 조성된 듯하다. 예의 마의태자 창건설도 아마 이 절의 좌향 때문에 더욱 회자되었던 것 같다. 송계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면, 사자석탑으로 유명한 사자빈신사지 절터와 덕주산성의 남문, 그리고 덕주계곡에 오르면 미륵대원의 동생뻘인 덕주사와 덕주사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연관되는 유적들이 산재하는 송계계곡은 그 빼어난 경치와 함께 하나의 문화회랑으로 유명해졌다.

 

미륵대원은 돌덩어리로 가득 차 있다. 유적지 서쪽에는 일직선의 개천이 흐르고 있고, 커다란 돌덩이를 다듬어 개울 양 옆에 석축을 쌓았다. 개울 건너서도 미륵대원의 유적이 일부 발굴되어 있지만, 지금은 세계사라는 절의 가설 건물들과 산나물 따위를 파는 장터가 차지하고 있다. 개울 동쪽은 세 차례에 걸친 발굴로 건물터들이 드러나 있고, 주목할 만한 석조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절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석실유구와 자비로운 미륵불상이 강렬한 흡인력을 가지고, 그 앞으로 석등, 석탑, 돌거북, 당간지주 초석들이 띄엄띄엄 놓여있다.

 

가람은 하나의 강력한 축선을 중심으로 좁고 길게 구성되었다.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중심축선 상에는 석실 안의 본존불 - 팔각석등- 5층석탑- 돌거북이 놓여져 있고, 절 터 입구에 깨어진 당간지주가 뒹굴고 있다. 당간지주가 있는 위치를 사찰의 정문터로 추정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요 유구들이 일정한 비례관계에 의해 위치한다는 점이다. 본존불과 각 유물들 사이의 거리를 곡척으로 측정한다면 석등까지 90척, 석탑까지 150척, 돌거북까지 270척, 그리고 정문 앞 당간지주까지 450척에 해당한다.

 

이들 사이에는 30척을 기본 모듈로 하는 일정한 비례율이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자칫 혼란스럽기 쉬운 이 폐허에서 건축적인 질서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남아있는 유물들 하나하나의 형태가 원초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고, 둘째는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수학적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5) 온달장군의 공기돌

석탑 서쪽 개울가에는 커다란 자연 암석이 놓여지고 이 위에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던 공기돌’이 놓여있다. 사찰 측에서는 이를 ‘보주탑(寶珠塔)’이라 이름을 붙여놓았다. ‘공기돌’을 중심으로 구성된 몇 개의 건물터가 발굴되었다. 특히 3×2칸 규모의 초석들이 완연한 소법당터는 ‘공기돌’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었다. 자연 암반을 인공건물의 기준축으로 삼았으니, ‘공기돌’은 더 이상 공기돌이 아니라 ‘보주탑’이었다. 돌덩이의 유적과 유물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석실 앞에는 사자인지 해태인지 모를 동물모양의 돌덩이들과 네모진 판석에 새겨진 앉아 있는 불상조각이 놓여 있다. 돌짐승들은 어디서 발견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미륵대원 경내의 것이 아니라 동네에 굴러다니던 것이라고 전한다. 불상 조각판은 홍수 때 개울의 상류에서 떠내려 온 것을 동네사람들이 주워서 초등학교 분교 앞에 모셨다가, 학교가 폐교되면서 석실 앞으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석굴 뒷산 쪽인 것은 분명하다. 멀리 떨어진 뒷산까지도 대원의 영역이었던 것을 증명해 주는 유물이다.

하늘재 쪽의 길가에는 또 다른 3층 석탑이 자연 암반 위에 서 있다. 사찰 경내에 있는 5층 석탑과는 조형양식적으로 전혀 다른,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습이다. 양식론적 시각으로 본다면 경내의 5층 석탑은 둔탁하고 수직적인 고려탑의 양식이 역력하여, 하늘재쪽 3층 석탑이 오히려 1-2세기 정도 앞선 것이다. 그런데 이 탑이 놓인 위치는 바로 길가여서 사찰의 중심에 놓이는 탑이 아니라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고 추측된다. 말이 거창해서 영남의 관문이지, 하늘재도 죽령도 새재도 모두 깊은 산중에 나 있는 한줄기 오솔길에 불과했다. 숲에 가려 길의 진로마저 불분명했던 시절, 이곳이 어디쯤인지를 가늠하기에는 특별한 표식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험한 산길을 넘어 온 나그네에게 여기에 따뜻한 쉴 곳이 있고 부처의 가호가 있다는 표시를 위해 길가에 석탑을 세운 것이다. 이 석탑은 산 속의 등대인 셈이다.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토속적인 모습을 한 부처의 머리가 길가에 놓여있다. 부근 땅 속에 엎어져 잇던 것을 최근에 발견하여 바로 세워놓았다. 이 일대까지도 미륵대원의 영향권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현재 석실을 중심으로 한 개울가의 유적만으로 미륵대원의 영역을 한정하는 것은 매우 좁은 소견이다. 큰 고개길 밑에 있었던 큰 절과 원(大寺院)임을 상상할 수 있겠다.

(6) 자연에 대한 순응과 인공적 변형

자연물이 기준이다. 이 절이 여러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북향을 하고 있는 것은 철저하게 지형적인 이유 때문이다. 말없이 서있는 미륵불의 시선을 쫓아가 보면, 송계계곡을 시종 투시하고 있으며 그 끝점에는 월악산 하봉이 위치한다. 다시 말해서, 뒤의 주흘산과 멀리 앞 월악산 봉우리를 잇는 자연 지형축을 가람의 구성축으로 삼은 것이다. 덕주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미륵대원은 남에서 북쪽을 감시하는 전략적 효과도 거둔다. 여기까지는 한국건축의 보편적인 터잡기 원리이기 때문에 그다지 감동할 필요가 없다.

 

더욱 눈 여겨 볼 것들은 5층 석탑과 보주탑과 돌거북의 위치와 형상이다. 보주탑의 기단은 자연 암석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5층석탑의 기단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자연 암석임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돌거북은 더욱 그렇다. 석탑의 기단은 자연 암석을 두부모를 자르듯 매끈하게 잘라내어 그 위에 다섯층의 탑신을 올렸다. 주의를 더 기울이면 기단의 윗부분이 직선이 아니라 불규칙하게 움푹 파인 것을 볼 수 있다. 바위의 원래 높이가 그것 밖에는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거북도 어디서 옮겨온 것같이 지면에서 분리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둘레를 약간만 파내어 떠 있는 효과를 준 것에 불과하다. 원래 거북이 비슷한 그 위치의 바위를(우리나라 개울가의 큰 바위들은 거의가 거북이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아니다) 약간만 다듬어 비석 밑부분(귀부)으로 삼았다. 자연물을 이용한 석탑과 돌거북은 가람구성의 매우 중요한 기준점으로 다시 이용되었다.

 

미륵대원의 구성축은 거시적으로 주흘산과 월악산을 따르며, 동시에 미시적으로는 본존불과 석탑용 바위를 잇는 선을 축으로 삼았다. 돌거북용 바위는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크게 본다면 역시 중심축의 한 요소임에 분명하다. 이 바위들을 중심으로 몇 개의 영역이 형성되었고, 앞서 말한 바와같이 이들간의 거리관계도 절묘한 기하학적 비례를 이룬다. 보주탑의 자연바위 역시 개울 건너 건물영역의 중심축윽을 이룬다. 이쯤되면 얼마나 철저하게 자연물을 인공환경의 기준점으로 사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바위들은 자연물인가, 인공물인가? 미륵대원에서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7) 지형을 바꾼 인공 운하 건설

가람의 중심은 개울가에 북남으로 깊게 자리 잡았다. 앞서 지적한 대로, 미륵대원의 영역은 개울 건너까지도 포함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개울은 사찰의 가운데를 관통하여 분할해 버리는 역할을 한다. 직선적인 개울이 중심축을 따라 일렬로 배열된 이 절의 구성을 더욱 명확히 부각시키는 데 일조를 한다고 하더라도, 건물의 배열이나 외부공간의 균형을 흐트러뜨리는 부정적 역할이 더 크다. 왜 그랬을까? 개울의 석축은 눈에 보이는 부분에 그치지 않는다. 본당인 석굴 옆을 끼고 그 뒤로 계속 올라가도 역시 인공적으로 쌓은 석축들이 연속된다. 석굴에서 100m 쯤 상류로 가야 인공석축의 흔적이 사라진다. 여기까지는 하류의 폭과 같이 일정하고 석축을 쌓은 돌들도 우람하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개울은 상류 쪽에서 거의 직선으로 내려온다. 그러다가 석굴 위쪽 60m 부근에서 매우 부자연스럽게 휘어지면서 석굴 옆을 통과하고, 그 아래 경내에서는 다시 직선으로 흐른다. 인공 석축을 쌓아 원래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 분명하다. 원래의 물줄기대로 계속 흐른다면, 현재의 석굴 중앙 본존불 아래를 관통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총 길이 200m의 거대한 인공운하를 조성한 것이다.

 

석굴 좌우, 개울 양쪽의 지형을 살펴보면, 서쪽 개울가의 산은 인공적으로 깍아서 급경사를 이룬 흔적이 역력하고, 동쪽은 원래 완경사인 곳에 석축을 쌓고 흙을 채워 인공적인 산을 만들었다. 현재의 석굴은 언덕을 파낸 것이 아니라, 평지에 석축을 쌓고 흙으로 메운 완벽한 인공물이다. 그것도 원래 개울이 흐르고 있던 곳 바로 위에. 개울의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인공운하를 조성했고, 지형마저도 변경한 것이다. 여러 가지 단점들을 감수하며 대대적인 인력과 재원을 투여해서까지 굳이 물가에 석굴을 만든 이유를 흔히 신앙적인 면에서 찾고 있다. 미륵신앙과 물은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백제의 미륵사가 연못을 메꾸어 터를 만들었고, 미륵신앙의 중심사찰들에는 연못이 있든가, 연못을 대신할 인공물들이 있다.

 

또 토속신앙 가운데 용에 대한 신앙이 미륵신앙으로 전화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용은 물 속에서 살며, 용의 우리말은 ‘미리, 미르’로 ‘미륵’과도 유사하여 설득력이 있다. 동네 할아버지들의 고증에 의하면, 아직도 석굴바닥 아래로 물줄기가 흐르고 있으며 본존불 뒤에 놓인 돌덩이를 하나 치우면 그 물줄기가 보인다고 한다. 인공운하를 쌓아 큰 물줄기는 옆으로 돌렸지만, 자연적인 원래의 수맥을 따라 작은 물줄기가 스며드는 셈이다. 상식적으로 석굴 내부에 습기가 있으면 유지보존에 치명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토함산 석불사 석굴이 석굴 내부의 결로현상 때문에 무진 애를 먹었고, 공조기를 이용한 강제적 방법으로 연명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일제가 석불사 석굴의 원형을 망가뜨리기 이전에는 석굴바닥아래에는 지하수가 솟는 샘이 있었고, 그 물줄기가 바닥돌의 온도를 낮추고, 내부의 물방울들은 바닥돌에 달라붙어 자연 배수되도록 고안된 것이라 한다. 석불사 석굴 바닥의 용천수가 자연습도조절 장치였다는 의견이다. 그 상식을 거스르는 지혜가 미륵대원의 석굴에도 적용된 것은 아닐까?

 

인공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시설이었다. 우선 홍수에 대비하여 사원의 시설물을 보호하는 큰 물길이었다. 미륵대원은 송계계곡의 상류에 위치하고 뒤에는 해발 1,100m가 넘는 주흘산 연봉이 자리 잡았다. 산이 깊으면 골이 깊고 , 골이 깊으면 일시에 홍수가 난다. 평소에는 바닥을 졸졸 흐르는 시내물이 약간의 비에도 일시적인 급류로 변하는 변덕을 이정도의 인공운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확증된 사실은 아니지만 이 운하가 석재운반로로 사용되지 않았나도 추정된다. 조사결과 미륵대원에 사용된 석재들은 상류쪽 뒷산 바위에서 캐온 것임이 밝혀졌다. 그 큰 돌덩어리들을 어디로 어떻게 운반했을까? 하늘재 길은 좁고 멀리 떨어져 적합하지 않다. 인공으로 석축을 쌓고 바닥을 편편히 고른 운하는 돌을 굴리거나 메고 오기에 매우 편리한 운반로가 아니었을까?

 

그 흔적은 현재도 개울 곳곳에 산재된 미완성의 가공석들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일단 돌덩어리를 바위에서 떼어내 석굴 뒤까지 옮겨와 준비한 후 현장에서 가공했는데, 미처 가공하지 않은 원재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최근의 것이기는 하지만 허리가 동강난 팔각 돌기둥, 원형으로 가공한 초석, 기단용 장대석등이 널려있다. 이것들은 가공하다가 실패한 것, 또는 너무 많이 만들어 남은 것들이다. 이 운하는 예전에는 석재 운송로였고, 최근에는 공사 폐기물 처리장의 역할가지 한다. 인공운하를 만드는 대토목공사로 수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일석오조이다.

 

(8) 복원된 가람의 구성

발굴보고서의 도면을 토대로 초석과 기단의 흔적을 더 자세히 조사했다. 조사된 평면적 흔적과 현존 석조 유구들을 중심으로 전체 가람의 복원도를 그려 보았다. 그 결과 더욱 뚜렷한 중축성 가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륵신앙의 사찰들이 강력한 계율사상을 바탕으로 중축성의 구성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뚜렷한 규범이 미륵대원에 구현된 것이다.

 

세 개의 영역이 석굴 구성축을 중심으로 일렬로 배열되었다. 또한 개울 건너 보주탑 영역은 주축에 대해 직각인 부축을 형성한다. 현재로서는 모두 4개의 영역을 상정할 수 있다. 물론 개울 건너 세계사쪽에는 더 많은 건물군 유적이 잇을 것이지만, 아직 땅 속에 묻혀 있거나 현 세계사의 건물을 세우면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중심부를 편의상 동원이라 하고, 개울 건너를 서원이라 부르자. 확정할 수는 없지만 동원은 세 개의 법당을 중심으로 한 예불원이고, 서원은 승려들을 위한 승원이었던 것 같다. 각 영역들을 구획하는 경계는 다양하다. 동원과 서원은 인공 운하(개울)에 의해 구획되며, 동원의 세 영역들은 문과회랑으로 구획된 듯하다.

 

동원의 가장 아래 영역은 당간지주가 있는 정문채부터 돌거북 바로 뒤에 있는 정방형 건물터까지다. 이 건물터는 가장 아래에 있는 법당으로 추정되며, 그 앞의 돌거북이 어느 고승의 사리탑비였다면 이 법당은 선종계통의 조사당이 아니었을까? 중심법당인 석굴의 정방형 내부와 계통을 같이하는 공간형식이다.

 

가운데 영역은 석탑을 중심으로 한 부분이다. 남쪽 뒤 석굴영역과의 사이에는 동서로 긴 회랑과 중문이 있었음직 하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영역의 중심 법당은 석탑의 동쪽 석축 기단 위에 있는 정방형 건물지로 보인다. 그 구체적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석굴의 미륵당을 보좌하는 다른 부처의 법당이었을 것이다. 석탑의 수직성과 함께 회랑 뒤쪽으로는 거대한 이층 목조법당의 지붕이 중첩되고, 서쪽으로는 개울 건너 보주탑으로 연속되며, 동쪽으로는 작지만 뾰족한 법당이 높게 자리잡아 공간적 균형이 잘 잡힌 영역이었다. 정방형 법당터 앞에 사각석등이 서 있지만, 원래 석탑 북쪽 중심축 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가장 위 영역은 말할 것도 없이 석굴의 이층(또는 삼층) 법당군이다. 거대한 법당 앞에는 널찍한 단을 두어 건물과의 균형을 맞추었다. 이 영역의 위치적 중심을 작은 팔각석등이 차지한다. 법당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지만 독립된 점과 같이 시각적 초점을 이룬다.

 

동원의 동쪽 경사지 위에 기다랗게 형성된 건물터들은 강당이나 승방으로 쓰였을 것이다. 이들은 가람의 동쪽 경계를 구성하면서 가람 전체의 중축적 구성을 더욱 강조하고, 개울이 있는 서쪽의 개방감과 대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세 영역들은 각각의 중심체를 갖는다. 아래의 돌거북, 중간의 석탑, 그리고 석굴 앞의 팔각석등이 그것이다. 이 석물들의 위치는 자연적인 지형의 산물이고, 이들 간의 거리가 일정한 체계로 조절되었음은 이미 밝혔다. 이들을 기준으로 구성축과 영역의 공간적 구성과 건물들의 배열이 결정되었다.

 

서원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영역은 보주탑을 마주보며 동향하고 있는 건물과 그와 직각으로 놓여 북향하고 있는 건물터다. 동향 건물은 작은 부법당일 것이고, 북향 건물은 단칸 깊이의 승방이었을 것이다. 서원의 다른 건물군들은 개울가에 동향하여 동원 쪽의 공간감을 형성하면서 부분적 영역을 이루지 않았을까.

 

그려본 복원도와 추정한 건물의 용도는 물론 전적으로 필자의 상상이다. 그러나 엉성한 도면이나마 입체화시켜 본 결과, 평면적 폐허의 입체적 공간을 느끼기에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이 복원도가 엉터리고 고증이 잘못된 것이라면, 필자의 엉성한 상상력을 비난하는 동시에 자신이 추정하는 정확한(?) 모습을 그려 보시라.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9) 마지막 석굴사원

미륵대원이 학계의 주목을 끈 것은 본당 유적의 모습 때문이다. 전면인 북쪽은 터지고 동남서 삼면을 6m가 넘는 석축으로 쌓아 석실을 만들고, 그 가운데 키 10.6m의 거대한 불상이 서 있다. 석실 정면 양 옆으로도 석축을 쌓아 전체적으로는 석축 가운데 공간이 움푹 들어간 모습이다. 문제는 이 석축이 자연지형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정교하게 축조된 것이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위를 목조지붕으로 덮어 내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석실의 전면에는 5×1칸의 목조건물을 이루었던 초석들이 남아 있고, 그 안쪽 석실과의 사이에는 문턱과 같은 인방석이 바닥에 일렬로 놓이고 한쌍의 높은 초석이 놓여 있다. 영락없이 전실과 주실로 이루어지는 석굴암의 평면을 연상케 한다. 단지 토함산의 석굴암은 주실이 원형인데 비하여 미륵대원은 방형이고, 전실과 주실사이에 복도가 없이 바로 붙어 있는 점이 다르다.

 

미륵입상 주위로 4개의 초석이 놓여진 주실 공간은 3×4칸의 구성으로, 폭 10.6m, 깊이 11.6m의 규모를 갖는다. 폭보다 깊이가 긴 형상 역시 석굴사원의 원형이다. 석실의 위부분에는 2m 가량의 긴 장대석을 여러개 눕혀 놓아 석축 위의 초석으로 삼았던 것 같다. 실측조사를 맡았던 태창건축 측에서는 초석들의 구성을 유추하여 상부 목조건물을 복원해 보았다. 앞에서 보면 2층 건물이고, 뒤에서 보면 1층인 건물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높은 주실건물 앞에 낮은 전실건물이 부가된 형태다. 전실과 주실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인방석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여기에 문짝을 달아 두 공간을 구획했음이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석실의 표면 아래에는 또하나의 석축이 숨겨져 있다. 일단 견고한 구조용의 석축을 쌓고 그 뒤에 흙을 채운 후, 가공된 석재들을 정교하게 짜올려 석실의 내부를 마감했다. 현재는 많이 파손되었지만 내부의 석벽은 상하 두 단으로 계획되었다. 아래 위 두 줄로 감실을 만들어 불상 조각들을 안치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아직도 일부 남아 잇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래 감실에는 여섯 구의 작은 부처들을, 위에는 단독불을 조각한 판석들을 감실에 끼워 넣었다.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불상 조각들을 연상케 한다.

 

이 석굴은 여러 가지 면에서 토함산 석굴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전실과 주실의 구성, 뒤로 약간 물러선 본존불의 위치, 내벽에 새겨진 불상들의 배열 등. 그러나 단순한 답습은 아니다. 토함산의 것이 완전한 석실이라면 이것은 반석실로 목조지붕을 가지며, 원형 공간에서 사각형 공간으로 전이되었고, 석실 단독의 배치에서 사찰의 일부 요소로 바뀌었다. 본질적인 것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실험정신 - 이것이 이른바 전통계승의 바른 길이 아닌가.

 

인도에서 발생한 석굴사원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부를 거쳐 한반도에 상륙했고 경주를 종착점으로 삼았다. 중국까지의 석굴은 자연 암반을 파고 들어가 내부공간을 만든 굴착석굴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바위 재질은 만만치가 않았다. 화강암은 너무 단단해 인공적으로 파 들어갈 수가 없었고, 애써 파내도 결을 따라 붕괴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굴이나 지형을 찾아 석굴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절벽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목조 지붕을 얹은 마애불로 만족하든가. 그러나 원초적인 석굴에 대한 동경은 너무나 강해 돌을 쌓아 석실을 만드는 이른바 축조석굴들이 만들어졌다. 그 대표작이 바로 토함산의 석굴암이지만, 돌로 천장구조를 만드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 후에 등장한 반 축조석굴, 즉 돌로 석실을 만들고 그 위를 목조지붕으로 덮는 형식은 넓은 공간과 석굴의 분위기를 만족시켰다.

 

그 최후의 걸작이 바로 미륵대원의 석굴이다. 미륵대원은 한국 석굴사원의 마지막일 뿐 아니라, 인도에서 발생하여 한반도에 도착한 국제적인 석굴운동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이 석굴의 잔재 앞에서 지리적으로는 4,000km에 이르는 엄청난 거리와, 시간적으로는 1,000년을 넘는 장구한 세월의 노력을 읽는다.

 

(10) 폐허의 감동

이 폐허를 입체로 복원해 보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예비지식이 필요하다. 불교건축의 원리에 대해서, 사찰구성의 일반적 방법에 대해서 적지 않은 체험과 역사적 지식이 쌓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반 독자들은 내가 대신한 상상적 복원을 통해 대리만족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또 하나의 지식을 얻는 것일 뿐, 깨달음이 수반된 감동은 얻지 못한다. 감동은 항상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곳을 이루고 있는 모든 재료들은 돌이다. 돌의 건축, 돌의 세계다. 그러나 그 돌들은 불국사의 돌과 같이 정교하지도 매끈하지도 않다. 다보탑같이 조각적이거나 기교적이지도 않다. 미륵대원의 돌들은 거칠고 뭉툭하다. 가장 공을 들여 축조한 석굴의 돌들마저 심한 불을 맞아 쪼개지고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둥글둥글해졌다. 그러나 그 모습들에는 원초적인 힘들이 가득 차 있다.

 

석굴의 돌들은 세부 디테일이 없어지고 덩어리의 괴체감만 부각된다. 그 괴체들이 가로로 또는 세로로 쌓여있다. 돌의 돌다운 성질은 우선 덩어리감이다. 때문에 돌들은 차곡차곡 쌓여져야 하고, 조적식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다보탑은 돌을 나무와 같이 사용하였다. 재료의 물성을 거슬러 다른 재료처럼 사용할 때, 놀라움과 신선함을 줄 수는 있다. 돌을 마치 나무와 같이, 마치 진흙과 같이 사용할 때는 그 솜씨와 상상력에 경탄하고 만다. 그러나 콘크리트를 목재와 같이 사용하여 가짜 한옥을 만들면 추악해지고 만다. 전통성에 대한 윤리적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콘크리트만이 가지는 역학적 장점과 일체적 성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놀라움이 일시적인 감동은 주지만, 본질적인 깨달음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다보탑은 하나면 충분하다.

 

다보탑의 모작들은 역겨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석가탑은 석탑의 전형이 되어 수많은 유사품들이 만들어졌지만, 그들에는 역겨움 대신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석가탑은 돌이라는 재료를 가장 돌적으로 사용한 구축법을 완성하였고, 돌 본래의 미학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 실체는 돌을 덩어리로 사용하는 것, 그래서 차곡차곡 쌓는 구조적 방법을 채택한 것, 그리고 그 덩어리들의 양감을 최대한 부각할 수 있는 실루엣과 비례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미륵대원의 돌들은 미완성이면서 투박하다. 이곳의 돌거북은 여타 귀부들과는 달리 등에 귀갑문양도 없고 발톱도 정교하지 않다. 그저 어리숙한 웃음만이 조각되어 있다. 일대에 산재하는 돌사자, 돌용, 돌부처들도 한결 같이 세련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것들은 편안한 미소와 은근한 해학들로 가득 차 있다. 돌거북의 등에는 어미 거북의 등을 타고 오르는 두 마리의 새끼 거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옆으로 친절하게도 넉단의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거북이들은 기어오르지만, 사람은 계단을 밟고 오른다. 고급 예술적 완성도에는 한참 떨어지지만 편안함 그 자체다.

 

사각석등의 모습은 범상치 않다. 신라형 팔각석등에 익숙한 눈에는 투박한 비례와 어울리지 않는 부재의 결함만 보이겠지만, 이 석등은 철저하게 구축적 방법을 채택한 ‘돌다운’석등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본존불의 얼굴에서 투박함의 극치를 본다. 옆에서 보면 마치 부엉이와 같이 절벽인 얼굴, 그러나 정면에서는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넉넉함이다. 주어진 재료의 한계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하나의 극치에 오른 깨달음만이 저러한 얼굴을 만들 수 있으리라.

 

이 폐허가 주는 감동은 돌다운 돌들의 물성 때문이다. 그 괴체감, 그 원초성은 해학을 낳고 전설을 낳는다. 마의태자와 온달의 전설이 우연히 얽힌 것이 아니다. 돌은 영원하다. 자연적 수명 때문이 아니라 돌에 얽히는 전설들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영원히 이어진다. 정암사 수마노탑의 자장율사 설화, 불국사에 얽힌 아사달의 전설, 이름 없는 산들의 며느리 바위에 얽힌 전설들 모두가 돌의 원초성과 영원함 때문에 생긴 설화구조다.

이 돌들의 감동에 익숙해지면 모든 돌들에 사연이 있을 것 같고, 굴러다니는 바위도 인공적으로 가공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세계사 건물 위쪽 언덕에는 수 십개의 석재들이 방치되어 있다. 예의 기단용 장대석들은 물론이고 원형기둥, 북모양의 초석들 등 진귀하게 다듬어진 석재들이 넝쿨 속에 묻혀있다. “혹시 발굴조사 때 나온 석물들을 여기다 쌓아논 거 아니야?” 기대를 하며 한참을 들춰보고 잇는데, 아래서 지켜보던 주지스님이 지나가는 소리로 한 말씀 하신다. “그 돌들은 이십년 쯤 전에 웬 이가 다듬다가 놔둔 거여유. 옛날 꺼 아뉴.”

「한국건축의 재발견- 앎과 삶의 공간 2 중 일부 발췌, 김봉렬』

 

(11) 석조보살의상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작품이다. 지방형의 판석에 조각한 보살상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은 갸름한 편으로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형상은 보이지 않으나 머리에는 보관을 썼으며 양쪽 귀를 감싸고 어깨까지 관식이 드리워져있다. 보살의 목에는 세 겹의 주름살이 보이고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가슴은 드러낸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 많이 조성된 반가사유상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한데다 검게 변색되어 있어 조각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될 뿐 원래의 위치와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높이 95cm, 두께 50cm, 폭은 68cm이다.

 

(12) 미륵사지귀부

유형문화제 제269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문화재이다. 이곳에 본래부터 있었던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조각한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이다. 이 절터의 내력을 적은 사적비를 더받치기 위하여 조성된 듯하나 현재 비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제작시기와 용도를 확인할 수 없으며, 뒷면 일부의 조각이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품이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거북이 등에는 비를 세우기위해 파놓은 홈이 있고, 머리와 다리가 힘차게 표현되었으며, 왼쪽 윗면에는 새끼거북 2마리가 귀엽게 조각되어 있다. 거북이 등에 귀갑문이 표현되지 않고 전체적으로 단순한 형태이지만, 웅대한 거북이의 모습에서 생명력과 힘이 느껴진다.

 

지방형의 판석에 조각한 보살상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은 갸름한 편으로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형상은 보이지 않으나 머리에는 보관을 썼으며 양쪽귀를 감싸고 어깨까지 관식이 드리워져있다. 보살의 목에는 세 겹의 주름살이 보이고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가슴은 드러낸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 많이 조성된 반가사유상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한데다 검게 변색되어 있어 조각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될 뿐 원래의 위치와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높이 95cm, 두께 50cm, 폭은 68cm이다.

 

5. 청룡사지

(1) 보각국사 정혜원융탑

국보 제19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작품이다. 석탑비에 의하면 속성 조씨이고 자가 무작인 보각국사가 태조 원년 (1392)에 73세로 입적하자 태조가 내신으로 하여금 칙명으로 조성토록 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석천택이 써서 태조3년(1394)에 세우고 탑명을 정혜원융이라 하였다. 탑을 중심으로 하여 뒤에는 보각국사비를 세우고 앞에는 배례석과 석등을 장엄하게 갖추었다. 탑은 9각 원당형으로서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상대를 얹고 그 위에 8각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춘 우수한 부도탑이다. 소문의 8각 지대석위에 놓인 8각의 하대는 어형 2단의 받침위에 얹혀 복연 16판인데 판 안에 삼산형의 화판이 조식되어 있으며 1단의 굄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는 엔터시스형이며 8면에 장방형의 안상이 마련되었고 그 안상에 운룡과 사자상이 교차로 4면씩이 배치되어 있다. 상대는 1단의 각형 받침위에 16엽의 앙연이 하대의 복연과 아래위 대칭으로 조각되었으며 그 상단에 탑신굄이 없이 8각의 홈을 파서 탑신을 안정시켰다. 8각의 탑신을 합각마다 두리기둥으로 표현된 우주가 있는데 우주마다 기둥을 오르는 반룡이 조각되었고 면마다 장방형의 안상이 마련되었는데 안상 안에 신장인 듯한 조상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두리기둥위에 창방과 같이 목조가구의 각부가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급경사이나 기왓골은 없으며 합각마루에 용두를 조각하였고 추녀와 사례도 양각하였으며 16엽의 단엽 연화문과 정면에 8엽의 단엽 화문을 돌려 보주굄을 두었다.

 

(2)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

보물 제656호로 지정된 이 석등은 각 부재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지대석 윗면을 하대석이 꼭 들어맞게 파서 하대를 놓았는데 하대는 1개의 돌로 조성한 사자가 엎드린 형태이다. 사자는 두 눈과 코가 웅건하고 상하 이빨 끝과 앞 뒤 네발이 날카롭게 조각되었으며 꼬리도 유려하게 표현하였다. 뒤쪽에는 안장을 놓은 듯 좌우로 길게 양각하고 그 안쪽에는 2줄의 선을 돌렸으며 꼭대기에 4각형으로 1단의 각형받침을 각출하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는 한 개의 돌로 된 4각형으로 각면에는 2줄의 안상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삼산형 원좌를 중심하여 유려한 화염문을 조각하였다.

4각형 상대석은 밑면에 받침을 마련하고 복엽 8판의 앙연을 조각하였으며 측면이나 윗면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다. 화사석도 4각형 돌 하나로 4모서리에 두리기둥을 모각하였으며 화창구 2면 뿐인데 다른 2면의 벽면과 창구 간지에는 문양이 없다. 옥개석 4모서리에는 귀꽃이 조각되었고 전각에도 반전이 있으나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고 합각 용머리도 둔후하여 고려시대의 옥개석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상륜부는 둥근 돌 하나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에는 복련을 돌렸으며 그 위 연주문을 조각한 원대가 있고 그 위에는 운문이 조각된 앙화에 보주를 조각하였다.

 

위와 같은 구조에서 볼 때 이 석등은『방형사자석등』이라 볼 수 있으므로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앞 사자석등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4각형의 석등 양식은 고려 초기부터 조성되었던 것인데 이곳의 사자석등은 중대석 측면의 조각이나 상대석의 양식 수법을 비롯 화사석의 화창이 2구로 된점 등이 고려 말의 걸작이라 일컫는 공민왕현릉 및 비정릉 석등과 흡사하다 하겠다. 그리고 연판의 조각수법이나 두리기둥의 모각의장에 있어서도 이 석등과 같은자리에 남아있는 보각국사탑의 각부와 같다. 그러므로 이 석등도 이곳의 여러 석조물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초인 1392~13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3) 청룡사지석종형부도

문화재자료 제54호로 지정된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로서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화강암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 모양으로 조성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기부분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전면부에 문자를 음각한 흔적이 보이는데, 마멸이 심하여 눈으로는 쉽게 판독하지 않으나 '적운당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부도 주변에는 장석을 방형으로 돌려놓아 탑구를 형성하였다.

 

(4) 청룡사지위전비

유형문화제 제242호로 지정된 작품으로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졌으며 2m가 넘는 크기의 4면비로 당시 청룡사의 운명과 관련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이다. 청룡사는 고려말기에 창건되어 보각국사가 머물면서 번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의 사실은 이 비로서 짐작할 수 있다. 비에는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및 수량이 적혀 있으며 2~3차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어 절은 몇 차례 걸쳐 보수·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받침들은 거북모양이고, 가첨석이 있는데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당시의 사찰운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6. 불교문화재

(1) 봉황리 마애석불군

보물 제1401호로 삼국시대 조성되었으며, 가금면 봉황리 내동 (안골마을)햇골산 기슭에서 약30m되는 중턱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동쪽을 향해 위치하고 있다. 암벽의 높이 1.7m, 너비 약 5m의 널다란 바위에 일렬로 8구의 불, 보살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1.4m 높이의 반가사유상을 중심하여 보살 5구가 조각되어 있으며, 별도로 여래좌상과 측면으로 공양을 하고 있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삼국시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에서 한강이 바라보이는 거리도 그리 멀지않다.

 

이러한 위치의 선택은 강을 따라 조형문화의 전파를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1978년 12월 1일에 발견된 것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3월 3일 보물 제 140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벼랑을 따라 50여m쯤 가면 또 하나의 마애여래좌상이 동쪽을 향한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높이 2m나 되는 주존불은 상호가 원만하고 어깨가 당당하며 무릎도 큼직하여 전체적으로 고식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의 두광에는 높이 34cm의 화불이 5구가 둘러 있어 돋보인다. 전실 등 목조의 가구가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와편과 자기편 등이 주위에 흩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2) 단호사철불좌상

보물 512호로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며, 현재 단호사 법당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데 이곳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 있고 단호사의 현 주지가 1945년에 이 자리에 불상이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절을 이룩한 점으로 단호사 철불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원체 짙게 개금불사 되어 오랫동안 철불인지 모른 채 지내오다가 1968년도에 철불로 밝혀졌다. 나발의 머리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양 미간의 백호공에는 새로 만들어 끼운 백호가 있으며 두 눈과 코, 입술 등이 정제되고 균형 잡혀 있다. 양쪽 귀는 길게 늘어지고 목에는 삼도가 돌려져서 위엄이 있어 보이며 상호가 원만하여 더 한층 근엄한 인상을 준다. 통견한 법의는 배꼽 앞에서 유려한 활 모양의 원을 그리면서 양쪽 팔에 걸쳤으며 양쪽 어깨에서 넘겨진 의문은 뒷면에까지도 조식되었고 가슴에는 의대와 그 밑으로 군의의 결대가 보인다.

 

양쪽 무릎에 의문이 조각 되었고 그 위에 양쪽 발바닥이 노출되었으며 양 무릎 가운데에 산형의 앞자락이 펼쳐졌는데 그 조각은 단정하다. 수인은 양쪽 손가락 부분이 모두 파손되어 있던 것을 근래에 원형 복원하였다. 이 철불은 육계와 상호 그리고 양쪽 무릎 의문 등 각부의 양식 및 조성수법으로 보아 그리고 특히 주조 자료가 철이라는 점이 대원사에 봉안되어 있는『충주철불좌상 (보물98호)』과 흡사하여 양 불상은 동시에 주조되었거나 한사람에 의해 조성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동체에 비하여 무릎이 널직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어 균형 잡힌 조성이다.

상호가 원만하나 전대에서 볼 수 있는 허심탄회한 부처님의 미소는 사라지고 근엄한 표정으로서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변화라고 보겠다. 제작연대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이 불상은『충주철불좌상』과 함께 고려시대 철불의 중요한 유품이며 유사한 양식을 갖춘 2구의 철불이 이 지역에 전하는 점은 고려시대 철불조성에 있어 지방적 양식이 잘 표현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3) 충주철불좌상

보물 제98호로 이 불상은 현재 대원사 앞뜰에 안치되어 있으나 충주공고옆 노천에 방지되었던 것을 중원군청으로 옮겼다가1959년 12월 15일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한 면의 길이가 97cm 높이 65cm의 비교적 큰 규모의 화강암 탑신석위에 안치된 철불의 머리는 나발인데 육계는 작은 편이며 미간에는 지름 2.5cm의 백호공이 있다. 상호는 이마가 넓고 턱으로 내려올수록 좁아져서 양쪽 볼에 살이 빠졌으므로 풍만한 인상을 주지 않으나 단아한 감을 느낄 수 있다.

 

눈썹은 가늘게 반원형으로 그리고 눈은 반만 뜨고 시선은 밑을 향하고 있으나 눈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게 조각하여 괴상해 보인다. 상호에 비해 코는 작으며 인중이 짧고 입술이 도톰해지는 등 고려시대 불상에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슴과 어깨가 넓고 당당하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 앞에 길이 10cm의 군의 매듭을 양각시켜 표현하였다. 옷주름은 3줄의 돌기선으로 표현되어 팔에서는 사선을 그었고 가슴 밑에서 "U"자 형을 만들었으며 불신 뒷면의 의습 처리는 오른편으로 처리하여 도식화 하였고 뒷면 중앙부에 광배를 장식했던 흔적이 보인다.

 

불상 전체에 비해 무릎이 넓어서 안정감을 주고 있고 두 다리가 수평하게 평행선을 그었는데 모두 융기선으로 되어 있어 힘 있게 느껴지는 반면 매우 형식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릎 밑에서 올라간 굵은 3줄의 음각선과 양다리 사이의 삼각형 옷주름 양식 등은 완전히 도식화하였다. 양 수인이 절단된 상태여서 석가여래인지 약사여래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 상호에서는 인상과 인체 묘사에 착실함이 부족한 점과 의문을 형식화 내지 도식화 한 것 등을 종합할 때 11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유행은 통일신라 하대부터 성행된 것이나 고려시대의 불상은 무엇보다도 그 조각 기술에 있어서 신라보다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거대한 조각에 있어서 퇴화의 모습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미륵리석불입상

보물 제96호로 이 석불입상은 보관까지 합하여 모두 6개의 돌이 쌓아 올려서 하나의 거대한 불상을 구성하고 있다. 육계에 나발이 있으며 양귀는 큼직하게 만들었으나 어깨에 닿지는 않는다. 상호는 둥근 편이며 미간에는 큼직한 백호가 있고 눈썹은 반원형이고, 눈은 약간 솟아 오른 듯한 눈두덩 아래에 가느다랗게 반개한 듯한 직선형이다. 코는 알맞게 표현되었으며 입술은 두꺼운 편이다. 굵은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인데 옷주름 등은 약식화한 경향이 뚜렷하다. 상호에 비해 어깨 등이 위축되었음을 느끼게 하며, 어깨에서 발끝까지가 거의 같은 폭으로 내려오는 등 인체묘사에 충실하지 않아 몸체에 비해 얼굴에는 많은 정성을 들인 것 같다. 팔은 형체만 겨우 살렸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손등을 보이게 했으며 왼손은 오른손 아래서 손바닥을 위로 하여 가볍게 무엇인가를 쥐었다. 위에서 흘러내린 옷 주름은 무릎부분에서 좌·우측면으로 약간씩 돌아갔으나 불상의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발은 좌대 위에 나란히 놓였는데 몸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미륵불 건립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에 미륵대원 등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연선사가 살았던 그 전에 만든 것이 확실하여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서러워하여 이곳까지 와서 이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고 그 여동생은 제천 덕주사 마애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전설은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이 불상을 보호하는 웅장한 석굴이며 대담한 거구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다만 당시의 거상을 다루던 기술이 급격히 쇠퇴하였기 때문에 이런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본다.

 

(5) 백운암철조여래좌상

보물 제1527호로 백운산 아래에 있는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은 아래와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왕후가 충주지방으로 피신을 왔을 때 한 무당이 곧 환궁하게 될 것을 예언했는데, 예언대로 곧 환궁하게 되자 무당을 서울로 불러 진령군여대감의 벼슬을 내렸다. 하루는 이 여대감의 꿈에 백의철불이 나타나 지금 이 사지에 안치해 달라고 하므로 그 자리에 절을 건립하여 백운암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이 절은 중창되었는데 법당은 1977년에 완공하여 지금의 모습을 하였으며, 주존불로 안치된 불상이 쇠로 된 철불좌상으로 전면에 금칠을 하고 있다. 나발의 머리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상호는 원만하여 위엄과 자비가 넘친다. 우견편단의 법의는 가슴속으로 부터 무릅에 이르기까지 평행 원호를 그리면서 흘렀고 양 무릎을 자연스럽게 덮고 있으며, 두 손을 자연스럽게 양쪽 무릎에 놓았다. 고려시대 12세기경의 우수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앉은 높이 90cm, 어깨폭 40cm, 가슴폭 70cm이다. 이 암자에는 또한 반자가 있으니 <바라>라고 불리는 징 같이 생긴 종의 일종이다. 직경 43cm, 두께폭 10cm인데 장식으로는 5개의 연과를 가진 자방이 있고 그 주변에 12판의 연화문을 돌렸으며 그 밖으로 3줄의 돌기선을 그었다.

 

7. 산성

(1) 장미산성

사적 제400호로 지정. 이 성은 둘레가 2,940여 m로 처음에는 백제가 성을 쌓아서인지 백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돌로 쌓아올린 포곡식의 성으로 인근의 중원고구려비와 관련하여 고구려 세력이 충주지역을 차지하였을 때 다시 쌓여져 삼국시대의 역사변천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대부분 기단을 마련하지 않고 지표면이나 산의 자연 암석을 다듬은 위에 성벽을 쌓은 것으로 산 정상부나 등성이 부분보다는 외향비탈면의 상부를 지나도록 축성되었다. 특히 성벽의 아래에서 위로 가면서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 쌓여서 안정감과 견고함을 갖추고 있다.

 

(2) 대림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제110호. 충주시에서 수안보 문경으로 향하는 3번국도 변에 달천강과 제법 암벽이 솟아 있는 산이 보이는데 옛부터 충주 진산이라고 불리는 대림산이다. 산의 험준한 지세를 이 용하여 능선을 따라 돌과 흙으로 쌓은 산성이조성 되었으나 지금은 일부 성벽만이 남아있다. 성 아래 달천강 길은 옛부터 조령과 계립령(하늘재)을 거쳐 충주를 왕래하는 주요 길목이 되는 곳으로서 이 성의 경계 목표는 남쪽 경상도 육로와 달천강 수운의 경계, 관리가 주목적이었다. 옛날 도로가 발달되기 전에는 강을 이용한 수로가 곧 길이었다. 오목한 산세를 이용하여 계곡사이에 성문을 두었던 흔적이 있고 계곡 양 옆 봉우리에 는 망대가 있다. 충주읍성의 비축물자의 창고 역할을 했던 듯, 성내의 지명이 창골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창고가 있던 흔적도 있다.

 

충주의 진산(도읍의 뒤에 자리 잡고 있는 큰 산으로 도읍을 지켜주는 주산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산성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기도 하나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의 토기 및 자편도 보이며 현재 남아있는 성을 쌓은 솜씨로 보아서는 조선시대에 왜적의 침입을 의식하여 쌓았던 듯싶다.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를 넘어온 왜군을 산성 위에서 숨어 있다가 돌과 폭약 등으로, 산 성 아래 길을 지나갈 때 공격하려 했으나 왜군이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성 밑을 지나지 않고, 달천강 상류에서 건너가 충주시 풍동(대림산 건너편)을 지나 충주시내와 탄금대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현재는 대부분 허물어져 있으나 성의 남쪽 중간 중간에 부분적으로 잘 보존된 곳도 있다. 국유지로 옛 기록에 의하면 둘레는 5.144m였다고 한다.

 

현재 이 성은 고려 몽고항쟁의 승전지인 충주산성으로 새로이 부각되고 있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성의 윤곽이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아 지나치기 쉬우나 대림산을 옆에 끼고 구 3번 국도를 따라 수안보 방향으로 가다보면 창골이라는 마을이 나 오는데 이 마을이 옛날 산성이 있던 자리이다. 창골길을 따라 옛 산성 안으로 들어서면 과연 천혜의 요새임을 느끼게 된다.

 

(3) 충주산성

지방기념물 제31호. 충주산성은 충주시 안림동 산56-1과 직동 산 24-1 및 목벌동 산54에 걸쳐 있으며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성은 외축 내착형이며 산 정상을 이어 쌓아진 퇴뫼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축성 재료는 석재를 고루 쌓아 전형적인 고식을 보이며 성 둘레는 83년 충주시 조사에 의하면 1,145m이며 중간 중간이 무너지고 5개소에 775m의 성곽이 남아 있으며 성안의 넓이는 46,524㎡이고 성벽의 높이는 7~8m에 이르고 있다. 성안에는 우물자리가 2개소 있는데 현재 물은 나지 않으며 동서의 산능선 상에 문지가 있고 동쪽으로 수구가 있다. 또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 및 기와쪽이 발견되고 있다.

 

충주산성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몽고병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되며 고종 40년(1253) 9월 몽고가 제4차 침입을 감행하여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충주 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매복하여 몽고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포위당한지 70여일에 군량이 다하고 사기가 저하되자, 방호별감, 승장 김윤후가 전군과 관노까지 격려하여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다음 해 2월에 김윤후를 감문위섭상장군으로 삼았고 4월에는 충주를 승격하여 국원경으로 하였다. 1254년 9월에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뿐 아니라 성안의 고려인이 열심히 싸우자 차라대도 물러갔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유린되었으나 충주산성은 끝내 수호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고 하며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도 한다. 개로왕이 바로 이 성 북쪽에 있는 안림동에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는 설과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된다. 1977년에 무너진 곳의 일부를 보수하였고 1986년도에 지방비 예산을 투입 충주공업전문대학 박물관 팀에 의하여 발굴 조사한 바 있다.

 

(4) 견학리토성

충청북도 기념물 제137호. 해발 110~114m 높이의 성밑마을 뒤편 구릉 윗부분에 위치하며 특이하게 네모꼴로 쌓은 토성이다.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성 둘레로 한 줄 돌려 기초를 만들었고 그 위로 흙을 잘 다져 판축기법으로 축성한 성이다. 현재의 성벽은 북벽44m, 동벽58m, 남벽도 일부가 훼손되어 32m 가량 잔존한다. 서벽은 모두 훼손되었으나 복원하면서 전체 성 길이는 210m정도로 남북으로 긴 장방형 토성이었다. 북동쪽의 문터와 성내 일부가 발굴조사 되었는데 청동기시대의 돌도끼와 민무늬토기, 원삼국시기의 토기, 신라시대의 회청색경질토기,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토기와 쇠낫을 비롯한 철제품도 출토되었다. 조사결과 선사시대는 생활공간으로 사용되다가 삼국시대 초기에 토성을 축조하여 이용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다시 보수된 것으로 보인다.

 

(5) 주정산봉수

충청북도 기념물 제113호. 이 봉수대는 충주시와 괴산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주정산 줄기의 4개봉 가운데 하주정산 이라 불리는 해발 440.2m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용된 봉수로 남북 21m, 동서 11m의 규모이다. 타원형의 방호벽과 출입구가 있으며 화구와 화덕을 갖춘 봉조(봉수대에서 봉수를 올리는 아궁이 시설) 5개소가 있는 내지봉수의 일반적인 구조이다. 이 봉수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이 나오고 있으며 때로는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특히, 도기의 뚜껑에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명문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 곳 하층민들이 한글을 깨우치고 한자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로 여겨진다.

 

8. 임경업장군 유적지

(1) 임경업 장군

조선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장군은 충주 태생으로 충주 주변 곳곳에 장군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 및 설화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충렬사, 임경업 장군 묘소, 삼초대, 임경업장군 사우, 그 외 낙안읍성, 속리산 경업대 등이 임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장소이다. 임경업장군은 당시 친명배청(親明排淸)을 일관되게 주장한 장군이다. 요즘 역사적으로 재평가 받고 있는 광해군과 더불어 당시 광해군의 명을 받들어 어쩔 수 없이 후금에 항복을 한 강홍립장군이 있다.

 

임경업 장군은 조선 선조 27년(1594년) 판서 임정의 후손이며, 임황의 아들로 충주 단월 가까운 대림산 아래 풍동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10년(1618년), 25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삼수의 방위를 위해 소농보 권관이 되었으며, 인조 2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는 등 혼란에 빠졌을 때 길마재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으며, 혼란을 틈타 나타난 도적떼들이 훔쳐갔던 국고의 금은보화를 되찾아와 국가의 재산을 지켰다. 이로 인해 "진무원종공신"이 되었으며, 가선대부로 올랐다. 이듬해인 인조 3년에는 첨지중추부사겸 우림위장이 되었으며 방답첨사로 다시 이듬해인 인조 4년 낙안군수가 되었다.

 

이 무렵 만주에는 후금이 요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명나라를 공격하였다. 후금의 태종 홍타시는 명을 공격하기에 앞서 우선 배후의 조선을 먼저 쳐서 후환을 없애려고 하였다. 인조 5년(1627년), 후금은 인조반정(광해군의 폐위와 인조가 즉위한 것 )은 부당한 처사라는 구실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으나 형제의 맹을 맺고 돌아갔다.(정묘호란) 이 무렵 일부에서는 청북지방을 방어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버리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에 임경업과 청북의 지방관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한 번의 병화로 가볍게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의론이 정해지지 않았다.

 

인조 9년 부친상으로 충주 달천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고 있던 중에 청북의 백성들이 서울에 올라와 대궐 앞에 엎드려 청북지방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이 사건을 김자점은 필히 임경업이 뒤에서 조정한 곳이라 하고 영을 내려 임경업을 잡아 올렸다. 이에 임경업은 '상복을 입고 있는 내가 어찌 그런 일을 지시할 수 있겠는가?' 하고 변명을 하여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 곧 석방될 수 있었다.

인조11년 임경업의 나이 40세에 청북방어사가 되고 이내 영변부사가 되어 서북지방 중요 산성인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의주의 성첩 역시 보수하여 변방인 서북지방을 굳건히 지켰다. 이때 명나라 장군 공유덕 등이 "우가장"으로 도망 와서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청과 내통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임경업은 명나라군과 함께 공유덕 반군을 모두 섬멸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벼슬까지 얻고 이름을 명나라에까지 드날리었다. 이 해에 임경업은 부친의 탈상을 위해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왔다.

 

다음해 인조12년(1634년) 5월 부친 탈상을 끝내고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가 되었으며, 후에는 의주진 병마첨절제사의 벼슬을 덧붙여 받았고, 인조 13년에는 종2품격인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부임하자마자 임경업은 비록 후금과 화친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후금은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어 방어 차원에서 군력 증원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병화에 시달리고 유랑하는 백성들을 구제코자 또다시 상소를 올려 겨우 은 천냥과 금단 백 필을 얻어, 상평창을 설치하고 명나라상인들과 무역을 하여 집없는 자에게는 집을 지어 주고 홀아비와 과부들에게는 각기 배필을 얻어 살게 하니, 각처에서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몰려왔다. 또한 땅을 개간하고 장정들에게 훈련까지 시키면서 방위와 안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후금인들을 잡아서 크게 호통을 치고 돌려보낸 일을 오랑캐와 내통하고 있다고 허위 보고 되어 관직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이에 백성들의 간곡한 호소와 새로 부임한 의주부윤 이준이 백성들의 뜻을 잘 전달하여 이듬해(인조14년)에 다시 의주부윤으로 복직되었다. 이 해(1636년)에 후금의 태종은 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임경업 장군도 청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봉수대를 높이 쌓아 적진을 탐정하고 비변사에 적의 침략이 있을 것을 알리고, 해서지방 군인 2만 명을 준다면 결사 방어할 것을 의뢰하였으나 간신들의 반대로 거절되고 말았다.

 

청 태종은 사신을 조선에 보내어 신하의 국가가 될 것을 요구했으나 조정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인조 역시 청의 사신을 인견하지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청태종은 인조 14년(1636년) 12월 초엿세날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병자호란이다. 청의 대군은 전략적으로 임경업 장군이 있는 의주를 피해서 서울로 직접 공격해 내려왔으니 태평만을 꿈꾸던 여러 읍성들은 감히 적에게 맞서지 못하였다. 인조는 여러 왕자와 비빈 및 그 밖의 가족들을 급히 강화도로 피신시켰으나, 왕 자신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40여일 만인 이듬해 정월 30일에 왕은 친히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고 만다.

 

(2) 여진(청나라)과 조선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여진의 누르하치(후금)집권 때만 해도 조선은 여진의 부모의 나라로 수직적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1627년 (인조5년) 정묘호란의 계기로 형제의 국가로 수평적관계,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으로 종래의 수직, 수평적 관계가 역전되어 조선은 청의 종속적 국가로 강등되었다. 이로부터 약 250여년 조선은 청에 사대의 예로 대하였으나, 대체로 청의 종주국 행세는 형식적이었던 것으로, 내정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세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말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조선총리로 임명되면서 노골적인 종주국행세를 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면서, 조선은 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지만, 일본에 또 다시 국치를 당하게 된다.

 

청나라는 평안도 앞바다에 있는 명나라 군사기지인 가도를 공략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사를 요구하고 같이 공략할 것을 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에게 청나라를 원조할 것을 명하였다. 명나라군사를 친다는 것은 임경업에게는 당시 괴로운 일이었다. 이에 임경업은 우리나라 군법에는 선봉이 성을 깨뜨리면 성안의 재물은 모두 선봉의 장수가 차지하게 된다고 꾀를 부려 선봉장을 피했다. 그리고 가도에 몰래 척후병을 보내어 준비케 하여 책임자인 "섬세괴"만 전사하게 되었다. 인조 23년 정월의 일이었다. 임경업은 곧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청태종은 그의 항복을 받아 내려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임경업은 내 목을 벨지언정 너희 오랑캐와 같이 머리를 깍을 수는 없다는 태도로 변발할 것을 반대하였다.

 

인조 22년에 조선에서는 상신 심기원이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었다. 심기원이 임경업과 같이 음모했다고 허위 자백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임경업의 죄를 다스리겠다고 환국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청태종은 이를 허락하여 임경업을 내 주었다. 서울에 도착한 임경업은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심문의 주요점은 심기원과의 공모 여부였다. 임경업은 명나라를 왕래하느라 조선에 없었으며, 심기원과는 친한 사이도 아님이 참작되었으나, 좌의정 김자점이 임경업을 몹시 시기하여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하였다. 심기원과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지 않자,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형리들의 매질로 숨지게 하였다. 죽음에 임한 임경업은 "천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냐?" 외치며 한 많은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대여 나는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느냐?" 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한다. 임경업은 김자점의 독단적인 계획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김자점도 역적으로 몰려 무참히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임경업의 충성심이 크게 빛나게 되었다. 숙종23년(1697년)에 특명으로 복관되고, 숙종32년에 충민공(忠愍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임경업이 금교역에서 탈출한 후 청은 그 가족들을 모두 잡아 심양까지 끌어갔다가 처만 남겨 놓고 모두 돌려보냈다. 처만은 임경업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매일 고문을 하였으나 장군의 아내답게 "우리 주인은 대명(大明)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가 있는가" 하고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결을 하였다. 또한 타고 다니던 준마도 금교역에서 고삐를 풀어 놓아 보냈는데, 그 후 말은 사복사 마굿간에 돌아왔다가 주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길게 세 번 울부짖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영웅의 아내는 아내답게, 영웅의 말 역시 영웅의 말답게 마지막을 장식했다.

 

영조 2년(1726년)에 호서지방 사람들이 충열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3년)에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정조15년(1791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3) 충렬사

충렬사는 숙종 23년(1697)에 왕명으로 충주 단월에 건립되어 영조 3년(1727년)부터는 춘추로 향제를 올려 오던 차 1977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충렬사를 성역화 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새로이 정회공사를 하여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다. 충주시가지에서 건국대학교 방향으로 이동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건국대학교 정문에서 단월강 방향(수안보방향)으로 300여m 내려가면 좌측으로 충렬사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나온다. 진입로 좌우로는 은행나무들이 가로수로 조성되어 있는데 매년 가을이면 노란빛깔로 진입로를 멋들어지게 한다.

충렬사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과 임경업 장군의 유품들을 전시한 유물관, 정조 15년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다는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 장군의 부인 완산 이씨의 충절을 기린 완산이씨정렬비각(完山李氏貞烈碑閣)이 있다. 경내는 다소 단촐하며 아기자기하다. 들어가자마자 우측으로 임경업 장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에 들어서면 장군이 사용했다고 하는 추련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추련검은 지휘용으로 사용한 검으로 추정된다. 추련검(秋蓮劍)에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장군의 애국심이 돋보이는 시이다.

 

時呼時來否再來(때여 때는 한번 와서 다시 오지 않나니)

一生一死都在筵(한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여기 있네)

平生丈夫報國心(장부의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三尺秋蓮磨十年(삼척 추련검을 십년이나 갈았네)

 

(4)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272호로 지정된 이 비는 충민공 임경업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석비이다. 받침돌과 비신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규모는 비신 높이 183cm, 너비 71cm, 두께 42cm로 앞면과 뒷면에 글자를 새겼는데 글자 수는 총1,420여자에 달한다. 전면 상단에서 좌행으로"御製達川忠烈祠碑"라 전각하였으며 글자크기는 상하 13, 좌우9cm, 본문이 3cm인데비해 상대적으로 크다. 비문은 정조가 지었으며 비제 다음 바로 본문을 쓰고 본문 끝에 글씨를 쓴 이와 전지를 쓴 이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이 비의 글씨는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직제학 이병모가 전서는 보국숭록대부 이조판서 윤동섭이 왕의 명을 받고 썼다.

 

(5) 임경업장군묘

충렬사를 벗어나 단월강을 가로 지르는 단월대교를 넘고 풍동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5분여 정도 가면 길 왼쪽으로 큰 느티나무가 보이며 우측으로 안내판과 함께 마을이 나타난다. 몇 채 안 되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느티나무 아래로는 논이 펼쳐져 있고 강 건너엔 상수도 취수장이 보인다. 장군의 묘소는 마을 뒷산에 모셔져 있다. 묘소까지 차량진입이 가능하다. 장군의 묘는 정확하게 월악산 영봉을 바라보고 있다.

 

지방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된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경업장군의 묘역은 약 200평으로 1982년 정화 때 상석, 동자석, 무관석, 장명 등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 봉분은 정경부인 전주 이씨와의 합장으로 큰 편이며 호석을 둘렀다. 이외에도 양, 망주석, 묘비, 신도비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나 당시의 것은 양 망주석 묘비뿐이다. 묘비는 개석을 갖추고 비신은 대리석인데 높이 138cm, 폭 56cm, 두께 28cm로 각자가 선명하다.

 

(6) 무예수련장 삼초대

삼초대는 대림산 서쪽 명당암석 아래 일련의 바위를 일컬으며 임경업 장군이 무예 연마를 위해 세 단계의 석축을 직접 쌓아 매일 세 번씩 오르내리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아직도 석축을 쌓은 곳이 현존하며, 장군의 묘지에서 단월강을 건너 바로 보이는 암벽벼랑이 삼초대이다. 삼초대로 가는 길은 장군의 묘지에서 나와, 왔던 길로 되돌아가 단월대교를 건너고 수안보 방향으로 간다. 버드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유서 깊은 유즈막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은 구 3번국도와 신 3번국도가 갈라지는 곳으로 삼초대로 이어지는 길은 구 3번국도이다. 삼거리에서 우측 소로를 따라 내려가면 단월강을 우측에 두고 버드나무 가로수길을 만나게 된다.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정심사란 절 입구가 나오고, 절 입구에 서 있는 벼랑이 삼초대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벽(측암절벽)을 세 발자국에 뛰어내리고 뛰어 오르고 했다는 설이 있다. 장군의 무예 훈련장소는 이 곳 말고도 속리산 경업대 암봉이 있다.

 

(6) 임경업장군 사우

살미면 세성동에 소재하고 있는 사우는 조선현종 9년(1668년)에 창건되었고, 1984년 다시 중건된 사당으로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배향하며 향사하고 있는 곳이다. 단월동의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에 비하면 규모는 작은 편이다.

사우 앞 좌측으로는 "쌍효각"(충열문)이 서있는데, 조선 정조 12년(1788년)에 명정된 정려로써 영의정 김자점의 모함으로 처형된 장군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 장군 서거 100일 만에 할복자살한 정경부인 전주 이씨의 충렬을 찬양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9. 기타 석탑

(1) 미륵리오층석탑

보물 제95호. 이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석불을 위해서 석굴이 만들어졌던 자취가 있어 주목되고 있으며, 그 앞면에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다. 이 석탑은 현재 기단 아랫부분이 파묻혀있어 그 구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탑신부는 4각형 중층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중석은 자연석에 가까운 조잡한 4각형 돌로 우주나 탱주의 표현은 되어 있지 않다.

 

갑석은 매우 좁은 2장의 판석으로 덮였고 밑에는 형식적인 부연이 있으며 윗면은 경사가 뚜렷한데 중앙에 역시 형식적인 몰딩이 있다. 탑신부는 1층 옥개석이 2장일뿐 옥신이나 다른 옥개석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있다. 각 층의 체감 비율도 고르지 못해서 매우 엉성해 보인다. 옥개석은 일반형 석탑의 옥신과 옥개석 비례를 무시하고 너무 좁아졌기 때문에 미관을 아주 손상시키고 있다. 받침은 각 층이 5단이지만 추녀가 짧기 때문에 6단 받침같이 보일 정도이다. 추녀 밑은 수평이고 옥상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전각의 반전도 거의 없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만 남아 있다. 노반은 5층 옥개석의 크기에 비하여 6층 옥개로 잘못 알 정도로 큼직하고 복발은 조식이 없는 반구형이다. 꼭대기에 남아있는 철제찰간이 희귀한 유례이다.

 

(2) 미륵리삼층석탑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굴이 있는 사원 경내에서 동쪽으로 약 500m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3층 기단위에 세워진 이 석탑은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하대저석 하대중대 하대갑석의 하층기단을 구성하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을 세워 상대중석을 만들고 상대갑석을 얹어 상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대중석에는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모각했다. 옥신석은 양 우주가 각출되었으나 면은 무문이고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하고 옥급 받침은 5단식이다. 옥개석 위에 4매의 노반을 얹고 그 위에 원형의 복발을 얹었다. 이 탑이 위치한 곳은 고대에 남북교통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신라 석탑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이 보인다. 다만 시대의 하강에서 오는 후대의 양식 이 있으나 대체로 소박하며 단아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3) 추평리삼층석탑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25호.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갖춘 일반형 석탑으로 2매로 조립된 갑석위에 초층 탑신이 안정감 있게 올리고 탑신의 양쪽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다. 낙수면은 급하며 옥개에는 전각의 반전이 있으며 탑신 괴임은 생략되었다. 옥개의 양쪽 끝에는 풍경원공의 흔적이 있고 층급받침은 모두 4단이다. 상륜부에는 복발로 보이는 부재가 남아있다.

 

추평리 탑평마을에 있는 석탑으로 주변에 기와편이 많이 산포하고 있어 이 일대가 절터임을 알 수 있다. 기단부는 땅속에 묻히고 갑석 이상이 노출된 삼층석탑으로 현재 높이는 2.3m이다. 갑석은 2매석을 맞대었으며 탑신 괴임은 표현되지 않았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각 층 4단이며 끝부분은 약간 반전되었는데, 옥개석 네모서리 마다 윗면에 1개 측면에 4개씩의 풍령공이 뚫려있다. 상륜부에는 평면 8각형의 석재가 놓여있는데 꼭대기는 둥글게 처리되었다. 기단부가 묻혀 있어서 전체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이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처마가 두툼하게 표현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4) 중원창동 오층석탑

지방 유형문화재 제8호. 이 석탑은 원래 창동 242번지 김영기씨댁 뒤뜰에 있던 것을 1978년에 원위치에서 남쪽 100m지점의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이 탑은 2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상륜을 놓은 일반형 석탑이다. 한 개의 돌로 된 지대석 위에 얕은 하층기단을 놓고 갑석을 얹었으며 그 위에 상층기단 면석을 놓았다. 상·하 기단면석에는 양우주와 탱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으며 상층기단 갑석의 상면에는 별석으로 된 높은 괴임석 1매가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에는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으나 초층 탑신에 비해 2층 이상의 탑신 높이는 약 3분1 가량 감축되었다. 옥개 받침의 층급은 초층에서 2층까지가 4급이며 3층 4층은 3급이며 5층에서는 2급으로 되어 있어 옥개 받침이 고층으로 가면서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옥개와 탑신이 각기 별석으로 조성되었는데 5층에서만 탑신 옥개가 1석화하였다. 각층 옥개의 상면에는 1단의 탑신 괴임이 각출 되었으며 상륜에는 노반이 1석 남아있을 뿐이다. 옥개의 층급 받침이 고층에 이르면서 줄어들었음과 탑신 옥개가 1석화 하는 현상은 석탑 구성에 있어 약식화한 수법으로 보이며 방형중층인 이 석탑은 고려식 석탑으로서 건탑 시기는 11세기경으로 짐작되고 있다.

 

(5) 단호사삼층석탑

지방유형문화재 제69호. 단호사 약사전 앞에 위치하는 이탑은 단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한 일반형의 3층 석탑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정밀조사를 한결과 원래는 5층 석탑이었으리라는 짐작을 갖게 한다. 지금까지는 이 탑을 3층으로 보고 3층 옥개 위에는 노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으나 이것은 노반이 아니라 3층 옥개에서 각 출면에 우주 가 정연하게 각출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었다.

 

원 위치였을 이 탑은 기단면석에 조출된 우주와 탱주의 표현 수법이 일정하지 않으며 초층 잡신이 별석인데 비해 초층 옥개와 2층 탑신 2층 옥개와 3층 탑신이 한 개의 돌로 되었고 3층 옥개 위에 4층 탑신이 각출되었다.

각층 탑신에는 우주의 표현이 정연하며 4층 탑신이 있음을 볼 때 원래 5층탑으로 추정 되며 이탑의 체감비율로 볼 때 상당히 경쾌한 탑신부를 형성했으리라 짐작된다. 이 탑은 기단부가 갖는 혼돈한 자태와 탑신과 옥개가 1석으로 된 점 등은 석탑 구성에 있어 후대의 양식에서 오는 수법이란 점을 볼 때 탑을 만든 시기는 고려중기 이후가 될 것으로 짐작되며 충주지방의 탑들이 대개 산 위에 위치하나 이 탑은 평지에 조성되었고 그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탑으로서 가치가 있다.

 

(6) 창룡사다층청석탑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창룡사는 남산(금봉산) 중턱 기슭에 위치한 절로서 신라 문무왕 때(661~681)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전해지며 조선시대까지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고 하며 1988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이 절의 앞마당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청석으로 만든 탑이 있는데 탑신은 없이 옥개석만 올린 모습이다. 아래에서 2층까지의 부재 아래 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받침은 모두 4단으로 되어있다. 옥개석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는 찰주구멍으로 보인다. 지금 현재 이 탑의 기단부는 청석 대신 화강암의 탑재로 받쳐지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복발을 표현하기 위해 둥그런 돌 하나를 얹어 놓았다.

 

(7)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보물 제17호. 본래는 수몰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로 84년도에 옮겨 세웠다. 높이 3.15m,폭 1.45m의 거대한 비석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귀부와 쌍룡을 조각한 이수를 얹어 놓고 있는 작품으로 고려초기의 석조미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법경대사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살았던 고승이다. 헌강왕 5년(879)에 태어났으며 성은 이씨이다. 17세 때에 삭발하고, 가야산에 입산수도 하였으며 효공왕 10년 (906)에 당나라로 들어가 각 사원을 순회수도한 후 효공왕 16년(912)에 귀국하여 충주 정토사에 와서 포교에 힘썼다.

 

고려 태조 왕건이 국사로 추대하였으며 63세의 나이로 태조 24년(941)에 입적하였다. 시호를 법경이라 하였으며 대사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최언위가 글을 짓고 명필가 구족달이 쓰고 태조 26년(943)에 이 비석을 건립하였다. 주변의 정토사지는 수몰 지역 내의 문화유적으로 1983년도 여름에 발굴하여 당시의 사찰규모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그 주초가 원형대로 이곳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절터에서는『』『』등 명문이 있는 기와와 연화문 및 귀면와 등이 다수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있었던 국보 제102호인 홍법국사 실상탑과 탑비는 1915년에 서울 경북궁으로 옮겨졌다. 이 부도는 독특한 조각을 하여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법경대사자등탑은 일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에는 길이 180cm, 두께 30cm 정도의 잘 다듬어진 초층 기단석이 있으며 흥법국사실상탑이 있던 위치에는 140cm 길이에 폭 50cm의 연화문석등 대석이 있다. 흥법국사실상탑의 건립은 고려 현종 8년(1017)이다.

 

(8) 억정사대자국사비

보물 제16호. 제액은「대지국사비명」이라 전서하였고 다시 비제를 유명 조선국 충주 억정 선사고고려국왕사시대지국사비명병서「가정대부예문춘추관학사도평의사사사겸성균사성신박의중봉 교찬」이라 하였다.

 

국사의 휘는 찬영, 자는 고저, 호는 목암 속성은 한씨이며 고려 충숙왕 15년(1328) 정월 8일에 탄생하여 14세 때에 중흥사에 들어가 원증국사에게서 5년 동안 수법하였다. 또 고려 조계산 제14대 조사인 정혜국사의 가지산 총림에 나아갔으며 유점사 수자화상의 훈도를 받기도 하였다. 여러 절의 주지를 거친 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양가도승록대사가 되었다. 그 후 석남사, 월남사, 신광사, 운문사 등이 주지를 거친뒤 내원에 불려 들어가 정지원명 무애국일선사의 호를 받고 우왕 초에 가지사의 주지로 국일도대선사가 되었다. 우왕 9년(1383)에 왕사가 되고 창왕 때도 왕사로 있다가 공양왕 2년(1390)에 억정사에서 입적하였다. 공왕 때의 시호는 지감 탑호는 혜월 원명이며 조선 태조 때 시호를 대지, 탑호를 지감원명으로 고쳤다.

 

대지국사비는 조선 태조 2년에 세운 것으로 박의중이 글을 짓고 혜조국일도대선사가 쓰고 승려 혜공이 각자하였다. 비의 형식은 매우 간략한 것이며 대석도 윗면에 2단의 신좌를 새긴 장방형일 뿐이고 개석이 없이 신석도 윗변 좌우를 크게 귀접하였을 뿐이다. 전통적 수비요식이 쇠퇴하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친 과도기적 소작이므로 조형상 특색을 갖추는 여유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비문은 신석의 4면에 해서로 음각되어있고 말미에는 문승들 뿐 아니라 속문도의 이름도 보이는데 판문하 홍영통, 문하시중 이색, 시중 심덕부, 판개성 우인열, 정당문학 박형 등 20여명의 이름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고, 건비관사원과 충주목사의 이름도 새겨져, 비를 세우기 위한 광범한 체제가 형성되었던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10. 기타

(1) 충주계립령로하늘재

명승 제49호. 하늘재 옛길(계립령로)은 충청도 충주와 경상도 문경 사이의 가장 낮은 고갯길로서 신라시대 초기 서기 15년(이달라니사금)에 개척된 유서 깊은 옛길이며, 많은 전설과 유래가 깃들어 있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문헌비고, 만기유람, 동국여지승람 등 다수의 고문헌과 자료에 나타나고 있는 옛길이다.

 

임진왜란 이후 새재에 관방시설을 설치하고 인근의 다른 통행로를 폐쇄할 때, 하늘재 옛길도 폐쇄되어 이미 오랫동안 행인의 왕래가 없어진 길이며, 지금도 충청북도 충주시 구간은 비포장도로로 남아있어 옛길의 정취를 잘 보존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늘재 옛길 주변에는 중원미륵사지(사적 제317호), 중원미륵리오층석탑(보물 제 95호), 중원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 96호)등 국가지정 문화재와 다수의 시도유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가 있어 매우 풍부한 문화경관요소를 지니고 있는 옛길이다. 현재 국립공원 측에서는 역사자연관찰로(History @Nature Trail)로 지정하여 탐방객에게 활용하고 있는 길로서, 하늘재 옛길은 우리 옛길의 특징을 매우 잘 갖추고 있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2) 충무공이수일장군묘

지방기념물 제21호. 조선 중기의 무신인 충무공 이수일장군의 유택으로 묘제는 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으로 8매의 화강석으로 된 원형호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상석과 동자석 한 쌍이 있고 그 오른쪽에 묘비가 있으며 중앙에 장명등 그 양쪽에 망주석 한쌍과 장군석 한 쌍이 있다. 이 묘소 아래 현종8년(1667)에 세운 대리석으로 된 이수일신도비가 있으며 묘소 50m떨어져 사당이 있다.

 

(3) 충무공이수일신도비

충북유형문화재 제205호. 이 비의 귀부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대리석으로 4,100여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이수에는 쌍룡을 양각였던 전ㆍ후면에 각각 2마리의 용이 섬세하게 족가되어 있다. 귀부는 웅장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조각되었고 이 비를 지나면 묘소와 사당인 충훈사(忠勳祠)가 있다. 전체적으로 비가 웅장하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글씨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귀부와 이수는 미술사적 가치가 있으며 또한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 3월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현종 때 세워진 이 비는 이조판서 金壽恒이 전(篆)하고 領相 李敬與가 찬(撰)했으며 한성부판윤 金佐明이 서(書)하였다. 비의 크기는 420×97×27m

 

(4) 택견

[택견의 명칭]

문헌에 따르면 택견은 여러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보면 덕견이라고 되어 있으며 매하(梅下)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 : 우리나라의 풍속에 대하여 기록한 책》에는 탁견희라고 기록되어 있고 안자산(安自山)의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의 기록에는 "근래(近來)에도 청년(靑年)들이 씨름보다 소이한 수박희(手博戱)를 행(行)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種류)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말사전》에는 '태껸' 또는 '택견'으로서 한 발로 서로 상대방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각희(角戱)]로 표현하고 있고,《조선어대사전(朝鮮語大辭典)》에도 '택견'이란 한쪽 발로 서로 넘어뜨리는 유희(遊戱) [각희(角戱)]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덕견'이 '택견' '태껸' '각희(角戱)'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택견’을 일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택견의 종류]

택견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고구려를 지켜온 우리의 민족무예로써 87년 7월 작고하신 인간문화재 고 신한승 선생에 의하여 체계화되고 정립되었다. 83년 6월 1일 무술로써 처음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조상들의 얼이 담겨있는 우리민족의 유일한 전통무술이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되었던 택견은 신라시대에는 화랑도로서 삼국을 통일하는 근간이 되었고 고구려 때에는 호국무예로서 무과시제의 정규과목이 되어 훌륭한 택견인들은 벼슬에 오를 정도로 무예를 장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상고사의 기록에 있듯이 송도의 택견이 지나(支那)에 들어가 권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 유술이 되었다는 기록을 보아 우리민족 무술인 택견은 각종 무술의 기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느 무술에서 느낄 수 없는 택견의 독특한 몸놀림은 능청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쭐거리기도 하며, 혹은 발로 차기도 하고, 혹은 상대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기도 하는 택견의 기법은 서두르지 않는 여유 있는 자연적인 무예라 할 수 있다.

 

[택견의 정신]

택견의 정신은 한마디로 ‘참’이라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선배(선비)정신과 신라의 화랑정신으로 이어지는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을 실현하는 것으로 서 전통문화 발전에 기여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고취하는 데 택견의 정신을 두고 있다. 택견인으로서 가야 할 길은 택견으로 조상의 얼을 이어 하나, 마음을 닦고, 둘, 예의를 지키고, 셋, 견주며, 넷, 몸을 길러 겨레와 나라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5) 김 생(성덕왕 10?∼원성왕7년 791?)

김생은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로 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 김생조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서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 행서, 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이 변경(북송의 서울) 하남성 개봉에 묵고 있을 때 한림대조 양구와 이혁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사관에 와서 그림족자를 썼는데 이때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오늘 뜻밖에 왕우군(진대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보게 될 줄 이야"하고 감탄하자 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사람 김생이 쓴 것이요"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천하에 우군을 제외하고 어찌 이런 묘필이 있으랴!"라고 하였다. 이에 홍관이 여러 번 김생의 글씨라고 하였지만 끝내 믿지 아니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상에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출신이 가난했고 원성왕 6년(790)까지 80여세를 살면서 글씨 공부에만 전념했음을 알 수 있을 뿐 그 밖의 것은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 충주목 불우조 김생사항에 김생이 두타행을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김생사」라 이름하였다는 기록과 그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들이 모두 사찰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점으로 보아 호불불취하였다는 그의 생을 짐작할 뿐이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평가받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는 그를 신품제일로 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그의 진적이 귀해져 이광사의「원교서결」에서 그의 진적은 절무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가 있다. 비문 글씨는 고려 광종 5년(954)에 승려 단목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한 것으로 통일 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 구양순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로 서가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또한 짜임새나 획의 처리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틀에 박힌 글씨에서 벗어나 운치를 살리고 있다.

 

그의 유일한 서첩으로「전유암산가서」가 있으며「해당명적」,「대동서섭」에 몇 점이 실려있다. 특히「여산폭포시」는 자유분방하면서 힘이 넘치는 필적이다. 이밖에「창림사비」가 있는데 현재 원비는 물론 탁본조차도 전하지 않는다. 단지 원나라의 조맹부가「동서당집고첩발」에서 창림사비는 신라 김생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 이 깊어 당인의 명각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품평이 전한다.

 

충주의 탄금대를 끼고 흐르는 남한강의 북쪽 금가면 유송리 반송부락에는 김생이 지었다는 김생사의 절터가 있으며, 반송마을 한강변으로 긴 축방이 있는데 이 제방을 김생제방이라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김생사에서 공부하던 학동들이 제방 쪽의 여울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방해가 되므로 김생이 도술을 써서 이 여울물을 돌리고 제방을 쌓았는데 이후 여울소리가 끊어졌다고 하여 벙어리여울이라 부른다고 한다.

 

김생의 글씨에 대해서는 한결 같이 역대의 명필들이 극찬을 하였으니 그를 정리해 보면 왕희지와 아주 흡사한 것 또는 그의 필법을 능가했다는 것으로 왕희지는 중국 서예사에 전무후무한 고금 제일인자라 불리고 있으니, 김생을 그에게 비함은 더할 나위 없는 극찬의 말이다.

 

김생의 글씨는 예, 행, 초의 온갖 글씨체에 다 능했으며 참으로 풍운의 조화와 사람으로서 신의 경지에 들어간 필치로 중국의 서성 진나라의 왕희지를 능가하는 전무후무한 서예의 대가였음을 알 수 있으며 김생이야말로 이름과 실상이 어긋나지 않은 동방서도의 고금 제1인자라 할 것이다.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반송 김생사지에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비가 세워져 있고 김생선생숭모비가 충주체육관 앞에 세워져 있으며, 김생연구회가 설립되어 김생선생에 대한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고, 김생선생을 추모하고 후예 양성을 위한 김생추모 전국서예대전이 충주문화원 주최로 해마다 성대하게 개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후 3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름 높은 서도가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신라의 명필이라 하면 "김 생"을 거론한다.

 

후세의 여러 가지 전설의 기록으로, 김생의 발자취를 보면 일찍 안동의 문필산, 경주 경일봉 석굴 같은 곳에서 오로지 글씨공부만을 하였으며 충주에서는 북진애라는 곳에 있는 절에서 중이 되어 두타행을 닦았다고 한다. 북진애라는 곳이 바로 현 유송리 "김생사"로 추측되어진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흰기러기

흰기러기야 훤사(喧辭)하랴

못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너지 마라. 고기 잡는 이가 알까 하노라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청량산을 두고 읊은 퇴계 선생이 쓴 시이다. [六六峰]이란 읊조르기 편의한 시구어로써 12봉을 일컬음인데(愼霽 周世鵬 선생이 명명하였다고 함) 자연경관이 절정을 이루어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어졌다. 이 명승지 영산 중에는 많은 사암(寺庵)이 있어 전해져 오고 있고, 원효대사의 유적인 원효정, 고운(孤雲;최치원)선생의 유적인 치원봉, 고운대(孤雲臺), 신라 서성 김생이 10년간이나 서도를 닦던 김생굴, 의상대사의 유적인 의상봉, 퇴계선생이 수도한 오산당(五山堂),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한 왕궁사(王宮寺) 밑 오마대(五馬臺), 청량산의 최고봉인 장인봉(丈人峰), 밖으로는 외장인봉, 선학봉, 안으로는 자란봉(紫鸞峰), 자소봉(紫소峰), 탁필봉(卓筆峰), 연적봉(硯滴峰) 등 수많은 명승 유적들을 간직한 이 청량산, 듣기만 해도 곧 신선이 되는 기분인데 입산하면 오죽하랴.... "연적봉물을 따서 탁필봉 붓을 삼고 금강역사 힘을 얻어 일필휘지 써 봤으면,,," 하는 생각 뭉클 난다.

 

[단군영정에 얽힌 전설]

경남 밀양 영남루 맞은편 천진전(또 강화도 마니산)에 모셔져 있는 이 두 곳의 단군영정전에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 단군영정의 유래는 지금까지 전설로만 전해져 오고 있다. 김생은 우리민족의 시조가 누구이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다. 시조가 단군임은 들어서 알았지만 그 모습이 어떠할까? 중국의 큰 성인인 공자의 상이 있고 석가모니불도 상이 있다.

 

그런데 어찌 우리 시조는 단군이라고만 하여 이름은 전하고 상은 전하지 않는 것인가? 이래서야 먼 훗날 우리 민족의 구심점을 어찌 어디에서 구하랴. 김생은 차츰 머리가 더 무거웠고 심신이 곤하였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생각이 궁극에 미치자 마침내는 손수 단군의 상을 그리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매일같이 목욕재개하고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하얀 종이 위에 초상화의 기초 본을 뜨기 시작하였다. 한장, 두장, 열장, 스무장......그러던 중 김생의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무아지경에서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김생의 앞에 신선 같은 도인이 나타났다.

그 도인은 말하기를 "김생. 그대는 나를 그리기 위해 이토록 정성을 기울이고 있구나. 자 나를 봐라. 똑똑히 보고 기억하라" 김생은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붓을 잡았다. 몽중 영상을 되살려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열심히 그렸다. 한장을 그려놓고 벽에 걸어보니 잘 그려졌으나 의심이 갔다. 과연 이 그림이 꿈에 나타난 단군의 상인가? 이 한 장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또 그려보자. 두장을 그렸다. 똑같이 그려졌다. 석장, 넉장, 다섯장.....열장을 그렸다. 다 비슷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한 장만 더 그려보자.

 

그리하여 도합 열 한 장을 그렸다. 다 함께 걸어두고 자세히 보아도 열한 장 모두가 꼭 같은 상이었다. 이제는 꿈에 본 상이 그대로 다 나타났는가 보다. 그제서야 믿고 자신도 이 이상 더 할 수는 없겠구나 하고 붓을 놓았다. 그리하여 김생은 단군의 상을 완성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은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석단목 스님은 과연 누구일까? 당시만 해도 모든 문화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 생활하던 시대가 아니던가? 그런 가운데에서 글씨는 더욱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백월비(白月碑)를 세우는 과정에서 비문의 글씨를 중국의 명필 가운데에서 구하지 않고 이미 타계한 신라 김생의 글씨를 한자 한자 모아 집자(集字)를 해서 비문을 각한 것은 위와 같은 연유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금가면유허비]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름높은 서도가들이 수없이 나타났지만, 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분으로 우선 꼽을 수 있는 분이 신라의 명필 김생과 조선후기의 김정희이다. 이 두 분이야말로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이라 불릴 정도의 서성(書聖)들로 그 취향과 태세는 고금이 서로 달랐다 해도 두 분이 이룩한 바탕은 하나였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성 김생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간단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후에 이인로의 파한집에서도 김생의 글씨가 신묘하다 하여 오십 칠종의 제가체세를 멀리 뛰어 넘었다 한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신라, 고려 등을 통틀어 명필가 넷을 신품사현으로 꼽는데 김생을 제일로 쳤으며, 원의 조맹부도 창림사 비발문에서 신라승 김생이 쓴 이 비문이 당인의 명각보다도 뛰어나다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성현의 용제총화에서 모두 김생을 제일로 치고, 원교 이광수는 "필쾌"에서 동국 필법은 신라 김생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홍양호는 김생이 동방서가의 시조라고까지 일컫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 같이 김생이 중국의 서성, 왕희지 필체의 신수를 얻어 오히려 그를 능가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김생의 진짜 필적으로 알려진 백율사의 석동기와 고려 초에 승단목이 김생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의 글씨를 보면 극도의 귀족적 세련미가 위축되어 유려전아(流麗典雅)하기만한 왕희지체보다 한결 더 골기가 승하여 청경탈속한 일취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고유미감의 가미로부터 이루어진 고유의 색이라 할 것인바 과연 김생은 동방 서가의 시조로 보아 손색없는 명필가라 하겠다.

 

동국여지승람 충주조에 김생이 두타행을 닦으며, 이 절에서 살았으므로 그로 인해 이름을 삼았다고 하였으니, 김생사가 김생이 기거하던 절이었음은 틀림없겠는데 안동문필산은 김생이 글씨를 배우던 곳이라는 각주가 붙어있어, 김생이 경주에 가까운 안동에 가서 글씨를 배우고, 이로 이름을 얻은 후에 고향인 이곳 충주로 와서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절이 김생사였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문화공보부는 선현추모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김생사지에 김생의 유필을 집자보존 하려는 뜻을 세우고 충북으로 하여금 그를 집행케 하니 이로 말미암은 기념집자비가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인연 필생의 도리가 천백세후에 때를 만나 성취케 되니 가히 성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전유암산가서]

그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경주의 창림사비는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고 그 탁본도 전하지 않는다. 법첩(法帖)으로 전하는 것은 해동명적(海東名迹)과 대동서법(大東書法)가운데에 들어있고 단독으로 된 서첩은 이 전유암첩 뿐이다.

 

처음에〈산가서(山家序)〉5엽이 있고 뒤에 5언시 1편이 붙어있는 소자 행초(小字行初)이다. 말미에 보덕사 김생서(報德寺 金生書)라는 자서가 있다. 글씨의 원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게 불만스럽기는 하나, 이런 것이라도 남아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낭공비(朗空碑) "해동명적"에 실린 행서 [당시(唐詩)] "대동서법"에 실린 대자(大字) "麗山○○詩 등을 종합 연구하면 김생의 면모를 알게 될 것이다.

 

[백월서운탑비]

이 비는 신라 효공왕과 신덕왕 양조의 국사인 낭공대사의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 塔碑)다. 낭공은 당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왕가와 불교계에서 숭앙받던 고승이다. 사후에 최인연이 비문을 지었으나 미처 세우지 못하였는데 고려 광종(光宗) 5년(954)에 봉화 태자사에다 비를 세우면서 서목(瑞目)이란 중이 김생의 글씨를 집각하였다. 이조 중종 때에 비를 영천군(현재 영주) 영천면 휴천동에 옮겼는데 절반이 부러진 것을 다시 붙여서 1918년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

 

낭공비는 집자일망정 왕희지의 성교서(聖敎序)와 같이 김생의 글씨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당시 당과 신라에 새로 유행하던 구양순(歐陽詢)이나 저수량(猪遂良) 유(流)를 따르지 않고 진과 남조의 필법을 모방하면서도 획에 있어서는 굴고 가는 것이 한 획 가운데서도 변화를 일으키며 선은 곧은 것과 굽은 것이 미묘한 감정을 살리어 한자에서 음양향배(陰陽向背)의 묘를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그의 천재적 예술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우리를 감탄케 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역대의 서예가 중에서도 이렇게 격조와 재기가 구비한 신품은 볼 수 없다. 고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제현서결평론(東國諸賢書訣評論)에서 김생을 신품 제일에 높은 것은 당연한 평이다.

 

현 낭공비의 측면에는 1509년(中宗 4년)에 영천 군수 이항(李抗)이 태자사에서 영주로 옮겨온 사실을 적은 기문이 박눌(朴訥)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봉화군 태자산의 태자사에 세운 것을 뒤에 영주군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 비신(碑身)의 높이는 155cm이고 넓이는 97cm이며 두께는 24.2cm이다.

- 기록된 바 없어 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으나 그 후 조선조에 와서 영주군 군청사 앞으로 옮겨 세웠다.

- 근대에 와서 또 세 번째로 자리를 옮긴 곳이 현재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다.

- 서체는 행서이고 글자의 크기는 직경 2.1~3.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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