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속에 나타난 청계천의 문화예술
- 박 경 룡(중구문화원 자문위원, 서울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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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 청계천의 연혁과 관리 (1) 연혁 (2) 준천과 관리 3. 청계천변의 생활모습 (1) 주민의 구성 (2) 청계천변의 상인활동 |
(3) 청계천의 이용 4. 청계천변의 문화 (1) 민속놀이 (2) 세시풍속 (3) 청계천 교량의 이용 5. 청계천변에 살았던 사람들 6. 나가는 말 |
1. 들어가는 말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에서 만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연장 10.92km의 이 도시 하천은 고려 때 한양천(漢陽川)·경도천(京都川)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는 개천(開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체로 인공을 가해 물이 잘 흐르도록 만든 큰 냇물을 예로부터 개천이라 불렀다. 청계천(淸溪川)이라는 명칭은 통감부 설치 후(1905년) 일제에 의해서 널리 호칭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경복궁 서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청풍계천(淸風溪川)을 줄여서 청계천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500여 년간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청계천은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도성 안을 지리적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도로·교통·주거 외에 사회·경제·문화면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으로 작용하여 서울의 남촌·북촌이 이루어졌다.
1958년~1977년까지 도심부에서 마장동에 이르는 청계천이 복개되고, 이어서 그 위에 고가도로가 놓이면서 서울에서 이름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을 볼 수 없었던 것이 40여 년이 되었다. 2005년 10월에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서울의 명물이 하나 더 늘어나 수많은 내외국인이 이곳을 찾아오고, 강북의 도시면모가 바뀌는 시점을 맞았다.
조선시대 이후 청계천이 서울의 하수역할을 하면서 악취가 풍기는 까닭에 이를 복개하려는 구상은 오래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에 일제가 남대문시장을 폐쇄하려고 하자 한국 상인들이 청계천 일부 구간을 복개하여 시장 부지로 사용하려 하였고,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청계천을 깨끗한 하천으로 바꾸고, 주변은 산책도로를 만들어 공원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1936년에는 경성부에서 5개년 계획(1937~1941)으로 ‘청계천개수계획’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일도 있다.
이에 청계천이 복원된 것을 계기로 조선초부터 1950년대까지 청계천변에 살았던 인물과 주민생활모습을 살피고, 관아의 역할과 활발했던 상공인의 모습 및 청계천에서 볼 수 있었던 문화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청계천의 연혁과 관리
(1) 연혁
조선초 세종 4년(1422) 1월~세종 16년 2월까지 12여 년간에 걸쳐 농한기를 이용하여 청계천의 본류보다 지천(支川)·세천(細川)의 개착과 소규모의 보수·확장을 계속하여 청계천은 서울사람들 생활하수의 배수(排水)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 28년(1752)에 청계천 준천(濬川)이 끝나자마자 서울사람들은 생활하수 외에도 쓰레기·분뇨 등의 오물을 개천에 버리거나 쥐·고양이·강아지의 시체를 비롯하여 심지어 전염병으로 죽은 유아의 시신까지도 밤중에 몰래 개천에 버렸다. 조선말 고종 때는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후 그 시신을 청계천에 내다 버려 청계천 4가의 효교(孝橋)~오간수문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서울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여 생활하수량이 늘어 난데다가 백악과 남산 일대의 수목이 땔감용으로 베어지고, 일부가 경지로 개간됨으로써 개천의 토사(土砂)의 유입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홍수 피해가 심하였다. 이에 조선후기 영조 때 청계천 준천(濬川)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영조 36년(1760) 2월, 20만 명을 동원하여 57 일간의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준천 사업은 하천을 준설하는 동시에 수로(水路)를 직선으로 변경하고, 양안(兩岸)에 돌로 축대를 쌓는 행태로 진행되었다. 이 후 준천은 정부의 재정 곤란 속에서도 2~3 년마다 한 번씩 정례적으로 실시되어 1908년까지 지속되었다.
개천에 맑은 물이 흘러 청계천이라 불릴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6․25전쟁 때 1․4후퇴로 서울 시민이 거의 남쪽으로 피난하여 서울에 환도하기 직전까지였다. 그 해 청계천이 맑고 잔잔히 흘러 송사리와 피라미 떼가 몰려다니며 꼬리치던 일도 있었다.
일제 때에는 농촌을 떠난 농민들이 서울로 몰려들면서 청계천 제방에는 무허가 임시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청계천변에서 특히 심각했던 것은 위생문제였다. 장마가 지면 침수되는 가옥이 부지기수였고, 전염병이 돌면 바로 전 시가를 휩쓸었다. 집중호우라도 내리면 청계천 하수가 주거 밀집지역으로 바로 역류하였다. 이 당시 서울 주민의 사망률은 청계천에 가까운 곳에 거주 할수록 높았다.
도심 한복판을 흐르면서 경관면이나 위생면에서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개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간편한 방법은 '복개'였다. 개천을 복개하려는 최초의 계획이 수립된 것은 대한제국 때의 일이었다. 청계천 처리 문제가 본격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이후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설정하고, 경성을 그 중심에 놓으면서부터였다. 이른바 '대경성 계획'을 세우고, 1934년의 시가지계획령을 계기로 서울의 전반적 개조에 대한 구상이 본격화되었다.
청계천의 전면 복개 구상은 1935년에 최초로 발표되었다. 당시 경성부의 마치다 토목과장은 청계천을 전면 복개하여 도로로 만들고 그 위로 고가철도를 놓는 구상을 발표하였다. 대경성계획으로 영등포를 비롯한 1 군 8 면이 새로 경성시에 편입될 경우 당시의 시설만으로는 늘어나는 교통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1936년에는 경성부에서 5개년 계획(1937~1941)으로 ‘청계천개수계획’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1) 광화문에서 청계천까지 암거(暗渠)를 설치하여 도로를 건설하고 (2) 청계천 양편에 암거(暗渠)를 시설하여 양쪽으로 도로를 확장하며 (3) 한강이나 세검정에 펌프를 설치하여 정기적으로 물을 끌어 올려 청계천의 오물을 세척한다는 계획이었다.
(2) 준천과 관리
조선초 문종 때 기록을 보면 청계천 수구(水口) 안에는 옛사람이 만든 3 개의 산이 있어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 뒤 성종 때 편찬된『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가산은 조선 전기 도성 수구내(水口內) 훈련원 동북에 위치하고, 수북(水北)·수남(水南)에 각 한 개씩 있었다. 흙으로 만든 산으로 지기(地氣)를 모아두는 것과 같다」고 소개하였는데 이는 풍수지리설의 이른바 비보(裨補)인 듯 하며, 조산(造山)된 흙은 개천공사 때 나온 토사(土砂)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청계천을 준설(濬渫)할 때에 나오는 토사는 이를 한두 군데에 모아 쌓아 둘 수밖에 없어 이것을 가산(假山)이라고 불렀다. 청계천변의 가산은 영조 36년(1760) 경진년(庚辰年) 때의 조성된 것이 규모도 크고 그 수효도 여러 개가 되어 주민들이 가산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불렀다. 이 가산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퇴락해서 평지로 변했다.
영조 36년 4월 10일, 청계천 준천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왕이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에게 이 공사의 성과를 묻자, 그는 “준설로 생긴 토사를 지금과 같이 개천의 양안(兩岸)에 방치해 두었다가 비가 내리게 되면 이것이 무너져 천거(川渠)와 도로에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모처럼 실시한 역사(役事)도 헛되이 되어 버리므로 거액을 들여서라도 이 토사를 다른 곳으로 운반해야 된다”고 답하였더니 영조가 이를 듣고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과 같이 경진년의 준천시에 준설로 인한 토사를 처리할 계획은 세우지 못하여 청계천의 양안에 무질서하게 쌓아 모아 둔 것 같다. 이처럼 유척기의 지적에 대하여 영조는 거액을 들여서 원거리로 운반해 갈 수도 없었으므로 이 흙을 오간수문 근처에 두 군데로 집중시키도록 함으로써 가산처럼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가산은 특별히 축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자 풍우(風雨)로 토사가 흘러내려 허물어지면서 낮아졌을 것이며, 그 다음 준천 때 다시 그 곳에 토사를 모아 종전보다 더 큰 산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순조 32년(1832) 9월 기록에 비변사(備邊司)에서 다음해 봄에 실시할 준천계획을 보고 받고, 순조는 모든 것을 경진년의 ‘준천사절목’을 참고하여 그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한 구절 중에 「어디에 조산(造山)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도 ‘경진사목’을 참고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 가산을 나지(裸地)로 두면 보기가 흉하기 때문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다. 1914년 일제가 경성부의 행정구역명을 새로 정할 때 속칭 조산동(造山洞)이라고 불려 오던 이 곳 가산에 심어놓은 꽃향기가 좋다고 하여 이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 동대문종합상가 부근의 북쪽 조산은 광무 2년(1898) 그 자리에 전차 차고(車庫)를 세우면서 대부분 헐렸으며,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에 남안(南岸)의 조산은 1918년경에 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를 짓고, 1921년 그 서쪽에 경성사범학교를 세울 때에 모두 파내서 그 흙은 종로의 도로 개수에 썼다고 한다.
광무 2년(1898)의 내부(內部)에서 경무청(警務廳)에 「인민 위생에 관한 훈령(訓令)」중에 각 골목 작은 개천을 주위 사람들을 시켜 협력하여 파내게 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음을 보아 조선말에 위생문제로 청계천 지천 등의 개천을 준천하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서울이 상업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일거리를 찾지 못하여 걸인으로 연명해야 하였다. 수백 명의 걸인들 근거지는 주로 청계천 다리 밑과 청계천 준천 이후 생긴 가산(假山)의 토굴이었다. 서울에서 거지를 땅꾼이라 부른 것은 가산에 땅굴을 파고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산은 조선 초부터 한양 걸인들의 집회소가 되었다. 이들의 수가 수백 명이나 되어 두목은 세도가에 붙어 다른 당파나 정적(政敵)의 행태와 드나드는 사람들을 염탐하기도 하고, 부잣집의 혼사나 상사(喪事) 때에는 잡배의 출입을 막아주기도 하며, 상여가 나갈 때에는 요령을 흔들고 만장을 들어주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
조선 초 성종 때 한성판윤이 “가산 일대에 거지 수백 명이 모여 삽니다. 그들은 법도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소란만 피운다 하니 좌우 포도청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상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포졸이 다스리기에는 너무 많은데다가 세력도 커져 있고, 세도가와도 야합되어 있어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차라리 조직화하여 생계를 보장해 주고 행패를 자제시키는 쪽으로 걸인정책을 바꾸었다.
포도청에서는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 두목인 ‘꼭지딴’[丐帥]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포도청에서는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 걸인 두목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매년 덕망있고, 깡이 세며, 통이 큰 두목을 선출하는데 선출된 두목을 ‘꼭지딴’이라고 하였는데 명절에는 고관이나 세도가에 찾아다니면서 세배도 했다고 한다. ‘꼭지딴’은 걸인들의 생살권(生殺權)을 쥐고 있었으므로 이합집산 등 모든 행동은 그의 지시를 따라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조선말부터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까지 광교·주교·오간수교 밑에는 뱀 장사와 걸인, 고물 수집인들이 살았다. 장마가 지면 뱀 장사는 다리 난간에 선반을 매고 뱀이나 가재도구 등을 옮겨 놓고 대피하였다. 고물 수집인들은 대개 1, 2년 정도 휴지 등을 모아 판 돈으로 자립하여 장사를 하였다.
조선말에 한성부는 청계천의 물이 잘 흐르도록 오물 등을 제거하기 위해 경무청의 협조를 얻어 청계천을 자주 준설하였다. 대한제국 때 시민들이 청계천에 쓰레기 등의 오물을 버리는 일이 많은 관계로 한성부는 이를 막고자 청계천 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오물을 버리지 못하도록 책임을 지워 감시하도록 하였다. 만약 청계천에 오물이 버려져 있을 경우에는 해당 가옥의 주민이 이를 처리하도록 했고, 교번소(交番所)에서는 오물을 함부로 버리는 자를 체포하였다.
광무 2년(1898) 6월에 한성부는 청계천에서 돼지를 기르는 중국 상인 때문에 위생상 불결하므로 경무청 산하의 중서장(中署長)에게 이를 금지시키도록 다음과 같은 통첩을 발송하였다.
「귀서(貴署) 소관 내인 장통방 시병(市屛), 섬교(종로구 장사동 55번지 북동쪽) 위쪽 개천에 청국인 상인의 돼지우리가 있어서 위생에 해롭고 물 흐름이 막히니 귀서에서 속히 금지하도록 함이 마땅하겠기에 이에 통첩함.」
1921년말에 경성부는 이듬해에 30만원(圓) 예산으로 청계천에 경편(輕便)철도를 부설하여 경성부의 쓰레기와 오물을 운반 처리, 광희문 밖에서 소각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한 일이 있다.
3. 청계천변의 생활모습
(1) 주민의 구성
오늘날 서울을 ‘강북’ 과 ‘강남’으로 구분하여 부르듯이 조선시대에는 ‘우대’ ‘아래대’ 라는 지역 구분이 있었고, 경술국치 후에는 북촌, 남촌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 상류인 인왕산 밑의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효자동, 통인동에는 주로 문관, 양반출신 상류계층이 살았다. 조선 말 이른바 장동 김씨(壯洞金氏)들도 이곳 인왕산 밑에 살았으며, 이곳을 ‘우대’ 라 불렀다.
인왕, 백악, 남산 등지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지금의 청계천 2, 3가·광교·수하동 부근의 청계천에서 합쳐졌는데 조선시대에 이 일대에는 주로 역관, 의원 등 중인계층과 상인들, 수공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므로 이곳을 ‘아래대’ 라고 불렀으며, 청계천변은 조선 초부터 상권(商圈)의 중심을 이루어 경제활동이 활발하였다. 이곳은 조선 500 년간 이들의 많은 애환과 세시풍속이 펼쳐진 곳이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모습이 사라지고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의 조상은 양반관료 계층이었으나 서얼출신이므로 신분사회에서는 출세에 한계가 있었다. 그 중에는 재주가 있고 배우기는 하였지만 신분상 이유 때문에 출세에 한계가 있으므로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여 역관, 의원, 화공(畵工) 등 기술직에 종사하였고, 역관 중에는 사신을 따라 수행하면서 상거래로 돈을 모아 거부가 된 사람도 있었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어 선각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재상이나 고관집 사랑에 출입하면서 기담(奇談)과 어릿광대 같이 번뜩이는 기지(機智), 세상사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재주로 식객(食客)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그 중 유명한 사람으로 서울의 정수동, 대구의 정만서 등이 있다. 정수동에 관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정수동이 대감집에 갔는데 종년의 어린 아들이 동전 한 닢을 삼켜서 죽는다 하고 울고불고 있자, 이를 본 정수동이 “걱정 말게, 이 집 대감은 수천 냥 삼켜도 끄떡없는데 그 동전 한 닢 먹어서 무슨 탈이 나겠느냐”라고 대감의 뇌물 먹기에 대한 비판을 했다는 것이다.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장통방(長通坊) · 훈도방(薰陶坊) 등 청계천의 좌우측, 오늘날 종로와 을지로의 1∼4가에 해당하는 지역 일대에 상가와 시장과 환락가로 이루어진 도심이 형성되었으며, 상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이곳에는 관리와 결탁하여 치재(致財)한 육의전(六矣廛)의 거상(巨商)들도 살았지만, 동시에 많은 서민들의 빈약한 가옥들이 밀집하여 혼잡과 시끄러움과 애환이 얽힌 마을을 이루었다. 청계천 좌우측은 도심이자 번화가이지만 장안에서 가장 저지대였기 때문에 한 발자국 뒷골목에 들어가면 배수가 잘 안되어 비만 오면 진흙구덩이가 되었으며, 여름철 가뭄 때는 개천의 악취가 퍼져, 주거 환경으로는 좋은 곳이 못 되었다. 이러한 뒷골목 서민들의 집에 끼어 빈한한 선비들의 가옥도 섞여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 청계천 하류지역에는 재인(才人)·백정(白丁)들이 거주하였고, 광교·수표교·오간수문 등 돌다리 아래에는 걸인들이 거주하였으며, 오간수문 밖은 인가가 드물어 ‘도깨비들이 노는 곳’으로 알려졌다.
조선말 황현(黃炫)의 매천야록(梅川野錄)에는 고종 원년(1864)~24년(1887)의 일을 기록하면서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老論)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小論) 이하 3 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하였다. 이 당시 노론 사람만이 북촌에 거주하였고, 소론과 남인·북인은 고급관리일지라도 남촌에 섞여 살았다는 것이다. 물론 남촌은 가난한 선비들만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청빈하게 산 유생과 실직한 양반들이거나 미관말직의 관원들이 살았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에 북촌은 한국인, 남촌은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불려졌다.
일본인들에게 서울 거주가 허용된 것은 갑신정변 다음해인 고종 22년(1885) 2월부터이다. 이때 그들의 안전을 위해 일본공사관과 영사관주위에 집단 거주케 할 필요성을 이유로 공사관․영사관에 이웃한 진고개 일대 즉 오늘날의 중구 예장동․주자동에서 충무로 1․2․3가, 명동에 이르는 지역을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일대의 일본인 시가지는 점차 그 모습을 달리해 갔으며, 진고개와 명동은 서울의 새로운 상거래의 핵 기능을 하게 되었다. 도성 내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성 밖으로 밀려나거나 낙향해 버리는 과정에서 한·일인 주민들의 교체가 일어남으로써 도심부는 일본인의 독거지화가 되었다. 이 결과 청계천변을 중심으로 마침내 일본인의 거주구역은 남촌과 한인 거주구역이 북촌으로 구분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도성내의 남촌․북촌과는 그 뉘앙스도 내용도 다른 새로운 남․북촌이 형성된 것이다.
일제 때의 한글로 발표된 신문, 잡지들을 보면 남촌이니 북촌이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온다. 잡지 『개벽(開闢)』에는 「형제여, 남촌의 시설은 저러하거늘 북촌의 시설은 왜 이 모양입니까」라는 글이 실려 있고, 남촌의 일인촌(日人村), 남촌시가의 극성(極盛), 몰락된 북촌의 참상(慘狀) 등의 글귀가 눈에 뜨인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왜놈들 마을」이라고 한 것을 남촌이라고 표현하였고, 그에 대해 자기들의 거주 지역을 북촌이라는 말을 썼다.
남부의 명철방(明哲坊), 즉 오늘날 동대문운동장 근처에는 훈련원(訓練院)이 위치하여 배오개[梨峴], 광희문, 왕십리 근처에는 군교(軍校)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과 그 가족만으로 따로 장용영계(壯勇營契)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조선말에 청국상인들은 수표교 남북쪽, 현재 중구 수표동과 종로구 관수동 일대에 본거를 잡고 서울의 상권(商圈)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청국상인과 한국상인간의 잦은 분규로 감정이 격화되면서 청국인들은 신변 위협을 느끼게 되자 진수당(陳樹棠)이 1885년초에 수표교변을 「청국인 거류구역」으로 정하고 당시 외무독판 김윤식(金允植)과 이를 협의하여 내약(內約)하였다. 청국상인들은 산동계는 현재 수표교 부근에 북방회관(北幇會館), 절강계는 현재 서소문 육교 부근에 남방회관(南幇會館), 광동계는 소공동에 광동회관(廣東會館)을 각각 세워서 그들 상호간에 정보교환·친목 등을 도모하였다.
(2) 청계천변의 관아와 문화시설
청계천변은 혜민국·사자청·도화서·장악원·군기시 등의 관아가 위치하여 청진동, 장교, 수표교 부근에는 낮은 계급의 관리들이 거주함으로써 아전(衙前), 중인(中人)이라는 칭호가 유래되었다. 그들은 이 일대를 스스로 위항(委巷)·여항(閭巷)이라고 칭했다.
수하동 64번지에는 조선시대에 그림을 가르치고․고시(考試)․제조․보관 등에 관한 일체의 일을 맡은 관아인 도화서(圖畵署)가 있었다. 원래 중부 견평방에 있었다가 이곳으로 옮긴 도화서는 역대 왕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태조 때 처음 설치되어 처음에는 도화원(圖畵院)이라 하다가 도화서로 개칭되었다.
조선말에 지은 『한경지략』에 「도화서는 중부 견평방에 있는데 조선 초에는 도화원을 두었다가 뒤에 서(署)로 고치고, 그림 그리는 일을 장악하였다. 화원은 모두 30명인데 전자관(篆字官) 2 명은 젊은이 중에 총민한 인재를 뽑아서 예조의 당상관이 출제하여 고시(考試)하고, 연말에 점수를 많이 받은 자를 병조에 추천해서 1년 기한으로 녹봉을 주게 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도화서 화원의 선발규정에 대하여 「대나무․산수․인물․조수(鳥獸)․화초 중에서 두 가지에 대해 시재(試才)하되 대나무를 1등, 산수를 2등, 인물․조수를 3등, 화초를 4등으로 하며, 화초의 그림에서 통(通)의 성적을 받으면 2분(分), 약(略)을 받으면 1분의 점수를 주고, 인물․조수화 이상은 차례로 등급을 올려서 각각 그 성격에 따른 점수를 보탬과 같이 한다」라고 하여, 도화서 화원은 특히 사군자와 산수화에 능한 사람이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삼각동과 남대문로 1가에 걸친 전 조흥은행 본점 뒤쪽은 조선시대 사자청(寫字廳)이 있어서 사자청동이라고 했다. 사자청은 규장각과 승문원(承文院)에 속한 관아로 외교문서와 자문(咨文) 등의 문서를 정서(正書)하던 사자관(寫字官)들이 근무하였다. 이들은 대개 중인 중에서 품행이 방정하고, 사학(寫學)에 능한 사람들이어서 규장각에 8 명, 승문원에 40 명이 소속되었는데 외국사신 사행(使行)에도 수행하였고, 사대교린 문서를 관장하였다.
주교동 126번지 북쪽에는 주교사(舟橋司)가 위치하여 이 부근의 청계천 다리를 주교(舟橋)라고 불리었다. 주교사는 조선후기 정조 13년 (1789)에 설치된 관아였다. 정조는 장조(莊祖)가 묻혀있는 수원으로 자주 참배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게 될 때 어가의 안전을 위해 한강에 주교 가설을 전담하는 주교사를 설치하였다. 정조가 1790년 친히 제정한 주교지남(舟橋指南)과 1793년에 정해진 주교사절목(舟橋司節目)에는 주교를 가설할 때 배가 290 척이 동원되었다. 주교는 봄·가을에 따라 다르나 연초인 1, 2월 혹은 8월에 가설되지만 대개 춘행(春行)이 많았으므로 주교 가설에 동원되는 주교선들은 겨울을 한강에서 지내고, 1, 2월에 주교의 역(役)을 마친 후 각자 조운(漕運)에 종사하게 되어 있었다. 동원된 선척은 충청도의 조운선과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강화도에 비치한 훈련도감 대변선 등 관선(官船)이었지만 점차 인근의 사선(私船)도 징발하였다.
훈련원은 중구 을지로 6가와 방산동에 걸쳐 있던 조선시대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훈련 및 병서(兵書)·전진(戰陣)의 강습을 맡았던 관아였다. 1917년 6월까지도 훈련원(訓練院)이라고 쓴 현판이 기와집에 달려있었는데 이곳에 초등학교를 신축하면서 기와집은 간호부양성소의 건물로 고쳐졌다.
조선 건국 초에는 훈련관(訓練館)이라고 했으나 세조 12년(1466)에 훈련원으로 바뀌었다. 훈련원에서는 중요한 업무의 하나인 무과(武科)시험을 주관하는데 서울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70 명과 각 도에서 뽑힌 120 명을 합한 190 명을 병조(兵曹)와 함께 복시(覆試)를 치러 28 명을 선발하고, 최종적으로 전시(殿試)를 보아 등수를 정하였다.
훈련원의 일화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 별과(別科)시험을 볼 때 말을 달리다 실수하여 낙마하여 왼쪽 다리의 골절상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다리를 나무껍질로 묶은 다음 말을 다시 타고 달려서 등과(登科)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말 1907년에 한일신협약의 체결로 훈련원이 폐지되고 군대해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해 8월 1일 모든 한국군을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집합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를 분개한 시위대대 제1대대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함에 장병들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인 무장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청계천변에 위치한 다동(茶洞)에는 조선시대에 궁중의 차례(茶禮)를 주관하던 사옹원에 속한 다방(茶房)이란 관아가 있었다. 다동이란 다방골이라 하던 것이 한자로 표기된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곳의 지형은 거북이 모양으로 옛날부터 전쟁 중에도 재해를 입거나 파괴, 화재 등이 일어난 적이 없으며 변란도 피해가는 지형이라고 한다. 조선말 고종 때 국가 행사로 진연(進宴)이 행해질 때 평양․진주․대구․해주에서 기생들이 서울로 뽑혀 와서 이 곳 다동에 모여 살았다.
1909년 관기(官妓)제도가 폐지되자 남도와 서도 기생들도 대거 상경하자 1913년에는 어느 백작이 서도 출신 기생을 모아 다동(茶洞)조합을 구성했는데 약 30명 정도의 기생들이 모였다. 이 무렵 서울과 남도 출신 기생들도 모여 광교(廣橋)기생조합을 구성하였는데, 다동조합에는 소홍(小紅)을 비롯하여 춘도(春桃)·명옥(明玉) 등 명기들이 모였으며, 1914년부터는 다동권번(茶洞卷番)으로 명칭이 바뀌어졌다. 1929년경에는 서울 안에 기생이 약 300 명이 있었는데 다동에만 60여 명이 있었다. 다동조합의 기생들은 「수심가」「놀량사거리」「난봉가」 등의 시조와 가사에도 능해 장안에서도 이름을 날렸으므로 ‘다방골 기생’이라는 애칭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 당시 기생들은 밤늦도록 술시중을 하며 주연에 참석했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실컷 잠을 잤고 종로 육의전에 가게를 가진 상인들도 밤늦도록 장사를 하고 돌아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잤기 때문에 아침 늦게까지 자는 것을 ‘다방골 잠’이라고 불렀다. 예부터 다동에는 일부러 허름하게 꾸민 대문과는 달리 집안에 들어서면 화려하게 장식한 알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광교가 놓였던 전 조흥은행 본점 남쪽에는 1897년에 고유상(高裕相)이 자본금 15만 원을 들여 설립한 회동서관(滙東書館)이 있었다. 회동서관은 신소설, 사전, 실용서 등의 출판과 판매를 겸하였으며, 서적 외에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용품 등도 함께 취급하였다.
현재 중구 삼각동 7-1번지 사법서사회 부근에는 최남선·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 등이 1910년에 한국 고문헌의 보존과 보급, 고전 문화의 선양(宣揚)을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있었다. 경술국치 후 일제가 조선에서 해마다 진귀한 서적과 국보급 문화재를 반출해 가자 이에 충격을 받은 최남선 등이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여, 『동국통감』 등 17 종의 조선 고전총서를 발행하였다. 이 단체는 귀중문서의 수집·편찬·개간을 통한 보존, 전파를 위하여 고문헌을 최단 시일에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여 인쇄하고, 가입회원에게는 실비로 배포하였다.
이에 따라 제1차로 역사책인 동국통감 · 동사강목 · 삼국사기 · 삼국유사 · 발해고, 지리책으로서 택리지 · 산수경, 민속책으로 동국세시기, 국어학책의 훈몽자회 · 아언각비, 고전책으로 용비어천가 · 산림경제 · 지봉유설 · 성호사설 · 열하일기, 문집류로서 율곡전서 · 이충무공전서 등을 간행하여 일제강점기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3) 청계천변의 상인 활동
19세기 말경 서울에 왔던 미국인 에드먼드 공군하사는 기행문에서
길가의 가게와 집들은 거의 서로 붙어 있는 단층집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그림 같은 가게에서 물건을 흥정하고 있었다. 가게들은 거의 좁아서 주인들도 그 속에 들어가 앉을 수 없었다. 따라서 주인들은 밖에 놓은 작은 마루에 쭈그리고 앉아서 가게 앞 작은 터전에 서 있는 손님을 접대하였다.
물건은 가게 속 시렁 위에 쌓여 있었는데 손님이 필요한 것을 말하면 주인은 팔을 벌려 이를 꺼내왔다. 두 손이 어떻게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아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품은 매우 종류가 다양하고 풍부하였다.”
그에 이어 러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05년 스웨덴 신문기자 A.S.그렙스트가 서울에 들어왔다. 그렙스트는 그의 견문담을 코레아 코레아라는 책에 실었다. 이 책에는 서울의 거리와 가게 모습을 상세히 써놓았다.
그는 서울의 거리를 단조롭다고 느끼고 상점은 도시의 몇 구역에만 따로 위치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가게는 두 종류로 나누어 개방적인 가게와 폐쇄적인 가게가 있다고 하였다.
개방적인 가게는 일본의 가게를 연상케 하는데, 길옆에 생활필수품을 진열해 놓아 행인이 언제든지 걸음을 멈추고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고를 수 있다.”
고 하고 진열된 상품들을 열거해 놓았는데 그 중에는 놋쇠로 만든 번쩍번쩍 빛나는 물건 외에 중국과 일본상품, 골동품 등을 보았다고 써 놓았다.
다음에 폐쇄적인 가게는 무명, 비단, 신발 등을 파는 대상인의 가게로 규정하였다.
만약 고객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옷감 한 벌 끊으러 왔소이다.”
하고 말하면 가게주인은 고객이 주문한 물건을 창고에서 꺼내 와 가게 안의 고객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절대로 모든 재고품의 견본을 보여주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고객이 혹시
이것보다 다른 것은 없소.”
하면 주인은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은 없습니다.”
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다.
가게주인들은 물건을 파는데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고객들은 상인들에게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정확히 이야기해야 한다. 가격은 깎을 수 있을지언정 물건에 대한 좋고 나쁜 것은 금기(禁忌)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그렙스트는 서울의 가게주인들은 간판을 걸지 않는 대신 큰 점포에서는 예외 없이 몇 사람의 종업원을 둔다고 하였다. 이들은 고객이 가게 앞을 지나려면,
손님, 무얼 찾으십니까. 우리 가게에 들어와 보십시오. 아주 싸게 팝니다.”
라고 열심히 선전하여 손님을 유치한다는 것이다.
청계천 2, 3가나 관수동 지역에 있었던 상인들은 자기 소유의 가게, 전방(廛房)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이 상인들은 서울 도성 안에 들어가는 길목인 동대문 배오개시장이나 남대문 근처 칠패시장을 지키고 있다가 물건을 헐값에 팔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거절하면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빌미로 난전(亂廛)이라고 뒤집어 씌워 물건을 빼앗는 행패를 부렸으므로 길목에는 울음소리가 잦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자기 가게가 없는 상인은 거간꾼 노릇을 하면서 점포상인의 이익에 더 붙여서 먹는 ‘여리꾼’이 있었다. 이들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하여 옷감을 사려고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얼른 다가가서는 말을 붙인 다음 꾀어서 자기가 아는 가게에 안내하고는 물건을 싸게 흥정하는 척 하면서 자기 몫을 챙겼다. 이들은 그들만의 파자(破字)에 의한 암호가 있었는데 이를 ‘변어’라고 하였다.
청계천변의 지금의 무교동 지역에는 국수집이 많아 국숫골[麵洞], 팥죽을 쑤어 팔던 두죽동(豆粥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었다. 현재도 이곳에 대중음식점이 밀집되어 있는 것은 옛날 전통을 이어온 것이 아닐까?
무교동과 종로구 서린동 사이에는 모전교(毛廛橋)가 놓여있는데 이 다리 이름은 토산 과일을 팔던 모전(毛廛)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 졌다.
남대문로1가와 수하동 일대를 흐르는 남산동천수(南山洞川水), 청계천 지천 변에는 각종 돗자리를 전문으로 매매하는 자리전이 위치하여 한자명으로 석동(席洞)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는 강화도 화문석뿐만 아니라 광희문 밖에서 만든 짚자리와 짚방석까지도 취급하였다. 조선시대에 자리는 생활필수품이었으므로 이곳 자리전 상인들의 세력은 종로 시전 못지않게 컸다.
장통교 부근 장교동·관철동에는 갓전, 관자전(貫子廛), 소금전, 신전 등을 비롯하여 모자·양털·청포전(靑布廛)·모시전 등이 있어서 많은 상인들과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입정동과 수표동에 걸쳐서는 갓[笠]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 그 부근에는 갓전이 있었다. 이리하여 갓전동네, 갓동네, 갓동이라고 하다가 갑동(甲洞)이라고 변음 되었다. 장교동·수표동·을지로2가에 걸쳐서는 대나무와 대그릇을 파는 죽전(竹廛)이 있어서 대전골, 또는 죽동(竹洞)이라 하였다.
청계천 양편 공터에는 나무시장이 섰었다. 조선시대의 서울 거리에는 연료로 쓰이는 숯과 장작을 파는 시장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특히 숯을 팔고 사는 경우에는 검은 가루가 널리어 도시미관을 해치고, 장작을 부려 놓은 곳은 도로를 가로막아 시민들의 왕래에 큰 불편을 주었다. 조선말에 한성부는 시탄(柴炭)시장을 지정하여 경계를 획정한 다음 다른 지역에서는 사고팔지 못하게 하도록 경무청(警務廳)에 요청하였다.
조선시대 청계천변 을지로 6가의 훈련원 주변에는 넓은 공지가 있어서 농사를 많이 지었으므로, 동대문 밖에는 큰 채소시장이 서게 되었다.
(4) 청계천의 이용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 계곡의 청계천 상류와 지천(支川)의 물은 맑았으므로 새벽이면 물장수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에는 면포를 바래서 표백(漂白)하는 사람들과 제지(製紙)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살았다. 청계천 본류는 오염되어 세탁이나 허드렛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지만 마장동 동쪽의 하류 지역은 채소 등을 재배하는 관계로 농업용수로 사용되었다.
동대문 배오개시장의 야채상인들은 오간수문 부근에서 야채를 씻어서 내다 팔았다. 그러나 일제 때는 전염병 예방을 위해 이를 금하였다. 1935년에 서울에서만 1,700여 명의 전염병환자가 발생하자 이 해 9월에 동대문경찰서는 청계천에서 야채를 씻는 상인 150여 명을 검거하였다. 이듬해 경성부는 소독한 청계천에서만 야채를 씻는 곳으로 지정하였고, 이어서 동대문경찰서는 전염병 예방을 위해 청계천변에서의 야채 재배를 금지하여 신설동·신당동·왕십리지역 주민 수천 명의 생계가 막막하게 되었다.
청계천 물줄기 양쪽에는 빨래터가 있었다. 여름철에 청계천 물이 흘러내리면 인근의 여인들은 빨래 감을 들고 몰려와 세탁을 하였고, 가난하여 주인의 행랑채에 살면서 숙식을 제공받고 일을 해주는 ‘드난살이’ 빨래꾼들은 청계천을 작업장으로 사용하였다. 이 당시 두 줄로 늘어선 버드나무 아래로 푸른빛 장옷을 쓰고 흰 빨래를 이고 걸어가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4. 청계천변의 문화
(1) 민속놀이
조선시대에 청계천은 도성 사람들의 음용수, 빨래터, 물놀이 장소로 이용되었지만 청계천변에서의 민속놀이도 이어져 왔다. 우선 정월대보름에 다리를 밟는 답교(踏橋)놀이와 연날리기, 편싸움, 6월 유두의 머리감기, 쥐불놀이 외에 4월 초파일 연등놀이가 성행하였다.
< 답교놀이 > 광교는 수표교, 소광교와 같이 정월대보름이면 서울의 많은 남녀가 이곳에 모여 답교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이 답교놀이는 중국의 연경(燕京)의 풍속으로 조선전기 중종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씌어있다. 정월대보름날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으므로 서울의 여인들은 종각에서 치는 인정 소리에 맞춰 이 다리로 몰려들었다. 이날 12 개 다리를 지나다니면 그 해 12 달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고 액(厄)도 면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보름날 밤 답교놀이는 고려조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되어있다. 태평할 때에는 매우 성하여 남녀들이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으므로 법관들이 금해서 체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 다리를 밟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유득공(柳得恭)이 기술한 『경도잡지(京都雜誌)』를 보면 고려 때에도 있었던 답교놀이는 서울지방, 특히 광교와 수표교에서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고, 다리를 밟으면 사람의 다리에 병이 나지 않고 1 년 동안의 액막이를 한다는 주술적 속신(俗信)이 이 놀이에 담겨져 있었다. 이 놀이가 한창 성행했을 때의 모습은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풍속편 답교조(踏橋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정월 대보름날 밤의 놀이 중 성행되었던 것은 연등놀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특히 태종 이후에는 연등놀이 대신 다리 밟기가 이 날 밤에 성행하였는데 특히 서울에서 더 했다. 장안의 남녀들이 종가로 모여들어 보신각의 저녁 종소리를 듣고 나서 각 곳에 있는 다리로 흩어져 가서 밤새도록 다리 위를 왔다 갔다 하였다. 서로들 어깨와 허리가 부딪힐 정도로 붐비면서 날라리와 장구를 울리고 시를 읊기도 하며 물에 비친 달을 보며 1 년 동안에 좋은 일이 있길 빌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서민들이 붐비는 15일 밤을 피하여 그 전 날인 14일 밤에 다리 밟기를 하였다. 이를 가리켜 ‘양반답교’라 하였다. 부녀자들은 14 · 15일을 피하여 16일 밤에 행하였다. 조선 중엽 이후에는 부녀자의 문 밖 출입을 심하게 단속했으므로 부녀자들의 다리 밟기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고 하였다.
< 연날리기 > 음력 1월 14일 저녁때가 되면 청계천에서 연을 날렸다. 이른바 ‘액막이 연’이다. 명종 때 ‘액막이 연’이 궁중 안으로 떨어져 궁중에서 여러 가지 불상사가 일어나자 연날리기를 금지시켰고, 그 후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연날리기도 거의 없어졌다. 이것이 영조·정조 때에 다시 부활되어 지연(紙鳶)을 날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때는 남산 아래에서 날리지 않고, 청계천의 양쪽 언덕에서 날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연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연과 연이 서로 어울려가며 싸웠다.
정월 대보름 전 2~3일은 이 수표교를 중심으로 청계천 아래 위에서 연날리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이 때 어린아이는 연을 바람부는 방향으로 날리면서 ‘고고매(苦苦妹)’라고 불렀다. 고고매는 몽고말로 봉황이라는 뜻이다.
< 편싸움 > 두 편의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돌을 던져가며 편싸움을 하는 이 놀이는 석전(石戰), 또는 편전(便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남성적이고 전투적인 이 놀이는 주로 개천이나 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두 편 마을사람들이 서로 돌맹이를 던지며 싸우다가 맞붙어 이른바 백병전을 벌이는 것인데 청계천 하류 양쪽 가산(假山) 일대에는 정월이면 어린이들의 편싸움이 벌어졌다.
< 유두(流頭)의 머리감기 >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음력 6월 15일 유두날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빗는다. 이 풍속은 신라 때 시작되어 고려 때에도 성행하여 이 날이 되면 궁중의 환관들이 짝을 지어 동천(東川)으로 나가 피서도 하며, 머리의 때를 씻었다. 조선시대 도성 사람들은 이 날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하므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찾아 나갔다. 목욕하고 머리를 감으면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으므로 서울의 청계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유두의 머리감기 장소로서는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 쥐불놀이 > 원래 농촌에서 정월 첫 쥐날(上子日)에 쥐를 쫓기 위하여 논 밭둑에 불을 놓는 놀이로 짚을 놓고 해가 지면 일제히 불을 놓아 잡초를 태웠다. 이 쥐불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 해의 풍흉(豊凶), 또는 그 마을의 길흉을 점쳤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횃불놀이를 겸하여 쥐불놀이로 청계천 양안의 밤을 아름답게 밝혔다.
< 4월 초파일 연등놀이 > 정월 대보름날 밤의 놀이 중 성행되었던 것은 연등놀이다. 그러나 조선 초 특히 태종 이후에는 연등놀이 대신 다리밟기가 이 날 밤에 성행하였다. 4월 초파일에 연등놀이의 하나로 무언 인형극인 만석중놀이를 놀았는데 만석중과 노루·사슴·잉어·용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놀이는 현재 전승되지 않는데 그림자 인형놀이인 영회극(影繪劇)과 유사했던 듯 하다.
(2) 세시풍속
조선시대 무과(武科)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선임자가 얼굴에 그림 뿐 아니라 온갖 욕을 다 썼으며, 다리가 부러진 예도 있었다. 그 밖에도 개천에 밀어 넣어 옷을 다 젖게 만드는 등의 갖가지 횡포는 신랑을 매어달아 놓고 발바닥을 때리거나 그 밖에 기합을 주는 악습과 더불어 없어져야 할 폐습이라고 개탄하였다.
수표교 남쪽에는 조선 역대 국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있으므로 국왕이 참배하는 일이 자주 있어서 청계천 양안의 주민들은 국왕의 거둥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 숙종이 영희전에 거둥하던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이 부근에 살던 장희빈을 우연히 보게 되자 그 미모를 잊지 못해 궁중에 들이게 하였다는 고사(古事)가 전해온다.
1월 14일 밤에 그 해의 신수가 나쁜 사람은 적선(積善)을 해야만 액(厄)을 면할 수 있다고 하여 개천, 청계천에 다리를 놓거나 유두돌을 놓는 일이 있다. 즉 액을 면하는 방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사람의 왕래가 많으나 다리가 없어 불편한 곳을 찾아 여기에 남몰래 다리를 놓는 것이다. 다리를 놓을 형편이 못되면 가마니나 섬·오쟁이에 돌을 가득 담아 띄엄띄엄 놓아 사람들이 밟고 가기에 좋게 한다. 이렇게 하면 다리를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당년의 액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유두를 놓을 때에는 섬 속에 돈을 넣어두는 일도 있다. 그러면 지나가는 행인이나 아이들이 주워가기 마련이니 그것도 적선의 하나로 여겨왔다. 이렇게 하는 것을 ‘월강공덕(越江功德)’이라고 하였다.
1월 14일 밤에 직성(直星)이 든 사람이 있는 가정에서는 제웅을 만들어 거리나 개천에 버린다. 직성이란 액년(厄年)이 든 것을 말하는데 남자는 11, 20, 29, 38, 47, 56세이고 여자는 10, 19, 28, 37, 46, 55세에 해당한다.
(3) 청계천 교량의 이용
청계천 위에 놓인 다리들은 여가 공간으로도 쓰였다. 조선 후기에 한글 소설책 읽기로 유명한 전기수(傳奇叟 :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노인)는 청계천 다리 위에 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설책을 읽어주는 이야기꾼들이 있었는데, 전기수는 동대문에서 종루 사이를 6일 간격으로 오르내리면서 청중에 둘러싸여 매일 소설을 구연(口演)하였다. 그가 소설을 읽다가 아주 긴박한 대목에서 읽기를 뚝 그치면 청중은 다음 부분이 궁금하여 다투어 돈을 던졌다고 한다. 또 역관 임희지(林熙之)는 눈 내리는 날이면 청계천 다리에서 생(笙)이란 악기를 불기도 하였다.
서울은 서울성곽이 쌓아진 내사산(內四山)에서 물이 흘러 동서로 흐르는 청계천에 합류되는데 조선시대에는 각 지천(支川)마다 도로와 교차하는 지점에 다리가 놓여졌다.
도성 안의 청계천 교량으로 처음 이름이 보이는 것은 통의동 부근의 조선 초 태조 5년(1396) 2월의 금천교(錦川橋)이다. 태종 10년(1410) 2월에는 혜정교(惠政橋)와 광통교(廣通橋) 이름이 나타나는데 이해 8월에 돌다리로 놓여졌다. 이 당시 의정부(議政府)에서 “광통교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하고 건의하니,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광통교가 도성 안의 교량 중에서는 최초의 돌다리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태종 12년(1412)에 실시된 제1차 개천공사 때는 대광통교 · 소광통교 · 혜정교 · 모전교(毛廛橋) 등의 교량 등 5 개를 석교로 놓았다. 청계천의 교량은 성종 때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장통교 · 수표교 · 신교(新橋) · 영풍교(永豊橋) · 대평교(大平橋) 등의 이름이 보이므로 성종 때에 이르러서 모든 교량 이름이 정해진 것 같다.
조선 후기 순조 때에 저술된 『한경지략(漢京識略)』 권2 교량조와 고종 때에 저술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권2 개천조에는 앞의 교량 이외에도 도성 안의 많은 다리가 소개되고 있다.
중구청 관내의 청계천 지류는 남산 밑의 창동천수(倉洞川水)가 북쪽으로 흘러 수각교 · 전도감교를 거쳐 소광통교로 흐르고, 남산동천수(南山洞川水)는 동현교를 거쳐 장통교에 이른다. 남산 밑 주자아천수(鑄字衙川水)도 북쪽으로 흘러 주자교를 거쳐 하량교(河良橋)에 흘러 들어간다. 필동천수(筆洞川水)는 필동교를 거쳐 영풍교로, 묵사동천수가 북쪽으로 흘러 무침교(無沈橋), 청녕교(靑寧橋)를 거쳐 이교(圯橋)에, 쌍리동천수(雙里洞川水)도 북쪽으로 흘러가면서 어청교를 거쳐 마전교에 각각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청계천 지천(支川)의 교량은 조선 초에 나무 다리였다가 차츰 돌다리로 바뀌어 갔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에 모두 24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수표교․관수교․오간수교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전일 조흥은행 본점 앞에는 광통교(또는 대광교, 광교)가 놓여 있었으나 현재는 청계천 복원 공사 후 서쪽에 옮겨져 있다. 광통교란 이름은 전일에 이곳을 광통방(廣通坊)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광교는 휴전 직후인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청계천 복개 때 자취를 감췄지만 조선시대에는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알려져 있다.
조선 초 태종~성종 때 청계천의 수표교는 장안의 명물로서 1959년까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중구 수표동 43번지 사이에 있었고, 홍수의 조절을 위한 수량(水量)을 재는 역할도 하였던 중요한 다리였다. 이 다리는 원래 마전교(馬廛橋)로 불리었다. 한양 천도 후 이 곳 부근에 소와 말을 팔고 사던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서 마전교라고 하다가 세종 23년(1441)에 홍수 때를 대비하여 청계천 수위(水位)를 재기 위한 두개로 된 부석(趺石) 위에 칫수를 새겨 놓은 나무 기둥을 끼워 세운 목제(木製) 수표(水標)를 세운 뒤로부터 수표교로 고쳐 불리었다.
1957년부터 서울시가 청계천 복개 공사를 하게 되면서 수표교는 훼손할 수 없다는 여론에 부응하여 일시 신영동 세검정 앞으로 이전하였다가 1965년에 현재 장충동공원으로 다시 옮겨 놓았으며,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이 당시 수표교 서쪽에 세워졌던 수표석(水標石 : 보물 제838호)은 영조 36년(1760)에 재건된 것으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겼다가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청계천의 여러 다리 중 수표교는 국왕의 거둥행차가 자주 있었다. 현재 저동2가 중부경찰서가 위치한 곳에는 태조 등 여러 왕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있어서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 납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거둥하였다. 조선 후기 숙종이 영희전 거둥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면서 수표교 북쪽 도로변의 어느 집 창에 걸었던 발이 떨어졌다고 한다. 마침 그 창에서 밖을 내다보던 여인이 숙종의 눈에 띄게 되어 궁중으로 들이게 한 이가 장희빈(張禧嬪)이라고 한다.
수표교는 조선 초 중종 때부터 정월 대보름날 밤에 서울시민들이 다리밟기(踏橋)를 하던 대표적인 다리였다. 즉 이 날 12 개 다리를 밟으면 12달 내내 재앙을 막고 각기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어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리를 밟았는데 이 날은 통행금지마저 해제되어 늦게까지 사람들이 붐비었다. 이에 남녀 풍기가 문란하다고 하여 명종은 한 때 답교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선조 때 갓 장가든 동악 이안눌(李安訥)이 답교놀이에 어울렸다가 술이 너무 취해 수표교 부근에 쓰러져 있었는데 다른 집 신랑을 찾으러 나온 신부집 하인들이 착각하여 이안눌을 신방(新房)에 뉘었던 일화가 있다.
또한 정월 대보름날 전 2~3일에는 수표교를 중심한 청계천 아래 위에서 연싸움이 벌어져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싸움하는 날이면 서울 시전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일제 때까지도 수표교 밑에서는 여름 장마철에 벌거숭이 소년들이 횃불을 들고 물놀이를 겸한 송사리잡기로 유명하였다. 1941년 최인규 감독이 제작한 「집없는 천사」는 이 다리 밑에 사는 걸인 아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또한 소광교~삼각동·수하동에 걸쳐있는 굽은다리[曲橋]는 이 부근의 명물이었는데 홀아비 도깨비가 붙어있어서 밤이 되면 이 다리를 지나는 부인들을 떨어트리곤 하였다.
5. 청계천변에 살았던 사람들
조선 초부터 개화기까지 고위 관리나 돈 많은 양반 집의 대문은 솟을대문이었다. 이들은 나들이에 초헌(軺軒)이란 외바퀴 수레를 타고 다녔는데 높은 초헌을 탄 채로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면 솟을대문이어야 가능하였으므로 이 대문은 바로 재상의 집을 상징하였다. 갑오개혁의 실시로 양반과 상민의 신분제도가 철폐되자 조선 초부터 실시되어 오던 가사규제(家舍規制)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 당시 현재 관철동의 부유한 중인들은 그들의 주택을 칸수의 제한 없이 상류주택의 규모 못지않게 건축하고, 종래의 평대문(平大門) 대신 양반집의 상징이던 솟을대문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문골, 삼청동, 사직골로 번져 나갔다. 이러한 사태가 점점 확산되어 가자 오히려 양반집에서는 솟을대문을 헐고, 평대문으로 개조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뿐 아니라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앞장 서 온 중인들은 유교사회의 상징인 사당(祠堂)을 없애고, 그 공간을 목욕탕으로 개축하기도 하였다. 얼마 전까지 무교동 89번지에는 1860년에 지은 250여 평의 중인 주택이 있었다. 이 집은 안채 50여 평, 사랑채 40여 평의 팔작지붕의 5량(樑)집이었다.
수표동․입정동․을지로3가에 걸쳐서 있는 시궁골 마을에는 영조 때 삼연 김창흡(金昌翕)이 친구를 모아 풍류를 즐기면서 시와 거문고[詩琴]를 연주하였으므로 시금골, 시궁골이라 하다가 시금동(詩琴洞), 시동(詩洞)이라 하였다.
수하동의 청계천변에는 조선시대 광해군 때 실학자 이수광(李晬光)의 집인 대은암(大隱庵)이 있어 유명하였다. 이 집은 조선초에 직제학 김맹헌(金孟獻)이 지은 것으로 이수광은 이 고옥의 내부를 수리하여 대은암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그 아들인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 : 1589~1670)가 다시 집을 지어 그 규모를 크게 하였다. 말년에 이 집을 외손인 신필화(申弼華)에게 물려주었다. 신필화 역시 문장에 뛰어났던 사람으로 이수광을 비롯하여 역대의 소유주가 모두 조선시대의 대문장가로 알려졌기 때문에 대은암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은암은 청계천변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았을 것인데 『한경지략(漢京識略)』 등 조선 후기에 발간된 기록에는 대은암이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이는 개항 이후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양안(兩岸)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상업지구로 발전하기 시작함에 따라 이름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던 청계천이 탁류로 변하였고, 부근의 자연경관도 훼손되어 대은암까지 황폐되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표교 부근에는 서학을 연구하던 이벽(李蘗 : 1754~1786)이 서양 문물과 사상에 눈을 뜨게 되어 1784년에 조선천주교회를 세웠다. 이벽은 이승훈을 통해 천주교 관계서적을 읽고 영세(領洗)를 받아 선교에 투신했다. 그러나 천주교가 탄압받게 되자 그를 설득하지 못한 부친 이보만(李溥萬)이 자결하자 1785년 천주교와 결별했다. 그러나 이듬해 페스트에 걸려 죽음에 이르자 이벽은 천주교의 배교행위(背敎行爲)를 뉘우치며 눈을 감았다.
수하동과 삼각동에 걸쳐있던 보습곶이[犁洞]에는 조선말 개화사상의 선구적 인물인 오경석(吳慶錫 : 1831~1879)이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보습곶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곳 지형이 농기구의 보습(犁)과 같아 붙여진 것으로 웃보습곶이(上犁洞), 아래보습곶이(下犁洞)가 있었다. 오경석은 수표동에서 아래보습곶이, 즉 수하동 11번지(중소기업은행 본점 뒤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는 중인 출신의 역관(譯官)으로 중국어와 서화 및 박제가(朴齊家)의 실학을 공부하고, 13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등을 구입해 왔다. 재동의 박규수 집 사랑방에서 1870년 초부터 김옥균․박영효․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 양반자제에게 개화사상을 가르쳐 1874년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형성되었다. 1877년 숭록대부의 직함을 받았으나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화(書畵) 수집에 취미를 가져 중국과 국내에서 희귀한 서화를 수집하였으며, 그의 매화 그림은 뛰어났다.
서울의 수표교, 광교와 장교 중간쯤에는 가느다란 나무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면 지금의 보신각 부근 관철동에 이르는 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옆에는 허술한 초막집들이 많았다. 이곳에는 청포(靑布)·갓·신발·철물 등을 파는 시전(市廛)들이 많은 곳이어서, 북촌 양반들은 체면이 깎인다 해서 잘 들르려 하지 않았다. 이른바 중인촌(中人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전 거리에 귀인(貴人)인 부마(駙馬)의 행차가 잦았다. 그야말로 볼만한 행차였다. 게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부마가 말을 내려 공손한 몸가짐으로 한 초막집 문턱을 넘나드는 일이었다. 광통방(廣通坊)의 시전 거리에 귀인이 나타나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일개 중인(中人)집 문 앞에서 말을 내린 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귀인은 철종의 부마 박영효(朴泳孝)의 행차였다.
뿐만 아니라 고종이 한 사람의 말만 믿는다고 소문이 난 참의(參議) 김옥균도 역시 말을 내려 예를 갖추어 이 초막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승지(承旨) 서광범, 청나라 원세개의 역관 오경석(吳慶錫) 등도 역시 같은 행차, 같은 공손을 3 일이 멀다 하고 서로 다투다시피 하였다.
이 집에는 봉면(蓬面)의 거사, 대치(大致) 유홍기(劉洪基)가 살고 있었다. 유대치는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갑신정변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선도(禪道)에서 불심(佛心)의 현대화를 시도하여 사회개혁론으로까지 그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사회개혁론을 구체화하기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 바로 김옥균·박영효 등이었다.
그들은 갑신정변 쿠데타 전날 밤에 광통방의 유대치를 찾아갔다. 이미 노경(老境)에 들어선 대치 거사는 “군(君) 등은 과연 일본 정략을 아는가?”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이었다. 유대치는 다시 “일본군 100 명이 3,000 명의 청나라 군대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그들의 거사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 시간을 미룰 수 없다고 김옥균이 말하고 인사를 고하자, 유대치는 눈 밑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는 “불교숭신(佛敎崇信)으로 일하라”고 타이른 뒤 자리를 고쳐 돌아앉았다.
갑신정변이 일어나 ‘3일천하’가 되자 대치 거사는 그 귀추를 지레 짐작했는지 표연히 집을 나가 자취를 감추자 사람들이 행방을 찾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오대산 상원암 인근에서 토와생식(土臥生食)하고 살았다는 한 노선사(老禪師)가 바로 바로 그 유대치가 아니었는지? 아니면 용문산 중턱의 암굴에 좌선(坐禪) 자세로 죽은 노선사가 바로 그 유대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구구한 소문만 나돌았다.
장교동 63-1번지에는 조선말에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이 살았다. 이 집은 건평 약 61 평으로 원래 박준혁의 소유였는데 1890년 무렵 한성부판윤을 지낼 때 한규설이 살았다. 한규설(?~1930)은 무과에 급제한 후 형조와 공조판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포도대장․장위사(壯衛使)․의정부찬성을 역임하였고, 광무 9년(1905)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내각을 조직하였다. 동년 11월 17일 일본 전권대사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강제로 어전회의를 열어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 각 대신들에게 개별적으로 가부를 물을 때 한규설은 극구 반대하여 조약 체결 후 파직되었다. 후일 중추원고문․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정부에 의해 남작이 수여되었으나 거절하였다.
서울시에서 장교동 일대에 대한 재개발사업으로 이 집을 철거 위험에 있던 것을 김성곤(金成坤)의 부인 김미희(金美熙)가 정릉동의 국민대학교에 기증하여 학교 구내로 옮겨, 1980년 12월에 완공하였다. 지금은 명원민속관(茗園民俗館)으로 사용되고 있다. 장교동 한규설대감가(韓圭卨大監家 : 지방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이 집은 개량식 한옥이라는 새로운 추세에 따라 지은 절충식 건축으로 서양식 난방 시설을 하였다.
청계천변 을지로 6가에는 훈련원(訓練院)이 있어서 이 부근에는 군인들이 많이 살았다. 조선시대 에는 16 세~60 세까지 양인(良人) 남자는 군역의 의무를 담당하였는데 복무기간이 길었다. 군인들은 일정한 월급이 없었고, 군대에서 사용하는 복장이나 무기도 스스로 마련하는 등 군복무는 괴로운 의무로 간주되었다.
4. 나가는 말
조선시대 청계천 다리에서는 소설책을 읽어주는 이야기꾼들이 있었고, 역관 임희지(林熙之)는 눈 내리는 날이면 청계천 다리에서 생(笙)이란 악기를 불기도 한 것처럼 복개된 청계천이 옛 모습을 되찾은 차제에 청계천 문화의 부흥이 절실하다. 마침 서울시는 지난 10월 8일 ‘문화예술 창작지원 방안’으로 남산과 청계천 등 서울시내 주요지역에 문화예술인들의 창작 공간 및 공연연습장을 2008년까지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즉 도심권에는 남산 옛 안기부 청사에 창작 공간 및 공연연습장을 조성하고, 중구 입정동의 청계천 공구상가 일대에는 문학창작 공간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청계천은 600여 년간 도성 안을 지리적으로 구분하다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도로·교통·주거 외에 사회·경제·문화면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작용하여 서울의 남촌·북촌을 형성하였다. 지금의 청계천 2, 3가·광교·수하동 부근의 청계천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주로 역관, 의원 등 중인계층과 상인들이 많이 살았으므로 이곳을 ‘아래대’ 라고 불렀다. 이곳은 조선 500 년간 이들의 많은 애환과 세시풍속이 펼쳐진 곳이었다. 청계천의 좌우측, 오늘날 종로와 을지로의 1∼4가에 해당하는 지역 일대에 상가와 시장과 환락가로 이루어진 도심으로 상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청계천 일대의 관아로는 수하동 64번지에는 조선시대에 그림을 가르치고․고시(考試)․제조․보관 등에 관한 일체의 일을 맡은 관아인 도화서(圖畵署)가, 전 조흥은행 본점 뒤쪽에는 외교문서와 자문(咨文) 등의 문서를 정서(正書)하던 관아인 사자청(寫字廳)이, 주교동 126번지 북쪽에는 국왕이 한강을 건널 때 어가(御駕)의 안전을 위해 한강의 주교 가설을 전담하는 주교사(舟橋司)가, 중구 을지로 6가와 방산동에 걸쳐서는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훈련 및 병서(兵書)·전진(戰陣)의 강습을 맡았던 관아인 훈련원(訓練院)이, 다동(茶洞)에는 궁중의 차례(茶禮)를 주관하던 사옹원에 속한 다방(茶房)이란 관아가 이곳에 있었고, 조선말 1897년에는 전 조흥은행 본점 남쪽에 신소설, 사전, 실용서 등의 출판, 판매와 학용품 등도 함께 취급한 회동서관(滙東書館)이 있었으며, 중구 삼각동 7-1번지 사법서사회 부근에는 최남선·현채·박은식 등이 1910년에 한국 고문헌의 보존과 보급, 고전 문화의 선양(宣揚)을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있었다.
청계천변의 지금의 무교동 지역에는 국수집이 많아 국숫골[麵洞], 팥죽을 쑤어 팔던 두죽동(豆粥洞]이 있었고, 모전교(毛廛橋)가 놓인 곳은 토산 과일을 팔던 모전(毛廛)이 있었다. 남대문로1가와 수하동 일대를 흐르는 남산동천수(南山洞川水), 청계천 지천 변에는 각종 돗자리를 전문으로 매매하는 자리전[席廛]이 위치하여 한자명으로 석동(席洞)이라고 하였다. 장통교 부근 장교동·관철동에는 갓전, 관자전(貫子廛), 소금전, 신전 등을 비롯하여 모자·양털·청포전(靑布廛)·모시전 등이 있어서 많은 상인들과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입정동과 수표동에 걸쳐서는 갓[笠]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 그 부근에는 갓전이 있었다. 장교동·수표동·을지로2가에 걸쳐서는 대나무와 대그릇을 파는 죽전(竹廛)이 있어서 대전골, 또는 죽동(竹洞)이라 하였다. 그리고 청계천 양편 공터에는 나무시장이 섰었다.
조선시대에 청계천은 도성 사람들의 음용수, 빨래터, 물놀이 장소로 이용되었지만 청계천변에서의 민속놀이도 이어져 왔다. 우선 정월대보름에 다리를 밟는 답교(踏橋)놀이와 연날리기, 편싸움, 6월 유두의 머리감기, 쥐불놀이 외에 4월 초파일 연등놀이가 성행하였다.
수표동․입정동․을지로3가에 걸쳐서 있는 시궁골 마을에는 영조 때 삼연 김창흡(金昌翕)이 친구를 모아 풍류를 즐기면서 시와 거문고[詩琴]를 연주하였고, 수하동의 청계천변에는 조선시대 광해군 때 실학자 이수광(李晬光)의 집인 대은암(大隱庵)이 있어 유명하였다. 수표교 부근에는 서학을 연구하던 이벽(李蘗 : 1754~1786)이 서양 문물과 사상에 눈을 뜨게 되어 1784년에 조선천주교회를 세웠다. 수하동과 삼각동에 걸쳐있던 보습곶이[犁洞]에는 조선말 개화사상의 선구적 인물인 오경석(吳慶錫)이 살았다. 그는 중인 출신의 역관(譯官)으로 13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등을 구입해 오고, 재동의 박규수 집 사랑방에서 1870년 초부터 김옥균․박영효․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 양반자제에게 개화사상을 가르쳐 1874년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형성되었다. 장교동 63-1번지에는 조선말에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이 살았고, 청계천변 을지로 6가에는 훈련원이 위치하여 이 부근에는 군인들이 많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