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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를 찾아서 - 어영청의 북둔이 설치되어서 불리어진 성북동 (박경룡교수)

작성자David|작성시간10.03.14|조회수146 목록 댓글 0

서울시 문화재를 찾아서 - 어영청의 북둔이 설치되어서 불리어진 성북동  (박경룡교수)

 

성북동의 서울성곽 

 

 

어영청의 북둔이 설치되어서 불리어진 성북동(城北洞)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의 서울성곽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싼 성북동은 조선시대에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北屯)이 영조 41년(1765)에 설치되었으므로 동명이 붙여졌다.

성북동은 조선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는데 갑오개혁(1894) 때,행정구역 개편으로 한성부 동서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 성북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경술국치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으로 칭하였고,1914년 4월 1일 경성부를 축소함으로써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로 되었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경성부 성북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 구제(區制)를 처음 실시함에 따라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광복이 되자 그 이듬해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고치면서 성북정은 성북동으로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이어서 1949년 8월 15일 성북구가 새로 설치됨으로 성북동은 이에 속하였다. 이 때 성북천에 놓인 운수교를 중심으로 도로 남동쪽은 성북동 1가,도로 서쪽은 성북동 2가로 나뉘었다. 그 뒤 성북동 2가는 성북동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도성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을 나서서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성북동은 옛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이 어울린 산자수명한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이 동의 자연촌락명으로 홍도동,도화동,복사동이 남아있다.

조선후기 순조 때 지은 <한경지략>에 보면 「맑은 계곡과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복숭아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매년 늦은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과 차마가 두 줄을 지어 가득하게 산 계곡 사이를 메우고 깨끗한 초가집이 많다.」고 소개하고, 서울 사람들은 봄이면 인왕산 아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의 연꽃, 동대문 밖 수양버드나무꽃, 세검정 부근의 수석 등과 함께 성북동의 복숭아꽃 구경을 찾아 나섰다고 하였다.

성북동은 북절골(북사동), 북저동, 도화동, 북둔, 북창동 등 옛부터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이 곳을 북사동(北寺洞)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전에 절이나 먹을 제조하는 관아인 묵시(墨寺)가 있었던 데에서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북창동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어영청의 북창이 성북동 260번지 수월암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북저동은 <<동국여지비고>> 권2 한성부 명승조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성북동의 자연촌락명으로는 노구멧골,도둑굴,운수동,논골 등이 있다. 노구멧골은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노구메(밥)를 떠놓고 산천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정성으로 결국 남편이 돌아와서 잘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으며,도둑굴은 성북동의 북동쪽의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준하여 도둑이 은거하기가 용이하였으므로 불리었다. 그래서 조선후기에는 어영청의 북둔을 두어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정에서는 이곳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으나 워낙 산 속이라 농토가 적고 시장이 멀어서 생할곤란으로 속속 떠나가자 영조 41년(1765)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영의정 홍봉한이 왕에게 건의하여 서울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의 표백 즉 마전하는 권리를 이 곳 주민들에게 주고, 3년 뒤 영조 44년(1768)에는 창의문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궁중에 바치는 메주 쑤는 권리도 일부 이 곳 주민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도 성북동 양쪽 골짜기의 물이 합류되는 부근의 냇가를 마전터라고 칭하였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운수동은 성북동 60번지 부근의 마을로 바위에 각자가 되어 있는데 이곳을 논골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 깊은 산속인 이곳에 논다랑이를 조금 풀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근래에 와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는 성락원, 꿩의 바다마을도 있다.

성북동 1번지의 계곡을 끼고 있는 성락원은 조선말 철종 때 이조 판서 심상응의 별장이던 것을 의친왕 이강공이 별궁으로 쓰다가 그 아들 이건공이 살았는데 그 후 심씨 후손들의 소유로 되었다.이 곳은 수려한 자연경관에 어울리게 한옥과 정자, 석상들을 배치해 놓았으며 얼마전까지 국내외 여성교육을 하던 예지원이 사용했다. 4,300여평의 성락원은 1992년 12월 24일 문화부에서 사적 제378호로 지정했다.

성락원 서쪽 언덕의 3형제 우물이란 약수터가 있었던 곳에는 꿩의 바다마을이 형성되 어 있다. 이름 그대로 꿩과 비둘기, 산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므로 시인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곳에는 주택들이 들어섰고, 꿩의 바다마을 서쪽에는 일본대사관 관저 등이 자리 잡은 고급 주택가인 대교단지(일명 삼청 주택단지)가 있다.

성북동의 문화유적으로는 숙청문과 선잠단이 있다. 삼청터널 위쪽에 위치한 숙정문은 서울성곽의 4대문의 하나로 북문이라 하는데 중종 이후에는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숙정문은 건립된 지 18년 후 태종 13년(1413)에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서가 있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태종 16년(1416)부터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는 풍속이 태종 16년(1416)부터 있었으니 이는 북은 음이요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리하여 「오주연문장전산고」(권6)에 보면 서울의 숙정문을 항상 닫아두는 것은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부녀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는 속설도 있다. 이것은 숙정문이 음방(陰方) 즉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상원(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수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하였다. 이는 숙정문 부근의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와 놀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 오래도록 비가 오면 숭례,흥인,돈의,숙정 등 4대문 밖에 나가서 영제(榮祭)라는 비 개이기를 비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조선시대 선조때 이수광의 <<지봉유설>> 재이부에 보면 「숙정문 밖 한 바위틈에서 액체가 흘러 나오는데 맑을 때는 마치 막걸리빛 같고 진할 때는 떡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숙정문 밖의 쌀바위[米岩] 전설이 남아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하루 세 차례씩 1되 가량의 쌀이 나왔는데 나무꾼 노인이 욕심이 생겨 이 바위에 지키고 앉아 쌀이 나오는 대로 자루에 담아 가득 채워 가지고 한 달 가량 계속했더니 쌀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현재 성북국민학교 옆(성북동 64-1)에는 사적 제83호로 지정된 선잠단지가 있다. 이 단은 조선초 성종 2년(1471)에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잠신(서릉씨)에게 매년 늦은 봄 길한 뱀날[巳日]에 풍악을 써서 제사를 지냈다. 선잠단 남쪽에는 한 단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뜰에는 뽕나무를 심고 궁중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했다. 대한제국 때에 와서 1908년 7월에 선농단의 신위와 함께 선잠단은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되면서 터만 남고 사적으로 지정되어 1961년 11월 10일에 ‘선잠단지’라고 표시되었다.

성북동에는 3.1운동때 33인의 한사람인 만해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성북동 222번지, 서울시 기념물 제7호)이 있다. 이 집은 3.1운동 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를 등지고 일부러 북향해서 지었다. 한용운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광복을 1년 앞두고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때 이 집에는 외동딸인 한영숙씨 가족이 거주하였고, 선생의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성북국민학교 옆에는 고 전형필 선생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된 간송 미술관(한국 민족미술연구소)이 자리잡고 있다. 이 미술관은 우리나라 제1의 고서화 소장처로써 1938년 전형필 선생의 아호를 따서 개설된 것으로 국보 및 보물, 지방 유형문화재 등을 다수 소장하고 있으므로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 소장품의 전시회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동에는 지방 민속자료 제10호의 이재준가(성북동 243-4)와 제11호의 이태현가의 한식 주택이 있다.

한편 종교기관으로는 조계종 성라암 자리(성북동 284번지)에는 비구니 대학과 한국 비구니회 총본부가 들어서 있고, 그 건너편에는 삼각산 수월암(성북동 274-2)이 1968년에 세워져 있다.

성북동은 1949년에 정부에서 풍치지구로 지정하여 주택을 지을 수 없었으나 한남동, 돈암

동, 응봉동 지구와 함께 해제되어 주택지구로 변경되었다.

그 밖에도 프란체스코 수도원(성북동 75번지)이 위치한 곳에는 조선 중기의 중종 2년(1507)에 별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단터, 즉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이 동의 북쪽은 북한산이 있고 이 산 봉우리 중에는 마치 개가 걸터앉은 모양이라 하여 구준봉이라 하고, 이 봉우리 남쪽에는 산 모습이 마치 머리를 들고 사방을 바라보는 것 같다 해서 거수봉이라고 칭한다. 구준봉 뒤쪽의 잘룩한 고개를 보토현 즉 「보토고개」라고 하는데 이는 서울의 입수목이 되어 잘룩하므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약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매년 흙을 메우고 떼를 입혔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전해온다. <<동국여지비고>> 권2에 「보현봉의 곁가지 산발이 곧 도성의 주맥이기 때문에 총융청에서 ‘보토처’를 설치하고 주관해서 보축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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