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天路)를 걷는 삶(6/13)
-차원이 다른 삶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혹 무슨 문제가 있거나 범죄했을 때에는 나라가 제정한 법에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양자 간에 문제가 생겨서 쌍방 간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도 소송을 통해 나라의 법정에서 잘잘못을 가리게 된다.
고린도전서 6장에는 교회 내에서 성도 간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며 바울은 그들 교회를 질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가지고서 교회 내에서 발생한 다툼에 대해서 세상 법정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성도는 세상과 차원이 다른 삶과, 차원이 다른 목표와 방향으로 살아가는 족속이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교회는 세상의 법을 뛰어넘는 ‘사랑의 법’이 덮여있는 공동체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맞으며 죽으신 그 사랑의 법을 말한다.
갑자기 내리치는 소낙비에 자기 자식을 보호하고자, 비에 젖지 않도록 어머니가 대신하여 그 비를 맞으며 아이를 품에 안고 있듯이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법정 송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들이 살아가는 방향이며 목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와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며 십자가의 희생이다. 그리스도를 품은 백성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삶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주의 사랑의 법은 세상 법을 뛰어넘고 우월하며, 그 안에는 죽음을 이기는 영생함이 충만한 곳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법이 교회를 지배하고 성도들이 그 크신 사랑을 지녔음에도, 성도 사이의 다툼에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끝끝내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느냐고 바울은 질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이 땅에 살게 하신 목적은 주의 복음을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두셨다.
그리고 성도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량따라 주어진다. 세상은 자신이 스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며 얻으나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뜻대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권하신다.
그래서 구약에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시며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일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모두 책임지심을 보여주셨다. 광야에서 때에 따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고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차원이 다른 삶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인 성도 간의 다툼에서 고발과 송사가 왠말이냐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서로 송사하는 것은 이미 완연한 패배이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7)며 성도의 가치와 세계관을 역설한다.
즉, 성도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모든 성도는 한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성도와 성도 사이의 다툼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함께 예수 십자가 바라보며 그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